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무대로,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 수석지휘자를 지낸 휴 울프가 2011, 13년에 이어 세 번째로 서울시립교향악단 지휘대에 섭니다. 메인 프로그램은 니체의 사상과 세계관을 철학적으로 풀어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입니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쓰인 도입부가 유독 낯이 익지만 관념적 표제로 관현악 표현의 온갖 지평을 실험하는 이후 8개 장(章)을 잊고 넘어가선 안 될 일입니다. '현악기 같은 유연한 표현력'으로 알려진 오보이스트 프랑수아 를뢰는 슈트라우스의 <오보에 협주곡>을 협연합니다. 콘서트 첫 곡으로는 3세기 전 관현악 정신의 정수인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4번>이 대조의 묘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프로그램]
바흐: 관현악 모음곡 4번
Bach: Orchestral Suite No. 4
R.슈트라우스: 오보에 협주곡
R.Strauss: Oboe Concerto
R.슈트라우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R.Strauss: Also Sprach Zarathustra
[프로필]
지휘 휴 울프 Hugh Wolff, conductor
지난 해에 이어 또다시 서울시향과의 무대에서 만나볼 수 있는 지휘자 휴 울프는 동세대 주요 지휘자 중 한 명이다. 시카고, 뉴욕, 보스턴, 필라델피아, LA, 클리블랜드,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 주요 교향악단을 모두 지휘하였고, 유럽에서도 런던 심포니, 필하모니아, 버밍엄 심포니, 프랑스 국립,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뮌헨 필하모닉, 체코 필하모닉,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등을 지휘하였다. 일본, 스칸디나비아, 오스트레일리아의 악단들을 정기적으로 객원지휘하며, 아스펜, 탱글우드, 라비니아의 여름 음악제에서 자주 출연한다. 바로크 스타일의 연주 스타일을 신작 연주에 확장시켜온 울프는 1979년 로스트로포비치를 도와 내셔널 심포니 부지휘자로 지휘 경력을 시작하였고, 뒤이어 뉴저지 심포니의 음악감독과 시카고 그랜트 파크 뮤직 페스티벌 음악감독을 역임했다. 울프는 세인트 폴 체임버의 음악감독 겸 수석지휘자(1988~2000)를 역임했고, 동 악단과 20여장의 음반을 녹음했다. <뉴욕 타임즈>는 '휴 울프가 지휘해온 세인트 폴 체임버는 정제된 사운드를 발전시켜왔다. 울프는 흠잡기 어려운 취향으로 해석을 구체화시켰다.'라고 평한 바 있다. 이후 프랑크푸르트 방송 교향악단 수석지휘자(1997~2006)를 역임하는 동안 그는 유럽, 일본, 중국 투어를 함께 했고, 잘츠부르크, 라인가우, 뷔르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출연하였다. 텔덱에서 주로 녹음을 해온 그는 하이든에서 스트라빈스키까지 많은 녹음을 세인트 폴 체임버아 오케스트라와 남겼다. 버밍엄 심포니와의 애런 제이 커니스 음반, BBC 심포니와 장이브 티보데와의 협연 등을 녹음하였고, 힐러리 한의 바버와 메이어 협주곡 녹음도 반주하였다. 앞서 언급한 앤타일의 1번, 6번 교향곡 녹음은 2001년 칸느 클래식 상을 받았다. 1953년 파리에서 미국인 부모 아래 태어난 그는 런던과 워싱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버드를 졸업하고 파리로 돌아가서 샤를 브뤼크에게 지휘를, 올리비에 메시앙에게 작곡을 배웠다. 이후에는 볼티모어에서 레온 플라이셔를 사사했다.
오보에 프랑소와 를뢰 Francois Leleux, oboe
최고의 오보이스트 프랑수아 를뢰는 전세계 주요 공연장과 음악제에서 바로크시대의 음악부터 새롭게 위촉된 작품에 이르기까지 주요 오케스트라들과 연주해오며 국제적 아티스트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를뢰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공연장에서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빈 콘서트하우스에서 빈 심포니와, 샹제리제 극장에서 프랑스 국립오케스트라와, 분카마라 극장에서 NHK 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하였으며 링컨센터에서 모스틀리 모차르트 페스티벌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피에르 불레즈, 마리스 얀손스, 콜린 데이비스, 정명훈, 다니엘 하딩, 토마스 다우스고르, 볼프강 자발리쉬, 알란 길버트와 같은 세계 최정상의 지휘자와도 함께 공연한 바 있다. 프랑스와 를뢰는 18세에 파리 오페라극장의 수석 오보이스트로 지명되면서 그의 전문 연주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3년 뒤 바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솔로이스트로 2004년까지 활동했다. 그는 독주와 실내악을 비롯해 2003년 수석으로 활동했던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을 하고 있으며, 뮌헨 음악원의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또한 오보에 레퍼토리의 폭을 넓히기 위해 힘쓰는 그는 니콜라스 바그리, 지 실베스트리니, 에릭 탕기, 티에리 에스카이흐 등과 같은 현대 작곡가들이 위촉한 많은 신작들도 연주하였다. 2010/11 시즌에는 스웨덴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스코틀랜드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함께 위촉한 Albert Schnelzer의 작품을 초연한 바 있으며, 모차르트의 돈조반니, 마술피리의 아리아를 편곡하여 카메라타 잘츠부르크의 협연으로 소니레이블에서 녹음하였다. 한편, 실내악 전문연주자이기도 한 를뢰는 정기적으로 전 세계를 순회하며 파리 바스티유 앙상블과 8중주, 레번트 프랑스와 6중주를 연주하였다. 평소 함께하는 리사이틀 파트너로는 하피스트 이사벨 모레티와 바이올리니스트이자 그의 아내인 리사 바스티아시빌리가 있다. 를뢰는 소니레이블에 소속되어 지금까지 리사 바스티아시빌리, 첼리스트 세바스티안 클링게르, 비올리니스트 로렌스 파워와 함께한 실내악 음반,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와의 바흐 음반, 카메라타 잘츠부르크와의 모차르트 음반을 발매하였다. 최근에는 슈트라우스 오보에 협주곡과 관악기를 위한 세레나데를 녹음하고 있다.
Concerto for oboe & small orchestra in D Major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 오보에 협주곡 D장조
Richard Strauss (1864. 6. 11 ~ 1949. 9. 8
슈트라우스의 협주곡들은 위대한 교향시들에 의해서 호른협주곡들을 제외하곤 잘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사실 첼로협주곡과 비슷한 형태를 가진 돈 키호테도 교향시로 분류된다), 주옥같은 곡들이 많다. 이 곡 역시 오보에연주자들의 각광을 받으며 세상에 알려진 곡으로써, 아주 매력적이다. 1942년, 세계 제 2차대전이 한창 떠오를 무렵, 슈트라우스는 그의 마지막 오페라 Capriccio의 작곡을 끝 낸 뒤 작은규모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들을 쓰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으며, 그 당시에 그는 그의 유명한 두번째 호른 협주곡도 작곡하였다. 이 곡과 다른 다섯 곡들을 위한 곡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옛 대 작곡자들을 기리기 위해서 썼다고 하는데, 이는 모짜르트, 베토벤, 슈베르트와 바그너인데, 그 이유는 진정한 독일의 문화가 파괴되어가고 있었다고 슈트라우스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영토인 Garmisch에 거주하고 있었던 슈트라우스는 어느날 미국군인 John de Lancie의 방문을 맞이하게 되었다. John de Lancie는 군인이었지만 미국에 있을당시 피츠버스 교향악단의 수석 오보주자였다. 그들은 둘의 공통 언어인 불어로 몇시간동안이나 이야기 했다고 한다. De Lancie는 후에 이렇게 전했다고 한다. 이 협주곡의 오보에 파트는 1945년 9월에 완성되었다. 그 이듬 달에 스트라우스는 나찌와 협조했다는 심문을 피하기 위해 그의 아내 Oauline을 떠나 스위스에서 머물렀다. 그때 Baden에서 그는 오케스트라 파트를 10월 25일에 완성하였으며, 1946년의 1월과 2월에 그의 Metamorphosen과 이 곡이 Zurich에서 각각 초연되었으며 3월에는 그의 두번째 Wind Sonatina가 Winterthur에서 초연되었다. 이 곡의 독주가는 Tonhalle Orchestra의 수석 오보에주자 Marcel Saillet이었으며 Volkmar Andreae에 의해 지휘되었다. 슈트라우스는 de Lancie를 초대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당시에 미국을 떠날 수가 없었다.
1.Allegro moderato
1악장은 첼로의 오스티나토 (반복되는 패턴)연주로 독주자의 등장을 암시하며, 그 뒤에오는 56마디는 이 악장의 주테마를 설명한다. 멜로디와 멜로디를 오가는 매끄러운 연결은 스트라우스의 창작법이 극에 달했음을 알려준다.
2.Andante
2악장은 1악장에서 이어진 오스티나토가 감성적이고 안단테적인 분위기를 보여준다. 이 곡의 cantabile 멜로디는 50년 전에 쓰인 돈 완의 오보에 솔로 멜로디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3.Rondo; Finale
3악장은 2악장에서 피치카토로 반주된 카덴자에서 이어진 화려한 론도 피날레가 즐거운 클라이맥스를 맞이한다
음악듣기,참고/http://blog.daum.net/yang49/14389
Also sprach Zarathustra Op. 30
리하르트 스트라우스 / 교향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Richard Strauss (1864 ~ 1949)
1. Einleitung (Introduction) [Sonnenaufgang (Sunrise) / 일출]
2. Von der Hinterweltlern [Of the people of the unseen world / 후세 사람들에 대해]
3. Von der grossen Sehnsucht Hinterweltlern [Of joys and passions / 환희와 정열]
4. Von den Freuden und Leidenschaften [Of The Great Longing / 크나큰 동경에 대하여]
5. Das Grablied [Dirge / 무덤의 노래]
6. Von der Wissenschaft [Of science / 학문에 대하여]
7. Der Genesende [The convalescent / 평온한 자]
8. Das Tanzlied [The Dance Song / 무도의 노래]
9. Das Nachtwandler lied [The Song of The Night-Wanderer / 몽유병자의 노래]
이 곡은 독일의 철학자 니이체의 동명의 저서를 바탕으로 1896년에 완성한 교향시이다.
자유로운 자기 자신의 철학 사상을 음악화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나 작품 발표 당시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은 곡이기도 하다. 곡은 오르간이 포함된 대편성이며 서두의 오르간과 트럼펫에 의한 자연의 주제는 영화 주제가로 사용될 만큼 장엄하다.
짜라투스트라는 B.C 6~7세기경 페르시아의 조르아스터교의 교주로 알려진 예언자이며 니이체는 그를 초인으로 보았다.
리스트에 의해 개척된 교향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의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슈트라우스는 제재에 있어 리스트가 지니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형식을 창안했고
"죽음과 변용", "영웅의 생애"를 비롯 많은 교향시들을 만들었다.
이 작품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의 대표적 저서를 음악화한 것으로 고금의 걸작으로 꼽히며, 슈트라우스는 철학의 음악화를 실험하여 클래식 음악의 레퍼토리를 확장했다.
그러나 최초 이 작품에는 찬사와 더불어 비난도 만만치 않았다.
슈트라우스는 스코어 제목 밑에 "프리드리히 니체에게 자유로이 따른" 이라고 써넣으면서 "나는 결코 위대한 철학자 니체의 작품을 음악으로 나타내려한 것이 아니라 인간 발전의 관념을 갖가지 단계를 거쳐 초인에 이르는 과정을, 니체의 초인 사상을 음악으로 표현하려 했다"고 설명을 덧붙히기도 했다.
작곡은 1896년 2월부터 8월에 걸쳐 완성했으며, 초연은 동년 11월 27일 프랑크프루트 박물관 협회 연주회에서 작곡자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철학저서인 "짜라투르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독일의 철학자 니체 (Wilhelm Nietzsche, 1844-1900)의 주요작품의 제목이다. 이것은 1883년부터 1885년에 걸쳐서 완성된 것으로 4부로 이루어지며 속편은 구상만 하고 미완성되었다. <짜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교의 교조로 일컬어지는 기원전 6세기경의 페르시아의 전설적 인물로 그리스어로는 조로아스터라고 불리운다.
짜라투스트라는 산속에 틀어박혀 사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은 후, 현실세계로 돌아와 각지에서 예언자로서 새로운 사상을 전한다. 니체에 따르면 이 사상의 구원자가 <초인>이며, 초인만이 미래를 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권력으로의 의지는 미래의 문화의 가치라 말했다.
슈트라우스와 철학의 만남은 1882년 뮌헨 대학에서 철학과 미학의 문학사 강의를 들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1788-1860)에 대한 강의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이때부터 철학서를 읽게 되었다. 이후 니체에도 흥미를 갖기에 이르러, 막 출판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는 그 사상에 깊이 빠지게 되어 마침내 이를 소재로 한 교향시를 작곡했다. 전곡은 약 33분의 연주로 1896년 11월 27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슈트라우스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왜 그렇게 초인이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1, 2 부를 통해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제시된다. 권력에의 의지로 무장한 초인이란 '신은 죽었다'라는 어구를 통해서 기존의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형이상학적인 면에 치우쳐 있는 도덕윤리에 대해 사형 선고를 내린 니체의 반항이자, 자신을 삶의 주체로 삼아야 한다는 실존적인 자아 인식의 문제에 대한 고찰에서 탄생된 참된 자기인 것이다. 이 책은 각각 짜라투스트라가 하산할 때 가지고 오는 깨달음을 담아 총4부로 구성되어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가 살았던 85년 동안 유럽은 정치적,사회적, 문화적으로 볼 때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큰 변화들을 겪었다. 특히 슈트라우스가 태어났고 그의 예술 활동의 중심지였던 독일은 통일국가로서의 출발, 전제정치로부터 공화제로 국가체제의 이행,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와 같은 폭넓은 변화를 겪어야 했다.
문화적으로 보면 19세기 전반을 지배했던 낭만주의 사조가 자연주위적, 사실주의적인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던 19세기 후반에도 큰 여파를 남겼고, 슈트라우스와 그 시대 음악가들, 예를 들어 구스타프 말러, 한스 피츠너, 막스레거 등도 그 영향 아래에 있었다. 특히 <신 독일 악파 Neudeutsche Schule>라는 이름으로 총괄되는 리스트와 바그너 예술의 강렬한 발산력은 이 작곡가들의 존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위대한 독일 음악의 후예로 태어나 자칫하면 낭만주위 사조의 잔재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기 쉬운 이 세기 말의 음악가들 속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만은 확실하게 남들과 다른 예술가로서의 체질을 가지고 다양한 예술상의 시행착오 속에서도 상처없이 20세기 전반을 의연하게 살아 나갔다. 그러나 강경한 생활태도와 어지러울 정도의 변용으로 인하여 슈트라우스는 여러 가지 오해를 불러일으켜 일부 반대자를 가지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도 그들은 나치 히틀러의 정권을 지지했고 그를 위한 음악가라는 지적을 하고 있다. 실제 나치스 군사 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니체의 철학은 동양 사상과 맥을 같이한다.
신이 죽었다는 말은, -외부로부터 인간 삶의 목적이 주입되던 시절-기독교의 신이 무력하게 되었다는 것 뿐 아니라 인간이 복종하여야만 하고 복종하길 원하는 초강성적인 것이 무력하게 되었다는 말을 의미하며, 이러한 무력화는 이제까지의 질서의 붕괴를 의미한다. 하이데거, <니체와 니힐리즘>
"종교는 사람들을 순한 양으로 만들어 복종시키는 최악의 사기이다"라며 열변을 토하는 짜라투스트라에 깊이 빠져들었다. 창조자로서의 인간 본성을 되찾아 춤추고 노래하고 현재를 즐기라는 가르침 또한 실존주의라고 불리는 다른 사람들의 사상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외부에서 위로자를 찾지 말라. 신도 종교도 없다. 당신은 존재만으로도 눈부시다. 국가와 제도와 도덕에 순종하지 말라. 순종은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군중의 입담에 놀아나지 마라. 그들은 멍청하다. 그들을 멀리하라. 네 이웃과 함께 바보짓을 하면서 네 안의 울림을 망각하지 마라. 고독해져라. 고독 속에서 자신의 울림을 자각해라. 네 안의 무한한 창조성을 발견하라. 당신은 신이 될 수도 있는 존재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깨뜨리고 죽이고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반복하라. 초인이 되기 위해, 전사가 되어라.
네 이웃을 적으로 삼아라. 그대여, 동정으로서 남에게 베풀지 말고 자신감 넘치는 초인이 되어 그 힘으로 자연스레 선을 행하라.
우리는 왜 초인이 되어야 하는가...? '니힐리즘'의 극복을 위해서...?
하이데거는 니체가 니힐리즘을 극복하기는 커녕 니힐리즘을 완성시켰다며 비판을 하는데...
그럼 하이데거의 니힐리즘 극복은 어떤 형태인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애매한 '권력에의 의지'- 이것을 자기 초극이라고 생각해도 되는지 궁금하다.
나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꾸준하고 계속적인 의지. 자신을 한 단계 극복할 때마다 얻는 쾌감과 힘.
그것을 권력이라 말한다면...그런데 왜 권력이라는 단어를 썼을까...
Richard Georg Strauss (1864.6.11-1949.9.8)
리하르트 스트라우스는 후기 낭만파 음악의 거장이자 근대 독일을 대표하는 최대의 작곡가로서
리스트가 이룩한 교향시라는 음악 형식과 바그너의 표현 수법을 융합하여 뛰어난 교향시적 표제음악을 많이 남긴 작곡가이다. 또한 관현악법으로서 베를리오즈, 림스키 코르사코프 이후의 최대 작곡가인 그는 지휘자 뿐 아니라 문필방면에도 뛰어났으며 철학에도 조예가 깊어 인격과 덕망이 높았고 휴머니스트로서의 또 다른 일면은 나치정권에 반발하여 망명길에 오르게 한다. 1896년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철학서에 감명받아 그의 감정의 움직임을 하나의 교향시로 판타지 형태에 용해시켜 그의 작품 30번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만들어졌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철학적이며 매우 詩的인 문장으로 되어 있다. 수도자(修道者)인 짜라투스트라가 산에 들어가 수도를 하며 산에서 내려오기까지의 이야기를 쓴 '짜라투스트라의 서설'과 인간에 관한 여러가지 일들, 즉, 기쁨, 전쟁, 사랑, 죽음, 괴로움 등의 약 80개의 제목을 가진 다양한 내용의 글로 이루어져 있는데 스트라우스는 이 곡을 만들면서 악보 서두에 니체의 원저의 序文을 싣고 이를 표제로 하여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철학을 음악화한 예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이에 대해 스트라우스는 "나는 철학적인 음악을 쓰려고 한 것도 아니며 니체의 위대한 작품을 음악으로 묘사하려고 한 것도 아니다. 음악이라는 수단에 의하여 인류발전에 대한 관념을, 그 기원에서 그 발전의 각가지 양상을 거쳐 니체의 초인 사상에 이르기까지를 전달하려 했다. 교향시 전체를 니체의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가장 훌륭한 예증을 보인 니체의 천재성에 대한 찬미를 그린 것이다."라고 답변하고 있다.
교향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처음엔 조용하고 낮은 C 音으로 밤의 장막이 걷히고 새벽이 다가옴을 나타냄으로서 시작된다. 장중한 자연의 주제가 트럼펫에 실려 시작되는데 재현부에서는 스케일이 큰 관현악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곡을 만들 무렵 그는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강의를 들었으며 1888년에는 교향시인 "Don Juan 돈환", "Tod und Verklarung, Death and Transfiguration"을 작곡하여 천재로 불리면서 표제음악적인 교향곡이나 오페라도 본격적으로 작곡하여 32세에 교향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Symphonia domestica 가정 교향곡", 2년 후엔 오페라 "Salome 살로메", 3년 후엔 오페라 "Elektra 엘렉트라", "Der Rosenkavalier 장미의 기사"를 작곡했다. 그 중에서도 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전작품을 대표할 정도로 손꼽히는 명곡으로서 각 연주회의 주요 레퍼토리로 등장하여 연주되고 있다.
니체 [Friedrich Nietzsche]
전통적인 서구 종교·도덕·철학에 깔려 있는 근본 동기를 밝히려 했으며, 신학자·철학자·심리학자·시인·소설가·극작가 등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계몽주의라는 세속주의의 승리가 가져온 결과를 반성했다. "신은 죽었다"는 그의 주장은 20세기 유럽 지식인의 주요한 구호였다.
민주주의, 반(反)유대주의, 힘의 정치 등에 강력히 반대했지만 뒷날 그의 이름은 그가 혐오했던 파시스트들에게 이용되었다.
[초기생애]
그의 집안은 루터의 경건주의를 신봉했다. 친할아버지는 프로테스탄트교를 옹호하는 책을 썼고, 외할아버지는 시골 목사였다. 아버지 카를 루트비히 니체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니체의 이름은 이 왕의 이름을 딴 것임)의 명으로 뢰켄의 목사로 임명되었다. 아버지는 니체가 6세가 되기 전에 죽었고, 어머니 프란치스카, 누이 엘리자베트, 할머니와 두 하녀 사이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1850년 잘레 강변의 나움부르크로 옮겨 돔 김나지움을 다녔고, 1858년 프로테스탄트교 학교인 슐포르타에서 고전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 본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헌학을 공부했다. 재학중 두 학기는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그 까닭은 2명의 대표적인 고전학 교수 오토 얀과 프리드리히 빌헬름 사이의 날카로운 대립 때문이었다. 그는 음악에서 안식처를 찾았고, 낭만파 음악가 로베르트 슈만의 영향이 두드러진 곡들을 작곡하기도 했다. 1865년 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옮겼다.
1867년 10월 군에 입대했으나 다음해 3월, 말을 타다가 가슴을 심하게 다쳤다.
장기간의 병가를 받고 그해 10월 라이프치히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그동안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알게 되었고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를 만났으며 고전문학자 에르빈 로데와 우정을 쌓았다.
[바젤 시기]
스위스 바젤에 고전문헌학 교수직이 비었을 때, 리츨의 추천으로 학위도 없이 교수로 임명되었다. 1869년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시험과 논문없이 출판된 저술들만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일어나자 의무병을 지원했는데, 1개월도 안되어 환자를 수송하다가 이질과 디프테리아에 걸렸다.
바젤에 있을 때 바그너와 사귀었고 뛰어난 제자로 인정받았지만, 바그너가 〈파르지팔 Parsifal>에서처럼 그리스도교적 모티브를 많이 이용하고 국수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빠지자 결별했다.
니체의 첫번째 저서 〈음악의 정신에서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die aus dem Geiste der Musik> (1872)은 그가 고전학의 굴레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 작품에서 그리스 비극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전자는 중용·제약·조화를, 후자는 거침없는 정열을 표현함)의 결합에서 나왔으며,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와 낙관주의가 그리스 비극을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미학사(美學史)의 고전으로 꼽힌다.
1878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을 출판했다. 건강이 점차 나빠져서 1879년 교수직을 사임했다. 1879~89년에는 책을 쓰는 것 외에는 삶에 어떠한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중병에 시달렸고 시력도 거의 잃었으며,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와도 접촉하지 않았다.
[고립·창조·오용의 시기]
성서 이야기 형식의 문학적·철학적 대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는 1883~85년에 4부로 나왔는데, 제4부는 자신의 돈으로 출판했다. 그가 쓴 대부분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당시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철학을 더욱 직접적인 산문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한 〈선악의 피안 Jenseits von Gut und B?se〉 (1886)과 〈도덕 계통학 Zur Genealogie der Moral〉(1887) 역시 독자를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니체의 정신이 정상적이었던 마지막 해인 1888년은 생산적인 해로, 〈바그너의 타락 Der Fall Wagner〉을 출판했고 〈우상의 황혼 Die G?tzen-D?mmerung〉·〈반(反)그리스도 Der Antichrist〉·〈니체 대 바그너 Nietzsche contra Wagner〉·〈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등을 썼다.
1889년 1월 이탈리아 토리노의 길거리에서 쓰러진 뒤 정신적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1900년 8월 25일 죽었다.
니체의 이름이 아돌프 히틀러 및 파시즘과 연결된 것은 주로 그의 누이 때문이었다.
그녀는 대표적인 국수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인 베른하르트 푀르스터와 결혼했는데, 1889년 푀르스터가 자살한 뒤 니체를 푀르스터의 이미지로 개조했다.
그녀는 니체의 작품들을 무자비하게 통제했고 탐욕에 사로잡혀 니체의 버려진 글들을 모아 〈권력에의 의지 Der Wille zur Macht〉(1901) 등을 출판했다. 히틀러에 대한 그녀의 열렬한 지지 때문에 대중은 니체를 독재자 히틀러와 연결지어 생각하게 되었다.
[니체의 철학사상]
니체의 저서들은 뚜렷하게 3가지로 구분된다. 초기작품 〈음악의 정신에서 비극의 탄생〉과 〈시대와 맞지 않는 생각 Unzeitgem?sse Betrachtungen〉(1873)에서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낭만주의적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중기 작품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즐거운 과학 Die fr?h-liche Wissenschaft〉 (1882)까지는 이성, 과학, 문학 장르의 실험 등을 찬양했고 초기 낭만주의, 바그너, 쇼펜하우어 등에게서 벗어났음을 보여주었다.
원숙기 철학은 〈즐거운 과학〉 이후에 나타난다. 원숙기 저작에서는 주로 가치의 기원과 기능을 다루었다. 생에 내재적 가치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면서 항상 생이 평가되고 있다면 그러한 평가자의 조건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특히 서구의 철학·종교·도덕의 기본적인 문화적 가치들을 금욕주의적 이상(理想)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고통이 궁극적 중요성을 갖는다는 생각에서 나온다. 니체에 따르면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은 고통을 신의 의도이자 죄갚음의 기회로 해석함으로써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승리는 개인의 불멸성이라는 교리와 개인의 삶과 죽음은 우주적 의의를 갖는다는 기만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통철학은 신체에 비해 영혼, 감각에 비해 정신, 욕망에 비해 의무, 현상에 비해 실재, 시간적인 것(일시적인 것)에 비해 무시간적인 것(영원한 것)에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금욕주의적 이상을 표현했다.
그리스도교가 죄지은 자들에게 구원을 약속한 반면, 철학은 현자들에게 세속적인 것이긴 하지만 구원의 희망을 제시했다. 전통적인 종교와 철학의 공통점은 존재는 설명· 정당화· 속죄 등을 필요로 한다는 가정을 숨기고 있다는 점이다.
양자는 경험을 다른 세계, 이른바 '참된' 세계를 빌려 훼손한다. 양자는 몰락하는 생이나 비탄에 빠진 생의 징후로 볼 수 있다. 전통도덕에 대한 니체의 비판의 초점은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의 유형학이다.
니체는 독일어 어휘 'gut'(좋은, 선한)·'schlecht'(나쁜)·'b?se'(악한) 등을 검토하면서 선악의 구별은 원래 비도덕적인 기술(記述)에 쓰인 것으로 선은 우월한 주인, 악은 열등하고 천한 노예를 가리켰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노예가 주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지배의 속성들을 악으로 규정함으로써 선과 악의 대조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월함은 악덕이 되었고, 자애·겸손·복종이 경쟁·자존심·자율성으로 대체되었다.
노예도덕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것은 노예도덕만이 참된 도덕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절대성에 대한 주장은 종교적 윤리와 마찬가지로 철학적 윤리에도 중요하다. 니체는 주인·노예 도덕의 역사적 계통학을 제시했으면서도, 이 계통학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성에 대한 비역사적 유형학이라고 주장했다.
니체는 금욕주의적 이상에 의해 최고의 가치로 정립된 것을 평가절하하기 위해 '허무주의'란 용어를 썼다.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수동적 허무주의 시대, 즉 19세기에 실증주의가 출현함으로써 종교적·철학적 절대성이 이미 해체되었음을 아직 모르고 있는 시대라고 보았다.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인 기초와 전통적인 도덕이 허물어짐으로써 이제는 무목적·무의미 등의 느낌만이 남았다. 무의미의 승리는 곧 허무주의의 승리이며, 따라서 "신은 죽었다".
그러나 니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금욕주의적 이상의 쇠퇴와 존재의 본래적 무의미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삶에 의미를 주는 대리 절대자를 찾으리라고 보았다. 당시 등장하던 민족주의가 그러한 불길한 대리 신이고 민족국가는 초월적 가치와 목적을 부여받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철학과 종교가 교의의 절대성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듯이, 절대성은 사명감과 정열을 지닌 민족국가에도 나타난다고 보았다. 경쟁자에 대한 살육과 영토의 정복은 보편적 형제애와 민주주의·사회주의의 깃발 아래 진행된다. 니체의 이러한 선견지명은 날카로운 것이었다.
니체는 자신의 저작들을 허무주의와의 투쟁으로 보았다.
종교·철학·도덕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퍼스펙티브주의(perspectivism), 권력을 지향하는 의지, 영원한 회귀, 초인(超人)에 관한 독창적인 사상을 발전시켰다.
퍼스펙티브주의는 지식이 항상 특정한 퍼스펙티브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는 태도이다. 즉 순수한 지각은 존재하지 않으며, 관점없는 지식이란 특정한 관점없이 본다는 것만큼이나 모순적이다. 퍼스펙티브주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퍼스펙티브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퍼스펙티브란 대상을 가능한 모든 관점에서 동시에 본다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니체의 퍼스펙티브주의는 때로는 상대주의나 회의주의로 오해받아왔다. 그렇다고 해서 퍼스펙티브주의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퍼스펙티브주의는 니체의 주장, 이를테면 지금까지의 지배적인 가치는 금욕주의적인 이상에 따른 것이었다는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주장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인가, 아니면 특정한 퍼스펙티브에서만 옳은 것인가? 퍼스펙티브주의는 퍼스펙티브주의 자체가 절대적 참이라고 가정할 수밖에 없을 텐데, 이는 자기모순이 아닐까?
관련해서 지금까지 인식론에서 유용한 작업과 풍부한 주석서가 많이 나왔다. 니체는 종종 생을 권력을 지향하는 의지, 즉 성장과 영속을 위한 본능과 동일시했다. 이러한 개념은 금욕주의적 이상을 해석하는 또다른 방식을 제시한다.
이 점은 그가 "이 의지가 '결여'된 인류의 모든 최고 가치는 쇠퇴와 '허무주의적' 가치의 징후이면서도 신성한 이름을 내걸고 주인행세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데서 나타난다.
따라서 전통적인 철학·종교·도덕은 불충분한 권력의지의 옷으로 치장하고 있다.
서구문명을 떠받치고 있는 가치들은 퇴폐의 승화된 산물이었다.
몇몇 주석가는 니체가 말하는 권력을 지향하는 의지라는 개념을 인간의 삶만이 아니라 유기적·무기적 영역에까지 확대 적용함으로써 니체를 권력의지의 형이상학자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지지하기 어렵다.
영원회귀의 원리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기본사상이다. 영원회귀란 서로 다른 삶이 무한히 반복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매순간과 모든 순간이 조금도 바뀌지 않은 채 무한히 되풀이되는 것을 뜻한다. 니체는 영원회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초인일 것이고 초인과 보통사람의 거리는 인간과 원숭이 사이의 거리보다 더 멀다고 말하고 있다. 주석가들은 아직도 영원회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인간을 규정하는 특수한 속성들이 있는가에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니체의 영향]
니체는 어떤 사람은 죽은 뒤 다시 태어난다고 쓴 적이 있는데, 이 말은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니체 없이는 20세기의 철학·신학·심리학의 역사를 생각할 수 없다. 예를 들면 독일의 철학자 막스 셸러, 카를 야스퍼스,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며 프랑스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등도 마찬가지이다. 철학과 문학비평에서 일어난 실존주의와 해체주의는 그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
신학자 파울 틸리히, 레프 셰스토프는 "신은 죽었다"의 신학자인 토머스 J. J. 알타이저와 마찬가지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위대한 유대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니체가 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지적하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1부를 폴란드어로 옮겼다.
니체가 자기를 그 누구보다도 더 철저하게 이해했다고 말한 지크문트 프로이트, 알프레트 아들러, 카를 융 등 심리학자도 깊은 영향을 받았다.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앙드레 말로, 앙드레 지드, 존 가드너 등의 소설가와 조지 버나드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슈테판 게오르크,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등의 시인·극작가도 그에게서 영감을 얻었고 그에 관해 글을 썼다. 분명히 니체는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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