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곡의 벽 (이스라엘 유적지) [痛哭 ── 壁, Wailing Wall]
옛 예루살렘 시에서 유대인들이 거룩하게 여기는 기도·순례의 장소.
고대 유대인들이 대단히 거룩하게 여긴 곳으로 AD 70년 로마 사람들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 제2성전 가운데 현존하는 유일한 유적지이다. 이 유적지의 신빙성은 전승·역사·고고학 등으로 확증되어 왔다. 이 벽을 건축한 시기는 BC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윗부분은 후대에 덧쌓아진 것이다.
오늘날 이 벽은 이슬람의 바위사원(Dome of the Rock)과 '알 아크사 모스크'를 둘러싸는 더욱 큰 벽의 일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은 관할권 또는 출입권을 놓고 오랫동안 투쟁해왔다. 오늘날 모습대로는 길이 50m, 높이 18m가량 되지만, 땅속으로 훨씬 더 깊이 들어가 있다. 유대인들이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은 비잔틴 시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곳에서 드리는 예배는 '하느님의 임재는 통곡의 벽을 떠나지 않는다'는 랍비들의 신앙을 재확인한다. 유대인들은 성전이 파괴된 것을 애도하고 다시 세울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한다. '통곡의 벽'이라는 용어는 유럽의 여행자들이 거룩한 성전 유적지 앞에서 밤을 새워 슬프게 우는 경건한 유대인들을 보고 붙인 이름이다. 아랍과 유대 자료들에 의하면 638년 아랍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 유대인들이 정복자들을 따라 거룩한 바위 터와 성전 뜰로 가서 잔해들을 치우는 일을 도왔다고 한다. 이스라엘이 1967년 6월전쟁 때 옛 예루살렘 시를 점령함으로써 유대인들은 다시 한번 이 사적지에 대한 관할권을 차지했다
엘 악사 모스크
이슬람교도들에게는 소중하게 여겨지는 모스크이며, 내부는 스테인드글라스와 타일로 아름답게 장식한 7개의 홀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에 있는 '하얀 모스크'는 십자군 시대의 건물로 '솔로몬의 신전'이라고 불렸다. 신전 오른쪽에는 솔로몬의 마구간이 남아 있다.
유대교 (종교) [── 敎, Judaism]
하느님의 임재를 인간행위와 역사에서 경험한다고 주장하는 유일신교이다. 유대교는 광의로는 아브라함·이사악·야곱 등 족장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4,000여 년에 걸친 유대 민족의 종교현상 전부를 뜻하며, 협의로는 BC 5세기 유대 민족이 바빌론 유수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와 유대교를 재건한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2,400여 년 동안 믿어온 신앙체계를 가리킨다.
그 기원은 고대 이스라엘인의 종교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보통 유대교라고 하면 바빌론 포로(BC 586∼BC 536) 이후 '모세의 율법'을 근간으로 하여 발달한 유대인의 고유 종교를 말한다. BC 2000년대 말에 사울과 다윗왕으로부터 시작된 고대 이스라엘 왕조는, BC 6세기 초 신바빌로니아에 의하여 무너졌다. 그 당시 전국토는 괴멸적 타격을 입고 초토화하였으며, 지배층·지식층·기술자 다수가 포로로서 바빌론으로 연행되어 갔다(바빌론유수). 이 사건은 이스라엘 종교사에도 큰 오점을 남겼으며, 그후의 유대교의 성격에도 그 흔적을 남겼다.
페르시아(키로스 2세)의 메소포타미아 정복은 반세기에 걸친 바빌론 포로기(期)에 종지부를 찍고, 포로민의 해방을 가져왔다. 그들 일부가, 야훼신이 그들 조상에게 주기로 약속하였다는 땅 팔레스티나로 돌아와 폐허가 된 예루살렘과 성전을 복구하였고, 문서학자인 에즈라의 지도 아래 선민사상적 유일신 신앙을 종교적 이념으로 하는 민족집단으로서 그들의 역사를 재개하였다. 이 시기에 과거의 역사가 신학적으로 검토·반성되고, 그에 따라 전승(傳承)이 재편성되었다.
유대교의 경전(구약성서)은 BC 1세기에 결집이 거의 완료되었지만, 그 기본적인 구성은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2장의 '천지창조' 이야기도 이 시기에 유래되었고, 그들의 신학도 이때에 역사의 원점을 향하여 역투영(逆投影)시켜 정립하였는데, 세계의 시초를 신화적·설화적으로서가 아니라 신학적으로 설정함으로써 마지막, 즉 종말사상의 궁극적 전개가 가능하도록 구성해 냈다. 비단 이 이야기에만 그치지 않고 모든 종교적 전승 속에 그들의 역사가, 또 공간과 시간이 끊임없이 수용(受容)·정리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유대교 역사상 종말론이 실제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페르시아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은 후 BC 2세기 이후이지만, 이스라엘적 종말사상의 맹아(萌芽)는 이미 바빌론 유수 이전의 예언자들에 의하여 싹텄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 종말론적 정신풍토 속에서 태어났다. 그리스도교는 처음에 유대인 일부에게 받아들여져 팔레스티나와 외지(外地) 거류민의 유대교 회당을 포교의 장(場)으로 활용하면서 전파되었으나, 할례(割禮) 문제를 계기로 하여 유대인의 범주를 넘어섰다. 유대교측은 예수가 일반 민중을 상대로 한 종교적 인격자라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하느님의 아들, 즉 메시아로는 인정하지 않으며, 유대교에서의 메시아 대망(待望)은 현재까지도 존속하고 있다. 실제로 메시아라고 호칭되거나, 자칭하여 다수의 추종자를 끌어들인 인물이 근세에 이르기까지 때때로 나타나고 있다. 현재의 이스라엘을 성립시킨 시오니즘 운동의 배후에도 성지(聖地)귀환 촉진의 한 요인으로서의 현대적인 메시아 사상이 깔려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유대교 본래의 특색은 율법(律法)에 있다. 율법의 기초는 계약의 개념으로서, 이것은 원래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경제적·사회적 통념이었는데, 그것을 신(神) 대 인간의 관계 속에 끌어들인 점에 유대교의 특성이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은 그들의 조상을 선택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았고, 그 자손들에게 약속한 땅을 주어 그들을 지키고 축복한다는 것이 선민사상의 개념이다. 한편 그들은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같이 조상 대대로 믿어온 신에게만 오직 정성을 다하고, 자신들을 신의 백성으로 선택한 야훼신 이외의 신을 섬기지는 않는다. 이 계약이행의 내용은 신의 편에서는 '헤세드(은혜)'이고, 백성 쪽에서는 신이 부여한 율법의 준수이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계약위반이므로 신의 분노를 초래한다. 특정집단에서만 숭배되는 일신(一神)이 과연 종교사에서 말하는 일신교의 신(神)관념과 합치하는지의 여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보편(普遍)종교에 비하여 유대교는 보통 민족종교로 정의된다. 게다가 이스라엘인은 처음부터 완전한 초월적·절대적 일신의 관념에 도달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어느 면에서는 《제2 이사야》와 같이 고도의 종교적 보편성을 나타내면서, 한편 신 관념에서 합리화, 즉 주술성(呪術性)의 극복을 추진하고 있는 면도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경전은 뒤에 그리스도교의 경전(구약성서)이 되었기 때문에, 정통적 유대교에서는 그 이후의 구전(口傳)의 율법과 고대 말기에 그 해석을 집대성한 《탈무드》를 경전에 추가하여, 오히려 거기에서 유대교의 특색을 찾는 경향이 있다. 그뒤에도 시대에 따른 율법해석이나 전승(傳承) 형성이 라비(스승:율법교사)의 지도 아래 꾸준히 이어지고 있으며, 정통파·개혁파 등 여러 파가 생겨나고 있다. 예루살렘의 라비 본청(本廳)은 유대교의 2대 종합집단인 아슈케나짐과 스파라딤을 통합하는 형태로서, 최고권위를 이루고 있으며, 민법 특히 혼인법의 규제를 통하여 교단 유지의 구실을 다하고 있다. <네이버 백과:출처>
이날은 사실 기독교인에게는 의미가 깊은 부활절이지만, 예수를 믿지않는 유대교인들에게는 부활절로서 의미가 있는 날은 아니다. 오늘 이토록 유대교인들이 많은것은 오늘이 유월절 휴가의 마지막날이라고 한다.
유월절은 유대력으로는 1월이지만 현대력으로는 4월...바로 오늘인것이다.
유월절 [逾越節, Passover]
과월절(過越節)이라고도 한다. 유월(逾越)이란 ‘지나치다’ ‘그냥 넘어가다’라는 뜻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기 전날 밤, 야훼는 이집트인의 각 가정의 장남을 죽였는데,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는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여 그 표지가 있는 집 앞은 그냥 지나쳤다는 데서 유래한다. 본래는 누룩 없는 떡을 먹는 축제는 농경적인 명절이고, 과월절 축제는 유목적인 명절이었다. 그런데 후에 이 둘을 합하여, 또 역사적인 의의가 첨가되어 깊은 뜻을 가지는 명절이 되었다. 그 기원과 의의에 변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월절은 민족의 해방을 의미하는 경축일이 되었으며, 하느님 은혜의 표징이 되었다.
유월절에는 니산월(유대력의 1월) 10일에 처음 난 어린 양을 골라 두었다가 14일 밤에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구워서 먹었다. 이튿날인 15일부터는 1주일을 누룩 없는 떡을 먹는 절기로 지킨다(《출애》 12장, 《레위》 23장, 《민수》 9장, 《신명》 16장).유월절 어린 양은 인류를 죄에서 구하고, 참 자유를 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에 예루살렘 성내에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켰고, 이것이 최후의 만찬이 되었다. 예수를 ‘유월절 어린 양’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랍비[rabbi]
나의 선생님’ ‘나의 주인님’(요한 9:2)이라는 뜻의 헤브라이어로, 라보니(rabboni)라고도 한다(요한 20:16). 이 용어는 1세기에 이르러 보편화되었고, 이후 유대교의 지도자제도로 정착되었다. 랍비가 될 사람은 구약성서와 탈무드에 대한 연구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현대의 랍비교육과정에는 다양하고 총체적인 지도력 배양을 위한 과목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기능은 유대교 내의 다양한 분파들에 따라 서로 다르다. 유대인들 사이에도 정통파 ·보수파 ·개혁파가 있어 분파마다 랍비에게 기대하는 역할이 따로 있다.
일반적인 기능과 역할은 종교행사와 각종 의식을 주재하며, 각종 교육활동에 폭넓게 참여한다. 또한 지역사회를 위한 구제와 봉사활동에도 관여하며, 여러 형태의 공동체 사업을 지원하기도 한다. 일부 랍비는 생계를 위한 직업을 가지면서 시간제 봉사직으로 랍비의 업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공식으로 임명받은 랍비가 없는 경우 공동체 내에 의식을 행할 만한 경건함과 인격을 구비한 사람이 랍비의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14세기 이후 랍비들에게 봉급이 지급되었는데, 이는 생활에 구애받을 경우 그 직책수행에 차질을 빚기 때문이었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는 제자들이 랍비라는 경칭으로 부르는 것을 경고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이 그들의 참교사이며 그들은 모두 ‘형제들’이기 때문이었다(마태 23:7~8).
나는 유대교인들의 이러한 모습을 난생 처음보았다.
양쪽 귀밑머리만 길게 길러서 꼬아 내리거나 따서 내리거나....그리고 이 더위에 저렇게 커다란 털모자를 쓰고....겨울에나 입어야 할것 같은 기인 검은 수트를 입고(하긴 지금 이곳은 겨울의 끝자락이다. 이들에겐 이 날씨가 춥다는것인가??....)암튼 모양새나 바삐 다니는 거나 무표정한 모습이나 영화에서 보았던 세계 2차대전때의 그 차림새 그대로인거나....통곡의 벽앞에서 서서 히브리성서를 열심히 읽고있는 모습이나.... 모든게 너무나 생소하고 이상해 보였지만, 계속 보니까 또 금새 익숙해진다.ㅎㅎ
하긴 여긴 그들나라이고 우리가 이방인이니까....
여자들도 기인 스커트에 머리는 꽁꽁 싸서 머리카락이 밖으로 하나도 나오지 않게 하고 있었는데, 이런 차림의 여성은 결혼을 한 사람들의 모습이란다., 머리를 완전히 삭발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들은 산아제한을 하지않기 때문에 한 가족이 대여섯 되는 가족도 있어 그것 또한 너무나 오랫만에 보는 풍경이라 낯설었고, 종교적인 의미가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웃는 모습의 유대인들을 보지 못했다는 것...그리고 관광객이나 순례객들에게 전혀 눈길도 주지 않았다는 것....
이렇듯 배타적인 민족은 여행중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이슬람 사람들이 하얀이를 드러내며 버스에 탄 우리들을 보고 양손을 흔들면서 함뿍 웃어주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그동안 우리가 그렇게도 이슬람 사람들에게 배타적 이었던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나도 통곡의 벽앞에 서서 기도문을 급히 써서 더이상 끼워넣을데도 없었지만 억지로 끼워넣고 기도를 했다.
아마 금새 기도문이 빠지지않을까 불안한 맘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이런 모든것까지 다 이미 아시고 계실테니까...
기도를 마치고 통곡의 벽을 뒤로 하고 나오면서....
수많은 유대교 신자들이 자녀까지 데리고 와서 히브리어 성경을 열심히 읽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이들 민족이 무섭도록 대단해 보였다.
수천년간 나라가 없이 세계를 떠돌며 살았어도 자기들 나라가 생겼을때 모두 모여 함께 히브리어로 말하고 히브리어 성경을 읽을 수 있었던.....얼마나 대단한 민족성을 가지고 있는 나라인 지 ....
물론 역사적으로도 결코 잊거나 씻을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을 겪은 민족이긴 하지만....
그리고 이들은 절대로 벽에 엉덩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기도후 나올때는 뒷걸음을 치며 나온다.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했다.
알레그리(Gregorio Allegri,1582-1652)
Miserere Mei,Deus
The Tallis Scholars, Live 참회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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