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chaikovsky, Piano Concerto No.1 Op.23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Martha Argerich, piano
Charles Dutoit, conductor
Orchestre de la Suisse Romande
Victoria Hall, Genève, 1973.10.24
Martha Argerich performs Tchaikovsky's Piano Concerto No.1
아마도 피아노라는 악기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유명세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이 초연된 지도 어느 새 150년을 바라보고 있지만, 작품에 대한 애정과 유명세는 점점 더 증폭되어 왔지 단 한 번도 줄어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차이콥스키의 이 대곡은 피아니스트라면 응당 연주할 수 있고, 연주해야만 하며, 이 곡을 통해 비로소 피아니스트로 인정받을 정도로 프로 연주자로서의 가능성과 예술성을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차이콥스키는 총 세 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지만 이 가운데 1번 협주곡만이 유독 유명하다. 흥분에 들뜬 회상이든, 괴롭고 즐거운 기억에 대한 체념이든 간에 이 곡의 가장 큰 주제는 ‘향수’다. 이 ‘향수’가 바로 러시아 낭만주의를 지탱하는 뿌리임은 분명하다. 우리가 다른 작품에서도 항상 느껴 왔듯이, 러시아인이라면 필수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이 바로 절망 속에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무엇인가를 뽑아내는 능력이다.
피아니스트들의 시작이자 끝인 협주곡
차이콥스키는 절망과 불행한 상황 속에서 이 곡의 작곡을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엔 감동적이고 성공적인 작품으로 발전되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러시아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철인 3종 경기에 맞먹을 만한 강인한 지구력과 원자폭탄과 같은 폭발력, 목가적이고 가요적인 정서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러시아적인 멜랑콜리가 이 곡의 매력이다. 무엇보다도 피아니스트의 마법적인 음색과 초인적 기교를 갖추고 있지 않으면 이 작품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차이콥스키는 러시아적 흙냄새와 호방한 사운드를 조합해 피아노 협주곡 1번이라는 걸작을 남겼다.
그러한 만큼 이 곡은 음반이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발매되기 시작한 무렵부터 지금까지, 일반적인 경우 다른 음반사나 자사의 레퍼토리와 겹치는 경우 레코딩을 회피하곤 했지만,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상업적 비즈니스의 이해관계와는 상관없이 한 번 이상은 반드시 녹음해야만 할 정도로 융숭한 대접(물론 슈나벨이나 폴리니, 브렌델과 같은 예외의 경우도 있지만)을 받고 있다. CD로 발매된 종류만 해도 무려 150종이 넘는 음반이 발매되었으니(복각되지 않은 LP시대의 녹음까지 합하면 더 많을 듯하다), 단연 최고의 베스트셀러 레퍼토리임을 확인할 수 있다.
레코딩이 발명된 이후 셀락이나 왁스를 재료로 한 디스크들이 상업적으로 널리 판매되기 시작했던 1920년대부터 이 작품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전기녹음이 도입되기 이전인 1925년까지는 녹음 기술에 문제가 많았으나 피아니스트 빌헬름 박하우스가 어쿠스틱 레코딩을 1921년과 1922년에 각각 남겼다. 그러나 레코딩 테크놀로지의 한계로 이 녹음과 작품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전기녹음이 도입된 이후 처음으로 마르크 함부르크의 녹음이 등장했고, 비로소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레코드 필청 레퍼토리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함부르크는 리스트와 더불어 19세기 피아노 교육의 양대 산맥이었던 레셰티츠키의 제자였다. 그는 러시아 출신다운 화려한 테크닉과 탁월한 힘, 빼어난 지구력을 자랑하는 피아니스트였다.
1926년 함부르크는 HMV 음반사에서 로열 앨버트 홀 오케스트라와 랜던 로날드의 지휘로 지금의 버짓 프라이스에 해당하는 ‘블랙 라벨’로 음반을 녹음했고, 이 음반은 삽시간에 전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했다. 현재 일본 Greendoor 레이블로 발매되어 비교적 어렵지 않게 감상해볼 수 있는데, 극심한 루바토와 열악한 음질에도 불구하고 불을 뿜는 듯한 테크닉,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터치, 안정된 호흡으로 훌륭한 비르투오시티의 정석을 들려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마르크 함부르크 자신이 살았던 19세기 러시아 낭만주의 시대의 열정과 온기를 고스란히 전달해 주고 있다. 그러나 1930년대 전설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등장하고 나서야 차이콥스키의 이 괴물 같은 대곡은 진정한 의미에서 불멸의 지위를 얻게 된다.
구제불능의 2류 작품이라는 혹평을 받다
차이콥스키의 얼룩진 삶에 끈질기게 실처럼 따라다녔던 것은 신경쇠약 증세였다. 성공보다는 실패에 더 민감했던 차이콥스키는 그가 음악의 구세주라고 생각했던 모차르트와 자기 자신을 비교하며 형식미와 구성력의 부족함을 특히 한탄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항상 비판하고 회의했던 그는 이 피아노 협주곡 1번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의 스승이자 당시 러시아 피아니즘의 대부로 손꼽히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에게 이 작품을 보냈고 그의 의견을 기다렸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루빈스타인은 이 작품을 엉뚱하고 기괴하며 거북스럽기 그지없는, 한마디로 구제불능의 곡이라고 신랄한 평을 서슴지 않았다. 문제는 연주하기에 너무 어렵고 악장들은 너무 잘게 조각 나 있으며 서투르게 취급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덧붙여 이런 2류 작품은 반드시 대대적으로 수정을 해야만 자신이 연주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차이콥스키가 후원자인 폰 메크 부인에게 쓴 편지에 대체적으로 정확하게 적혀 있다.
격분한 차이콥스키는 독일의 명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에게 이 작품을 헌정했다. 이 작품의 가치를 인정했던 뷜로는 이 곡을 미국 연주회 도중 1875년 10월 25일 벤저민 존슨 랑의 지휘와 함께 보스턴에서 초연했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같은 해 모스크바에서도 연주해 호평을 받게 되었다. 결국 3년 뒤에는 루빈스타인이 직접 화해를 구하게 되었고 두 사람의 우정은 다시 회복되었다고 한다. 이후 차이콥스키는 이 작품에 수정을 가하여 모스크바의 유르겐슨 출판사를 통해 세 개의 판본을 발표했다. 첫 번째는 1875년에 완성한 ‘오케스트라 반주의, 혹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피아노 협주곡’이고, 두 번째는 1879년 9월 개정된 판본, 마지막 세 번째는 1889~90년에 개정된 판본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이 작품은 독일의 지휘자 한스 폰 뷜로에게 헌정되었고, 뷜러는 이 작품을 초연했다.
차이콥스키는 분명 루빈스타인의 비평에 “나는 음표 하나라도 고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시간이 지난 뒤 결국 고치고야 말았다. 차이콥스키는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는 귀를 기울였지만, 이 작품을 최초로 본 루빈스타인의 비판은 무시했다. “진정 하나의 진주와 같은 작품”이라고 극찬한 초연자 뷜로가 어떤 조언을 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1876년 런던 초연의 협연자로 나선 에드워드 댄로이터의 수정이 두 번째 판본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댄로이터는 초연 당시 프로그램 노트에 해설을 쓰기도 했다. 1969년 발견된 댄로이터의 가필 판본은 그의 수정이 부분적으로 반영되었음을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다. 특히 차이콥스키는 1876년 댄로이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현명하고 실제적인 제안들’에 감사를 표했고, 재출판될 경우 의견을 반영하겠다고 썼다. 차이콥스키는 루빈스타인의 감정에 찬 비판은 거부한 채, 댄로이터의 건설적인 제안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Horowitz performs Tchaikovsky's Piano Concerto No.1
Vladimir Horowitz, piano
Arturo Toscanini, conductor
NBC Symphony Orchestra
Tchaikovsky,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35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Arabella Steinbacher, violin
Vladimir Fedoseyev, conductor
Tchaikovsky Symphony Orchestra
Musikverein Saal, Wien, 2011.09.25
Arabella Steinbacher/V. Fedoseyev - Tchaikovsky's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35
아라벨라 스타인바허(독일, 1981~ )는 일본인 어머니가 그녀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3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가르쳤으며 9살에 뮌헨 음악대학에 입학했습니다. 2001년에는 ‘안네-소피 무터의 친구들’의 장학생이 되었습니다. 2013년만 해도 한 달 평균 5회 이상의 왕성한 연주 활동을 하고 있으며, 최근 브루흐와 코른골트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담은 CD를 냈습니다.
1878년 봄, 차이콥스키는 스위스의 제네바 호수 근교의 클라렌스에서 결혼의 상처(1877년 여름에 차이콥스키는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밀류코바라는 여성과 결혼했지만 석 달 만에 파경을 맞았다)를 달래고 있었다. 3월 14일, 자신의 제자였던 요시프 코테크가 찾아왔다. 그때는 차이콥스키가 한창 피아노 소나타 G장조를 작곡하던 시기였다. 베를린에서 요제프 요아힘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던 코테크는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의 악보를 보여주었고, 두 사람은 이 곡을 함께 연주했다. 그리고 차이콥스키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불타는 영감으로 써내려간 바이올린 협주곡
며칠 후,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이 모든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들리브나 비제의 작품처럼 랄로는 진지하고 심각하게 쓰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형식을 찾아냈고 대부분의 독일 작곡가들처럼 전통을 답습하는 대신에 음악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힘으로 발견할 수 있었던 겁니다.” “오늘 아침 나는 불타는 영감 안에서 한없이 타올랐습니다. 내가 작곡한 이 협주곡이 심장을 파고들 만큼 강력한 음악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드는군요.” “정신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있어서 그런지 작곡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의 1악장은 완성되었고, 내일부터는 2악장을 시작할 겁니다. 이 협주곡을 작곡하는 동안 내내 즐거웠고 처음부터 왠지 모르게 끌렸습니다. 손님이 없을 때는 하루 종일 작곡에 몰두할 수 있었고 이런 식의 속도라면 예상보다 빠르게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코테크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차이콥스키에게 작곡을 배웠던 인연으로 그와 오랫동안 교류해 왔다. 차이콥스키가 폰 메크 부인을 알게 된 것도 코테크를 통해서였고, 차이콥스키는 코테크를 위해 <왈츠-스케르초>를 작곡할 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깊었다. 마침내 4월 4일 모든 작업을 끝냈다. 그러나 차이콥스키는 여전히 2악장이 마음에 걸렸다.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차이콥스키는 결국 처음 작곡했던 2악장(두 달 후 <명상곡>으로 출판된다)을 버리고 하루 만에 새로운 안단테 악장을 썼다. 그리고 4월 11일에 악보의 초고가 나왔다. 차이콥스키가 4번 교향곡과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을 막 끝냈을 때였다. 출판은 모스크바의 표트르 위르겐슨이 맡았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악보가 그 해 10월에, 오케스트라 파트보는 1879년 8월에 나왔다.
‘연주 불가능, 바이올린을 모르는 작곡가’라는 잘못된 평가
초연을 향한 길은 멀고도 험했다. 차이콥스키는 이 곡을 완성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코테크가 초연해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프로페셔널 연주자로 경력이 많지 않았던 코테크는 이 작품의 연주를 망설였다. 게다가 그는 자신과 차이콥스키의 육체적 관계에 대한 소문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1878년 10월, 차이콥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레오폴트 아우어에게 악보를 주면서 초연을 부탁했다. 아우어는 자서전에서 그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차이콥스키가 내게 보여준 협주곡을 우정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나는 작곡가에 감사하다고 말했고, 우리 둘은 곧바로 연습을 해보았다. 첫 번째 연습에서 작품의 전체적 맥락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1악장 2주제 선율의 서정적인 아름다움과 슬프게 변화하는 2악장 칸초네타의 매력이 느껴졌다. 나는 초연을 맡겠다고 약속했고 차이콥스키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악보를 주었다. 그런데 악보를 자세히 보니까 이 협주곡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가치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손을 보아야 했다. 작곡가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바이올리니스트 아우어는 초연을 부탁받았지만 연주 불가능이라는 이유로 응하지 않았다.
끝내 아우어는 차이콥스키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2년을 기다리다 지친 차이콥스키는 넌더리를 냈다. “우리의 우정에도 불구하고 아우어는 나의 협주곡을 까다로운 작품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명한 비르투오소가 ‘연주 불가능’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애꿎은 나의 협주곡만 오랫동안 내팽개쳐져 있었다. 마치 영원히 잊혀진 것 같았다.” Hilary Hahn/Vasily Petrenko - Tchaikovsky,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35 Hilary Hahn, violin Vasily Petrenko, conductor Royal Liverpool Philharmonic Orchestra Philharmonic Hall, Liverpool, 2008.11 초연의 실패와 혹평, 성공을 향한 집념 그러다 마침내 구원자가 찾아왔다. 모스크바 출신으로 라이프치히 음악원의 교수였던 아돌프 브로드스키가 1881년 12월 4일, 빈 필하모닉 협회의 콘서트에서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초연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신의 바이올린 협주곡 악보를 처음 본 순간부터 콘서트에서 이 작품을 연주하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벌써 2년 전 일이었죠. (중략) 러시아에 돌아와서 몇 달째 하루 종일 당신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습했습니다. 거의 미친 듯이 매달렸는데 어찌나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그토록 오래 연습했는데도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물론 테크닉이 쉬운 작품은 아니었습니다만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 작품을 이제 알게 되었다고 느꼈을 때, 빈에서 초연을 맡겠다는 결심을 내리게 된 거죠.” 초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 빈 음악계를 주름잡던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는 “음악이 이토록 심한 악취를 풍길 수 있다는 사실을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증명했다”고 혹평했다. 또 다른 비평가들도 이구동성으로 야유했다. “거칠기 짝이 없는 러시아의 허무주의”(테오도르 헬름), “괴이한 음악이 많은 사람들을 유혹한다”(막스 칼베크). 초연자 브로드스키는 절망하는 대신 몇 개월 후인 1882년 4월 런던에서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다시 협연함으로써 거대한 성공의 서막을 열었다. 그리고 8월 20일 이폴리트 알타니의 지휘와 브로드스키의 협연으로 모스크바 초연을 했고 여기서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제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아돌프 브로드스키란 이름을 떼어내기는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상황을 인식한 차이콥스키는 원래 예정되었던 헌정자였던 레오폴트 아우어 대신 브로드스키에게 이 작품을 헌정했다. 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 조용한 서주와 함께 두 개의 주제가 제시되는데 여리게 도입 선율을 연주하고 10마디부터 제1주제를 다시 연주한다. 이어 바이올린 카덴차가 연주되는데 대단히 화려한 특징이 있다. 폭풍처럼 몰아붙이는 파워는 차이콥스키의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에 힘입어 폭발적인 파워를 느끼게 한다. 중요한 점은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린 독주 사이의 미묘한 균형인데, 차이콥스키는 기교적인 카덴차와 질주하는 듯한 오케스트라의 대비감을 표현하는 데 있어 최상급의 작곡가였다. ▶영화 <더 콘서트>의 한 장면. 마지막 10여 분 동안 여주인공이 연주하는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눈물샘을 자극한다. 2악장: 칸초네타. 안단테 관악기의 서주가 흐른 후 서정적인 주제를 바이올린이 노래하는데, 차이콥스키의 감수성이 잘 표현되어 있다. 무엇보다 바이올린의 부드러운 음색 조절은 연주자의 능력을 가늠하는 키워드가 되기도 한다. 3악장: 피날레. 알레그로 비바치시모 오케스트라의 강력한 어택과 함께 16마디부터 37마디까지 바이올린 카덴차가 화려하게 펼쳐진다. 러시아 민속 춤곡 스타일이 물씬 풍기는 3악장은 서정과 격정 그리고 탄식과 희망 사이를 교차하고 있다. 5도 음정의 관악기들과 함께 제2주제가 시작되는데, 활발하게 움직이는 독주 바이올린은 절망과 희망을 교차하면서 감정의 등고선을 자극한다.
추천음반
1. 이 작품의 녹음에서 정경화(Decca)는 우리에게 첫 번째 대상이었다. 프레빈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의 연주는 그녀의 첫 출발점이었다. 우울한 서정성의 표현에 주안점을 둔 연주로 비극적인 색채의 느낌이 매우 특별하다.
2. 하이페츠(RCA)의 연주는 질주의 미학이 뭔지를 보여준다. 속도감과 박력의 오케스트라는 파괴적인 차이콥스키 상을 그려내었다.
3. 오이스트라흐(MELODIYA)는 내면적 우울과 열정의 상반된 요소들을 모두 표현한 훌륭한 연주다.
4. 코간(EMI)의 연주는 테크니션 코간의 바람을 가르는 날렵한 연주가 색다른 쾌감을 던져준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 오늘의 클래식>명곡 명연주 2010.02.03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66&contents_id=1948
차이콥스키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Tatjana Vassiljeva, cello Vladimir Fedoseyev, conductor Tchaikovsky Orchestra Musikverein, Wien, 2011.09.26 Tatjana Vassiljeva plays Tchaikovsky's Rococo Variations
차이콥스키의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 Op.33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1876년 12월에 작곡되었다. 당시 36세의 차이콥스키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었다.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 원장으로 있던 모스코바 음악원에서 화성학 이론을 가르치고 있었던 그는 경제적으로 곤궁한 상태에 처했고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했으며, 자신의 천성에 맞지 않는 결혼을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 반려자로 어떤 여자를 확실하게 정해놓은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에는 창작력 또한 활발하지 못해 피아노 협주곡 1번과 환상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 정도만을 작곡했을 뿐이다. 조용하고 우아한 18세기 음악으로의 휴식 당시 그의 상황은 객관적으로는 나쁜 듯 보였지만, 음악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그는 여행과 음악의 풍요로움을 만났던시기이기도 했다. 러시아의 음악을만들고 싶어 했던 그는“나는 러시아인이다. 뼛속까지 러시아인이다”라는 편지를썼을 정도로, 그는 즐거운 칸틸레나와우울한 멜랑콜리가 결부된 지극히 러시아적인 특성을 길러나가는 방법을 터득했을 당시다. 이렇듯 자신만의 음악적 표현력을 키워나갔던 그는 1875년 이후 음악적 교제 관계를 넓혀나가게 되었다. 생상스와 우정을 맺었고 리스트와 그를 열광시킨 <카르멘>의 작곡자인 비제,마스네 등과 교제하며 음악적 사상을 함께 했다.한편그는 바이로이트로가는 여행길에 바그너를 만나기를 시도했지만 실현할 수는 없었다. 이렇듯 그는 러시아를 벗어나 서유럽의 최신 음악 사조와 음악가들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역량을 한층 넓게 키워나갔다.불행한 결혼생활로 정신적인 고초를 겪었다. 한동안 경제적,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그는 ‘로코코 변주곡’을 작곡한 이후 작품과 삶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부유한 미망인인 폰 메크 부인을 소개받아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이 만남으로 인해 그는 안심하고 전적으로 작곡에 매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폰 메크부인과 차이콥스키는 평생토록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14년 동안 계속된 그들의 엄청난 양의 편지로부터 목가적 순애보의 흔적을 찾아볼 수있다.이렇듯 폰 메크 부인이 정기적으로보내준 돈 덕택에 그는 모든 재정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있었고 더군다나 가르친다는의무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으며,실패로 끝났지만 정신적인 홀가분함을 얻게된 결혼과 결별(이혼은 이후에),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걸친 여행과 사교생활 등등으로 그는 정신적으로도 충만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그의 창작력은 급속도로 팽창하여 4번 교향곡과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과 같은 대작들을 쏟아낼 수 있었다. 1876년 서두에 차이콥스키가 작곡한 작품은 교향적 환상곡인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로 당시의 초조하고 격정적인 마음을 잘 반영하고 있다.그러나 이 첼로를 위한변주곡을 작곡하면서 차이콥스키는 불안한 상태의 삶에서 잠시벗어나 18세기의 보다 조용하고우아한 분위기에 빠져들고 싶어 했다.바로 그가 존경했던 모차르트의 음악으로 대변되는 시대였던 것이다. Justus Grimm plays Tchaikovsky's Rococo Variations
Justus Grimm, cello
Carlo Rizzi, conductor
Symfonieorkest van de Munt
2012.02.14
첼로의 풍부한 표현력과 관현악의 조화 과거를 재해석하려는 그의 의도에 맞추어 차이콥스키는 독주 첼로를 고전주의 규모에 맞는 실내악단, 즉 2관 편성에 두 대의 호른과 현이 반주하도록 의도했다. 이런 규모는 독주자의 멜로디와 기교적인 표현을 방해하지 않고오히려 솔리스트의 표현을 잘 살려줄 수 있었다.한편 음악 양식에 있어서 그는 변주곡을 선택했다.이 양식으로 작곡가는스스로순서와 한계를 정하게 할 수 있었다.그는 오리지널 주제를 모차르트가썼을법한 네마디의균형감 있는 모양으로단아하게 꾸몄다.조성은 모차르트의 가장 감동적인 작품들에서사용되었던 A장조였다. 18세기 모차르트 풍의 우아한 첼로가 매력적인 곡이다. 이 변주곡은 모차르트에 대한 오마주라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모방작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작은 목관의 에필로그는 주제에 이어 불규칙적인 음정으로 변화하지 않고 반복되며,이는 독주악기가 넘겨받은 뒤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한다. 이는 18세기 오스트리아보다는 19세기 러시아 전통에 더 가까운 것이다.그리고 주제를 이끄는 표현력이 풍부한 관현악의 도입부부터 마지막 코다의 질주까지, 음악의 자연스러움과 윤기는 차이콥스키가 아니면 그 누구도 흉내 낼수 없는것이다.그러나역설적으로 오늘날 일반적으로 감상하는 악보를 고려해볼 때, 이 작품은 완전히 차이콥스키의 작품이라고도 말하기 힘들다. 원래 이 작품은 독일의 젊은 첼리스트인 빌헬름피첸하겐을 위해 작곡했다고 한다. 그는 차이콥스키와 같은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였는데,작곡중간피첸하겐은 독주부를 어떻게 쓰면 효과적일지에 대해 많은 제안을 했고 이 단계에서 작곡가는그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모스크바에서 곡이 초연되던1877년 12월과 작품이출판되던 1878년사이에,첼리스트는 작품에 더 급진적이고 다양한 수정을 제안한다.심지어 그는출판사에자신이작품에 관한 권위를 위임받았다고 주장하며 여러차례 수정을가했다. 앞에 있던 D단조안단테를 작품의 끝에 두는편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이유로차이콥스키가 쓴 느린 변주 두개의 위치를바꾸었고,나머지부분을계속해서 뒤섞어 작곡가가 쓴 여덟 번째와 마지막 변주는 생략하기에 이른 것이다.차이콥스키는 인쇄 직전 교정지를 한번 보고서는 피첸하겐이 저지른 일을 알아서다.그리고 “빌어먹을!”이라고 역정을 냈지만,이내 “그대로 진행해!”라고 말하며 피첸하겐의 수정을 바로잡지 않았다.이러한 이유로 하나의 주제와 7개의 변주로 구성된 피첸하겐의 개작이 이 변주곡의 기준이 되었고,이내 이형태의 변주곡은 차이콥스키의 가장 유명한 작품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1879년 비스바덴에서 프란츠 리스트가 참석한 가운데 연주된이 개정판은 대호평을 받았고, 이후1956년 차이콥스키 작품집기념출판이라는 형식을 통해 소련에서처음으로 작곡가의 원전판이 빛을 보게 되었다. Rostropovich plays Tchaikovsky's Rococo Variations
Mtslav Rostropovich, cello
Kirill Kondrashin, conductor
Royal Concertgebouw Orchestra
1977.03.14
출처 : 네이버캐스트 오늘의 클래식>명곡 명연주 2010.03.31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66&contents_id=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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