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 클래식 2015년)

2015교향악축제/코리안심포니/문태국(VC)협연/4.1.수/예술의 전당

나베가 2015. 3. 31. 22:00

 

 

 

 



4. 1 (수) 8:00 p.m.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지휘 | 임헌정
첼로 | 문태국
김택수 / Spin Flip (세계 초연)
Texu Kim / Spin Flip (Wolrd Premiere)

슈만 / 첼로 협주곡 a단조 Op.129
R. Schumann / Cello Concerto in a minor, Op.129

차이콥스키 / 교향곡 제5번 e단조 Op.64
P. I. Tchaikovsky / Symphony No.5 in e minor, Op.64


 

 

2015 교향악축제 CONCERT SCHEDULE * 클릭하시면 각 교향악단으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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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wed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4.2 thu 대구시립교향악단
4.3 fri KBS교향악단
4.4 sat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4.5 sun 군포 프라임필하모닉오케스트라
4.6 mon 과천시립교향악단
4.7 tue 충남교향악단
4.8 wed 광주시립교향악단
4.9 thu 대전시립교향악단
4.10 fri 서울시립교향악단
4.11 sat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
4.12 sun 춘천시립교향악단
4.14 tue 울산시립교향악단
4.15 wed 원주시립교향악단
4.16 thu 수원시립교향악단
4.17 fri 제주특별자치도립 제주교향악단
4.18 sat 부산시립교향악단
4.19 sun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패키지 할인 : ⑴ 골드회원 6회 25% / 9회 30% / 12회 35% / 18회 40% 할인 ⑵ 블루회원 6회 20% / 9회 25% / 12회 30% / 18회 35% 할인 ⑶ 일반 6회 15% / 9회 20% / 12회 25% / 18회 30% 할인

ⓒ홍장현 - 월간객석

 지휘 | 임헌정
Hun-Joung Lim, Conductor


지휘자 임헌정은 끊임없는 도전과 열정으로 청중과 비평가 모두를 사로잡으며,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스트라빈스키, 쇤베르크, 바르토크, 베베른 등의 작품들을 초연하며 국내 클래식계의 새로운 활력소를 불러 일으켰으며,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전곡 연주를 시작으로 베토벤, 슈만, 브람스, 브루크너 교향곡에 이르기까지 혁신적인 프로그램을 통해 한 작곡가를 깊이 있게 소개하는 동시에 꾸준히 음악계에 화두를 던져왔다. 특히 그는 1999년부터 2004년까지 5년간 국내 최초로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를 펼쳐내며 ‘말러 신드롬’, ‘말러 붐’ 열풍을 불러일으키는 대 사건을 만들어냈다.

‘지휘대의 탐험가’, ‘클래식 음악에 대한 편견의 벽을 무너뜨린 인물’ 등 그를 수식하는 단어들이 증명하듯 동아일보로부터 국내 음악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국내 최고의 지휘자’로 한겨레신문이 기획한 우리 사회 각 분야의 개혁성과 전문성을 갖춘 인사 중에서 ‘한국의 미래를 열어갈 100인’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한국음악협회 ‘한국음악상’,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우경문화예술상’, ‘서울음악대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대통령상)’, ‘대원음악상 특별공헌상’을 수상하며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끊임없는 도전을 증명하였다. 또한, 25년간 이끌어온 부천필에게 음악단체로는 처음으로 한국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호암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서울대 음대 졸업 이후 미국 메네스 음대와 줄리어드 음대에서 작곡과 지휘를 공부한 그는, 귀국 후 서울대 작곡과 지휘 전공 교수로 30년째 재직하고 있다. 현재 코리안심포니 제5대 예술감독으로 새롭게 음악의 인생을 펼치며 또 다른 교향악의 역사를 시작하려 한다.

 

 첼로 | 문태국
Taeguk Mun, Cello


첼리스트 문태국은 1994년에 태어나 만 4세에 첼로를 시작하였고 2007년에 도미하였으며, 한국에서는 양영림을, 줄리어드 예비학교에서는 클라라 김을 사사하였다.

제15회 성정전국음악콩쿠르 최연소대상, 독일 올덴부르그 청소년국제콩쿠르 1등, 제3회 앙드레 나바라 국제첼로콩쿠르 1등, 2014 파블로 카잘스 국제첼로콩쿠르 1등을 비롯하여 국내외의 수많은 콩쿠르에서 수상하였다. 2004년 금호영재독주회와 2006년 경기도문화의전당 소극장 독주회를 시작으로 한국, 독일, 프랑스, 미국 등에서 수차례 독주회를 가졌다. 또한 수원시립교향악단, 인천시립교향악단, 뚤루즈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헝가리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비롯하여 국내외 유명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바 있으며 2014년 부산국제음악제에 라이징 스타로 초청받아 연주를 하였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서 독주회를 가진바 있으며 2015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스프링 페스티발에 초청되어 연주를 계획하고 있다.

(재)성정문화재단과 황진장학회, 대신금융그룹 송촌문화재단에서 후원을 받고 있는 문태국은 줄리어드 예비학교에서 전액장학생으로 공부를 마친 후 현재 보스턴의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전액장학생으로 세계적인 선생이자 첼리스트인 로렌스 레서를 사사하고 있다.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Korean Symphony Orchestra


2015년 창단30주년을 맞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는 연간 90회 이상의 공연을 통하여 국내 교향악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1987년부터 국립극장과 전속계약을 맺고 국립오페라단, 국립발레단, 국립합창단 등의 공연을 통해 대한민국 유일의 오페라와 발레 전문 오케스트라로 인정받으며 전문성을 확보해왔다. 1989년 문화체육부로부터 사단법인단체로 승인 받은 이후, 2001년 3월 창단 16주년을 맞아 재단법인으로 탈바꿈하면서 예술의전당 상주오케스트라로 새롭게 출발하였다. 이후 <11시 콘서트>를 비롯 예술의전당 대표 프로그램을 연주하고 있으며, 콘텐츠영상화사업에 참여하는 등 관객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가고 있다. 1989년과 1990년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5천명 합창단과 함께 <대합창 연주회>로 화제의 공연을 이루어낸 바 있으며, 2011년 국립오페라단의 국내 초연작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 2013년 <파르지팔>과 2014년 국립발레단의 국내 초연작 <봄의 제전>의 호연으로 평론가와 관객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또한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안젤라 게오르규, 라두 루푸 등 세계적인 음악가들의 내한 시에도 함께하였으며, 클래식 음악뿐 아니라 영화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 OST를 녹음하였고, 팝 스타 ‘스팅’ 내한 공연 등을 통하여 다양한 무대에서 관객과 만나고 있다.

국내 클래식 음악계의 선 굵은 연주회는 물론 2013년 제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는 오케스트라로서는 유일하게 무대에 섰으며,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과 패럴림픽 폐막식의 연주를 담당하는 등 세계 속에 한국의 클래식 문화를 알리는데 앞장서고 있다. 국내외 정상급 아티스트와 함께 폭넓은 레퍼토리로 구성되는 정기연주회와 다양한 컨텐츠 개발을 통한 자체 기획시리즈인 ‘라이징스타’, ‘토킹 위드 디 오케스트라’는 관객들의 관심을 유발하며 폭넓은 관객층을 형성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또한 2010년부터 국립예술단체와 함께 ‘방방곡곡 문화공감 사업’에 참여하고 있으며, 2013년부터 ‘찾아가는 음악회’를 진행해나가는 등 전국 문화소외지역을 찾아가 전국민 문화향유권 신장에 기여하며 클래식음악 저변확대에 힘쓰고 있다.

2014년 1월 지휘자 임헌정이 제5대 예술감독ㆍ상임지휘자로 취임한 이후 매회 전석 매진을 달성, 깊이 있는 해석과 탄탄한 연주력으로 완벽한 호흡을 선보이며 최상급 오케스트라로 나아가고 있다.

Tchaikovsky, Symphony No.5 in E minor, Op.64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Yevgeny Svetlanov, conductor

USSR State Symphony Orchestra,

Suntory Hall, Tokyo

1990.06.03

Yevgeny Svetlanov/USSR State SO - Tchaikovsky, Symphony No.5 in E minor, Op.64

차이콥스키의 교향곡들, 특히 후반의 3곡(4, 5, 6번)은 한국인들에게 매우 사랑받는 레퍼토리입니다. 그의 교향곡을 미뤄뒀던 까닭은 겨울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추운 나라 러시아에서도 가장 추운 지역으로 손꼽히는 북쪽 지역, 한때 죄수들의 유형지로도 유명했던 보트킨스트에서 태어난 차이콥스키의 음악에는 추운 겨울에 들어야 제 맛이 나는 특유의 우울감이 있습니다. 특히 교향곡이 그렇습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러시아의 음악적 중심은 오래도록 교회음악이었습니다. 로마의 비잔티움 교회에 반발했던 러시아 정교회의 음악들이 18세기 말까지 러시아 음악을 대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연주됐던 음악은 물론이거니와 서민들이 즐겼던 민속음악에까지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이 뿌리 깊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18세기 중반에 러시아 궁정에 소개됐던 이탈리아 오페라도 왕족과 귀족들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습니다. 물론 당시 음악 산업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었던 영국 런던에서도 상황은 비슷했지요. 그만큼 18세기 중후반의 유럽에서 이탈리아 오페라의 파급력은 대단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탈리아류(流)’라고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보트킨스트에 있는 차이콥스키의 생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이에 대한 반발이 생겨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모든 사회문화적 현상에는 나름의 이유와 배경이 있습니다. 러시아인들의 마음속에 민족적 자의식을 갖게 한 계기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이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시련을 겪은 러시아에는 국가주의적 자의식이 싹트기 시작했고, 이런 상황 속에서 이른바 ‘국민음악파’로 규정되는 다섯 명의 음악가가 등장합니다. 나이 순으로 이름을 불러보겠습니다. 발라키레프, 보로딘, 큐이, 무소륵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입니다. ‘국민음악파’라는 규정은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고 당시에는 ‘모구차야 구치카’(강력한 소수파)라는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그들을 강력하게 옹호했던 음악비평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가 1868년에 붙여준 이름입니다. 살짝 미안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사실 이들 중에서 음악가로서의 독창성과 재능을 확실히 보여줬던 음악가는 두 명입니다. 바로 무소륵스키와 림스키코르사코프 정도라고 해야겠지요.

러시아 5인조. 왼쪽부터 발라키레프, 보로딘, 큐이, 무소륵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차이콥스키는 그들의 바로 다음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거의 동시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모구차야 구치카의 멤버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던 무소륵스키보다 1년 뒤에 태어났으니까요. 자, 어쨌든 당시 러시아의 문화적 분위기를 크게 둘로 나눠본다면 슬라브주의자들과 서구주의자들의 분열과 대립이라고 할 만한 양상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한쪽은 슬라브의 전통적 정신과 문화를 옹호하는 쪽이었고, 또 다른 한쪽은 서구의 발달한 제도와 문화를 빨리 수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지요. 그런 러시아의 상황 속에서 모구차야 구치카의 5인방은 슬라브주의에 가까운 성향을 보였던 음악가들이었습니다.

“내 음악은 러시아의 노래에서 나왔다”

그러면 차이콥스키는 어느 쪽이었을까요? 여러 정황으로 추정컨대 차이콥스키는 서구를 지향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그가 이탈리아를 동경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결혼에 실패한 그가 쫓기듯이 도피했던 곳도 바로 이탈리아였지요. 그런데 차이콥스키의 이런 서구 지향은 아주 어린 시절에 뿌리를 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그가 유년기에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배웠던 가정교사가 프랑스 여성 파니 뒤르바흐였습니다. 당시 러시아의 좀 산다 하는 집에서는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배우는 것이 상당히 유행이었지요. 한데 차이콥스키는 이 여자 선생님을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합니다. 4년간 함께 공부한 그녀와 헤어지고는 매우 힘들어했다고 전해지지요. 또 차이콥스키가 16살 무렵에 만났던 성악 교사는 이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 덕분에 차이콥스키는 서유럽을 친숙하게 느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울러 그가 서유럽의 음악가들, 예컨대 베를리오즈와 바그너, 리스트 등의 음악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니콜라이 쿠즈네초프가 그린 차이콥스키의 초상화, 1893

하지만 차이콥스키 음악의 독특함을 만들어내는 지점은 역시 러시아적 정서입니다. 차이콥스키가 겪었던 그 모든 교유 관계와 음악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에서 근간을 이루는 정서는 역시 ‘러시아의 노래’입니다. 교향곡에서도 물론 그렇지요. 차이콥스키의 교향곡들은 베토벤처럼 구조를 쌓아올리기보다는 모차르트처럼 선율에 보다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입으로 따라 부르기 좋은 선율이 빈번히 등장합니다. 게다가 그 선율들은 매우 러시아적이어서, 한국인이나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가슴으로 쉽게 밀려오는 본능적인 선율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동양적 정서’를 공유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내 음악은 러시아의 노래에서 나왔다”라는 차이콥스키의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생전의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조용한 곳에서 자라났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러시아의 대중적인 노래들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었다. 그리하여 러시아 정신의 모든 표현에 정열적으로 빠져 들어갔다. 간단히 말해 나는 철저히 러시아 사람이다.” 이화여대 출판부에서 십여 년 전에 번역ㆍ출판했던 <음악의 즐거움>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구절입니다. 차이콥스키가 동생 가운데 한 명에게 보낸 편지에 등장하는 문구라는데, 어떤 동생에게 보낸 편지였는지는 제가 미처 확인하질 못했습니다. 아마 막내인 모데스트가 아닐까 추정합니다. 차이콥스키는 형제 가운데 모데스트에게 가장 많은 편지를 썼지요. 하지만 정확하진 않으니 그냥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앞의 인용 구절은 제가 이런저런 강의에서 차이콥스키 음악의 요체를 설명할 때 자주 인용하는, 아주 좋아하는 문구입니다. 한데 이 책은 요즘 절판돼 구할 수 없는 모양입니다. 더 많은 분들이 읽을 수 없어 안타깝군요. 이 기회를 빌어 이화여대 출판부에 재판 발매를 권해봅니다. ▶<음악의 즐거움> 표지.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88), [출처: 위키피디아]

“시작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영감이 온 것 같습니다”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은 번호가 붙은 것이 모두 여섯 곡(1번부터 6번까지), 번호 없이 표제로 출판한 곡(만프레드 교향곡)이 한 곡입니다. 그중에서도 교향곡 5번 E단조 Op.64는 4번을 작곡하고 11년이나 세월이 흐른 뒤에 작곡했습니다. 왜 이렇게 늦어졌을까요? 객관적 사실로는 차이콥스키가 그 중간의 기간에 오페라 작곡에 많은 신경을 썼고 유럽 각지를 다니면서 여러 음악가들과 친교를 나눴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동분서주하느라고 교향곡을 작곡하지 못했다는 것은 왠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보다는 교향곡 작곡에 대한 자신 없음 때문이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잘 짜인 구성, 미묘한 관현악법을 적절하게 구사해야 한다는 교향악의 작곡 수법에 그는 매우 중압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1888년에 후원자였던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음악에 대한 형식을 파악하고 만들어내는 것에 대해 나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 때문에 평생 괴로워했습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것을 스스로 “선천적 약점”이라고까지 털어놓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독일-오스트리아의 고전주의 혹은 낭만주의적 수법에 대한 열등감이었을 겁니다. 교향곡 작곡의 대세이자 표준은 바로 그 지역이었으니까요. 말하자면 차이콥스키의 예술적 유전자였던 러시아적 감성, 자신의 음악이 “러시아의 노래에서 나왔다”는 고백은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었던 동시에 콤플렉스이기도 했던 셈입니다.

차이콥스키는 1888년에 러시아로 돌아오지요. 그 이전에는 주로 서유럽에 머물렀습니다. 연주여행이 많았던 까닭입니다. 러시아로 돌아오기 직전까지도 라이프치히, 함부르크, 베를린, 프라하, 파리, 런던을 한 바퀴 도는 연주여행을 치렀지요. 그 과정에서 브람스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로 돌아온 차이콥스키는 모스크바 북서쪽의 도시 클린((Klin) 근교의 전원마을 프롤로프스코예에 집을 마련합니다. 숲에 둘러싸인, 넓은 정원을 가진 저택이었다고 합니다. 차이콥스키는 그해 5월 동생 모데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여름에 교향곡을 한 편 쓸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한 달 뒤에는 후원자였던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향곡을 한 곡 쓸 생각이라고 말씀드렸는지요? 시작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영감이 온 것 같습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자, 교향곡 5번 E단조 Op.64를 듣기에 앞서 교향곡 4번을 잠시 복기해보겠습니다. 제가 이미 말했다시피 교향곡 4번의 1악장은 호른과 파곳이 연주하는 격렬한 팡파르로 시작합니다. 차이콥스키는 그것을 “이 교향곡 전체의 핵심이며 정수”라면서 “운명”이라는 말로 폰 메크 부인에게 설명했지요. 한데 차이콥스키의 ‘운명론’은 11년 뒤에 쓴 교향곡 5번에서 한층 짙어집니다. 이번에는 아예 장송행진곡 풍의 어둡고 무거운 운명을 첫머리에 등장시킵니다. 1악장 서주에서 클라리넷이 연주하는 음울한 선율이 그것입니다. 게다가 그 운명은 불가항력적으로 인생 전반을 지배합니다. 이 음울한 선율은 교향곡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악상으로 계속해 얼굴을 비춥니다.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

2악장은 안단테 칸타빌레(느리게 노래하듯이)로 시작하는 악장입니다. 현악기들이 이끄는 도입부에 이어 호른이 노래하는 인상적인 선율이 등장합니다. 뭔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애상감이 가득한 선율입니다. 여기에 다른 악기들이 가세하면서 선율이 점점 강력해지다가 다시 고즈넉해집니다. 이어서 클라리넷이 등장해 중간부의 선율을 이끌다가 드디어 운명의 악상이 강렬한 음향을 뿜어내며 작열합니다. 1악장의 첫머리에서 만났던 바로 그 암울한 선율입니다. 그렇게 폭발했다가 다시 원래의 고즈넉함으로 회귀하지요, 마지막 코다는 잦아들듯이 끝납니다.

반면에 3악장은 따뜻합니다. 왈츠 악장입니다. 차이콥스키가 즐겨 작곡했던 발레음악이 연상되는 몽환적인 느낌의 왈츠입니다. 3악장에 느닷없이 왈츠가 등장하는 것에 대해 초연 당시에도 이런저런 비판들이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의 관점에서는 아주 적절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 2악장이 춥고 암울했던 까닭에 3악장에서라도 뭔가 따뜻한 것을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혹독하게 추운 겨울, 성냥팔이 소녀가 그리워했을 따뜻한 불빛이 느껴지는 악장입니다.

이어서 1악장 서주의 주제 선율이 다시 등장하면서 마지막 4악장이 문을 엽니다. 애초에는 단조였던 선율이 장조로 모습을 바꿔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현악기들이, 이어서 관악기들이 웅장한 느낌으로 연주합니다. 팀파니가 으르렁대는 소리를 배경에 깐 채 광포한 분위기의 첫 번째 주제가 연주되고, 잘게 부서지는 음형들로 표현되는 두 번째 주제는 목관이 연주합니다. 무거운 1주제에 비해 두 번째 주제는 환한 분위기를 구사합니다. 그리고 잠시 뒤 1악장 서주에서부터 이 교향곡을 관통해 온 음울한 주제 선율이 당당하게 모습을 바꿔 다시 등장합니다. 아주 늠름한 행진곡풍입니다. 그래서 4악장에 내려진 일반적인 해석은 ‘운명을 극복한 승리의 행진’이라는 식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차이콥스키의 맨얼굴이었을까요? 어쩌면 차이콥스키는 이 마지막 악장을 쓰면서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Mravinsky/Leningrad Philharmonic - Tchaikovsky, Symphony No.5 in E minor, Op.64

Yevgeny Mravinsky, conductor

Leningrad Philharmonic Orchestra

Leningrad, USSR

1983.3.19

                         1983년 므라빈스키 80세 때의 연주

추천음반

1.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60, DG. 50년이 넘은 녹음이지만 언제 들어도 좋다. 호쾌하고 섬세하다.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악단의 호응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지는 명연이다. 구소련이라는 정치ㆍ사회적 배경 속에서나 가능했던 연주이니, 이제는 ‘역사적 녹음’이라고 규정해도 될 성싶다.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을 연주한 음반들은 지천으로 널려 있지만, ‘이 한 장의 음반’을 꼽는다면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이 연주야말로 가장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2.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75, DG. 음질을 중시하는 경우라면 카라얀의 1970년대 음반을 권한다. 생전의 카라얀은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을 일곱 차례 녹음했는데, 1971년에는 EMI에서, 1976년에는 DG에서 녹음했다. 모두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한 녹음이다. 어느 것을 선택해도 무방하나 오늘은 DG의 음반을 권한다. 치밀한 합주력이라는 측면에서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에 버금갈 만한 연주라고 할 수 있다. 화려하고 세련된 연주다. 하지만 러시아적 야성이라는 음악의 본질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P.S.] 개인적으로 즐겨 듣는 음반은 예브게니 스베틀라노프가 소련국립교향악단을 지휘한 1990년 녹음(Pony Canyon)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두 번 들었습니다. 도쿄 산토리 홀에서 가졌던 실황입니다. 질풍처럼 내달리는 연주입니다. 스튜디오 녹음과는 맛이 다른 흥분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마지막에 터져 나오는 ‘브라보!’와 박수소리도 음악입니다. 음질도 좋습니다. 현재 절판 상태이지만, 눈에 띄면 망설이지 말고 구입해도 좋은 음반입니다.

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대학 시절부터 클래식 음반을 쫓아다닌 음악 애호가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 관현악과 피아노 독주다. 오랫동안 경향신문에 음악 비평을 써 왔으며, 채널예스에 음악 칼럼 ‘내 인생의 클래식 101’, 서울시향의 기관지 SPO에 ‘20세기 음악 산책’ 등을 연재하고 있다. 경향신문사에서 문화부장을 두 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 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저서에 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저서에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돌베개, 2013), <더 클래식: 바흐에서 베토벤까지>(돌베개, 2014)가 있다.

출처 : 문화웹진 채널예스 칼럼>음악>'내 인생의 클래식' 101 2013.12.16

http://ch.yes24.com/Article/View/23985

 

슈만, 첼로 협주곡 Schumann, Cello Concerto Op. 129 특성 | 환상곡풍의 스타일로서 세 악장이 쉼없이 연주되는 단악장 형식<br>
	정보 | 1850년 10월 10일부터 24일 사이, 단 2주만에 작곡을 끝냈다.

슈만이 작곡한 세 곡의 협주곡 중 가장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첼로 협주곡은 대체로 외면적으로 화려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독주부와 관현악부가 일체가 되어 슈만 특유의 시적이고 상상력 넘치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첼로 협주곡 A단조] Op.129는 이러한 특질을 가장 잘 띄고 있는 작품으로서, 독주악기의 존재감을 화려하게 드러내보이지 않고 관현악 속으로 자연스럽게 몰입시킨 점이 다른 첼로 협주곡들과의 다른 점이기도 하다. 외향적인 성격보다 내면적인 모습, 그리고 내면으로의 침잠이 아니라 외면을 향해 용솟음치는 고양감을 그러낸 작품인 만큼 독주자로 하여금 세심하면서도 대범한 연주기법과 상상력 풍부한 표현력을 요구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Jacqueline du Pre plays Schumann's Cello Concerto in A minor (Op.129) (FULL)

 

 

독주 악기로 부각되기 시작한 첼로의 가능성

 

슈만 역시 첼로를 위한 협주곡을 작곡하는 데 많은 고민과 시간을 거쳤음이 분명하다. 협주곡을 작곡하지 않았던 슈베르트는 예외로 치더라도, 그의 선배격인 모차르트나 베토벤은 물론이려니와 동시대 동료인 리스트나 쇼팽, 멘델스죤, 브람스 등등 역시 첼로 협주곡을 작곡하지 않았다. 19세기에 들어서자 바이올린과 마찬가지로 첼로를 위한 작품 수는 점차 감소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낭만주의 시대의 작곡가들은 당시에 유행했던 피아노를 반주로 사용함으로써 첼로라는 악기의 가능성을 독주악기로서 개성을 발휘하게끔 이끌었다.

베토벤, 브람스, 쇼팽 등이 작곡한 첼로 소나타들의 경우가 바로 그 예다. 첼로는 독주악기로서, 그리고 오케스트라에서 사용되는 가장 서정적인 악기가 되었다.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에서의 환상적인 레치타티보도 그러하거니와 브람스의 교향곡에서도 선율을 주도하는 악기는 바로 첼로였다. 더군다나 브람스는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2중 협주곡]에서도 첼로의 역할과 비중을 높게 할애해 독주 악기로서 첼로가 가진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했다.

19세기 초중반은 첼로라는 악기에 대한 비르투오소적인 관점이 팽배해지던 시기였다.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 이후 첼로에 대한 관심은 본격적으로 증폭되기 시작했다. 생상스, 랄로를 비롯하여 미요, 뒤티외, 포레, 댕디, 미요, 뿔랑, 프로코피에프, 쇼스타코비치, 브리튼 등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첼로에 대한 탐구는 계속되었다. 특히 드뷔시의 [첼로 소나타]와 코다이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 달라피콜라크세나키스 등의 작품들은 첼로에 대한 풍부한 가능성과 표현력을 확장시킨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가운데 슈만의 [첼로 협주곡]이야말로 그 기법과 표현력, 형식면에 있어서 선구자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첼로라는 악기는 첼로 협주곡을 작곡하기 이전부터 슈만에게 있어서 대단히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슈만과 첼로는 대단히 극적이며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그 인연은 슈만의 마지막 작품과 관련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마지막 작품은 피아노 작품으로, 1853년 10월 15일부터 18일 사이에 작곡한 [아침의 노래 gesänge der frühe] Op.133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작 슈만의 마지막 관심 대상은 바로 첼로였다. 1853년 11월 뒤셀도르프에서 작곡한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로망스]라는 작품이 슈만의 진실된 마지막 작품인 것이다. 슈만이 세상을 뜬 뒤 40여 년이 지난 1893년에 클라라 슈만은 요하임의 권유로 이 작품을 불에 태워 파기해버렸는데 만약 이 작품이 지금까지 전해졌다면 슈만의 천재성이 최고도로 발휘된 감동적인 걸작으로 평가받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사망 전마지막 행복한 시기에 작곡된 작품

1849년에 슈만은 괴테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드레스덴에서 체류하고 있었다. 슈만은 오랫동안 공을 들였던 괴테의 [파우스트]에 의한 같은 제목의 극음악을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바이마르에서 공연했다. 당시는 슈만에게 있어서 풍부한 결실의 해로서 수많은 합창곡과 관악기용 작품이 탄생했다. [피아노와 호른을 위한 네 개의 행진곡] Op.76, [피아노와 클라리넷을 위한 환상 소곡집] Op.73, [네 개의 호른과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체르트슈튀크] Op.86 등이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동안슈만은 마음 속으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진정한 음악가를 만날 수 없다는 이유로 이 도시를 떠난 슈만 부부는 운 좋게도 1850년 가을 뒤셀도르프에 새로운 음악 감독으로 부임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라인란트 지방의 자유롭고 친절한 분위기가 슈만 부부로 하여금 행복한 나날을 꿈꾸게 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클라라는 남편이 지휘대에 오르게 된 것을 진정으로 기뻐했다. 이렇게 작곡과 연주 모두에서 로베르트는 진정한 음악적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독일 본에 위치한 슈만과 클라라의 무덤. [첼로 협주곡]은 슈만 말년의 원숙한 음악성이 발휘된 곡으로 특히 2악장의 깊은 서정성이 인상적이다.(좌)

로베르토 & 클라라 슈만 부부. [첼로 협주곡]은 슈만 부부가 뒤셀도르프로 거처를 옮겨 행복한 시기를 보낼 당시에 작곡된 작품이다.(우)

 

바로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11월과 12월에 작곡한 [라인 교향곡]과 더불어 [첼로 협주곡]을 꼽을 수 있다. [첼로 협주곡]은 그가 라인강에 투신자살을 시도하기 4년 전, 그리고 46세의 나이로 엔데니히 정신병원에서 숨져가기 6년 전인 1850년에 작곡한 작품이다. 슈만은 1850년 10월 10일부터 24일 사이, 단 2주만에 작곡을 끝냈다. 안타깝게도 슈만은 생전에 이 작품이 연주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1851년 3월 23일 크리스티안 라이머(Christian Reimers)가 솔로 파트만을 리허설했을 뿐, 전곡이 온전한 형태로 대중들 앞에서 연주되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 곡의 초연은 그가 세상을 뜬 4년 뒤인 1860년 6월 9일,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에서 열린 슈만 탄생 50주년 기념행사에서 비로소 루드비히 에베르트(Ludwig Ebert)의 독주로 이루어졌다.

이 작품은 첫 제시부의 긴 길이와 도입부의 초절기교적인 테크닉 때문에 슈만의 모든 작품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대범하고 모험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자필 악보를 보면 슈만은 협주곡이라기보다는 콘체르트슈튀크(Konzertstück)라고 명시해 놓고 있다. 이는 전통적 관점의 협주곡 양식과 결별해 작곡가 카를 베버로부터 비롯한새로운 장르인 콘체르트슈튀크와 첼로의 가능성을 발전시키고 싶어했음이 분명하다. 그의 다른 협주곡들과 동일하게 이 [첼로 협주곡] 역시 환상곡풍의 스타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 악장이 쉼없이 연주되는 단악장 형식을 취하고 있다. 슈만은 악장 사이에 박수가 나오는 것을 혐오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협주곡에 악장 구분을 없앤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짧은 오케스트라 도입부에 이어 첼로의 독주가 시작되고, 이후 서정적인 멜로디를 따라 오케스트라와 첼로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3악장 론도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음향과 개성적인 리듬을 만들어간다. 최근에는 마지막 코다 전에 등장하는 마지막 반주가 따르는 카덴차를 연주가 자신이 임의로 작곡한 무반주 카덴차를 등장시키기도 한다. 물론 슈만이 악보에 카덴차를 바꾸어 연주해도 된다고 지시한 사항은 아니다.

추천음반

슈만의 첼로 협주곡은 예로부터 훌륭한 연주가 많이 존재해왔다. 그 가운데 엔리코 마이나르디의 DG 레코딩(Spectrum)은 풍부한 서정성과 투명한 음색으로 이 작품의 목가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해낸 역사적인 녹음으로 손꼽을 만하고, 야노슈 슈타커의 녹음(Mercury)은 이 작품의 에너지감과 고전적 형식미를 정확히 읽어낸 호연 가운데 호연으로 그 명성이 이어져내려왔다. 모리스 장드롱의 우아하고도 귀족적인 녹음(Testament)도 개성적인 뿐만 아니라, 나탈리 구트만과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연주(DG)는 이 작품의 모든 디테일에 영혼을 불어넣은 현대적인 연주로 적극 추천한다.

 

글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66&contents_id=2962
박제성 | 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써 온 음악 칼럼니스트 공연, 방송, 저널활동, 음반리뷰, 음악강좌 등 클래식 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서울문화재단 평가위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