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클래식 2014년)

서울시향 2014/브루크너와 바르토크&표르트 안데르제프스키/6.20.금/예술의 전당

나베가 2014. 6. 20. 00:30

서울시향 2014/브루크너와 바르토크&표르트 안데르제프스키

 

 

2005년과 2007년 내한독주회를 가졌던 폴란드 피아니스트 표트르 안데르제프스키가 남다른 리듬감과 헝가리의 토속적 색채로 무장한 바르토크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 합니다. 2006년 시마노프스키 작품집으로 그라모폰상 기악부문을 수상한 안데르제프스키는 프랑스의 유명 음악다큐 감독 브루노 몽생죵이 선택한 피아니스트로도 알려진 인물로, 몽생죵은 두 편의 다큐에서 그를 조명한 바 있습니다. 이날 지휘대에는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재직 중이고 이미 두 차례 서울시향을 지휘한 바 있는 프랑스 지휘자 스테판 드네브가 나섭니다. 프로코피예프의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과 브루크너의 교향곡 중에서도 직선적이고 근육질적인 <교향곡 4번> '낭만적'을 들려줍니다.

[프로그램]

프로코피예프: 세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모음곡
Prokofiev: l'Amour des Trois Oranges, Suite
바르토크: 피아노 협주곡 3번
Bartok: Piano Concerto No. 3
브루크너: 교향곡 4번
Bruckner: Symphony No. 4

[프로필]
 
지휘 스테판 드네브 Stephane Deneve, conductor
현재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의 상임지위자인 스테판 드네브는 로열스코티시내셔널오케스트라(RSNO)의 전 음악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참신한 연주력과 기획을 통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그는 특히 프랑스 레퍼토리 해석의 권위자로 평가받고 있다. 최근 활동으로는 보스턴 심포니와 함께한 카네기홀 무대 그리고 시카고 심포니,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LA 필하모닉, 뮌헨 필하모닉, 바바리안 라디오 심포니, 산타 체칠리아 국립 음악원 심포니 오케스트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과 함께한 공연이 있다. BBC 프롬스, 에든버러 페스티벌, 빈 콘체르트하우스, 암스테르담 콘세르트 허바우 등의 유명 페스트벌 무대에서는 로열스코티시내셔널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음반 활동으로는 RSNO와 함께한 드뷔시(Chandos), 루셀(낙소스), 프랑크(Na?ve), 코네송(Chandos) 등의 작품들이 있으며, 특히 그는 낙소스에서 출반한 루셀 시리즈의 첫 음반을 포함해 디아파송 2회 수상을 한 바 있으며, 2012년에는 그라마폰의 올해의 아티스트 상의 최종 후보자 명단에 들었다. 드뷔시, 라벨, 베를리오즈, 루셀, 포레, 풀랑 등 자신의 모국인 프랑스의 음악에 대한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그들의 작품을 연주해오고 있는 그는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을 졸업한 뒤, 파리 오케스트라와 파리 국립 오페라와 함께 게오르그 솔티의 어시스턴트 지휘자로서 지휘 활동을 시작했다. 장-이브 티보데,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 표트르 안데르제프스키, 엠마누엘 액스, 라르스 포그트, 니콜라이 루간스키, 폴 루이스, 요요마, 프랭크 피터 짐머만 등의 세계적인 솔로이스트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함께 협연했으며, 오페라의 무대에서는 왕립 오페라하우스, 글라인드본 페스티벌, 라 스칼라, 리세우 극장, 네덜란드 오페라, 라 모네, 파리 국립 오페라, 볼로냐 극장 등에서 지휘했다. 

피아노 표트르 안데르제프스키 Piotr Anderszewski, piano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하는 표트르 안데르제프스키는 매우 역량있는 피아니스트로 손꼽힌다. 늘 대대담하고 창의적이며 도전적인 아티스트로 알려져 있는 그의 최근 몇 년간 활동으로는 런던의 바비칸 센터, 왕립 페스티벌 홀, 빈 콘체르트하우스, 뉴욕 카네기 홀, 성 피터스부르그의 마린스키 콘서트 홀, 그리고 뮌헨의 헤르쿨레잘홀에서의 독주회를 꼽을 수 있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는 베를린 필하모닉, 보스턴, 시카고,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왕립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와의 출연 등이 있다. 안데르제프스키의 실내악 협연들에는 벨체아 사중주단과 바이올리니스트 프랭크 피터 짐머만과의 출연이 포함된다. 2000년부터 버진 클래식의 전속 아티스트로 활동해 온 그는 그동안 많은 음반 발매를 진행해 왔다. 버진 레이블과의 첫 음반은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이었고, 이 음반은 '음악 세계의 충격'(Choc du Monde de la Musique)과 에코 클래식 어워드 등을 수상한 바 있다. 또한 그래미 수상후보에 오른 바흐 파르티타 <1번>, <3번>과 <6번>은 수많은 찬사를 받기도 했다. 폴란드 출신의 시마노프스키 음악에 대한 그의 애착은 특히 강하며, 2006년 클래식 FM 그라모폰 어워드에서 베스트 기악부문 상을 수상한 시마노프스키 음반에서 더욱 돋보인다. 한편, 그의 음악적 해석의 강렬함과 독창성은 4년마다 뛰어난 피아니스트에게 주어지는 '길모어 상'을 수상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지난 2012~13년 시즌 활동으로는 카네기홀, 베를린 필하모니, 런던의 사우스뱅크 센터, 그리고 빈 콘체르트하우스 등 주요 음악 센터에서의 독주회 등이 있으며,

협연 무대로는 베를린 슈타츠카팔레, 런던 심포니오케스트라와 밤베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연주 등이 있다.

 

Sergey Prokofiev - L'amour des trois oranges / The Love for Three Oran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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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르토크/피아노 협주곡 3번 E장조

     

글 : 황장원(음악 칼럼니스트)

<연주시간 : 23분>

바르토크는 20세기 헝가리를 대표하는 작곡가로서, 동구권의 민요적 선법과 화성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이론과 작풍을 확립했던 인물이다. 그는 피아노 협주곡을 모두 세 곡 남겼는데, 그 중 마지막 곡인 피아노 협주곡 3번은 다른 두 곡과 성격이 사뭇 다르다. 즉, 앞선 두 곡이 피아노의 타악기적 속성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원시적인 역동감과 압도적인 중량감을 과시했던 데 비해, 이 곡은 악상과 화성이 한결 온순해진데다 구성 면에서도 모차르트를 연상시킬 정도의 간결성과 침착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바르토크가 이 협주곡에 착수한 것은 1945년 봄으로, 당시 그는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즈음이면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의 수순을 밟으면서 그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몸은 이미 백혈병에 잠식되어가고 있었다. 그 해 여름에 그는 캐나다 접경지인 새러낵 호숫가에서 요양하면서 제2악장을 썼지만, 병세가 악화되자 9월에 다시 뉴욕의 아파트로 돌아와 병석에 누운 채 제3악장의 작곡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작곡의 진전과 더불어 그의 얼마 남지 않은 생명력도 급속히 소진되어 갔고, 결국 9월 26일 새벽에 그는 마지막 17마디를 마무리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만다. 미완성으로 남겨진 부분은 티보르 설리가 보필했고, 그렇게 완성된 작품은 이듬해 2월 8일 필라델피아에서 헝가리 피아니스트 죄르지 산도르의 독주로 초연되었다.

이 협주곡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면, 전편에 걸쳐 관조의 기운이 깊이 스민 ‘서정성’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제1악장(알레그레토)은 관현악의 상냥한 속삭임과 함께 시작되며, 곧이어 그 위로 헝가리 민요의 정취가 어린 부드럽지만 리드미컬한 선율이 피아노 독주로 얹힌다. 피아노와 관현악의 사랑스런 대화는 점차 랩소디풍의 보다 특색 있는 모습으로 발전하지만, 음악은 악장 내내 세련미와 투명성을 잃지 않는다.

‘종교적인 아다지오’로 지정된 제2악장에는 코랄풍의 주제와 새의 지저귐을 흉내 낸 패시지가 등장하는데, 그 차분하고 맑은 흐름에는 삶을 체관한 사람에게만 가능한 마음의 평화가 담겨 있는 듯하다. 그리고 제3악장(알레그로 비바체)으로 넘어가면 분위기는 급전되어 유쾌한 활기와 박진감이 넘쳐나는 한 바탕 춤의 향연이 펼쳐진다.

 

 

Bartók, Piano Concerto No.3 in E major

바르토크 피아노 협주곡 3번

Béla Bartók                                  

1881-1945

Martha Argerich, piano

Yuri Bashmet, conductor

Toho Gakuen Orchestra

2007.04.14

 

Martha Argerich/Yuri Bashmet/TGO - Bartók, Piano Concerto No.3

2007년 제9회 벳푸(別府) 아르헤리치 음악제에서의 공연입니다. 이때 아르헤리치의 나이가 66세, 그럼에도 건반을 두드리는 힘이 굉장하네요. 비올리스트 거장인 유리 바슈메트가 지휘를 맡은 것도 이채롭습니다.

바르토크는 원래 피아니스트로 출발하여 연주회 무대에 당당히 비르투오소로 서는 것이 꿈이었다. 현대에 남아 있는 바르토크의 피아노 녹음들을 들어보면 당시 헝가리의 최고 피아니스트로 손꼽히던 도흐나니와 같은 헝가리 피아니스트들의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는 않은 듯하다. 낭만적이고 자의적이며 감정의 기복을 중시하는 버르토크의 피아노 솜씨는 어떻게 보면 작곡이나 음악학, 민속학과 같은 그의 다른 장르의 직업들에 비하면 이류 정도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작곡과 음악학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분야로 생각했고 피아노 연주는 그저 생계 수단으로만 생각했다.

작곡가-비르투오소의 전통을 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토크는 당대 최고 수준의 피아니스트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05년 안톤 루빈스타인 콩쿠르에 참가한 바르토크는 안타깝게 빌헬름 박하우스에게 1위를 넘겨주며 2등의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지만, 낭만주의자인 바르토크와 모더니스트인 박하우스는 서로의 연주를 높이 평가할 정도로 두 사람은 막강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특히 바르토크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최고의 해석가(라흐마니노프를 제외하고 대다수의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들은 자신의 작품에서 최고의 해석을 보여주진 못했다)로서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헝가리 출신의 작곡가 벨러 버르토크.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작품만을 연주하기를 고집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매니지먼트들은 그에게 자작자연을 요구했고 후배 연주자들도 자신의 작품만을 배우기 원했으며 음반사에서도 자작자연만 고집했던 탓에, 그는 선배 작곡가들에 대한 훌륭한 해석을 선보일 충분한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라흐마니노프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이 이 작품에 있어서 성경과도 같은 원전성을 갖는 것처럼, 비록 바르토크는 협주곡을 녹음으로 남기진 못했지만 이후 바르토크 스페셜리스트로 일컬어진 언도르 폴데시나 죄르지 산도르, 죄르지 세보크를 비롯한 많은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가르침과 연주를 기준으로 삼았다. 이와 더불어 바르토크가 남긴 기록들과 지시들 또한 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해석하기 위한 절대적인 기준으로 남아 있다.

그의 많은 피아노 솔로 작품들도 중요하지만, 작곡가-비르투오소의 전통을 잇는 예술가로서 버르토크의 위대함은 바로 피아노 협주곡에서 비롯한다. 그의 많은 장르의 작품들 가운데에서 어떤 특정한 작품을 독립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적합한 일은 아니지만, 그의 피아노 협주곡은 그의 다른 작품들보다 특별한 시대적ㆍ음악적ㆍ역사적 중요성을 띠고 있다.

바르토크는 작곡과 오케스트레이션에서 나름대로의 스타일을 완성하고 있었고, 당시 음악 경향에 대한 분석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거쳤으며, 특히 바로크 초기 작곡가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옛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26년 이후 작곡된 그의 피아노 작품들의 상당 부분은 실질적인 목적에서 작곡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자신의 연주회 목록을 보다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비롯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피아노 협주곡으로 인해 그는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오랜 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했소. 나는 마치 오랜 시간을 침대 위에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던 환자가 팔과 다리를 겨우 움직여서 일어난 뒤 한두 발을 내딛으려고 하는 것과 다름이 아니오. 이러한 인간은 하르마샤타르 동산에 설 수 없는 법이지. 어찌 되었든 나 역시 되도록 천천히 움직여야만 한다오. 그래서 나는 피아노 작품 몇 개만을 가까스로 작곡할 수 있었소. 아직도 나에게는 모든 것이 벅차기만 하오.”

오늘날 바르토크 피아노 음악은 그 해석에서의 많은 오류로 왜곡에 가까운 시련을 겪고 있다. 바르토크가 CBS에서 남긴 ‘미크로코스모스 리코딩’의 경우 자신이 악보에 남긴 지시와는 전혀 다른 해석을 리코딩으로 남긴 바 있다. 탁월한 피아니스트로서 뛰어난 해석가이기도 했던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연스러운 리듬의 향연과 정교한 앙상블을 통한 구조의 현대적인 이미지 창출, 여기에 연주자 자신의 독창적인 감수성이 어우러지며 전혀 새로운 상상력의 세계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민속적 리듬감의 소박함은 버르토크 피아노 음악의 특징 중 하나이다.

특히 2번 협주곡은 지나칠 정도로 고난도의 테크닉과 원시적인 효과에 집착하여 민속적인 리듬감이 주는 소박하면서도 운무적인 성격을 잃어버리곤 했다. 언젠가부터 라흐마니노프의 저 찬연한 낭만주의가 희미해진 감상성으로 변질되었듯이, 바르토크의 남성적이고 무곡적인 에너지 또한 가학적이고 파괴적인 피아노 타격으로 망가진 측면이 많다.

Yeol-Eum Son/Myung-Whun Chung/SPO - Bartók, Piano Concerto No.3

Yeol-Eum Son, piano

Myung-Whun Chung, conductor

Seoul Philharmonic Orchestra

Seoul Arts Center

2009.08.21

1. Allegretto

2. Adagio religioso

3. Allegro vivace

피아노 협주곡 3번 E장조

바르토크는 이 작품을 1945년 봄에 작곡하기 시작했는데, 오케스트라 반주를 수반한 피아노 작품으로서는 최초로 작곡가 자신이 직접 연주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들었다. 대신 그는 아내가 초연 시 독주를 할 것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병으로 인해 독주자로서 활동을 더 이상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아내에게 이 작품을 초연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작품의 초연은 자신의 제자인 죄르지 산도르의 독주와 유진 오먼디의 지휘로 1946년 2월 8일에 이루어졌다. 이 작품의 판권이 누구에게 주어졌는가는 오늘날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이에 아랑곳하지 않은 버르토크의 아내 디터 파스토리(Ditta Pásztory)는 이 작품을 1960년대부터 연주하기 시작했고 음반도 녹음했다.

바르토크는 이 작품의 모든 설계를 끝마쳤지만 마지막 17마디의 오케스트레이션을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마지막 오케스트레이션이 완성되지 못한 17마디는 티보르 세를리가 완성시켰다. 오늘날 사람들은 버르토크의 오리지널 악보를 거의 완성본으로 간주하지만, 바르토크는 사실 이 작품의 표현 및 템포 기호에 대해 최종적인 점검을 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의 음악을 악보에 옮겨낼 수는 있었지만 이에 살아 있는 표정까지를 입히지는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3번 협주곡은 버르토크의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 가장 자주 연주되는 명곡으로 사랑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20세기를 대표하는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 하나로 존경받고 있다.

추천음반

1. 가장 먼저 두 명의 헝가리인 게자 안다와 페렝크 프리차이의 연주(DG)가 버르토크 피아노 협주곡에서 가장 정통적인 명연으로 그 위상이 높다.

2. 바르토크의 제자이자 3번 협주곡 초연을 맡은 죄르지 산도르의 두 번에 걸친 레코딩 또한 작곡가의 의도가 충실히 반영된 연주로서, 이 가운데 아담 피셔의 지휘로 녹음한 디지털 리코딩(SONY)이 음질과 원숙미가 훨씬 높다.

3. 헝가리 계열의 가장 최근 녹음으로 졸탄 코치쉬와 아담 피셔의 녹음(Philips)도 훌륭하며, 치머만, 안스네스, 그리모가 피에르 불레즈의 지휘로 차례로 녹음한 앨범(DG) 또한 버르토크에 대한 새롭고 독창적인 시선이 담겨 있다.

박제성(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쓰고 있으며, 공연, 방송, 저널 활동, 음반 리뷰, 음악 강좌 등 클래식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을 번역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 오늘의 클래식>명곡 명연주 2012.06.06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66&contents_id=8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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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브루크너 / 교향곡 제4번 E♭장조 ‘로맨틱’

     

글 : 황장원(음악 칼럼니스트)

<연주시간 : 65분>

흔히 브루크너의 작품활동을 가리켜 ‘음악을 통한 신앙고백’으로 규정한다. 브루크너는 평생을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살았고, 교회에 봉사하면서 오르간을 늘 가까이 했으며, 신에게 음악을 바치는 것을 필생의 사명으로 여겼다. 그는 교향곡에 몰두하기 이전에 주로 오르간곡과 합창곡을 작곡했는데, 그 모든 작품들 역시 신에게 바쳐진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미사곡 제3번 F단조와 ‘테 데움 C장조’는 19세기 종교음악 장르의 기념비적 걸작으로 꼽힌다.

물론 교향곡에서도 브루크너의 종교적 자세는 기본적으로 유지된다. 그가 작곡한 교향곡들은 대개 신을 향한 믿음과 정열의 소산으로 간주되며, 그만의 숭엄·장대한 교향악 세계는 이른바 ‘삶의 고뇌를 통한 종교적 귀의의 엄숙한 표현’으로서 듣는 이에게 심오한 묵상의 순간과 경건한 감동의 울림을 선사한다.

그런데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그의 교향곡들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제4번 E♭장조는 얼마간 이질적인 존재처럼 보인다. 일단 브루크너 자신이 붙인 ‘로맨틱’이라는 표제가 풍기는 뉘앙스가 그렇고, 도처에 산재한 감미로운 선율들과 회화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묘사적ㆍ암시적 장면들 또한 그러하다. 특히 처음 세 악장에서 브루크너는 마치 오스트리아의 숲과 들에서 마주치게 되는 자연의 신비와 교감하고 있는 듯하며, 그가 존경해마지 않았던 바그너처럼 중세 전설 속의 그윽한 정경들을 호출하고 있는 듯하다.

브루크너의 첫 번째 장조 교향곡인 교향곡 4번은 독일에서 비교적 일찍부터 인기를 끌었다. 그 이유로 먼저 ‘로맨틱’이라는 표제와 특유의 암시적 기법들이 효과를 발휘한 점을 들 수 있겠고, 나아가 ‘독일적 기법’의 표상과도 같은 대위법이 이전 작품들에 비해 한층 정교해진 점, 그리고 장조의 밝은 음률로 오스트리아-독일의 자연을 환기시킨 면이 19세기 후반이라는 미묘한 시기에 민족주의적 정서를 자극한 점 등을 꼽을 수 있겠다.

브루크너가 이 교향곡에 착수한 것은 1874년으로, 그 무렵 그는 빈 음악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오르가니스트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자 사범학교의 음악교수직을 겸하다가 스캔들에 휘말리기도 했고, 바그너에게 '교향곡 3번'을 헌정하고 빈의 바그너 협회에 가입함으로써 빈 음악계의 권력자이자 브람스파의 수장인 에두아르트 한슬릭의 눈 밖에 나서 곤란을 겪기도 했다. 어쩌면 그가 이 교향곡을 쓰면서 이전과는 사뭇 다른 자세와 시야를 견지했던 것이 그런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는 아니었을까?

여하튼 브루크너는 1874년 1월 2일에 작곡에 착수하여 11월 22일에 일단 작품을 완성했다(제1고). 그러나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자신감이 부족했던 그는 주위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작품의 악보를 출판하지도 초연을 추진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4년이 지난 1878년에 이르러 전면적인 개정 작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 작품은 대폭 변경되었고, 특히 제3악장은 제1고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교체되었다(제2고). 하지만 브루크너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2년 후인 1880년에 제4악장을 대폭 수정하여 새로운 피날레를 마련했다(제3고). 작품의 초연은 1881년 빈에서 한스 리히터가 지휘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제2고와 제3고를 혼합한 형태에 다시금 손질이 가해졌으며, 이후에도 몇 차례 소폭의 개정이 추가되었다. 오늘날 이 교향곡은 로베르트 하스, 레오폴트 노바크 등 후대의 학자들이 그 모든 개정을 반영하여 정리한 악보(1878/80년판)로 연주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간혹 최초의 악보(1874년판)도 연주되고 있다. 물론 여기서는 일반적인 1878/80년판을 기준으로 살펴본다.

제1악장
첫 악장은 브루크너 특유의 세 개의 주제를 가진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다. 곡이 시작되면 안개 자욱한 새벽녘을 연상시키는 현의 트레몰로 위로 호른이 제1주제를 아련하게 떠올리는데, 여기서 5도 음형으로 이루어진 소박한 동기가 장차 전곡을 통일하는 핵심 모티브로 기능하게 된다. 이 주제는 목관의 반복과 호른의 응답으로 펼쳐지고, 계속해서 ‘브루크너 리듬(2+3)’으로 일컬어지는 특징적인 음형이 가세하면서 점진적으로 고조된다. 음악은 심한 전조가 이루어지는 경과부에서 한 차례 힘차게 고조되고, 다시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제2주제가 등장하는데, 이번에 주제선율은 비올라에서 흐르지만 그보다 인상적인 것은 주제를 장식하는 바이올린의 오블리가토이다. 마치 안개가 걷히고 시야가 밝아진 가운데 햇살에 나뭇잎이 반짝이고 시냇물이 찰랑거리는 듯하다. 이것이 발전하여 템포가 빨라지면 앞서의 경과부에서 나타났던 하행 동기를 발전시킨 제3주제가 금관에서 강력하게 울려 퍼지고 음악은 세차게 돌진한다. 그리고 그 격렬한 흐름이 잠시 진정되는가 싶을 즈음 금관의 팡파르로 당당한 코랄 악구가 울려 퍼져 깊은 인상을 남기고, 음악은 조용한 경과부를 거쳐 발전부로 넘어간다. 이후 음악은 소나타 형식에 의거 철저한 발전부와 충실한 재현부를 거친 다음 긴 종결부에 이르러 마무리된다.

제2악장
꿈결처럼 감미롭고 그윽한 흐름에 우수와 비감을 가득 머금은 느린 악장이며, 브루크너 특유의 게네랄파우제(모두쉼표)가 사뭇 의미심장한 효과를 빚어내는 악장이기도 하다. 처음에 첼로가 꺼내놓는 제1주제는 유려하면서도 고뇌가 서려 있으며, 다른 현악기들의 피치카토를 수반한 채 비올라가 노래하는 제2주제는 더욱 깊은 정감을 자아낸다. 여기에 중간 중간 나타나는 교회 성가 풍의 울림과 흐름이 종교적 색채를 더하며, 발전부에서는 거장다운 대위법이 펼쳐진다.

제3악장
‘사냥의 스케르초’라 불리는 악장으로 전곡 가운데 가장 단순명쾌하고 흥미진진하다. 주부는 사냥에 나선 기사들의 뿔피리를 연상시키는 호른의 팡파르가 경쾌하면서도 힘차게 울리면 거기에 트럼펫이 메아리처럼 응답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또 ‘사냥 향연의 무곡’으로 불리는 중간부에서는 한결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랜틀러(오스트리아의 민속무곡) 풍의 음악이 흐른다.

제4악장
소나타 형식과 순환형식이 결합된 브루크너 특유의 장대하고 복잡다단한 피날레이다. 먼저 저현의 오르겔풍크트(페달음) 위에서 출발하는 42마디의 도입부가 나오는데, 이 도입부는 이 악장의 제1주제를 암시함과 동시에 제3악장의 스케르초 주부를 회상하는 2중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최초의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면 제1주제가 제시되고, 이어서 바이올린에서 6잇단음 모티브가 출현하여 제1악장의 제1주제와 융합한다. 이후 악상이 가라앉으면 얼마 후 제2주제가 목관에서 나타나 현악으로 이어지는데, 이 주제는 ‘브루크너 리듬(2+3)’을 지니고 있다. 이 주제들이 화려한 대위법적 발전을 보이고 나서 발전부로 넘어가는데, 그 진입부는 악장 첫머리의 도입부와 유사한 수법으로 처리되어 있다. 이와 비슷한 수법은 종결부에서도 나타나며, 결국 이 피날레는 최종적으로 제1악장 첫머리의 호른 주제가 서서히 떠올라 마침내 드높이 울려퍼지며 궁극적인 클라이맥스에 도달한 후 힘차게 마무리된다

 

Bruckner Symphony No 4 E flat major 'Romantic ' Die Romantische' Sergiu Celibidache Münchner Philh

 

 

 Bruckner - Symphony No. 4 in E flat major - 4 Finale - Celibidache

 

 Bruckner Symphony No 4 E flat major Die Romantische, Christian Thielemann Die Münchner Philharmonike

 

작품설명

브루크너가 남긴 9개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유명한 대표작이며,「낭만적」이라는 표제가 붙여져 있듯이 수수한 기쁨, 맑은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그것에 황홀해진 무아(無我)의 경지가 나타나 있다. 브루크너는, 맑고 깨끗한 음의 세계를 교회당에 울려 퍼지는 파이프오르간의 거룩한 울림 속에 잠겨서 찾아냈는데, 먼지가 없고 부정하지 않은 순진무구한 그의 음악 세계와 그의 음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고는 이해할 수가 없다. 브루크너가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제 4번 「낭만적」은, 부르크너가 50세 때인 1873년부터 1880년에 걸쳐 빈에서 작곡되었으며, 1881년 2월 20일에 유명한 리히터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제 1악장은 숲의 조용한 속삭임 위에 호른이 울리고, 깊은 숲의 모습이 나온다. 폭풍이 찾아와 한 때 숲은 술렁거리지만, 또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다. 제 2악장은 만가(挽歌)로, 슬픔의 서정일 것이다. 제 3악장은 농부의 무곡, 제 4악장은 나타난 주제가 여기서 소용돌이치고 융화되며 그리고 끝맺는다.

별명이 'Romantische'여서 인지도 모르지만... 밑의 교향곡들이 모두 'moll'인데 비해 이곡은 장조이다. 성격적으로도 밝은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정말 브루크너의 교향곡 중에선 가장 '낭만적'인 선율을 자랑한다. 이 작품이 브루크너를 설명하는 거의 모든 해설서의 기본을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면, 브루크너의 교향곡의 특색이라고 나열하는 것의 대부분이 여기에 있다. 브루크너 리듬. 4박자 리듬인데, 한박, 한박, 셋잇단으로 두박. 상상이 가시는지? 3악장 시작에 기본 리듬이다. 그 다음 브루크너 휴지(pause). 이것은 브루크너 교향곡 거의 전체에 드러나는 부분이지만... 트레몰로로 시작하는 1악장. 역시 4번에 있다. 그러나 진정 4번이 로맨틱한 이유는 각 악장마다 고운 선율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교향곡의 기초를 순수한 음향에 두었다는 점에서 낭만주의자였던 그는, 바로 그 점에 의해서 음향의 아름다움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그의 가장 조화된 제 4교향곡을 제작하였다. 또한 교향곡 작곡가로선 그의 9개의 교향곡들은 브람스의 그것들과는 대조적으로(브람스의 교향곡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실내악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 또 다시 진정한 교향곡의 기념비적 성장을 이룩하였다.

그의 음악적 표현의 네 개의 원천-바하, 베토벤, 슈베르트, 바그너 -중에서, 그의 교향악 안에 가장 풍부하게 흐르는 것은 확실히 슈베르트의 그것이다. 그는 기본적 선율 창안에 있어서 슈베르트와 똑같은 샘을 갖고 있었고, 형식에 있어서도 똑같은 호흡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느린 악장과 스케르쪼의 단순한 선에 있어서나, 또는 제 1과 제 4악장이 다소 긴밀치 못하다는 점에 있어서나 꼬집어서 어떤 부분이 슈베르트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되짚어 올라가기는 불가능하다.

그와 브람스가 가장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은, 또 다시 저 위대한 베토벤의 아다지오 형식을 채용한 그의 용기와, 첫 악장과 끝 악장간의 리듬적 연계가 부족하다는 점인데, 이것을 그는 오랜 동안의 오르간 연구로 함양된 화려한 관현악법과 대가스러운 선율처리로 보완하고 있다. 그의 교향곡들은 또 다시 우주적 기운을 호흡한다. 자연에 대한 사랑, 경건함. 해학과 신비주의는 무곡 형식, 장엄한 합창곡들에서 그 표현의 요체를 얻는다. 이 단순 조야하고 '무식한' 음악인은 위대한 사상가는 못될 지언정, 위대하고 예민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내부에서 전투를 경험하고, 회의와 기쁨, 절망과 환희의 양면을 알며, 창조적 힘과 새로운 창안으로 풍부한 작품들을 통하여 그가 겪었던 것을 표현해 내는 신성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 : 1824 - 1896)
브루크너는 마지막 교향곡인 미완성 9번을 위해서, 8번을 작곡한지 6주 뒤부터 죽기 전까지 10년이나 작업했다. 9번은 그의 마지막 최후의 삶에 대한 결정체이다. 숨을 거두는 그날에도 마지막 악장을 잠시 작업하다 숨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굳건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신에게 이 곡을 바치고 싶어했었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염원을 간직하고 있다. 이 곡의 음악적인 형상에 대해서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점은 그 음의 구성에서 나타나는 생소함과 대담성에 대한 놀라움이다. 선율의 처리 방법은 복음정을 각별히 많이 구사하였으며, 풍부한 하모니는 바그너적인 반음계법이 침투하여, 음의 장대한 흐름은 아주 개성적인 면모로 발휘하기 시작했다. 또한 베토벤의 교향곡들은 브루크너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이제 브루크너는 그의 교향곡을 통해서 더욱 베토벤의 교향곡적인 형식을 발전시킨 셈이 된다.

9번의 최초의 스케치는 63세 때인 1887년 9월이며 그후 병세가 점점 심각해지고 나이가 들면서 3악장까지 작곡하고 200페이지 분량의 피날레 스케치를 코다까지 남겨둔 상태로 서거하게 된다. 이 피날레를 가지고 브루크너의 의도와 비슷하게 다시 완성하려는 시도는 다행히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마지막 코다 부분은 브루크너의 영면과 함께 엄숙한 세계로 완결 지어졌기 때문에 굳이 피날레 부분에 손을 델 필요는 없다고 본다. 브루크너는 마지막에 이 피날레가 완성되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테 데움이 대신 연주되기를 바랬었다.

곡의 초연은 그의 사후인 1903년 2월 11일 빈에서 Ferdinand Löwe 지휘로 당시 막 창단된 빈 콘체르트페라인 오케스트라 (Wiener Konzertvereinsorchester)에 의해 행해졌다. 이 오케스트라는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전신에 해당한다. 뢰베는 작품의 연주를 원활히 한다는 미명하에 브루크너의 악보를 수정했으며 그 수정본이 Doblinger에 의해 이듬해 출판된다. 1934년에야 Alfred Orel이 편집한 오리지날 악보가 출판되게 된다. 크나퍼츠부쉬 (1950)를 비롯해 푸르트벵글러 (1944), 아벤트로트 (1951) 등은 모두 이 오리지날 악보를 쓰고 있다. 반면 현대의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1951년에 출판된 Leopold Nowak판을 이용하고 있는 추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