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무용

봄의제전.까페뮐러/피나바우쉬/2010.3.19.금/LG아트센터

나베가 2010. 3. 2. 14:33

 

 

                     

 

 

 

 

피나 바우쉬, 그녀는 갔지만 예술은 영원히 남았다

작년 6월 갑작스런 타계로 세계 예술계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던 전설적인 무용가 피나 바우쉬(1940~2009). 20세기 현대무용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으며, 장르를 초월하여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주었던 피나 바우쉬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예술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던 진정한 예술가였다. 특히 그녀가 소중히 여겼던 한국과의 남다른 인연과 따뜻한 우정을 기억하고 있는 한국 관객들에게는 그녀의 부재가 더욱 큰 슬픔과 그리움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갔지만 예술은 남았다. <카페 뮐러> <봄의 제전>. 1970년대에 발표되어 피나 바우쉬의 전성기를 본격적으로 열어주었던 이 두 편의 대표작을 통해 앞으로도 우리의 가슴 속에서 영원히 살아남을 그녀의 혼과 숨결을 느껴본다.

 

독일적인 음울함과 고뇌로 가득 찬 피나 바우쉬의 트레이드 마크 <카페 뮐러>

<카페 뮐러>(1978년 작)는 피나 바우쉬 자신의 유년기의 기억이 담긴 자전적인 성향의 작품으로, 그녀가 직접 출연하여 춤추었던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카페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그녀는, 어른들의 세계인 그 곳에서 관찰한 다양한 인간 군상들과 어린 아이로서는 지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만큼 복잡하고 난해한 인간 관계의 핵심을 본능적으로 포착해 춤으로 옮겨냈다.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텅 빈 테이블과 의자를 배경으로 헨리 퍼셀(Henry Purcell)의 음울한 아리아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마치 몽유병자처럼 공간을 부유하는 듯한 무용수의 움직임은 고독과 우울, 번뇌로 황폐화된 전후 독일 사회에 대한 메타포를 짙게 담아내고 있다. 이에 <카페 뮐러>는 초연된 후 30년을 훌쩍 넘긴 오늘까지도 피나 바우쉬의 트레이드 마크(trademark)격인 작품으로 불리고 있으며, 그녀의 열렬한 팬이기도 한 스페인 영화계의 거장 페도르 알모도바르 감독에 의해 영화 <그녀에게>의 시작 장면에 삽입되어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비록 한국 무대에서 직접 춤추겠다는 피나 바우쉬의 약속은 이제 지킬  없게 되었지만 오랜 세월 그녀와 함께해  부퍼탈 탄츠테아터의 베테랑 무용수들이 그녀의 예술혼을 온전하게 되살려낼 것이다.

 

피나 바우쉬와 한국, 30 년을 이어온 오랜 인연의 시작 <봄의 제전>

길고 혹독한 겨울을 보낸 고대 러시아의 어느 이교도 부족. 다시 찾아온 봄을 맞은 이들은 대지의 신에게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처녀를 간택해 제물로 바치는 잔혹한 의식을 행한다. 1913 파리에서 스트라빈스키의 음악과 니진스키의 안무로 초연되었던 <봄의 제전>은 당시 그 급진성과 이단성으로 인해 엄청난 소동을 불러 일으켰다. 전통 발레의 유려하고 아름다운 멜로디에서 벗어난 거칠고 야만적인 불협화음, 긴장과 혼란을 불러 일으키는 리듬과 멜로디는, 만물이 꿈틀대며 다시 태어나는 봄의 폭발적인 에너지와 생명력 그리고 원색적인 색채를 담아냄으로써 새로운 움직임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이에 20세기 음악과 무용의 혁신을 상징하는 작품이 되었다. 이후 마리 뷔그먼, 모리스 베자르, 마사 그레이엄, 마츠 에크, 프렐조까주  유수의 안무가들이 이로부터 영감을 얻어 자신만의 안무작들을 발표했고, 피나 바우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부퍼탈 탄츠테아터의 수장을 맡은  얼마 되지 않은 1975 발표한 피나 바우쉬 버전의 <봄의 제전> 단연코  이전 이후를 통틀어 가장 강렬하다는 평가를 받는 기념비적인 작품이었고, 이후 20세기 현대무용의 역사는 그녀와 함께 새롭게 쓰여지기 시작했다. 1979 내한을 통해 피나 바우쉬라는 세기의 예술가를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시키며 인연의 싹을 틔워주었던 <봄의 제전> 이렇게 30 년의 세월을 돌아 새로운 봄과 함께 우리를 다시 찾아온다.  

 

공연후기....

 

까페 뮐러

 

어둠....

꿈틀거림,,,,

적막....

가장 원초적인 소리...

몸부림....

 

사실 피나바우쉬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를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뭐라 말할수는 없지만 내면 깊숙이 뭔가가 꿈틀대었고 ,

아프고, 삶의 고통이 스멀스멀 내 안으로 들어왔다면......

그냥 아무 생각없이 무의 상태로 앉아있게 만들었다면.....

 

섹시함과 아름다움을 거부하고 깡 말라서 해골처럼 몸이 드러난....늙은 여인의 모습으로 처절하게 내면 연기를 하던 여인...

생전의 피나바우쉬가 직접 춤을 추었던 역할이기도 하지만.....

그녀 사후 무대에 올려진 오늘 무대에서 나는 생전의 피나바우쉬와 너무나 이미지가 똑같아 그녀가 환생했나??

망원경으로 들여다 봤다는...ㅎㅎ

 

피나바우쉬는 아름다운 춤보다는 내면을 표출해내는데 더 몰두해온것 같다.

그러기에 그녀의 춤은 춤이라기 보다는 연극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이름하여 <부퍼탈 텐츠테아터>란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낸 장본인.

 

까페 '뮐러'를 배경으로 그 안에 찾아든 현대인들의 삶의 고뇌와 사랑을 표현하려 한것이 아닌 지..

보이지않는 눈으로 까페를 찾아든 여인....까페안의 의자와 탁자를 연신 치워주는 한 남자...

그와 사랑하게 되어 그의 포옹을 갈망하지만 누군가는 계속 그들의 따듯한 포옹을 방해한다.

나중에는 그 방해자가 없는데도 그렇게 훈련이 되어서 그냥 앉겨있지 못하고 쓰러진다.

한편 노란머리, 빨간구두 아가씨는 이유없이 까페를 정신없이 토닥토닥 구둣소리를 내며 드나들고....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은 모두 지쳐서 쓰러지기를 반복한다.

 

삶의 탈출구를 찾으려는 듯 출구를 찾아 나서지만 빙빙 도는 회전문은 이들에게 그리 만만하지 않은것 같다.

더욱 빠르게 회전하는 문은 결코 그녀를 내 보내지 않았다.

삶에 지친 이들은  모두  쓰러졌다 일어서기를 ...아니, 자신의 삶에 익숙해진 행위를 끊임없이 반복할 뿐이다.

할일없이 목적도 없이 들락거렸던 노랑머리 여인은 마지막에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찾은걸까...

노랑머리 가발을 탈출구를 찾지못하고 쓰러진 늙은 여인에게 씌워주고, 자신의 빨간구두도 가지런하게 벗어놓고다. 

다시 까페는 어둠이 장악한다.

 

흑색의 무대에 아크릴릭 판으로 까페외벽을 만들어 거울효과와 무용수들의 모습을 투명하게 비취게 한것.

의자와 탁자의 둔탁한 소리만이 있다가 어느 순간 울려 퍼졌던  여성 보컬의 노래소리는

무에서 처음으로 소리가 탄생되는...천지창조의 아찔함을 느끼게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여백 뿐이었다고......

나도 그 커다란 종이위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앉아 있었던것 같은 느낌...

무용이라기 보다는 한편의 드라마였고...

한장의 그림같기도 했던 ....

 

공연이 끝나고 마치 레퀴엠을 듣고 박수를 칠 수 없듯이 그냥 얼음땡이 되어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망원경렌즈엔 무표정한 6명의 남,녀 무용수들만이 맺혔다 사라질 뿐이었다.

 

봄의 제전

 

스트라빈스키의 엄청난 작품 <봄의 제전>을 한다.

원작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센세이셔널한데....

 현대 춤의 대모격인 피나바우쉬는 과연 어떻게 표현해 낼까....

2010년 가장 기대되는 작품중 하나로 일찍부터 자리매김 해놓고 홀로 벅차하며 오늘을 기다렸다.

 

1부 까페뮐러가 45분, 2부 봄의 제전이 35분. 그런데 인터미션이 무려 30분??

의아해 했던 마음은 커튼이 오르자 마자 금새 풀렸다.

 

무대위에 가득 깔려있는 붉은 흙....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렇지!! 생명의 탄생의 가장 원초적인것은 역시 흙이었어~

기발한 ....아니, 역시 그녀의 꿰뚫는 심미안을 뛰어넘는 원초적 감각에 감탄했다.

 

생명의 태동하는 모습을 이 곡처럼 격정적이고 아찔하게 표현해 낸 곡이 어디 있으랴~

어쩌면 이미 스트라빈스키가 만들어 낸 이 리듬에 빠져들면 누구나 헤어나올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미 다른 사람-나진스키,모리스 베자르 안무의 작품을 영상물로 봤을때도 소름이 끼쳤었으니까....

아니, 곡만 들어도....

그러니 천재 안무가 피나바우쉬가 이 작품을 놓칠 리가 없었던 거지.

 

지구 태초의 모습으로...

가장 원초적인 흙위에서....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아직 생성되지 않은 선율...오직 리듬만이 있는....

그 리듬은 인간으로 하여금 쉽게 엑스터시에 빠져들게 한다.

가장 원초적인 것만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또다른 생명을 탄생시켜야 하고

거기엔 반드시 누군가의 희생이 따라야 한다는 심리...

인간의 노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자연이 허락하는 탄생의 신비엔 신이 개입해야 한다는....

 

왜 신은 인간의 희생제물을 원한다고 생각했을까??

최고의 것을 바쳐야 하기때문....

그것은 곧 생명!!

 

아~ 인간을 희생제물로 바친다는 그 설정부터가 사실 얼마나 아찔한 일인가!!

제물로 바칠 처녀를 고르는 장면....

그리고

선택된 그 처녀가 제물로 바쳐지기 전까지 공포에 질려 추는 춤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광란의 질주....

공포에 질린 표정...

 

이미 그녀는 무용수가 아니라 잠시후면 실지로 신께 바쳐질  희생제물 같았다.

그녀 뿐만이 아니라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관객들도 모두 엑스터시에 빠져들게 만든 그녀의 표정...

 그녀를 감싼 공포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으니까.

 

순간 번뜩이며 죽음이 스쳐지났다.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악당 조커로 나온 '히스레져'가 자신이 맡은 악당역할에 얼마나 몰입을 했으면

그 중압감때문에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과다복용....

결국은  죽음에까지 이르렀다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들었다.

 

커튼이 내려오고....

깜깜한 어둠속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바로 박수를 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건 너무나 당연했을 지도 모른다.

 

그 순간

무엇을 생각했을까....

인간의 욕망??

생존의 본능??

죄의식??

 

현대에는 물론 없어졌지만, 오래 전에는 희생제물로서 살아있는 인간을 바쳤던 제가 존재했었다고 한다.

인간은 얼마나 잔인한가~

세상에 살아있는 생물중에 인간만큼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타인을 희생시키는 행위를 주저하지 않고 행하는게 있을까~ 

지금도  느끼지 못하는 희생제물이 세상엔 얼마나 많을까....

 

공연이 끝나고 ....

여러가지 걷잡을 수 없는 상념에 사로잡혀 자리에서 쉬이 일어날 수 없었던  두 작품이었다.

 

한가지 조금 아쉬웠다면....

음악이 실황연주가 아니고 녹음반을 틀었다는 것...

실황연주였다면... 와아~ 아마 감정이 폭발했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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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의 제전, 안무가들의 도전정신을 자극하는 작품
  • 작성일 : 2010-03-15 오후 11:57:41조회 : 278

<출처.LG Azine>

 


 
  H. Purcell(1659~1695)
Oedipus Z.583
Music for a while '잠시동안의 음악'
Alfred Deller(1912~1979) / Counter-tenor
Wieland Kuijken / Bass Viol
William Christie / harpsich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