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묘교회 앞...
예수님 십자가의 길.....14처를 다 순례하고 (성묘교회를 끝으로) 나와서 작은 광장앞 계단에서 쉬고 있는 관광객들....
성묘교회 외관...
다윗성채내의 다윗의 무덤......
유태교 신자가 문에 기대서 통곡을 하고 있는 모습에 너무나 놀라웠다.
무엇이 저토록 통곡하게 만드는지.....그 신앙의 깊이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고
그리고 잠시 나의 신앙을 되돌아 보았다.
같은 곳에 와 있는데......
다윗성채를 나와서.....
다윗상이 있다.
다윗 왕....
BC 1000년경부터 BC 962년경까지 이스라엘을 다스린 제2대 왕(사울 다음).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하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았다. 유대인들에게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견고한 왕조를 세운 이상적인 왕으로서, 그와 그의 통치에 관련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아 대망이 생겨났다. 다윗은 미래에 있을 성취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신약성서 저자들은 예수가 다윗의 혈통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이슬람 전통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유대교)
이스라엘의 종교 전통에서 다윗 왕가 또는 가문은 하느님과 민족을 이어주는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즉 왕을 하느님과 그 백성 사이의 중재자로 보게 된 것이다. 고대의 많은 전통에서와 마찬가지로 왕을 신적인 동시에 인간적인 존재로 생각하게 되었다.
메시아라는 말은 다윗 계열의 왕들의 칭호인 '하메시아'(기름부음을 받은 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훗날 재난을 당하게 되자 하느님의 권세를 위임받아 백성과 영토를 구속해줄 새로운 중재자인 메시아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름으로써 이 희망이 성취되었다는 확신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다윗은 그 백성들의 기억 속에 2가지 모습으로 살아 있었다. 하나는 그들의 정치 권력을 토대로 한 위대한 인물이며, 다른 하나는 그들의 신앙의 중추적 상징이다
(→ 신성한 왕권).
다윗이 스스로 이러한 지위를 얻게 된 과정과 그의 가문, 그리고 그의 도시에 대해서 〈사무엘 하〉 5~8장에서 추적해볼 수 있다.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 다윗은 그곳 주민들과 시온 산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종교 제도를 다스리기로 했다. 이전 군주(여부스족)는 왕인 동시에 대제사장으로서 도시와 그 신 사이에 중재자 역할을 하였으나, 이스라엘에는 왕이 중재자 겸 제사장 역할을 한 선례가 없었으며, 성곽도시를 통치와 예배의 중심지로 삼았던 예도 없었다. 다윗은 여부스족의 시온 산 제의를 받아들여 그것을 자신의(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례에 맞추어 수정했다. 다윗 시대부터 약 4세기 동안 계속된 전체 왕정을 통해 왕은 시온산 예배에서 단순히 예배 집행자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하느님과 민족 사이의 관계에서 자신의 직무를 통해 몸소 구현하는 인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겜과 다른 곳에서 행해지던 왕정시대 이전 이스라엘의 예배에서는, 각 지파의 지도자를 통한 하느님과 백성 간의
계약이 양자 사이를 잇는 끈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다윗은 예루살렘의 고대제의를 수용·변형시킴으로써 이스라엘에 새로운 예배를 도입했는데, 그 예배는 왕 자신의 지위와 그 지위가 가지는 신성한 의미를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야훼라고 불렀다. 다윗은 이 이름을 예루살렘(이 도성의 옛 이름은 '살렘'이었을 것임)에 거하는 지존자의 거룩한 이름으로 삼고, 야훼가 그 도성을 정복했음을 암시했다. 신에 관한 이전의 모든 이름이나 칭호는 정복자이자 이스라엘의 하느님인 야훼의 속성 혹은 칭호가 되었다(예를 들면 '엘 엘리온'[El 'Elyon: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해 사용하던 이름이 다른 이름들을 대신하긴 하였으나, 예배의 내용은 비슷하게 남아 있었다. 야훼가 세상을 창조하였고 민족들을 다스리고, 범우주적 통치의 상징과 방편으로서 왕을 세웠다. 시온은 야훼가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선택한 다윗이 거하는 곳으로서, 야훼가 친히 보좌를 두고 좌정하였으며, 왕은 그의 대리자로서 오른쪽에 앉았다. 다윗은 이렇게 예루살렘이 건설될 때부터 그 곳에서 다스려온 제사장왕(king-priests)의 계열을 이어나갔으며, 이런 상황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이는 한 전설에 따르면 족장 아브라함이 오래전 그 계열을 대표하던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치고 축복을 받았다.
자신의 왕위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는 수단으로 예루살렘의 고대 제의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정복의 힘이었던 야훼 제의라고 고쳐 부른 후, 다윗은 새로운 성지와 그곳에서의 예배를 왕정시대 이전의 이스라엘 경험과 관련시키기 위해 중요한 이전을 했다. 즉 그는
계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고 그것을 제의의 중심 대상으로 삼았다. 전승에 따르면 계약궤는 이스라엘과 함께 광야를 유랑했고, 그들을 약속의 땅에 이르는 길로 인도했다. 그것은 직4각형의 나무궤로서 원래 덮개가 없었으며 야훼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상징하였다. 야훼와 계약궤는 너무 긴밀해서 계약궤를 야훼라고 부를 수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야훼가 자기들을 위해 싸운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해서 계약궤를 들고 전쟁터에 나갔으며 야훼가 자신들과 함께 유랑한다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 광야에서도 그 궤를 가지고 다녔다. 예배에서도 계약궤가 사용되었는데 해마다 절기 때 행해졌던 순례 행렬에서도 운반되었다. 그것은 야훼 임재의 상징이었고 심지어 구현이었다. 왕정시대 이전을 그리워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시온에서 거행되는 다윗 왕가의 제의를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다윗으로서도 계약궤와 또 그것과 관련된 모든 옛 경험을 새로운 의식에 끌어들이는 것 말고 달리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다윗은 시온 산 예배를 각색하고 왕을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임재의 실체와 수단으로 이해함으로써 인류의 종교사에, 특히 서양 전체의 경험에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 때문에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시가 되었고, 다윗은 장차 올 메시아의 원형이 되었다. 메시아의 상징으로서 다윗의 귀환 혹은 다윗 '자손'의 도래라는 말이 역사 안에서 역사를 심판하고, 구속하고, 새롭게 하기 위한 신의 통치와 임재를 강조하는 말이 되었다. 다윗은 이렇게 해서 미래의 성취, 최종적인 평화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리스도교가 등장하기 전 두 세기를 풍미했던 묵시문학의 발전과정에서는 다윗의 상징적인 역할 중 신의 중재자 신분이 강조되었다
(→ 유대교). 다윗의 자손은 천상적인 인물로 더욱 강조되어, 결국 세계의 민족들 위에 군림하는 하느님의 아들로 발전되었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러한 기반 위에서 일어났다. 이 새로운 종교는
시온 산 제의의 신비주의에서 다윗에게 부여된 칭호와 기능들을 가지고 예수의 경력을 해석했는데, 그 전통에 따르면 다윗은 제사장 왕으로 일했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였다
(→ 묵시사상).
<출처:브리테니커백과>
헤로데 문(초소의 문)
헤로데 안티파스의 궁전이 이 성문 근처에 있었다고 하여 이렇게 불린다. 유다인들은 '사아르
헤페라힘(꽃들로 장식된 성문)', 회교도들은 '바브 에즈 사히라(초소의 문)라고 부르고 있다.
Angelis (1995)
Elbosco
No.8 - Nirvana (Eternal 열반)Nirvana - Elbosco (엘보스코 수도원 어린이 합창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