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일주 배낭 30일(2011.8~

85.케이프타운-유대박물관 지하(만델라기념관과 케이프타운 역사관)

나베가 2012. 2. 1. 08:02

 

 

 

 

 

케이프타운의 역사는...

1652년 네덜란드동인도 회사아시아로 항해하는 선박의 보급 기지로 아프리카 대륙 남부에 식민지를 시작했던 케이프 식민지에서 유래한다.

이 케이프 식민지에서 실론을 통해 동남아시아로 항해 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1815년, 비엔나 의정서에 의해 영국 영토로 되어 1854년에 케이프 식민지 의회가 세워졌다.

1910년에는 영국자치령(남아 연방)이 되었고, 이 땅에 남아프리카 연방 의회가 있었다.

인종차별 폐지 운동의 중심 인물이며, 1994년에 흑인 최초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이 된 넬슨 만델라는 이 지역 (로벤 섬)에 유폐되어 있었다.

 

백인의 남아프리카 이주

현재 남아프리카 백인은 보어인의 후손이다. 보어인이란 네덜란드에서 이주한 이민으로서,이들은 흑인을 착취하여 다이아몬드를 채굴했다. 물론 채굴 활동을 통한 이익은 백인만 가졌을 뿐, 흑인에게는 돌아가지 않았으며, 오히려 같은 일을 하고도 백인에 비해 4~10배나 차이나는 낮은 임금을 받았다. 심지어는 전기, 수도, 교통, 공공의료 등의 공공혜택도 흑인은 받지 못했기 때문에, 1990년대까지도 흑인의 50%가 수돗물, 전기, 공공의료를 이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백인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백인은 교육을 악용한다. 우선 학교에서는 흑인에게 백인을 위해 봉사하는 노예 노동만 가르칠 뿐, 학문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서 흑인은 읽고 쓰는 법조차도 모르는 무식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백인 교사는 흑인의 종교와 문화는 미신이고 야만적이라고 가르쳐서, 흑인이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게 했다. 지금도 일부 흑인은 문맹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종차별은 아시아계에도 적용되어 모한다스 간디도 남아프리카에서 변호사로 일할 때 인도 노동자를 위한 인권 운동을 실천한 바 있다. 당시 남아공의 인도인은 직업 선택, 교통기관 이용에서 차별을 받았기 때문이다

 

 

 

 

 

 

 

 

 

 

 

 

 

 

 

넬슨 롤리라라 만델라 (Nelson Rolihlahla Mandela, 1918년 7월 18일 ~

 

넬슨 롤리라라 만델라 (Nelson Rolihlahla Mandela, 1918년 7월 18일 - )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평등 선거 실시 후 뽑힌 최초의 대통령이다.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에 그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지도자로서 반아파르트헤이트운동 즉, 남아공 옛 백인정권의 인종차별에 맞선 투쟁을 지도했다.

반역죄로 체포되어 종신형선고 받았으나, 26년 만인 1990년 2월 11일에 출소했다. 1994년 4월 27일 실시된 선거에서 ANC는 62%를 득표하여 ANC의 지도자인 넬슨 만델라는 1994년 5월 27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하였고 진실과 화해위원회(TRC)를 결성하여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는 과거사 청산을 실시했다. TRC는 성공회 주교데스몬드 투투 주교가 참여하였으며, 수많은 과거사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여 조사하였다. 인종차별 시절 흑인들의 인종차별 반대투쟁을 화형, 총살등의 잔악한 방법으로 탄압한 국가폭력 가해자가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뉘우친다면 사면하였으며, 나중에는 경제적인 보상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또한 피해자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피해자 무덤에 비석을 세워줌으로써,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잊혀지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저서로 뉴욕 타임스가 뽑은 20세기 최고의 책에 선정된《자유를 향한 긴 여정》이 있다.

 

나도 학생이 되어 만델라 반에서 한컷....ㅋㅋ

아예 사진 속 교실옆에 의자가 놓여있다.

 

 

 

반 아파르트 헤이트의 투사

1918년 7월 18일 그는 트란스케이 수도, 움타타 지구에 위치한 작은 마을, 음베조에서 태어났다.[1] 1832년에 사망한 그의 증조부 응구벵쿠카인코시 엔크훌루 혹은 군주로서 템부 족을 다스렸던 추장이었다.[2] 만델라라는 이름의 증조부 아들 중 한명이 넬슨의 할아버지가 되었으며 그의 성씨의 출처가 된다. 만델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케이프 주 트란스케이를 통치한 템부 부족의 분파에 속한다.[1]

비트바테르스란트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재학중인 1944년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에 들어가 그 청년동맹을 설립하고, 청년동맹 집행 위원을 취임하여 반 아파르트 헤이트 운동을 벌인다. 이후 1950년, ANC 청년동맹 의장으로 취임한다.

1952년 8월에 요하네스버그에서 올리버 탄보와 함께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한다. 그 해의 12월에 ANC 부의장 취임하여, 1961년 11월, 움콘트 웨 시즈웨(민족의 창)라고 하는 군사 조직을 만들어 최초의 사령관이 된다. 그러한 활동으로 1962년 8월에 체포된다. 1964년에 국가 반역죄 종신형을 선고받아, 로벤 섬에 수감되게 된다. 1982년, 케이프타운 교외의 포르스모아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민족 화해의 상징

1989년 12월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레드릭 데 클라크와 회담을 통해, 1990년 2월 11일 석방된다. 석방 후 ANC 부의장으로 취임한다. 데 클라크와 예비 회담 시에는 ANC 대표로 참석했다.

1991년, ANC 의장에 취임하였고, 데 클라크와 협력하여 모든 인종 대표가 참석한 민주 남아공화국 회의를 두 번 개최하였고, 또한 다당 협상 포럼을 열어, 임시 정부 잠정 헌법을 만들었다. 이 10월 5일, 베이징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1993년 12월 10일에 데 클라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1994년 4월 남아공화국 최초의 모든 인종이 참가 총선이 실시되었다. ANC가 승리하고, 넬슨은 대통령에 취임했다. 잠정 헌법의 권력 분배 조건에 따라 연립 정권을 세워 국민 통합 정부를 수립했다. 넬슨은 민족 화해 협력을 호소하면서, 인종차별 체제 하에서 흑백의 대립과 격차의 시정하려고 노력을 했고, 흑인 간 충돌의 해소, 경제 불황을 회복하는 부흥개발 계획 (RDP)을 공개했다.

1997년 12월 ANC 전당 대회에서 넬슨은 의장의 자리를 부통령 터보 음베키에게 양보한다. 1999년 2월 5일 국회에서 마지막 연설을 했다. 같은 해 열린 총선을 계기로 정계에서 은퇴했다.

 

은퇴후

2000년 1월 19일국제 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처음으로 연설을 실시했다. 2001년 7월 전립선암이 발견되었고, 7주간의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2005년 1월 7일에 전처 위니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마카토 만델라가 에이즈에 의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는 것을 공개했다. 현재 유네스코 친선 대사로 일하고 있다.

  연보

  • 1918년 7월 18일 - 트란스케이 움타타에서 템부족(族) 족장의 아들로 태어남.
  • 1934년 1월 - 클라크뷔리 중등학교에 입학해 백인중심의 교육을 받음.
  • 1940년 - 포트 헤어 대학에서 네덜란드 법학을 전공하던 중 학생운동을 하다가 퇴학당함.
  • 1941년 - 정략결혼을 피해 요하네스버그로 감. 다양한 일을 전전하다가 법률사무소에 근무하며 독학으로 법률 공부 증진함.
  • 1943년 - 비트바테르스란트 대학교에 입학.
  • 1944년 1월 25일 - 다니엘 밀란에 의해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용어가 남아프리카 국회에서 최초로 표명.
  • 1948년 - 스머츠 장군이 이끄는 연합당과 다니엘 밀란이 당수인 국민당이 선거에서 경합을 벌여 국민당이 승리했다. 이후 백인종의 안전과 기독교 문명을 보장하겠다는 명분하에 아파르트헤이트원칙이 본격적인 인종차별정책으로 이어짐.
  • 1952년 - 만델라는 정식 변호사가 되어 비백인(非白人)으로는 처음으로 요하네스버그에 법률상담소를 열고,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반대하는 등 본격적인 흑인인권운동에 참여하게 됨.
  • 1956년 12월 5일 - 시민 불복종 캠페인, '자유헌장'작성등 관련해 반역죄로 체포당함. 요하네스버그의 마셜 스퀘어 감옥에 수감됨. 이 무렵 첫번째 아내 에블린 메이즈와 이혼했다.
  • 1957년 - 남아프리카 국민당은 동등 직업에서 흑인이 백인 대신 복무할 수 없고, 계서상 백인보다 우위에 있는 자리를 맡을 수 없다는 두가지 원칙을 제안하다. 뒷날, 남아프리카 국민당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 1959년 4월 - 로버트 소부퀘를 당수로 범아프리카 회의가 출범.
  • 1960년 3월 - 범아프리카 회의가 주도한 대규모 집회가 열리고 경찰이 발포해 67명이 사망, 400명이 부상당하는등 유혈사태 발생. 이를 계기로 만델라는 평화시위운동을 중단하고 무장투쟁 노선에 착수한다.
  • 1960년 3월 30일 - 3월 30일에 긴급사태 선포 직전 두번째로 체포되어 수감된다. 한편, 이무렵 만델라와 두번째 부인 위니 사이에 둘째 딸 찐지스와가 태어났다.
  • 1961년 3월 29일 - 반역죄 재판 종결되다. 검찰이 아프리카 국민회의의 이적성과 폭력성을 증빙하지 못했다는 판결이 내려짐.
  • 1961년 6월 - 만델라는 무장투쟁으로 선회를 제안하고 그안이 루툴리 대장에 의해 승인되다.
  • 1962년 2월 - 아디스 아베바에서 열린 범아프리카 회의에서 신생 독립국을 대상으로 '국민의 창'에 적극 동참해달라는 대의를 천명하다.
  • 1962년 8월 - 요하네스버그의 은신처로 돌아가던 중, 거주지 명령 위반 및 사보타주 혐의로 체포되다.
  • 1962년 10월 15일 - 시나고그에서 열린 재판에 코사족 전통의상인 카로스를 착용하고 참석해 아프리카 정신을 고취하려 했다. 그러나, 판결 결과 반란선동에 대해 3년형, 허가 없는 거주지 이탈에 대해 2년의 강제노역을 선고받고 프리토리아 형무소에 수감.
  • 1963년 5월 - 에스퀴티니섬의 로벤 아일랜드 감옥으로 이감되다.
  • 1964년 6월 11일 - 만델라를 포함한 아프리카인 6명, 인도인 1명, 백인 1명이 종신형 선고받음.
  • 1965년 - 로벤 아일랜드 감옥으로 귀환하다. 이후 27년간 이곳에서 복역하기에 이른다.
  • 1968년 - 로벤 아일랜드 감옥에서 만델라는 50살 생일을 맞았다.
  • 1969년 5월 12일 - 만델라의 올랜도 자택에서 부인 위니 만델라가 체포, 수감되다. 이무렵 장남인 템비가 트란스케이에서 교통사고로 사망.
  • 1976년 - 교도소를 총 관할하는 지미 크루거가 만델라를 방문해 반투스탄 정책에 대해 회유하나 만델라는 이를 거절했다.
  • 1985년 1월 31일 - 의회에서 피터르 빌렘 보타는 폭력을 정치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다는 조건하에 만델라를 석방하자고 제안.
  • 1988년 7월 - 넬슨 만델라는 감옥에서 70살 생일을 맞이했다. 끝없는 협상으로 인한 과로로 폐결핵 초기라는 진단이 내려지고 수술을 받는다. 12월 9일에는 빅토르 페르스테르 감옥 내부의 별장으로 이송되어 특별대우를 받는다.
  • 1990년 명예 인도 최고 훈장(honorary BR) 수훈.
  • 1990년 2월 2일 - 의회의 개회식에서 데 클레르크는 아프리카 국민회의, 범아프리자주의자 회의, 남아프리카 공산당을 위시해 31개의 불법 조직에 대해 내려진 금지령을 철회하고, 사상범의 석방과 사형 중지를 선포한다. 2월 11일에 넬슨 만델라는 27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출감한다. 그뒤 만델라는 아프리카, 인도, 유럽등을 순방한다.
  • 1990년 6월 26일 - 미 의회 연설에서 넬슨 만델라는 아프리카 국민회의 입장을 천명하다.
  • 1991년 7월 - 더번에서 30년만에 최초로 아프리카 국민횡의 전국회의가 개최. 만델라는 만장일치로 의장에 선출된다. 이후 만델라는 실용주의 노선으로 선회하여 데 클레르크의 백인정부와 협상을 벌여 350여 년에 걸친 인종분규를 종식시킨다. 토지법, 집단 지역법, 인종 등록법이 폐지되고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된다.
  • 1991년 12월 20일 - 민주 남아프리카를 위한 공회(CODESA)가 개최되어 정부와 아프리카 국민회의의 포럼이 시작되다.
  • 1993년 6월 3일 -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로 1인 1표제에 입각한 민주적인 선거가 1994년 4월 27일에 실시될 것이 결정되다.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 폐지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받았다.
  • 1994년 4월 27일 -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참여 자유 총선거가 실시. 65%의 압도적인 지지를 획득한 만델라는 5월 10일에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이는 46년간 걸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실질적으로 마감되는 순간을 의미한다.
  • 1995년 영국 명예 Order of Merit 훈장(honorary OM) 수훈.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 출간.
  • 1996년 3월 - 3년간의 별거 끝에 위니 만델라와 이혼 수속을 시작, 동시에 새로운 민주주의를 위한 헌법 제정을 주도함.
  • 1997년 - 남아프리카 개발공동체(SADC)의 의장으로서,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스와질란드잠비아에 대한 제재를 제안하다. 동시에 만델라는 아프리카 국민회의 의장에서 퇴임한다.
  • 1998년 - 그사라 마셀 여사와 결혼식을 올린다.
  • 1999년 2월 5일 - 국회에서 마지막 연설을 했다. 같은 해 열린 총선을 계기로 정계에서 은퇴했다.
  • 2002년 6월 8일 -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등 인권운동에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프랭클린 루즈벨트 4개 자유상' 수상받았다.
  • 2004년 5월 11일 - 남아프리카공화국 민주화 10주년을 기념, 의회에서 연설함.
  • 2005년 - 첫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출생한 외아들이자 장남인 마카토 만델라가 에이즈로 사망.
  • 2007년 7월 - 89살 생일을 맞이한다. 은퇴한 세계 지도자들의 모임인 세계원로회의 출범을 선포하다. 여기서 지미카터, 코피아난, 매리 로빈슨 등등 전직 지도자들이 총 망라돼 있다.

 

 

 

 

 

 

 

 

박물관 옆 건물에 있는 기념품 센타에 잠시 들러서

아기 자기한 많은 기념품들을 구경하고 몇가지 기념품을 구매했다.

 

까페에서 풍겨나오는 커피향이 강하게 유혹했지만...

우리가 가야할 곳이 너무나 많기에 과감히 물리치고

다음 코스로 Go~

 

이제는 미술관이 오픈했겠지??

 

와아~~

하늘 빛이 기막히네~

테이블 마운틴을 가리웠던 구름은 이젠 거의 벗어지고

웅장한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다시 국립미술관으로 왔다.

겉에서 보기와는 달리 내부는 꽤나 컸다.

사진전을 비롯해서 회화 전시가 열리고 있었는데 18세기 인물 초상화부터 아방가르드 작품까지....꽤 볼만했다.(사진 촬영 금지)

한참을 보고 있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ㅎㅎ

의진씨다.

우리가 유대박물관을 보고 있는 사이 의진씨는 1679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서 건립..노예숙소로 사용하다가 이후 최고 재판소로 사용했던 슬레이브 로지를 보고 온것이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전시물등과 17~19세기 케이프타운에서 사용했던 생활용품등이 전시....아시아 여러나라들의 도자기,가구,유리제품까지 전시 되어 있다는데...당시엔 우린 다른곳을 계획했었기 때문에 시간상 이곳을 가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우리도 슬레이브 로지를 갈걸..쫌 후회가 되긴 한다.ㅎㅎ

 

 

 전시장을 다 돌고나니 역시 기념품 가게가 있다.

오옷~

기념품들의 퀄리티가 의진씨 말따나 가격대비 상당히 높다.

우리가 스와콥문트 거리 노점에서 산거에 비하면 가격은 꽤 높았지만

암튼 퀄리티가 높아서 ....ㅠㅠ

의진씨 역시 이곳에서 기린을 두마리 샀다.

이리하여 우리 일행 모두는 길잡이 미야씨를 비롯....성여씨만 빼고는 모두 기린 두마리씩을 샀다는....

ㅋㅋ 역시 아프리카 여행의 끝의 백미는 기념품으로 기린 사는거?? 푸헐헐~

 

미술관 앞의 전망이 기막히다.

다름 아닌 하늘의 전경....

ㅋㅋ

저런 구름을 뭐라고 부르지??

새털구름??

ㅋㅋ

무슨 구름의 빛깔이 진주 펄 느낌이 나~

진짜 이쁘다~

 

어이쿠~ 저건 또 뭐얏??

다람쥐??

헐~ 깊은 산속도 아니고 화단에...

 

 

 

 

 

 

 

 

 

 

 

미술관 앞의 넓다란 잔디 공원엔 학생들이 소풍을 온건 지,삼삼오오 앉아서 맛난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의 종교가.....??

분명 얘네들은 이슬람인데...

한번 찾아볼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종교.

남아공기독교 비율은 73%이다. 하지만 토속 종교와 융합된 쉠베(Shembe) 세인트존스(St. Jones)를 비롯하여 전체 기독교의 40.8%를 차지하는 거대한 이단 집단인 시온주의자, ZCC(Zion Christian Church)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7]. 그래서 남아공의 실제 기독교 비율은 개신교 34%, 복음주의적인 교회는 19%이다.

기독교가 처음 남아공에 유입하게 된 것은 1652년 네덜란드에서 로마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보어인(농민)이 이민해 오면서부터였고(대부분 장로교인), 그 후에 영국의 식민 정책과 아울러 성공회를 비롯하여 영국 장로교감리교, 침례교 등이 함께 들어오게 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백인은 흑인 원주민을 자신들과 차별을 두기 위하여 인종격리 정책(아파르트헤이트)을 이용하였으며, 교회조차도 백인의 흑인 지배원리에 종교적으로 힘을 실어 주는 잘못을 범하기도 했다. 그 실례로 남아공 개혁교회는 인종차별을 정당화한 잘못을 이단적인 행위 곧 기독교의 교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선언하였다.

현재 남아공의 기독교 교단 대부분은 정체 혹은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는 반면 계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교단은 남아공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독립교단이다. 서양 열강의 식민정책과 아울러 함께 들어온 기독교가 남아공 전지역에 걸쳐 쉽게 정착은 하였으나, 식민정책이 끝이 나면서 반기독교 정서와 정책으로 무슬림 지역으로 변하거나, 전통 종교와 혼합된 이른바 혼합주의(Syncretism) 기독교의 형태로 바뀌고 있다<위키백과 참조>

 

 

 

다음 행선지인 국립박물관은 미술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컴퍼니 가든을 끼고 그 주위에 다 있기때문에 왠만한 곳은 걸어서 다 둘러볼 수 있었다.

 

와아~ 이곳엔 아이들이 더 많네~

소풍을 온것이 분명해~

하긴 넓은 잔디밭에 미술관, 박물관도 있으니 더없이 좋겠지?

그러고 보니 어쩌면 소풍이 아니고 견학을 온것?? 그게 그건가?? ㅋㅋ

 

어린 시절 소풍갔었던 때가 생각난다~

배도 슬슬 고파오고....

빨랑 가자! 박물관으로....

 

 
. Du vet hvem jeg er - Sidsel Endresen (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