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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토마스 베른하르트 - 죽음의 무도(Totentanz)

나베가 2008. 12. 7. 16:14

IV. 토마스 베른하르트

IV.1. 죽음의 무도(Totentanz)
 
"죽음, 그건 분명 비인 사람일거야,
사랑하면 프랑스인을 떠올리는 것과 같은 이치지.
그렇지 않다면 누가 너를 시간에 맞춰 천국의 문까지 데려다 줄텐가?
맞아, 그런 직감을 가진 이는 비인 사람뿐이지.
죽음, 그건 분명 비인 사람일거야,
오직 그만이 부드러운 어조로 타이를 수 있지:
가자 얘야, 가자 아가, 왜 그렇게 널 가두어놓고 있니?
죽음은 분명 비인 사람일거야.
가자 꼬마야, 자 착하지, 친구 하인(죽음)과 함께 가자꾸나!
죽음은 분명 비인 사람일거야.
Der Tod, das mu  ein Wiener sein,
genau wie die Lieb' a Franz sin.
Denn wer bringt dich p nktlich zur Himmelst r?
Ja, da hat nur ein Wiener das G'sp r daf r.
Der Tod, das mu  ein Wiener sein,
nur er trifft den richtigen Ton:
Geh Schatzerl, geh Katzerl, was sperrst dich denn ein?
Der Tod mu  ein Wiener sein.
Geh Mopperl, du Tschopperl, komm brav mit'm Freund Hein!
Der Tod mu  ein Wiener sein."  

 

비인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게오르그 크라이슬러의 이 노랫말은 죽음의 테마에 특히 민감한 오스트리아인의 정조(情調)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죽음이란 테마는 특히 비인을 중심으로 한 세기 전환기 문학에서 현대문학에 이르기까지 오스트리아 작가들의 작품에 독특한 소재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들 가운데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1950년대 창작 초기부터 마지막으로 발표한 극작품 {영웅광장}에 이르기까지 줄곧 이 테마에 천착하여 다양한 죽음의 형식을 전개시켜 온 작가이다. 본 장에서 다루려는 '죽음의 무도'는 중세 후기부터, 정확히 14세기 때부터 카톨릭 전통의 유럽 각국에서 구전으로 전해져 온 것이다. 따라서 오스트리아에만 국한된 문화적 현상이라 일컬을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한 사람씩 차례로 저승사자에 의해 삶의 대열에서 빠져나가는 '죽음의 무도'가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드는' 축제 속에서 펼쳐지는 기본구도는 오스트리아 특유의 감각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할 것이다. 이러한 기본구도는 베른하르트의 산문이 아니라 극작품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죽음의 무도'는 1970년에 초연된 베른하르트의 첫 극작품 {보리스를 위한 축제}에서 마지막으로 공연된 {영웅광장}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희곡작품에서 확인된다. 베른하르트의 드라마에서 죽음은 중세 회화에서 보는 섬뜩한 인골의 모습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거부될 수 없는 어떤 힘으로써 암시될 뿐이며, 극적 과정은 죽음 직전에 처한 인간의 다양한 경계상황의 묘사에 집중해 있다. 그러나 창작 초기인 1958년에 집필된 오페라 가극의 대본 {황무지의 장미} 둘째 악장에서 죽음은 "하얀 의상"을 걸친 "카드놀이 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죽음이 등장하자, 연신 "소주와 베이컨, 빵과 맥주"를 먹고 마시는 남자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불안해하는 여자는 이 뜻밖의 손님에게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여자는 오히려 그녀의 손에 입맞추는 죽음에게 함께 춤을 추자고 조르며 그가 자신을 사랑할 것을, 즉 그가 자신을 데려갈 것을 간절하게 원한다. 여기서 일종의 '사랑하는 님'으로 의인화된 죽음은 위에 인용된 노랫말에서 삶이라는 육신의 감옥을 벗어 던지고 함께 가자고 부드럽게 타이르는 죽음과, 그리고 프란츠 슈베르트의 현악 사중주곡 "소녀와 죽음"에서 두려워하는 소녀를 위로하며 평온한 안식을 제공하는 죽음이 지닌 "친구"로서의 이미지와 같은 것이다. 이런 친근한 이미지를 가진 죽음은 악마와는 다른 존재로서 이해된다. 카톨릭교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의 무도는 원래 인간에게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신의 뜻에 따라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일종의 경고의 구실을 해왔다. 중세 때부터 전해지는 '죽음의 무도' 테마를 수집하여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호프만스탈의 {누구나 Jedermann}에서는 죽음이 신의 뜻을 충실하게 받드는 저승사자로서 등장하며 세속적인 재물에 눈먼 인간을 신의 심판대에 세우기 위해 천상에서 지상으로 "하강한다". 이 희곡은 욕심 많은 한 부자가 어느 날 갑자기, 그것도 남녀 쌍쌍의 친구들과 더불어 한참 먹고 마시고 노래하는 술잔치가 절정에 이른 무렵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된다는 이야기를 오스트리아 작가 특유의 유머로써 풀어나간다. 호프만스탈은 신과 죽음간의 대화를 서막에 도입함으로써 바로크 전통의 종교적인 모티브를 명백하게 시사하며, 극적 해결을 신에 의한 구원으로 이끌어간다. 그러나 베른하르트가 '죽음의 무도'에서 길어 올린 발견은 무엇보다 연극과 삶의 동질성에 대한 인식이다. "죽음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우스꽝스럽다". 작가 개인의 실존적 경계 체험이 또한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는 이 인식에 따르면, 삶은 덧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현세에서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언젠가는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덧없는 삶을 그린 문학의 중심 생각은 세계가 무대이고, 인간은 이 무대에서 주어진 역할을 연기한다는 것이다. 바로크 전통에서 - 대표적인 작가로 칼데론을 꼽을 수 있다 - 이미 연극이란 공허하고 무가치하고, 덧없는 삶을 비유하는 메타퍼를 보여주며 죽음의 관점과 연결된다. 즉, 우리는 결국 우리가 맡은 역할에서 죽을 것이며, 죽은 후에 남게 되는 것은 우리가 역할연기자로서 입었던 의상과 연극 무대, 소품들뿐이다. 따라서 베른하르트의 연극에는 전통적인 '죽음의 무도'-구도에서 나타나는 종교적인 구원의 계기가 없으며 사후세계에 대한 어떠한 신앙도 배제되고 있다. 그 대신 {황무지의 장미} 둘째 악장 "카드놀이 하는 사람"에서는 죽음과의 '내기'가 도입된다. 이 '내기'는 언뜻 삶의 유예기간을 놓고 호프만스탈의 주인공 예더만이 죽음과 벌이는 '흥정'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구원 가능성과 관련하여 신의 존재 여부를 놓고 '내기 Wetten'를 거는 파스칼의 실존주의적 관점을 뒤집은 것이다. 죽음과의 내기에서 잃는 쪽은 물론 인간이다. 그러나 구원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시대에서 이 내기 자체는 인간이 처한 실존적 상황과 다양한 죽음의 방식에 대한 예시를 담고 있다. 예컨대 {보리스를 위한 축제}는 현대 소비사회의 지배적인 권력에 예속되어 식물인간처럼 살아오다 자신의 언어마저 상실해버린 한 불구자의 생일잔치를 보여준다. '먹고 마시고 웃고 노래하는' 동안 이 파티의 주인공인 보리스는 소리 없이 죽어간다. 생일잔치라는 역설적인 상황에서 벌어지는 이 '죽음의 무도'는 20세기말에 처해 있는 인간의 상황을 사회풍자극으로 엮은 것이다.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해서 자살하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다리 없는' 손님들의 대화에서 분명하게 표현되는 것처럼, 삶이라는 것은 개성은 물론이고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마저도 무시되는 획일적인 사회의 규범 속에서 얼마나 오래 버텨내느냐의 문제이다. 침대가 아니라 1미터 미만의 "상자"속에 몸을 맞추어 누울 수밖에 없는 불구자들이 늘어놓는 죽음에 대한 농담과 유희는 자살의 충동을 억제하고 "우스꽝스런" 삶을 끝까지 견뎌낼 수 있는 유일한 원동력으로서 제시된다.
                     

출처 : 돌체 클래식
글쓴이 : 박승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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