공연후기( 클래식 2015년)

서울시향 실내악 2-Ⅲ : 포레 스페셜 II /10.23.금/세종 체임버홀

나베가 2015. 10. 22. 01:07

 

 

실내악 2-Ⅲ : 포레 스페셜 II

- 프로필 -

바이올린
 신아라, 김덕우
첼로 김소연, 장소희
비올라 미정
피아노 미정


- 프로그램 -

포레,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로망스’ Faure, Romance for Violin and Piano, Op. 28
포레, 피아노 삼중주 Faure, Piano Trio, Op. 120
포레, 피아노 사중주 1번 Faure, Piano Quartet No. 1, Op. 15
포레, 두 대의 첼로를 위한 ‘초견용 소품’ Faure, Morceau de Lecture for Two Cellos


탄생 170주년을 맞이하는 가브리엘 포레를 위한 두 번째 실내악 무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초기 작품들과, 아름답지만 한층 구조적으로 복잡한 후기의 피아노 사중주 1번을 소개합니다. 피아노 삼중주는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삶의 마지막이 다 가는 것을 깨달은 시기, 음악적 영감의 고갈을 의심하던 시절의 작품입니다. 이 같은 개인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첫 악장 두 주제가 친밀하게 얽혀드는 부분이나, 마지막 악장의 민속 춤곡을 비롯해 즐거움과  경이로 가득한 곡입니다.

 

 

포레 /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로망스 Op.69

Faure, Gabriel Urbain [1845~1924]

 

 

Gabriel Fauré - Romance, Op. 69 (excerpt) | 21 September 2013

 

 

 

갈대의 노래-포레 로망스

프랑스 작곡가 포레가 남긴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로망스 op.69. 같은 편성 같은 제목의 op.28도 있다. op.69는 1894년 작품으로 그가 두 곡의 첼로 소나타를 쓰기 훨씬 전에 작곡된 작품이다. 포레는 생상처럼 교회음악가로 음악교육을 받았지만, 독주 오르간을 위한 작품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대신, 제자인 라벨이나 이베르 처럼 새로운 길을 갔다.

그 새로운 길이란 바로 피아노와 현악기를 조합하여 그의 감성을 풀어내는 일이었다. 그가 남긴 일련의 바이올린 소나타와 첼로 소나타, 그리고 유명한 엘레지와 로망스 등의 소품들은 바로 그가 가고 싶었던 길에서 얻은 수확이다. 프랑스 낭만주의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에 속하는 포레의 탁월한 선율, 우아하고 섬세한 매력을 지닌 로망스! 해가 산 너머로 뉘엿뉘엿하는 저녁,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숲 풍경이 느껴진다.

     

프랑스의 작곡가 포레

몽고지푸아 사범학교의 교사이자 교장이었던 T. 포레의 아들인 그가 최초로 음악에 감동한 것은 아버지의 학교 부속 예배당에서 하르모늄에 귀를 기울였을 때였습니다. 9세 때 니데르메이에르 고전 종교음악 학교의 학생이 되기 위해 파리로 가고부터는 집에서 떨어져 아무런 격려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파리에서의 음악 공부, 또 다른 일반 교과의 공부도 극히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불만을 가지고 살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이 상태는 그가 젊고 뛰어난 피아노 교사 생상을 만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생상은 그에게 슈만, 리스트, 바그너의 음악을 발견하게 해주었습니다. 그 당시 그는 그의 최초의 작품인, 빅토르 위고의 시에 의한 가곡 나비와 꽃(1861)을 작곡하고 그 후 잇달아 몇 개의 가곡, 로망스, 피아노를 위한 3개의 로망스(1863), 장 라신느에 대한 찬가(1865)를 작곡했습니다. 20세 때 포레는 화성법에서 2등상, 작곡 부문에서 1등상, 피아노에서 우등상을 타면서 니데르메이에르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렌에 있는 성 소뵈르 교회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습니다(1866). 렌 거리는 지금도 포레가 그곳에 살았던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포레로서는 시골에서 보낸 수년간의 생활이 그리 달가운 것은 아니었지요.

그러나 이때 보불 전쟁이 선포되어 포레는 1870년 7월, 군에 지원했습니다. 이 혼란된 시기의 포레에게 있어서 특기할 만한 일은 코뮌의 시기에 스위스에서 만난 메사제와의 우정이지요. 파리로 돌아가 생상의 조력으로 파리에서 오르간 주자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된 포레는 이리하여 생 토노레 델로의 오르간 주자, 생 쉴피스 교회 합창단의 오르간 주자, 마들렌 교회의 오르간 주자 대리, 그리고 테오도르 뒤부아의 후임으로 역시 마들렌 교회의 합창장이 되었습니다(1877). 또한 니데르메이에르 음악학교의 교수가 되었으며, 음악계 인사들과 교류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포레는 까무잡잡하고 로맨틱한 얼굴을 한 젊은이였습니다. 그의 피아노 주자, 반주자로서의 자질은 높게 평가되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앞 다투어 초대했습니다.

그는 특히 비아르도의 살롱에 출입했는데 폴린 비아르도의 딸 마리안「Marianne」과의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혼이 성사되지 않자(1877) 포레는 매우 실의에 빠지고 말지요. 또한 이와 병행해서 그는 프랑스 음악 발전의 촉진을 목적으로 한 국민음악협회의 창설에 참가했으며, 1874년부터는 이 협회의 비서를 겸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또 흥미있는 여행을 하고 있는데, 그는 생상을 따라 뮌헨과 쾰른을 여행했는데, 뮌헨에서는 니벨룽겐의 반지를 접할 수 있었지요.

 

 

 

바그너는 포레를 매우 복잡한 형태로 매혹시켰는데, 그의 관현악법(프로메테)과, 몇 곡의 가곡(눈물, 무덤에서)의 서사시적 경향에서 그 영향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갖가지 풍성한 경험을 갖는 시기가 다음의 창조력에 풍성한 개화기를 준비합니다. 두 개의 피아노 4중주곡(1876~86), 6개의 녹턴(1875~94), 6개의 뱃노래(1881~94), 레퀴엠(1887~88), 발라드(1877~79), 그리고 제1 및 제2 가곡집, 우아한 노래(1892~94) 등 수많은 가곡이 그것입니다. 또한 가정적인 일이 그의 창작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조각가 프르미에「Emmanuel Fremiet」의 딸 마리「Marie」와 결혼(1883)할 때 그는 고양(高揚)된 작품을 남겼으며, 양친이 잇따라 세상을 떠났을 때(1886, 1888)는 비통한 아픔을 표현했습니다. 이 마음의 아픔을 우리는 레퀴엠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1892년 음악교육 시찰관으로 임명된 그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보다 자유로운 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그의 명성은 확립되었고 마들렌 교회의 수석 오르간 주자, 나아가서는 마스네의 후임으로서 파리 음악원의 작곡과 교수가 되었습니다.(1896). 그가 기른 제자 중에는 유명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샤를르 쾨클랭, 플로랑 슈미트, 루이 오베르, 나디아 불랑제, 모리스 라벨 등). 그러나 포레를 모방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전통적인 요소의 독창적인 사용으로 이루어진 포레의 스타일은 그것을 배우기에는 지나치게 개인적이었으니까요. 오랫동안 교수생활을 한 결과 그는 마침내 파리 음악원의 원장이 되었습니다(테오도르 뒤부아의 후임으로서). 그러나 그는 이 학원에서 공부한 일도 없고 그곳에서 아무런 상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의 신문은 읽어보면 그가 군대에 있을 때의 공적이 이 임명에 도움을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포레는 원장이 되자마자 독재자가 되었습니다. 즉, 그는 학교의 교과 방안을 개혁했을 뿐 아니라 구태의연한 교육방법을 쇄신시켰습니다. 그러나 그가 취한 이 엄격한 태도는 한편으로는 격렬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1903년경부터 거의 청각을 상실하게 되었으나 이것이 그에게 직접적인 장해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이 시기에는 성공과 명예가 그를 따랐습니다. 베지에의 야외극장에서 상연된 비극적인 오페라 프로메테는 호평을 얻었으며(1900),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피선되었고(1909), 몬테 카를로에서는 오페라 페넬로프「Penelope」가 초연되었습니다(1913). 그러나 청각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타인과의 의사소통이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정신적으로 고립되게 된 그는 주로 내성적인 경향을 띠기 시작하여 실내악, 가곡, 피아노곡 분야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1920년 그는 여러 가지 수많은 서훈, 1922년 소르본느에서의 연주회에서 그에게 행해진 국민적 칭찬 등 명예에 싸여 있던 모든 공직을 사퇴했다. 그리고 미완성 작품을 소각한 후 1924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포레는 무엇보다도 낭만주의로부터 길러졌고, 항상 표현적이고 내성적인 음악을 위하여 싸운, 19세기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종종 그의 이름과 결부되어 이야기되는 드뷔시, 라벨 등과는 달랐던 그는 20세기를 이끌어 가는 음악상의 각종 투쟁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른 작곡가들로부터 받은 최후의 충격은 1902년의 펠레아스와 멜리상드의 초연이었습니다. 그 후에 만들어진 포레의 성악 작품에는 드뷔시의 이 작품에서 받은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침묵의 영역(청각의 상실)으로 들어가서, 작곡법도 종종 금욕적이라고 평해지는, 매우 관념적인 제3기의 경향을 띠게 된다.실제로, 그가 남긴 작품은 3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1기는 1880년까지로, 여전히 매우 낭만파적이고 살롱의 유행, 사교계의 생활과 결부되어 있었지만 그에 비해서 제2기(1881~1902)는 작곡가의 개성이 가장 잘 나타내지고 있습니다. 다채로운 눈부심을 가진 화성(우아한 노래), 오케스트라의 폭발하는 듯한 색채(프로메테) 같은 특징을 발전시킴으로써 관능적이고 열기를 띤 그의 예술이 태어났던 것입니다.

청각을 상실한 제3기로 들어서면, 그는 이제까지의 방법을 모두 팽개쳐 버립니다. 만약 그가 청각을 상실하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제2기적 경향을 계속 밀고 나갔을 것입니다. 포레는 본질적으로는, 그가 만년에 그러했던 것 같은 내성적, 금욕적인 작곡가는 아닙니다. 따라서 제3기의 그를 보고 그의 힘참, 그의 낭만주의를 부정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주로 조용한 매혹과 정묘한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지중해 인이었으며, 피아노4중주곡이 말해주듯이 정열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포레, 피아노 삼중주  TrioPiano in D minor, Op. 120 - Gabriel Faure [HD]

 

포레, 피아노 사중주 1번

Hamelin plays Fauré - Piano Quartet No. 1 in C minor, op. 15 (with Leopold Tr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