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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시니/피렌체의 꽃파는 소녀 - 신영옥

나베가 2006. 5. 29. 11:36
피렌체의 꽃 파는 소녀 : La fioraia fiorentina  by 신영옥
작곡가: Rossini

제목:  La fioraia fiorentina 피렌체의 꽃파는 소녀

I più bei fior comprate, fanciulle amanti e spose:
가장 아름다운 꽃들을 사세요, 사랑에 빠진 소녀들과 신부들이여:
son fresche le mie rose, non spiran che l'amor,
내 장미꽃들은 신선해요, 사랑 밖에는 풍기지 않는답니다,
no, no, non spiran che l'amor. Ahimè!
사랑 밖에는, 장미꽃들은 사랑처럼 죽어가지 않습니다. 아아!
Soccorso implora mia madre, poveretta,
도움을 간청합니다 나의 어머니는, 불쌍한 어머니는,
e da me sola aspetta del pan
그리고 그녀는 전적으로 나에게 빵을 의존한답니다
e non dell'or. Ahimè! Ah!
금은 보화가 아니구요. 아아! 아!
로시니 Rossini, Gioaccino Antonio (1792.2.29~1868.11.13)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작곡가. 페사로 출생. 어릴 때부터 음악가였던 양친으로부터 기악을 배우고 뒤에 교회의 성가대에서 활동하였다. 1804년 전 가족이 볼로냐로 이사하자, 그곳에서 종교음악의 작곡에 뛰어난 안토니오 테제이 밑에서 정식으로 작곡공부를 하고 1806년 볼로냐음악학교에 입학하여 다시 첼로·피아노·작곡 등을 배웠다. 재학 중에 발표한 칸타타 《오르페오의 죽음에 대한 아르모니아의 통곡》으로 상을 받고, 10년 베네치아에서 공연한 《결혼 어음》으로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13년에 상연한 《탕크레디》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자》가 모두 호평을 받고, 16년 로마에서 공연한 《세비야의 이발사》가 절찬을 받아 이때부터 그는 일류의 작곡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어 《오셀로》(1816, 나폴리) 《도둑까치》(17, 밀라노) 등도 절찬을 받았다. 그리고 22년에는 빈을 방문하여 로시니 선풍을 일으켰으며, 23년에는 런던을 방문, 영국왕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24년 파리로 건너가서는 이탈리아오페라극장의 감독을 맡아 프랑스 정부로부터 연금과 보수를 받고 작곡에 종사하였다. 그의 작품은 이 밖에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15, 나폴리) 《신데렐라》(17, 나폴리) 《이집트의 모세》(18, 나폴리) 등과 파리에서의 작품 《오리백작》(28) 《기욤 텔 Guillaume Tell》(29) 등이 있는데 대작 《빌헬름 텔》을 최후로 사실상 오페라에서 손을 떼었다. 36년 볼로냐로 돌아와 음악학교 교장으로 여생을 보내다가 48년 피렌체로 옮겨 잠시 지낸 후 55년 다시 파리로 건너가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한 편 만년에는 요리연구에 몰두하여 많은 저서를 내기도 하였다. 38곡의 오페라를 비롯하여 칸타타·피아노곡·관현악곡·가곡·실내악곡(현악4중주곡 등)·성악곡 등 여러 방면에서 많은 작곡을 한 그는 이탈리아오페라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킨 이탈리아 고전오페라의 최후의 작곡가로 널리 알려졌다.
 
작품의 특징
본능적인 감각 뛰어난 기교 그리고 끊임없는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가운데 오페라 부파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드높인 로시니는 극장 작곡가로서 세태에 부응하는 표현 기법으로 대중을 사로잡아 2세기에 걸친 이탈리아 오페라의 금자탑을 세운 대가이다. 유려한 선율과 생생한 인물 묘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나며 또한 오페라 아리아에서도 대단한 수완과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피렌체 (Firenze)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자치주의 주도. 면적 102㎢. 인구 35만 1600(2003). 영어로는 플로렌스(Florence)라고 한다. 로마의 북서쪽 약 230㎞, 아펜니노산맥 기슭, 아르노강 연변에 있다. 기후는 비교적 온화한데 일시적으로 극단적인 계절적 기온을 나타내기도 한다.
 
역사
BC 1세기 무렵 로마 식민군에 의해 건설되었고 제정시대에 토스카나의 중심지가 되었다. 11세기말 마틸데 디 카노사 시대까지 도시의 발전은 정체되었으나, 12세기초 자치도시가 된 뒤 모직물공업이 발전하여 유럽의 상공업·금융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13세기초 교황당(겔프)과 황제당(기벨린)이 싸워 교황당과 대상인(大商人)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 뒤 대상인은 정치적 혼란을 틈타 세력을 확장하였고, 13세기말 교황청으로부터 징세업무를 위임받아 금융·무역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여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15세기초 피렌체의 재벌 메디치가(家)가 권력을 장악하였고 C. 메디치와 손자 L. 메디치가 실질적인 독재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들은 예술과 학술을 후원하는 등 르네상스 진흥을 위해 노력하였고, 이때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까지 메디치가의 추방과 복귀가 되풀이되었으나 1532년 메디치가의 세습체제가 확립되고 피렌체공화국은 막을 내렸다. 메디치가의 분가(分家)인 코지모 1세가 토스카나대공(大公)의 칭호를 받아 69년 토스카나공국(公國)이 성립하였으며 피렌체는 수도가 되었다. 그 무렵부터 질병이 유행하고 인구가 감소되었으며 경제도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나 1737년 메디치가 최후의 대공 가스토네가 죽은 뒤 계몽군주 레오폴트 2세의 치세로 다시 활기를 찾았다.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이탈리아 통일운동)의 고조 속에 1860년 국민투표에 의해 사르데냐왕국(61년 통일 이탈리아왕국이 됨)에 통합되었고 65∼70년까지 통일 이탈리아왕국의 수도였다. 제 2 차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치열한 공습을 받았으며 1967년 아르노강이 범람하여 우피치궁전 등의 문화재가 큰 손실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