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클래식 2014년)

서울시향/엘리아후 인발의 쇼스타코비치/협연:이상 앤더스/3.28.금/예술의전당

나베가 2014. 3. 31. 02:45

 

 

엘리아후 인발의 쇼스타코비치

 

3월 28일(금)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엘리아후 인발 Eliahu Inbal, conductor
협연 첼로_이상 앤더스 Isang Enders, cello


프로그램
블로흐, 셀로모 Bloch, Schelomo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1번 Shostakovich, Symphony No.11 in g minor

 

1974~90년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재직하면서 말러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전집이라는 육중한 성과를 내놓았던 이스라엘 출신 지휘자 엘리아후 인발. 2007년 몬테카를로 필하모닉을 이끌고 내한해 말러 <교향곡 5번>을 들려주었던 그가 이번에는 서울시향과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1번>을 선보입니다. 1905년 혁명을 묘사한 ‘무소륵스키적 대작’입니다. 또한 고난도 기교를 요구하는 트럼펫 솔로를 서울시향의 트럼펫 수석 알렉상드르 바티가 소화해 낼 모습도 관심 거리입니다. 첼리스트 이상 앤더스는 히브리의 서사가 녹아있는 블로흐의 <셀로모>를 협연합니다. 최근 데뷔 음반 ‘미르테와 장미와’를 선보이고 5년간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첼로 수석을 내놓은 그는 어머니가 한국인입니다.

 

지휘 엘리아후 인발 Eliahu Inbal, conductor
세계적인 말러 스페셜리스트인 엘리아후 인발은 고향인 예루살렘 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전공하였다. 파리국립음악학교에서 루이 프레스티에와 올리비에 메시앙, 나디아 불랑제를 사사하였고, 네덜란드 힐베르쉼의 프랑코 페라라와 이탈리아 시에나의 세르주 첼리비다케 또한 그의 영감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1963년 그는 이탈리아 노바라에서 열린 ‘귀도 칸텔리 지휘 콩쿠르’에서 1위를 했다.
인발은 그 후 1974~ 1990년까지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그 이름을 떨치게 되고, 재임 기간 동안 말러와 브루크너의 해석에 대해 수많은 음반 상들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칭송을 받았다. 이후 그는 1995~ 2001년 사이 이탈리아 방송협회 국립오케스트라(RAI)의 명예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2001년부터 5년 간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2007년부터 이후 5년간 베니스의 라 페니체의 상임 지휘자를 역임했다. 2009년부터 2012년 사이에 그는 체코 필하모닉과 함께 했으며, 2008년부터 현재까지 도쿄 메트로폴리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엘리아후 인발의 음반 목록에는 베를리오즈, 브람스, 브루크너, 말러, 라벨, 슈만, 쇼팽, 쇼스타코비치, 스크랴빈, 스트라빈스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이 포함된다.
인발은 199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예행정가(Officier des Arts et des Lettres)’로 임명되었고, 1997년과 1998년에 ‘올해의 지휘자상’과 함께 비평가들로부터 ‘프레미오 아비아티상’, ‘프리미오 비오티상’을 수상하였다. 2001년 2월, 그는 비엔나 시에서 황금훈장(Gold Medal of Merit)과 프랑크푸르트 시에서는 Goethe Badge of Honour를, 2006년에는 독일에서 공로 훈장을 수여받았다.

 

피아노 이상 앤더스 Isang Enders, cello
한국계 독일인 첼리스트인 이상 앤더스는 20세의 어린나이에 10년 이상이나 공석이었던 슈타츠카펠레의 첼로 수석이자 악장으로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그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종종 라인가우 뮤직 페스티벌,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뮤직 페스티벌, 멕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페스티벌, 쇼스타코비치 페스티벌, 베르비에 페스티벌 등 세계 유수의 음악 페스티벌에서 마에스트로 정명훈, 크리스토프 에센 바흐, 주빈 메타, 미하일 유로스키 등과 함께 연주하였다. 1988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이상 앤더스의 이름은 1995년에 작고한 작곡가 윤이상의 이름을 따서 작명되었다. 피아노를 먼저 시작한 그가 첼로를 처음 접한 것은 아홉 살 때였다. 그의 음악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프랑크푸르트 음대에서 미하엘 잔데를링을 사사했을 때였다. 이후 그는 구스타프 리비니우스 문하생으로 수학했으며, 그 외에도 미국 첼리스트인 린 하렐 또한 이상 앤더스의 음악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상 앤더스는 수차례의 마스터클래스에 참석하여 세이지 오자와, 파멜라 프랑크, 다비드 게링가스, 야노스 슈타커, 스티븐 이셜리스, 나탈리아 구트만 등 세계적인 명성의 음악가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다양한 상과 장학금 수혜자인 이상 앤더스는 두 개의 기구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다. 독일 엘리트 양성을 위한 국가장학기구(Studienstiftung des Deutschen Volkes) 와 독일음악재단(Deutsche Stiftung Musikleben)이 바로 그것으로 후자는 악기 대여 프로그램이다. 이 덕분에 이상은 함부르크에 거주하는 한 가족으로부터 대여한 1720년 나폴리산 조셉 갈리아노를 사용하고 있다.

현재 이상 앤더스는 슈만과 윤이상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전곡을 녹음한 그의 첫 데뷔 앨범의 출시를 기다리고 있다. 또한 바흐 무반주 모음곡 녹음을 시작했으며, 주빈 메타의 지휘로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함께한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의 실황음반도 준비하고 있다.

 

 

이상 엔더스는 음악가로서 자신의 입지를 매우 짧은 시간에 세운 독보적인 아티스트로 인정받고 있다. 바로크에서부터 풍부한 고전주의-낭만주의 레퍼토리, 그리고 동시대 작곡가들의 신작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장르를 아우르는 그는 솔리스트, 실내악, 오케스트라 협연, 그리고 교육자로서 다방면에서 수많은 재능을 선보이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1988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이상 엔더스는 오르가니스트이자 피아니스트인 독일인 아버지와 작곡가인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의 나이로 미하엘 잔데를링을 사사하며 일찌감치 음악적 재능을 나타낸 그는 구스타프 리비니우스, 트룰스 뫼르크, 그리고 그의 소중한 멘토인 미국 첼리스트 린 해럴로부터 남다르면서도 때로는 도전적인 방식으로 가르침을 받았다. 스무 살의 나이에 독일 첼로 주자 중 최연소의 나이로 4년간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첼로 수석에 임명된 후 당시 악단의 수석 지휘자였던 파비오 루이지와 그의 뒤를 이은 크리스티안 틸레만 아래에서 자신의 재능을 연마했다.
 
 이상 엔더스는 솔리스트로서 다채롭게 경력을 쌓고 있다. 주빈 메타,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정명훈, 가브리엘 펠츠, 파블로 에라스-카사도 등과 그들이 지휘하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슈투트가르트 필하모닉,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해왔으며, 라인가우 음악 페스티벌, 프라하 드보르자크 페스티벌, 포메라니아 메클렌부르크-베스트 페스티벌과 베르비에, 다보스 페스티벌에서 초청연주를 가진 바 있다. 실내악에 대한 애착 또한 남다르고 다양하다는 것은 그가 최근 창단한 앙상블 세레스(Ensemble Ceres)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그와 호흡을 맞춘 젊은 뮤지션으로 키트 암스트롱, 이고르 레비, 쥴리앙 쿠엔틴, 알레산드라 조움, 그리고 세바스티안 만츠 등이 있고, 에르메스 4중주단, 치몽 바르토, 로맹 귀요, 그리고 로제르 뮈라로 등과도 협연했다.
 
 올해 주요 연주로는 엘리아후 인발이 지휘하는 서울시향과의 데뷔 무대를 앞두고 있으며, 그 뒤를 이어 빈 무지크페라인 홀 데뷔 무대가 기다린다. 여기에서 그는 유키 마누엘라 얀케와 함께 브람스 이중협주곡을 연주할 예정이다. 또한 메클렌부르크-포어폼머른 페스티벌에서 선보이는 이고르 레비의 “Friend Project”의  객원 연주자로 초대받았으며 올해로 세 번째를 맞이하는 독일 부퍼탈의 ‘3B 페스티벌’에도 참여한다.
 
 피아니스트 안드레아스 헤링과 함께 작업한 이상 엔더스의 데뷔 앨범 “미르테와 함께 장미꽃을”은 폭넓은 호응을 얻은 바 있다. 아름다운 첼로 선율이 일품인 이 음반은 특히 성가대로 활동하던 엔더스의 어린 시절 추억을 반영하고 있으며, 음반에 수록된 윤이상의 음악은 독일에서 작곡가로 활동하는 자신의 어머니의 모습에서 그 근원을 찾고 있다. 또한 같은 음반에 수록된 슈만의 첼로-피아노 듀오 전곡은 여러 성취를 일구었던 그의 드레스덴 시절을 추억하는 것이기도 하다.

 올해 봄 소개되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첼로 모음곡 전곡 레코딩은 그의 경력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는 중요한 프로젝트로, 이 젊은 아티스트의 인지도를 한층 더 높이는 한편 그가 참여할 새로운 음악 프로젝트 <ELEMENTS>로 이어지는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첼로 독주와 전자음악으로 구성된 이 프로젝트는 키트 암스트롱, 샤를로트 브레이, 바소스 니콜라우, 프란체스코 트리스타노등의 작곡가들에게 위촉한 작품들과 다수의 초연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상 엔더스는 여러 음악상과 장학금을 수여한 바 있으며, 특히 독일 국가 장학재단과 독일 음악가 재단으로부터 악기 협찬을 받고 있다. 현재 그가 사용하는 첼로는 함부르크 가로부터 대여한 “조세프 갈리아노 필리우스 나폴리 1720년산(Joseph Gagliano Filius, Neapoli 1720)”이다. 또한 장 밥티스트 비욤(Jean Baptiste Vuillaume)이 파리에서 제작한 1840년산 악기도 연주한다.
 
 현재 그의 모교이기도 한 프랑크푸르트 음악-공연예술 대학 (the College of Music and Performing Arts in Frankfurt am Main)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며, 그의 연주 음반은 베를린 클래식스와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제작되고 있다.
 

 

셀로모 : 히브리 랩소디 (1916)

 

<연주시간 : 20분>

글 : 황장원(음악 칼럼니스트)

 블로흐는 스위스 출신의 미국 작곡가이며, 1916년에 미국으로 이주한 뒤 매니스 음대, 클리블랜드 음악원, 샌프란시스코 음악학교, 버클리 음대 등에서 행정직과 교수직을 맡기도 했다. 그는 성서적 주제에 근거를 둔 일련의 서사적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유태음악의 대가’로 명성을 떨쳤는데, 그 작품들은 유태의 민요나 종교곡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동방적인 음계와 리듬을 통해서 유태적인 정체성을 확보한 것들이었다.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히브리 랩소디’의 형식을 취한 ‘셀로모’는 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며, ‘3개의 유태풍 교향시’, ‘전주곡과 시편’, ‘이스라엘 교향곡’ 등으로 이어진 블로흐의 ‘유태음악 사이클’의 대미를 장식한 뜻 깊은 작품이다. 또한 이 광시곡은 블로흐가 스위스에서 완성한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원래는 ‘전도서’에 기초한 성악곡으로 구상되었으나, 언어의 선택을 두고 고심하던 작곡가가 첼리스트 알렉산드르 바르얀스키의 인상적인 연주를 접한 후 계획을 변경하여 협주적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제목의 ‘셀로모’는 유태민족의 전설적인 왕인 솔로몬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로, 이 곡에서 첼로는 솔로몬의 음성을 나타낸다. 또 작곡가의 설명에 따르면, 첼로 독주는 솔로몬의 권화이며 관현악은 그를 둘러싼 세계와 그의 인생 경험을 나타낸다. 그리고 때로는 첼로가 솔로몬의 말을 대신하는 동안 관현악이 그의 생각을 반영하기도 한다.

 단악장인 이 곡은 독주 첼로의 카덴차 풍 연주로 시작된다. 관현악의 투명한 울림을 수반한 도입부의 카덴차는 비올라에서 제시되는 주제적 소재를 포함하여 작품 전체에 나오는 주요 동기들 대부분을 제시한다. 이후 음악은 풍부하면서도 고요한 명상적 분위기와 리드미컬하고도 흥분된 무곡적 분위기가 교대로 나타나며 진행된다. 첼로는 관현악과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격렬한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기도 하지만, 그 이면의 정서와 기저의 어조는 다분히 탄식조이다. 블로흐는 성서에서 인생의 허무와 공허를 토로하는 솔로몬의 대사에서 첼로의 주제를 착안했다고 한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첼로 - 나탈리 클라인

일란 볼코프 : BBC 스코틀랜드 교향악단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1번 G단조, Op. 103 (1957)
Shostakovich, Symphony No.11 in g minor
<연주시간 : 55분>

글 : 황장원(음악 칼럼니스트)


 1905년 1월 9일 일요일 오후, 러시아의 고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부에서 일군의 노동자들이 행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차르에게 제출할 탄원서를 들고 겨울궁전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 무렵 러시아의 사회상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20세기 초 전 세계를 강타한 생산과잉 현상으로 인하여 자본가들은 생산을 줄이고 고용인력을 해고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러일전쟁의 여파로 세금 부담은 가중되었고 생필품 가격도 나날이 치솟았다. 그런 상황에서 1904년 12월 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공장에서 노동자회 회원 4명이 해고되자 불만이 폭발했던 것이다.

 그 날, 상트페테르부르크 전역의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포함한 시위대의 숫자는 무려 14만에 달했다. 사람들은 마치 축제일인양 나들이옷을 챙겨 입었고, 행렬의 선두는 교회의 깃발과 성상들, 그리고 차르의 대형 초상화를 높이 들고 걷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차르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궁전 앞 광장에 다다랐을 즈음, 시위대는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차르가 아니라 무장한 군대와 경찰, 바리케이드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시위대는 행진을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비극적인 발포 명령이 내려졌다. 황제의 군대와 경찰들이 무방비 상태인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인 총격을 가했다. 시위대는 쓰러지고 당황하면서도 궁전을 향해 계속 전진했다. 그러나 수비대장이 이끄는 2만의 병력이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말발굽으로 짓밟고 총검을 휘둘러 댔다.

 러시아 역사에 ‘피의 일요일’로 기록된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1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약 5천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차르에 대한 러시아 민중의 신뢰를 산산조각 내버렸고, 러시아 각지에서 노동자들의 파업과 저항, 반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 날의 참사가 ‘제1차 러시아 혁명’을 촉발시켰던 것이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11번은 바로 이 ‘피의 일요일’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그가 이 교향곡에 착수한 1956년은 흐루시쵸프가 ‘평화공존론’을 제창하고 ‘스탈린 비판’을 감행하면서 이른바 ‘해빙’이 시작된 해였다. 또 그 해 9월에는 전 음악계가 그의 탄생 50주년을 축하해 주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련 역사의 중대한 사건을 비교적 평이한 음악어법으로 다룬 새 교향곡의 발표는 자칫 정권이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전향적 태도로 해석될 소지를 안고 있다. 더구나 1957년 9월에 완성된 작품은 ‘10월 혁명’ 40주년 기념일에 즈음하여 초연되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이 교향곡의 작곡 동기에 대해서 ‘러시아 역사에서 반복되는 사건’을 그려보고 싶었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는 수세기 동안 독재자의 압제에 신음해왔고, 민중은 끊임없이 저항하고 탄압받았다. 스텐카 라진과 푸가초프의 반란, 1905년의 순교, 1917년의 ‘10월 혁명’, 그리고 작곡가도 몸소 체험했던 스탈린의 철권통치 등이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반복되는 사건’으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쇼스타코비치는 레닌을 신봉했던 사회주의자였고, 이 교향곡은 암울했던 스탈린 시절의 절망에서 벗어나 새로운 희망을 꿈꾸던 시기에 작곡되었다. 따라서 이 곡은 소련 역사의 시발점을 돌아보는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그 상징적 사건에 바쳐진 ‘음악적 기념비’라 하겠다.

 쇼스타코비치 최초의 ‘표제 교향곡’인 이 작품은 악장마다 ‘피의 일요일’ 당시의 상황을 상정한 제목을 갖고 있으며, 혁명가의 선율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든 악장이 중도에 쉼 없이 계속해서 연주되는데, 전곡 연주에 통상 한 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이 작품은 쇼스타코비치 자신의 교향곡 7번이나 8번처럼 역사적 정경을 담은 장대한 ‘음악적 프레스코화’와도 같다.

1악장 ‘궁전 앞 광장’
 느린 템포로 진행되는 첫 악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그 첫 부분은 참사가 일어나기 전 겨울궁전 앞 광장의 싸늘한 정경을 그리고 있다. 하프의 화음을 배경으로 약음기를 부착한 현악군이 연주하는 ‘광장의 테마’로 시작되며, 이후 음산한 팀파니의 레치타티보와 불길한 신호 나팔 소리가 들려온다. 중간부는 침묵을 지키는 무능한 황제 밑에서 신음하는 민중의 모습을 그린 듯하다. 구슬픈 혁명가 ‘들어주소서!’에 이어 보다 억제된 분위기의 ‘죄수들’이 민중의 고통을 나직이 토로하는 듯하다. 마지막에는 다시 처음의 분위기로 돌아간다.

2악장 ‘1월 9일’
 역시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1부에서는 먼저 민중가 ‘오 당신! 우리의 대부이신 황제여’가 탄원하듯 흐르면서 신호나팔 소리와 함께 고조되었다가, 그것이 가라앉으면 전곡에 걸쳐 나타나며 일종의 ‘라이트모티브’로 기능하는 ‘모자를 벗자’의 슬픈 선율이 금관합주로 연주된다. 2부로 넘어가면 앞서의 선율들이 다시 등장하되 한층 격앙된 흐름을 보이면서 분노와 저항의 감정을 드러내고 군중의 외침, 기도, 신음, 울음 등을 떠올리는 듯하다. 돌연 폭풍 전야의 고요와도 같은 정적이 흐르며 ‘광장의 테마’가 들려온다. 그리고 얼마 후, ‘타타타타!’- 갑작스런 작은북의 연타가 정적을 깬다. 이제 군대와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는 끔찍한 광경이 펼쳐진다. 장대한 푸가토가 진행되며 충격과 공포에 빠진 군중의 혼란을 나타내고, 타악기들이 광포하게 질주하며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해산시키는 군대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다시 돌연한 정적.

3악장 ‘추도’
 이 아다지오 악장은 희생자들을 위한 진혼곡이다. 먼저 ‘불멸의 희생자들이여, 그대들은 쓰러졌구나’의 선율이 엄숙하게 흐르고, 중간부에서는 음울한 분위기를 딛고 ‘안녕, 자유여!’의 선율이 밝은 표정으로 등장하여 감격적인 찬가로 고양되어간다. 클라이맥스에서는 ‘모자를 벗자’가 복수의 맹세처럼 울려 퍼진다. 이후에는 처음의 테마가 재등장해서 자유롭게 변주되며 슬픔의 극복과 혁명의 결의를 다지는 듯하다.

4악장 ‘경종’
 비극을 딛고 일어나 혁명을 향해 전진하는 민중의 모습이 그려진다. ‘격노하라, 압제자들이여’의 선율을 금관과 목관이 힘차게 연주하며 출발하고, 이후 맹렬하게 질주하며 거침없이 타오르는 혁명의 기운을 부각시킨다. 클라이맥스에서는 다시금 ‘모자를 벗자’ 동기가 등장하고, 2부로 넘어가면 우리에게도 익숙한 군가를 연상시키는 혁명가 ‘바르샤반카’의 격앙된 선율이 행진곡으로 발전하며 결연하게 전진하는 군중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마침내 코다로 접어들면, 격렬한 기세는 흩어지고 실패로 돌아간 ‘제1차 러시아 혁명’의 의미를 반추하는 듯한 숙연한 흐름이 떠오른다. 잉글리시호른이 ‘모자를 벗자’의 선율을 노래하고, 마지막에는 호른의 라이트모티브 연주와 함께 의미심장한 경종이 울리며 마무리된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1번 / 게르기에프

 

 

2악장...스네어 드럼 소리는 압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