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나스테라 Alberto Evaristo Ginastera 1916∼1983
아르헨티나의 작곡가. 1928-35년 알베르토 윌리엄즈 음악원(부에노스아이레스), 1936-38 국립음악원9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공부, 1937년의 처녀작 발레 음악<파남비(나비)>에 의해 주목을 받고, 1940년까지 국가 대상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상을 받는다. 1946-47 구겐하임 급비생으로서 미국에 간다.
1948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설립된 국제 현대음악협회 아르헨티나 지부의 부서기장이 되고, 1951년에는 동 협회의 초청으로 서독에 간다. 그 후 국외에서 활약, 1957년에는 코플랜드, 차베스 등과 나란히 카라카스(베네수엘라)에서 거행된 라틴 아메리카 작곡 콩쿠르의 심사위원을 역임한다.
1971년 이후는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가족과 함께 정주. 처음에는 민족적인 기반에서 출발했으나 점차 12음 기법 등 현대적인 수법을 사용하게 되었고, 1960년 경 부터의 작풍은 다분히 전위적이다. 많은 장르에 걸쳐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데 관현악곡 <협주적 변주곡,1953>,피아노 협주곡 제 1번(1961)또 오페라 <보마르소,1964>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실내악곡과 피아노곡에도 걸작이 있으며 이것들은 자주 연주된다.
Alberto Ginastera (1916,01,11-1983,06,17)
20c의 탁월한 남미 작곡가로 인정을 받는 히나스테라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음악적 재능을 보인 그는 7세 되던 해에 처음으로 피아노레슨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12세 되던 해에 윌리암스 음악원에 입학하여 음악이론과 솔페지, 피아노, 화성학, 작곡 등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의 탁월한 음악적 재능은 1935년 음악원 졸업시 작곡에서 금메달을 수상함으로 증명되었다. 이후 히나스테라는 국립음악원에 입학하여 아토스 팔머와 화성학을, 호세 길과 대위법&푸가를, 호세 안드레와는 작곡을 공부하였는데 1938년 졸업 당시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시편곡>으로 음악원을 최우등 졸업하였다.
히나스테라가 아르헨티나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1937년 당시 유명한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후앙 호세 카스트로가 그의 발레 모음곡<피남비(Pinambi)>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초연하면서부터이다. 1941년에 히나스테라는 국립음악원에 작곡과 교수직에 임용되었으며, 1943년 발레<에스탄시아(Estancia)>의 발표 이후 아르헨티나의 민족주의적 문화와 특징을 음악 안에서 효과적으로 해석하는 작곡가로 꼽히게 되었다.
구겐하임 장학금을 받아 1945년부터 두 해 남짓 미국에 머물면서 그는 미국내 대학들의 음악 프로그램과 음악학교들을 돌아보고 탱글우드에서 열린 코플랜드의 작곡코스에도 참가하는 등 국제적인 안목을 키워갔다.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히나스테라는 1948년, 국제현대음악협회의 아르헨티나 본부가 된 작곡가동맹을 결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주로 아르헨티나에서 교육과 작곡에 힘쓰는 동시에 다른나라로부터 위촉된 작품을 쓰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던중 1958년 워싱턴에서 열린 미대륙간 음악제(Inter-America Music Festival)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 음악제에서 줄리어드 현악4중주단이 그의 <현악4중주 제2번>을 연주하게 되고, 이곡이 굉장한 호평을 받게 되면서부터 히나스테라는 국제적인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또한 그 3년 후에는 <미국을 위한 칸타타(Cantata para America magica)>와 <피아노협주곡 제1번>으로 더욱 유명해져서 미국으로부터 주요작품을 위촉받기에 이르렀다.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던 그는 1962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고등음악연구소를 창설하여 남니의 음악도들에게 자유로운 실험정신을 키우고 세계각국에서 방문한 작곡가들에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데 힘썼다.
후에 이 기관은 남미에서 작곡공부기관으로서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히나스테라는 1964년 7월 그의 그랜드 오페라<돈 로드리고>가 콜론 극장에서 초연된 후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두번째 오페라<보마르초>도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1971년에는 유럽의 제네바에 머물면서 작곡한 세 번째 오페라가 워싱턴 케네디센터 연주회장의 개관시에 초연되기도 하였다.
히나스테라의 작품들은 대략 1960년까지의 민족주의적 경향을 띤 곡들과 그 이후 더욱 현대적이며 진보적인 작곡어법을 사용하여 쓴 작품들로 구분된다. 그러나 히나스테라 자신은 좀더 세분화된 작곡스타일의 변화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3단계로 나누어 객관적인 민족주의, 주관적인 민족주의, 그리고 신표현주의라고 명칭하였다. 그의 객관적인 민족주의는 아르헨티나의 민속적인 특성과 주제가 직접적이고 명백한 방법으로 조성적인 선을 지니고 나타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히나스테라는 민속적인 특성 중 특히 크리올라 음악(musica criolla)이라고 알려진 민요와 춤의 리듬과 멜로디 모델로 삼았다. 이 시기의 히나스테라 음악에 영향을 받은 작곡가들은 바르톡, 화야, 스트라빈스키 등이다. 히나스테라의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발레 모음곡<피남비(Pinambi)>, <에스탄시아(Estancia)>, 피아노 곡으로는 <아르헨티나 춤곡(Danzas Argentinas)>과 <크리올라 춤 모음곡(Suite de danzas criolla)>등을 들 수 있다.
히나스테라의 주관적 민족주의는 그의 <현악4중주 제1번>으로부터 시작되어 6년간 지속된 작곡 경향을 말한다. 그는 "이 <현악4중주 제1번>에는 팜파스 음악의 리듬, 멜로디, 동기들이 포함되어 있으나 그것들이 명백하게 보이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피아노 소나타 제1번>에서도 히나스테라는 이곡의 주제적 구조, 리듬과 멜로디, 동기들 사이의 표현적 긴장감이 뚜렷한 아르헨티나의 악센트를 지닌다고 했다. 그러나 이 표현적 긴장감은 작곡가의 자신에 의해서는 감지되지만 청중에 의해서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며, 이것이 바로 히나스테라가 말하는 '주관적(subjective)'인 민족주의인 것이다. 이 주관적인 민족주의 시기는 오케스트라를 위한 <팜페아나(Pampeana)제3번>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엄격한 구성력과 작곡가 개인의 음악적 정수가 가장 이상적으로 혼합되는 시기는 신표현주의라고 불리는 제3기이다.
1958년작 <현악4중주 제2번>으로 시작되는 이 시기는 12음기법의 샤용, 다조성, 1/4음과 다른 미분음정의 사용, 우연성, 그리고 기악과 성악적 자원의 확대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특히 이 시기에 히나스테라는 초자연적이며 환상적 암시를 지닌 마법적인 요소를 중요시했는데, 이 요소는 그의 <현악4중주 제2번> 'Presto magico'악장과 <피아노협주곡 제1법>중 'Scherzo allucmate' 그리고 <피아노5중주 op.29>중 'Scherzo fantastico'에서 나타난다. 히나스테라는 그의 <피아노협주곡 제2번>의 마지막 악장에 초현실적인 요소가 나타난다고 하였다. 이 악장에서 제시되는 11음으로 이루어진 주제는 쇼팽의 <피아노소나타 bb minor>의 끝부분에서 유래되었으며 이것은 그의 협주곡의 비극적이며 환상적인 성격을 암시한다고 한다. 히나스테라는 자신의 작곡일생을 통해 전통적인 형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표현의 새로운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면서도 유럽의 위대한 고전, 낭만의 전통에 굳건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전통적인 형식이나 악기들이 부활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특히 소나타 형식을 좋아했으며 중요한 구조적 요소로 사용되는 카덴차와 변주곡 형식도 많이 사용하였다. 한 예로 <현악4중주 제2번>의 마지막 악장은 카덴차의 형태를 지닌 주제와 3개의 변주이며, <피아노협주곡 제2번>의 제1악장은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의 제4악장에서 발췌된 음들로 만든 화음(F-A-D-C#-E-G-Bb)을 가지고 작곡한 32개의 변주이다.
히나스테라는 강한 리듬을 선호하였는데 이중 가장 특징적인 것이 아르헨티나 민속음악에서 유래한 리듬 패턴의 사용이다. 특히 두드러지는 리듬의 형태는 아르헨티나의 카우보이인 가우초(gaucho)가 자주 사용한 말람보(malambo) 리듬이다 이 리듬은 헤미올라와 같은 형태로 겹박자에서 2박과 3박의 패턴이 번갈아 가면서 진행되는 수법을 의미한다. 즉 첫째 마디는 1-2-3-4-5-6, 둘째 마디는 1-2-3-4-5-6으로 진행된다. 이 리듬은 곡이 절정에 이르는 부분에 주로 사용되었다.(참고:아르헨티나 춤곡 제3번) 히나스테라는 이 리듬을 악보의 첫 부분에 3/4=6/8=6/16의 이중박자 기호로 자주 표시해놓곤했다.(참고:피아노소나타제1번4악장) 그외에 리듬의 악센트를 변화시키기 위한 당김음의 사용, 오스티나토 음형, 수시로 바뀌는 변박자들을 사용함으로써 전통적인 박자 구성에 다양한 변화를 주었다.
그의 선율 및 화성 역시 리듬과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아르헨티나의 민속음악인 잉카(Inca)와 크리올(Creole)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교회선법적인 화성에 근거를 둔 잉카 음악의 선율은 대부분 우울하고 애조를 띠는 반면, 크리올 음악의 선율은 밝고 빠른 성격을 지니고 주로 병행3도의 형태를 지니면서 제시되곤 한다.
중기에는 히나스테라의 개성이 표출된 주관적인 방식의 선율들이 점차 나타났고 후기에 이르면 12음 기법에 의한 도약이 심한 선율들이 주를 이루었다. 복조성과 병행화음의 사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던 초기의 화성은 <현악4중주 제2번> 이후에는 12음기법의 사용으로 인해 증4도를 중심으로 구성된 화음들과 복화음, 그리고 군집화음(cluster chord)의 사용으로 대치되었다.
자료출처: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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