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 클래식 2015년)

서울시향/안토니 비트의 베토벤 영웅/발레리 소콜로프(vn)/3.24.화/예술의 전당

나베가 2015. 3. 23. 00:00

 

서울시향/안토니 비트의 베토벤 영웅/발레리 소콜로프(vn)

 

 

 

낙소스 레이블로 말러 교향곡 전집, 차이콥스키 교향곡 전집 등을 선보이며 ‘폴란드의 카라얀’이란 별명을 얻었던 안토니 비트 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이 2012년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에 이어 두 번째로 서울시향의 지휘대에 오릅니다. 2005년 조르주 에네스쿠 콩쿠르 우승자인 발레리 소콜로프는 2013년 쇼스타코비치 바이올린협주곡 1번 협연으로 시향 팬들에게 인정받은 주인공. 그가 협연할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은 2011년 데이빗 진먼 지휘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와 함께 CD 발매해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지휘 안토니 비트 Antoni Wit, conductor
협연 발레리 소콜로프, 바이올린 Valeriy Sokolov, violin


 


[프로그램]

엘스너, 백공(白公) 레젝 서곡(편곡, 피텔베르크) Elsner, Overture to Leszek Bialy (arr. Fitelberg)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Tchaikovsky,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35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 Beethoven, Symphony No. 3 in E-Flat Major, Op. 55, ‘Eroica’

 

 

 

 

Beethoven Eroica

Symphony No. 3

in E flat major op. 55

Beethoven, Symphony No.3 in E-flat major

'Eroica'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Berliner Philharmoniker

Complete

Philippe Herreweghe conducts Beethoven's Symphony No.3 'Eroica'

Philippe Herreweghe, conductor

Radio Kamer Filharmonie

Concertgebouw Amsterdam

2011.02.20

 

 

필리프 헤레베헤(1947~ )는 특이한 이력의 지휘자입니다. 그는 벨기에의 겐트 대학에서 정신의학을 전공했는데 졸업 무렵 고음악 오케스트라인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Collegium Vocale Ghent)를 설립하고는 지휘자로 깜짝 변신을 했습니다. 지극히 정제된 사운드로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진한 여운을 남겨주는 헤레베헤의 음악적 해석은 매우 탁월해서 그를 고음악의 거장으로 부르게 하였습니다. 헤레베헤는 1991년 자신이 창단한 시대악기 오케스트라인 샹젤리제 오케스트라와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와 함께 내한하여 5월 31일(용인 포은아트홀)과 6월 1, 2일(LG아트센터)에서 공연을 갖습니다.

귓병을 딛고 일어선 불굴의 의지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은 장애를 딛고 일어선 한 예술가의 당당한 자기 확신이며 거칠 것 없는 외침과도 같은 곡이다. 베토벤은 1802년 고질적으로 앓아오던 귓병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거의 들을 수 없었으며, 그해 10월 6일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작성하여 두 동생에게 남긴다.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1802년 10월 6일에서 10일 사이, 베토벤은 시골마을 하일리겐슈타트에 체류하는 동안 갑작스레 자살 충동에 이끌린다. 그는 동생들에게 그런 생각을 공공연히 편지로 보냈고, 그것이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이다.

“(...) 만일 죽음이 나의 모든 예술적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만한 기회를 갖기도 전에 찾아온다면, 아무리 내 운명이 험난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일찍 찾아왔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죽음이 조금 더 늦게 찾아오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대로 죽는다 해도 난 행복해할 것이다. 죽음이 나를 끝없는 고뇌에서 해방시켜줄 테니까. 죽음아, 올 테면 오너라, 용감하게 그대를 맞아주마. (...)”

베토벤은 이 비장한 유서에 담긴 각오를 통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음악적으로도 1801년~1803년 사이엔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어법을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그의 특징적 작법은 매우 건축적이며, 장대한 기상과 함께 강렬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베토벤의 가장 유명한 교향곡들 중 하나인 ‘영웅 교향곡’ 역시 이러한 배경 아래 탄생하게 되었다. 이 작품으로 인해 베토벤은 그의 창작 시기 중 가장 드라마틱하고 혁신적이라고 불리는 시기로 완전히 들어서게 된다.

물론 참담하고 비장한 분위기로 가득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처럼 베토벤이 목숨을 끊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유서에 담겨 있는 예술가로서의 투쟁과 불굴의 의지는 당시 베토벤의 창작세계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 이 무렵에 작곡한 작품들에서는 투쟁, 갈등, 대립이 화해되며 종결되는 양식이 드러난다. 특히 ‘영웅 교향곡’에서 나타나는 개별 악장들의 확장된 스케일, 50여 분에 이르는 긴 연주시간, 내용적 심화는 습작적인 면모를 보이던 이전의 작품들과는 달리 큰 변화를 보이고 있는 요소다.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에 나타난 비장한 각오가 ‘영웅 교향곡’ 전 악장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1802년에 작곡하기 시작하여 1804년 봄에 완성되었고 1805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초연되었다. 초연의 결과는 참담했다. 당시 대중들은 이 곡의 거친 형식미, 광폭하고 야수적인 음향, 긴 연주시간에 거부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베토벤은 이때부터 자신의 내면을 담은 열광적인 작품들을 미친 듯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3번 교향곡을 통해 비로소 베토벤만의 세계가 폭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Daniel Barenboim conducts Beethoven's Symphony No.3 'Eroica'

Daniel Barenboim, conductor

West-Eastern Divan Orchestra

BBC Proms 2012

 

 

나폴레옹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아 작곡을 시작한 교향곡

베토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전제 군주정치에서 비롯된 폐해를 누구보다도 깊이 실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은 베토벤에게 프랑스 혁명의 혼란으로부터 나라를 일으켜 세운 나폴레옹에게 강하게 이끌리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베토벤의 전기를 쓴 안톤 쉰들러(Anton Schindler)에 따르면 당시 빈 주재의 프랑스 공사였던 베르나도트 장군이 이런 의지를 촉발시켰던 것으로 전해진다. 베토벤은 베르나도트 장군에게서 나폴레옹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 위대한 교향곡의 첫걸음을 시작하게 되었다. 공화주의의 이상과 새로운 시대의 지도자 나폴레옹에 대한 존경심이 이 교향곡에 대한 최초의 발상을 제공한 셈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초대형 걸작품 <나폴레옹의 대관식>(부분). 캔버스에 유화, 610x931cm, 1805~07

하지만 ‘영웅 교향곡’의 음악적 실체는 베토벤이 이 작품의 형태를 구상하기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베토벤은 기존에 완성한 자신의 작품인 발레곡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Op.43), <시골풍 무곡>(WoO 14-7), <피아노를 위한 주제와 변주>(Op.35)를 <교향곡 3번 Eb장조 ‘영웅’>(Op.55)의 피날레 악장에 인용했다. 이 3개의 곡 중에서 ‘영웅 교향곡’ 해석의 가장 중요한 열쇠를 지니고 있는 작품은 1801년에 작곡한 발레곡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이다. 이에 관해서는 음악학자 콘스탄틴 플로로스의 주장이 다소 설득력이 지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플로로스는 발레곡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에서 베토벤이 나폴레옹에게 보내는 은밀한 찬사가 등장한다고 주장한다.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의 구심점을 이루는 작품은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빈첸초 몬티(Vincenzo Monti)의 서사시인 ‘프로메테오’이다. 베토벤은 이 서사시를 통해 인류에게 불을 선물한 프로메테우스를 공화주의자에 비유하면서 나폴레옹의 혁명 정신을 찬양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베토벤 자신의 새로운 예술을 불멸의 프로메테우스에 빗대고 있다.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 소식에 불같이 화를 낸 베토벤

나폴레옹에 대한 베토벤의 지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영웅 교향곡’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갖지도 못했고 헌정되지도 않았다. 베토벤은 완성된 악보에 ‘보나파르트 교향곡’이라고 써넣었고, 그를 로마의 위대한 집정관으로 비유하곤 했다. 그러나 결국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섰다는 소식을 듣자 베토벤은 불같이 화를 내며 이렇게 소리쳤다. “결국 그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군! 그는 인간의 권리를 죄다 짓밟고, 그 야망 때문에 가장 지독한 폭군이 될 거야.” 그리고 악보에서 보나파르트라는 이름을 지워버렸다.

'Bonaparte'라는 글자가 지워진 채 남아 있다.

베토벤의 제자이자 전기 작가인 페르디난트 리스에 의해 전해지는 이 유명한 일화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애꿎게도 당시 나폴레옹을 깎아내리고 싶어 했던 영국의 속셈을 드러내는 단편적인 사건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에 크게 실망한 베토벤은 작품의 제목이었던 ‘보나파르트 교향곡’을 빼버리고 ‘신포니아 에로이카 ? 한 위대한 인물을 추념하기 위해’라고 제목을 수정했다. 이 흔적은 현재 사본 악보와 함께 오스트리아 빈에 보존되어 있다. 한편, 이 혁신적인 교향곡에 대한 인상은 공개 연주회를 본 하이든의 전기 작가인 카를 아우구스트 그리징어가 당시 출판사에 보낸 서신에 잘 드러나 있다. “여기 하이든과 모차르트를 능가하는 무엇이 있다. 여기 한 편의 교향시는 더 높은 대지로 다가왔다!”

1악장: 알레그로 콘 브리오 Allegro con brio

소나타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두 개의 주제에 의해 풍부한 악상을 지닌다. 1주제는 저음역의 현악기에 의해, 2주제는 온화한 클라리넷 선율로 시작되어 바이올린으로 이어진다. 마르크스 같은 음악학자는 1주제의 선율을 ‘영웅 주제’로 명명했으며 음악학자 쾨르너는 이 ‘영웅 주제’를 군대적 심상을 지닌 동기로 간주하였다. 또한 1악장에서는 반음계적인 기법이 자주 사용되는데 이것이 전쟁의 긴장감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2악장: 아다지오 아사이 Adagio assai

유명한 ‘장송 행진곡’(Marcia funebre) 악장이다. 현악기에 의한 주제는 영웅의 장중한 걸음걸이를 나타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중간부에서 나타나는 C장조의 밝은 분위기는 생전의 영웅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지나 다시 어두운 분위기의 ‘장송 행진곡’으로 마무리된다. 곡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용된 쉼표는 절뚝거리는 영웅의 걸음걸이를 그려내고 있다.

3악장: 알레그로 비바체 Allegro vivace

3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빠른 스타카토의 움직임을 보인다. 가벼운 악상은 점차적으로 힘을 키워가며 무거운 움직임을 보인다. 트리오에서 사용되는 코랄 풍의 호른 선율은 위풍당당하며 마치 일사불란한 군대의 행진을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4악장: 알레그로 몰토 Allegro molto

이 악장의 주된 주제는 베토벤의 작품 <영국 풍 시골 무곡> 선율이다. 1주제인 피치카토 주제에 이어 등장하는 2주제는 평온하고 정적인 느낌을 주며 이후 대위법적 기교들이 얽히면서 장대한 정점, 압도적인 스케일을 향해 치닫게 된다. 마지막에는 거대한 코다가 등장하며 작품을 힘차게 마무리한다.

 

Beethoven Symphony No. 3 in E flat major, Op. 55 "Eroica" (Berliner Philharmoniker, Claudio Abba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