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에서 B.C.란 ‘Before Callas’(칼라스 이전)를 의미한다.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야 말로 오페라의 역사를 뒤바꾼 ‘불멸의 디바’이며, 그가 아닌 어떤 뛰어난 가수일지라도 ‘칼라스 이전 혹은 이후에 최고’일 뿐이라는 뜻이다.
1977년 9월 16일에 칼라스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났다. 다음달 그의 30주기를 앞두고 세계 곳곳에서는 칼라스의 예술혼을 기리려는 움직임이 한창이다. 그를 잃은 뒤 30년간 전세계가 그를 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지만, 그의 불꽃 같았던 삶과 음악을 되살려 다시 한 번 아로새기려는 것이다.
본명 마리아 안나 소피 세실리아 칼로게로포울로스(Maria Anna Sophie Cecilia Kalogeropoulos). 그는 1923년 12월 2일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그리스 출신의 부모가 약국을 개업하면서 발음하기 쉬운 미국식 성으로 바꾸는 바람에 마리아 칼라스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마리아라는 흔하디 흔한 이름을 가진 소녀가 처음부터 주목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7살 때인 1930년 음악을 시작했지만 맨하튼의 비좁은 아파트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제대로 된 음악교육을 받기 전, 뉴욕 증시의 폭락으로 아버지의 약국은 망했고 부모는 1937년에 이혼했다. 그해에 어머니를 따라 그리스로 온 칼라스는 이듬해인 15세 때부터 아테네 국립 콘서바토리에서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다. 1941년에는 아테네 오페라단의 평생단원이 됐다.
하지만 1945년, 22살의 칼라스는 아버지가 있는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고자 했다. 당시 그의 몸무게는 210파운드(약 95kg). 가냘프고 아름다운 여주인공 역할을 맡기엔 지나치게 뚱뚱했다. 그해 겨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디션에서 탈락하자, 그는 1947년 화물선을 타고 이탈리아 나폴리로 건너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28살 연상의 사업가이자 칼라스의 열렬한 후원자인 메네기니를 만나 결혼했다.
메네기니와의 결혼한 이후 칼라스는 남편의 도움을 받아 유럽 각지의 무대에 섰고, 1951년 라 스칼라 극장의 시즌 개막 공연이 성공을 거둔 뒤 1958년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는 로시니, 도니제티, 벨리니 등 그동안 무대에 잘 올려지지 않았던 벨칸토 레퍼토리에 주력하면서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1956년에는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로 자신을 거부했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에서 성공을 거뒀고, 같은 해 ‘토스카’ 공연에서도 16회나 커튼콜을 받는 등 매번 승승장구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공연했을 때는 1만여 명의 관객이 2000석의 좌석을 차지하지 위해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가 서는 무대는 언제나 관객들의 열기로 뜨거웠으며, 그로 인해 오페라 시장이 호황을 맞고 극장이 새로 들어서는 등 오페라 역사가 바뀌었다.
그러나 성공 이면에서 늘 사랑을 갈구했던 그는 1954년 영화감독 루치아니 비스콘티를 사랑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자신 안의 여성을 재발견하게 된다. 이때 단기간에 30kg의 체중을 감량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스콘티는 동성애자였으므로 이뤄질 수 없었다.
이후 칼라스가 ‘세기의 연인’인 선박재벌 오나시스를 만난 것은 1957년. 베니스의 한 파티장에서 만난 인연으로 남편과 함께 요트 항해에 초대 받았다가 오나시스와 사랑에 빠진다. 이때부터 칼라스의 음악 인생은 위기를 맞기 시작했다. 이듬해 1월 칼라스는 이탈리아 대통령이 참석한 ‘노르마’의 로마 갈라 콘서트에서 몸이 아프다며 1막이 끝난 후 퇴장해 호된 비난을 받았으며, 같은 해 5월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준 라 스칼라 극장의 예술감독과 크게 다퉈 라 스칼라를 등지게 된다. 11월에는 메트로폴리탄에서마저 해고된다. 오나시스와의 사랑을 위해 남편인 메네기니에게 이혼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남편의 곁을 떠나 오나시스와 동거에 들어간다.
1960년부터 61년까지 칼라스는 무대에 서기를 포기하고 오로지 오나시스와 함께 화려한 상류생활을 즐기는 데만 몰두했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영원하지 않았다. 43세에 극적으로 임신을 했지만 오나시스가 받아들이지 않아 낙태했으며 이로 인해 우울증에 걸린 칼라스가 자살을 기도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명성은 여전했지만 ‘목소리는 이미 한물갔다’는 평이 대부분이었고, 스스로도 한계를 느낀 칼라스는 1965년 코벤트 가든에서 열린 로열 갈라 콘서트를 끝으로 잠정 은퇴했다.
그는 1966년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그리스 국적을 획득하면서까지 오나시스와의 결혼을 갈망했지만, 오나시스는 결국 칼라스를 배신하고 1968년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과 결혼했다. 오나시스는 이후 허영스러운 재클린과의 결혼을 후회하고 칼라스를 그리워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975년 사망할 당시 칼라스가 선물한 붉은 색 캐시미어 담요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고 한다.
오나시스의 배신과 죽음은 칼라스의 생애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가 죽은 뒤 칼라스는 삶의 의욕을 잃은 채 프랑스 파리의 아파트에서 홀로 칩거하다가, 심장마비로 55세의 나이에 삶을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그리스로 돌아와서 화장됐으며, 유골분은 폭풍우가 치는 에게해에 뿌려졌다.
자신이 출연한 수많은 비극 오페라의 한 장면처럼 세상을 떠난 칼라스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남긴 메모는 오페라 ‘라조콘다’ 4막 아리아의 일부분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끔찍한 순간에 / 내게 남는 건 그대뿐 / 그대만이 내 마음을 유혹한다 / 그것은 내 운명의 마지막 부름 / 인생의 노상에서 마지막 건너야 할 길….”
칼라스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하이라이트만 발췌한 음반을 듣지 말고 공연 실황녹화나 전막 레코딩을 접할 것을 권한다. 칼라스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온몸으로 오페라의 배역을 소화하는 그의 폭발적인 연기력에 있기 때문이다.
칼라스의 음색은 곱고 깨끗한 미성(美聲)이 아니다. 오히려 굵고 거칠고 사납다고 하는 편이 옳다.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은 그의 목소리에 찬사를 보내면서 천사가 아닌 마녀, 여왕, 여신과 같은 수식어를 붙였다.
칼라스 연기와 노래는 신들린 듯했다. ‘루치아’를 부를 때면 광기어린 루치아가 되고, ‘노르마’를 부를 때면 불타 죽는 여신이 됐다. 무대 위의 칼라스는 카리스마 넘쳤지만 예쁘지 않았다. 분노 복수의 감정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드라마틱 소프라노’의 전형으로, 당시의 관객들이 가졌던 오페라에 대한 의식을 전혀 새롭게 바꿔 놓았다.
(펌글)
영화 '필라델피아'에서 건진 곡...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싸우는 변호사 이야기...
에서 사랑이란 걸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네요.
핸펀 저장된 첫곡인 동시에
요즘 제 자장송입니다.
두번째 Eric Anderson - Sheila
세번째 Alan Parsons Project - Far Away From Home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볼륨업하셔서 전율의 음성을 잘 느껴보시길.
Mr.Island
(지금은 어떤느낌으로 들리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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