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클래식 2014년)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 사이클/교향곡 7번/임헌정,코리안심포니/11.21/예술의 전당

나베가 2014. 11. 21. 17:29

 

 

프로필

임헌정

지휘자 임헌정은 끊임없는 도전과 열정으로 청중과 비평가 모두를 사로잡으며,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스트라빈스키, 쇤베르크, 바르토크, 베베른 등의 작품들을 초연하며 국내 클래식계의 새로운 활력소를 불러 일으켰으며,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전곡 연주를 시작으로 베토벤, 슈만, 브람스, 브루크너 교향곡에 이르기까지 혁신적인 프로그램을 통해 한 작곡가를 깊이 있게 소개하는 동시에 꾸준히 음악계에 화두를 던져왔다. 특히 그는 1999년부터 2004년까지 5년간 국내 최초로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를 펼쳐내며 `말러 신드롬`, `말러 붐` 열풍을 불러일으키는 대 사건을 만들어냈다. `지휘대의 탐험가`, `클래식 음악에 대한 편견의 벽을 무너뜨린 인물` 등 그를 수식하는 단어들이 증명하듯 동아일보로부터 국내 음악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국내 최고의 지휘자`로 한겨레신문이 기획한 우리 사회 각 분야의 개혁성과 전문성을 갖춘 인사 중에서 `한국의 미래를 열어갈 100인`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한국음악협회 `한국음악상`,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우경문화예술상`, `서울음악대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대통령상)`, `대원음악상 특별공헌상`을 수상하며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끊임없는 도전을 증명하였다. 또한, 25년간 이끌어온 부천필에게 음악단체로는 처음으로 한국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호암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서울대 음대 졸업 이후 미국 메네스 음대와 줄리어드 음대에서 작곡과 지휘를 공부한 후 서울대 작곡과 지휘 전공 교수로 29년째 재직하고 있다. 현재 한국 지휘자 협회 이사직을 겸하고 있는 그는, 코리안심포니 제5대 예술감독으로 새롭게 음악의 인생을 펼치며 또 다른 교향악의 역사를 시작하려 한다

 

연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1985년 3월 30일 창단된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는 지난 29년의 역 사 속에서 연간 90회 이상의 공연을 통하여 국내 교향악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1987년부터 국립극장과 전속 계약을 맺고 국립오페라단, 국립발레단, 국립합창단 등의 공연을 통해 대한민국 유일의 오페라와 발레 전문 오케스트라로 인정받으며 전문성을 확보해왔다. 1989년 문화체육부로부터 사단법인 단체로 승인 받은 이후, 2001년 3월 창단 16주년을 맞아 재단법인으로 탈바꿈하면서 예술의전당 상주오케스트라로 새롭게 출발하였다. 이후 <11시 콘서트>와 같은 예술의전당 대표 프로그램을 연주하며 관객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가고 있다. 1985년 창단 이후 현 재까지 국내 클래식 음악계의 선 굵은 연주회는 물론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를 위하여 다양한 기획공연과 함께 많은 무대에 서고 있다. 2013년 제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는 오케스트라로서는 유일하게 무대에 섰고, 2013년 덕수궁 고궁 음악회, 1989년과 1990년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5천명 합창단과 함께 <대합창 연주회>를 진행하는 등 화제의 공연을 이루어낸 바 있다. 2011년 국립 오페라단의 국내 초연작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 2013년 <파르지팔> 등은 평론가와 관객으로부터 극찬을 받았으며, 2012년 전석 매진을 기록한 <카르멘> 역시 호연으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안젤라 게오르규, 라두 루푸 등 세계적인 음악가들의 내한 시에도 함께 연주하였으며, 클래식 음악뿐 아니라 영화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 OST를 녹음하였고, 세계적인 팝 스타 `스팅` 내한 공연 등을 통하여 다양한 무대에서 관객과 만나고 있다. 연간 5회의 정기연주회와 함께 2011년부터 새롭게 선보이는 기획시리즈 <키즈콘서트>, <라이징스타> 등은 많은 팬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또한 2010년부터 국립예술단체와 함께한 방방곡곡 문화공감 사업을 통하여 전국 문화소외지역을 찾아 클래식음악 저변확대에 힘쓰고 있다. 초대 음악감독인 홍연택을 시작으로 제2대 김민, 제3대 박은성을 이어 제4대 최희준과 함께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였으며, 2014년 1월 지휘자 임헌정이 제5대 예술감독·상임지휘자로 취임하며 최상급 오케스트라로 나아가고 있다.

 

 

Wagner: Tannhäuser Overture - Thielemann / Münchner Philharmoniker

 

 

Tannh?user Overture

바그너: "탄호이저" 서곡

RICHARD WAGNER 1813~1883

작품 배경 및 개요

바그너의 작품은 베르디나 푸치니 등 이탈리아 오페라에 비해 장대한 것이 많아서 입문자들이 쉽게 친숙해지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바그너의 작품에 친숙해지려면 우선 그 서곡이나 전주곡부터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서곡이나 전주곡들은 오페라나 악극과는 별도로 연주회에서 단독으로 자주 연주되는데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전주곡,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서곡,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 그리고 "탄호이저" 서곡등이 자주 연주된다. 이중 특히 "탄호이저"는 오페라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해주는 정교한 구성, 낭만적이면서도 숭고한 힘이 느껴지는 멜로디를 가지고 있어서 서곡만 따로 연주되는 경우가 가장 많으며 바그너의 관현악곡 중 가장 유명하다.

서곡의 모체가 되는 오페라 "탄호이저"는 바그너의 명성을 전 유럽에 확고부동하게 만든 걸작이다. 이 작품은 그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몇가지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로는 이탈리아 오페라 형식을 탈피하려 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전의 작품인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서도 여전히 사용했던 번호 형식의 아리아 배열 (한곡 한곡이 각각 독립되어 있으며 배열순서에 따라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는 형식)을 버린 것이 대표적인 사항이다.

둘째로 바그너는 이후의 그의 작품들이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탄호이저" 여러 곳에서 암시하고 있다. 바그너는 음악, 특히 주인공의 독창이 중심이었던 과거의 오페라의 전통을 뛰어넘어 음악과 연극, 무대연출 등이 모두 유기적으로 통일되는 새로운 형식을 창출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각 장면마다의 음악이 서로의 시작과 끝이 잘 구분되지 않고 시종일관 끊어짐 없이 계속 연결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무대위의 연극내용이 음악 때문에 단락별로 끊어지지 않고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통일되도록 하는 기법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이 소위 '무한선율'이라고 불리우는 작곡기법이다. 이러한 무한선율의 진행을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라이트모티브 (시도동기)'가 필요하게 된다.

작품의 구성

서곡은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운데에 관능적인 베누스베르크의 세계가 배치되고 그 앞뒤로 경건한 순례자들의 합창 음악이 배치되어 있다 - 3부 형식은 이 오페라 전체의 기본 형식으로 각각의 막과 장은 모두 3부 형식을 취한다.

곡의 제 1부는 안단테 마에스토소, E장조, 3/4박자로 장엄한 '순례의 합창'이 먼저 관악기 합주로 시작된다. 이어서 현악기가 들어와 이 주제가 반복되면서 차차 음량이 커지고 트롬본으로 다시 장엄하게 연주된다. 이 모티브가 여러번 연주되고 난뒤 멀리 사라져가듯이 목관군으로 조용히 연주된다.

제 2부는 갑자기 알레그로, 2/2박자로 바뀌어 베누스베르크의 요염한 세계가 뚜렷해지며 '환락의 동기'가 먼저 비올라에 나타난다. 이어서 '시레네의 부르는 소리'가 목관으로 연주된 다음, 처음 템포로 돌아와 현악기로 힘차게 '베누스 찬가'가 연주된다. 그 뒤 첼로, 바이올린, 클라리넷 등으로 '베누스의 동기'가 나타난다. 이어서 '유혹의 동기'가 바이올린에 나타나고 음악이 계속 고조되다가 베누스베르크의 세계는 멀리 사라져간다.

이제 제 3부로 넘어오면서 관악기로 '순례의 합창'이 들려온다. 이 합창이 한층 힘차고 장엄하게 연주되면서 곡이 끝난다.

 

오페라 탄호이저(Tannhauser) 줄거리

작 곡 : 바그너(R. Wagner 1813-1883)
대 본 : 작곡가가 씀 (독일어)
등장 인물 : 탄호이저 (테너)
볼프람 폰 에센바흐 (바리톤)
헤르만 (Hermann, 튀링겐의 영주) 바리톤
엘리자베트 (Elizabeth, 헤르만의 조카딸) 소프라노
베누스 (Venus, 사랑의 여신) 소프라노
그밖에 귀족, 기사, 귀부인, 순례자, 요정, 주신의 시녀들 등
때 와 곳 : 13세기 독일 튀링겐
초 연 : 1845.10.19. 드레스덴
주요아리아 :
노래의 전당 (Dich, theure Halle)
볼프람의 아리아 (Blick'ich umber)
엘리자베트의 기도 (Elisabeths Gebet)
저녁별의 노래 (O! du mein holder Abendstern)
순례자의 합창

-제 1 막 -

베누스베르크의 산속 베누스의 궁전으로, 기사이며 음유 시인인 탄호이저가 베누스의 무릎에 기대어 누워있다. 그는 밤낮을 모르고 주지 육림에 빠져 있었다. 이때 사이렌(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뱃사름을 유혹하여 난파시킨 마녀)의 합창소리가 울려 퍼지고, 고조된 베누스베르크 산의 음악이 들려온다. 그러나 이제 그는 향락에 권태를 느껴 지상의 세계를 동경한다. 베누스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하면서도 좀더 기쁨을 나누자며 그를 유혹한다. 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결국에는 다시 자기에게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그의 뜻대로 내버려 둔다. 장면은 바뀌어, 바르트부르크의 계곡이다. 평화스럽기 그지없는 대지를 바라보며 탄호이저는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길가의 십자가에서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린다. 이때 순례자의 행렬이 로마를 향해 지나간다. 탄호이저는 이들을 따라 가기로 마음을 먹는데, 마침 볼프람과 사냥하는 몇몇 무리들이 영주와 함께 들어온다. 볼프람이 그에게 한 가지 사실을 일러주는데, 그가 "그대의 고귀한 노래(Als du in kuhnem s ange)"를 남기고 떠난 이래로 엘리자베트는 전과 같지않으며 영주는 다가올 노래 경연에서 우승자를 그녀의 약혼자로 내정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탄호이저는 그들과 함께 바르트부르크로 되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들은 서로 흥겹게 어울리는데, 탄호이저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빼어나며 행복이 흘러 넘쳐 보인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사냥할 때 부는 호른소리에 맞추어 길을 떠난간다.

- 제 2 막 -

바르트부르크의 음유시인들이 모여있는 성안이다. 엘리자베트가 등장하여 유명한 아리아 "노래의 전당 (Dich, theure Halle)"을 부른다. 그때 볼프람이 탄호이저와 함께 다가온다. 탄호이저는 엘리자베트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그녀는 그가 돌아왔음을 기뻐한다. 그 두 사람이 기쁨으로 새 생활에 대한 2중창을 부를 때, 엘리자베트를 연모해 오던 볼프람은 단념의 노래를 부른다. 잠시 후 그들이 떠나고 영주가 나타난다.영주는 노래 경연 개막을 선포하면서 엘리자베트는 노래 경연의 우승자와 결혼하게 된다는 것을 밝힌다. 그녀는 그 사람이 탄호이저이기를 기대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축제 행진곡"이 트럼펫의 웅장함으로 울린다. 이어서 음유시인들이 차례로 순수한 사랑의 기쁨을 표현하는 노래를 부른다. 볼프람이 첫번째 순서였다. 그는 잔잔하게 사랑을 찬미하는 아리아 "볼프람의 아리아 (Blick' ich umher)"를 남자답게 노래한다. 다음은 탄호이저로 육감적인 사랑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베누스에 대한 찬미로 이어지자 청중들은 술렁 대기 시작하고 격분한 기사들은 칼을 빼어들고 결투하려고 달려든다. 탄호이저 스스로 베누스를 그리워하는 노래를 하여 자신이 베누스베르크에 있었다는 것이 폭로되고 만 것이다. 볼프람은 사람들을 진정시키려고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기사들은 탄호이저를 죽이려 하는데 엘리자베트가 간곡하게 목숨을 애걸한다. 그녀의 간곡한 부탁으로 기사들은 무기를 놓게 되고, 탄호이저는 후회를 한다. 영주는 탄호이저에게 죄의 사함을 받기위해 로마 순례 여행을 명한다. 계곡에서 순례자의 합창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탄호이저는 자책하며 달려나가 순례자들에게로 간다.

- 제 3 막 -

살결이 우유빛처럼 고운 엘리자베트가 하얀 옷을 입고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드린다. 탄호이저가 베누스베르크를 떠날 때 기도를 드렸던 그 십자가 앞이다. 볼프람은 그녀를 찬찬히 지켜보는데, 사실 그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유명한 "순례자의 합창" 소리에 맞추어서 순례자의 악대가 무대를 가로질러 간다. 모두들 로마로부터 돌아온 것이다.엘 리자베트는 탄호이저를 찾지만 그는 그들 틈에 끼어있지 않았다. 그녀는 실망하여 자기 연인의 영혼을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하면서, 죄를 용서받는다 면 자기의 목숨은 버려도 좋다는 내용의 유명한 아리아 "엘리자베트의 기도 (Elisabeths Gebet)"를 부른다. 볼프람은 자신과의 동행을 거부하고 가버린 그녀를 생각하며 "저녁별의 노래 (O! du mein holder Abendstern)"를 부른다. 이 내용은 생명의 종말이 가까운 엘리자베트를 굽어 살펴 달라는 것으로 별을 바라보며 간구한다. 이때 기진맥진하면서 탄호이저가 병이 난 발을 끌고 들어온다.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는 그는 볼프람에게 비켜서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로마의 이야기 (Romerz-ahlung)"를 부르는데, 그 내용은 자신이 로마에 가서 죄의 사함을 받고자 빌었지만 교황은 그의 나무지팡이에 잎이 돋고 꽃이 피어야만 용서받을 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곧 탄호이저가 용서를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지은 죄를 참회하고 견딜 수 없는 격심한 고통을 감내할지라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볼프람은 그를 위로하면서, 성스러운 엘리자베트가 탄호이저의 마음을 되돌려서 베누스베르크 산의 잔영과 베누스의 유혹적인 목소리를 그의 가슴속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면 용서가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횃불을 든 행렬이 지나가는데 그것은 엘리자베트의 장례 행렬로서 그녀의 유해가 보인다. 탄호이저는 "성스러운 엘리자베트, 나를 위해 기도해 주오"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그녀의 관 옆에서 죽어간다. 그때 순례자의 일행이 꽃이 핀 교황의 지팡이를 가져오는데 놀랍게도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 교황의 지팡이에는 꽃이 만발해 있었다. 탄호이저의 구원을 알리는 합창이 울려 퍼지면서 막이 내린다.<출처 : 쿠키의 뮤직세계>

 

공연후기....

 

11월18일,19일양일 얀손스가 이끄는 독일 명문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연주가 있었다. 

이처럼 엄청난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은 뒤....

한동안은 공연을 안보는게 더 나을때도 많다.

평소엔 잘 못 느끼던 연주가 너무나 확연히 다름을 느껴서.

그러나 오늘 코리안 심포니의 연주는 포기하기 힘들었다.

 

브루크너 곡이라면 실황 연주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기도 하고,

우리나라 공연계에 말러 전곡 연주를 성공리에 마쳐 말러 붐을 일으켰고,

이어 브루크너에 도전한 최고의 지휘자 임헌정과의 연주였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오늘 프로그램인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은

그가 처음으로 빈에서 음악가로 인정받은 곡이기도 하고, 부르크너 삶에서 가장 큰 기쁨을 준 곡이기도 했기에 더욱 그러하다.

 

혹시 너무 실망하면 어쩌나...싶기도 했지만 다행히 오늘 공연이 실황 녹음을 할 예정이라고 하니,

이들의 많은 연습량을 생각해 보건데 일단 좋은 연주를 기대해도 될듯하다.

 

첫곡으로 연주된 바그너 '탄호이저 서곡' 또한 워낙 유명한 곡이라서 자칫 쉽게 귀에 거슬릴 수 있는데, 혼이 좀 약한거 말고는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고

인터미션후 시작된 브루크너 7번은 기인 연주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짐 없이 좋은 연주를 들려 주었다.

18,19일 연주탓일까...

아무래도 관이 좀 약하다 싶긴 했지만, 워낙 어려운 파트이고 또 그만큼 브루크너 곡에서는 절대적인 큰 부분을 차지한 연주자들이니,

연주가 끝나고 가장 먼저 바그너 혼 파트에게 칭찬의 박수를 보낸다.

이어서 혼, 트럼펫, 트롬본...

그리고 여늬 연주와는 달리 그 다음이 목관파트다.

역시 브루크너는 빵빵하게, 또는 애닳게 연주되는 금관파트가 생명이다.

 

특히 2악장은 바그너를 추모하는 곡으로 작곡되어서인 지, 빨려들듯 거인에 대한 애닳음과 웅장함이 있다.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오기 힘든 가장 흡인력이 강한 멋진 악장이다.

 

그런데 공연내내 왜 그렇게 가슴이 아파왔는 지....

쇼스타코비치에게서 느껴지는 매혹적인 아름다움은 한 순간도 느낄 수가 없었다.

감당하기 벅한 거대한 선율속에서 그의 고독한 음악에의 투쟁이 느껴져서 였을까...

범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음의 세계속에서 그가 감당해내야만 했던 시련들이 그대로 내게 파고 들어서 였을까....

 

4악장에서야 폭발하는 오케스트라 선율속에서 아팠던 마음이 뚫리는 듯 했다.

엄청난 에너지...

엄청난 쓰나미였다.

 

연주가 끝나고 임헌정은 자신의 연주자들에게 넘치는 박수를 보냈다.

참 잘해냈다는 격려와 사랑의 메세지라고 할까....

 

문득 정명훈 지휘자가 처음 서울 시향을 맡고나서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그도 늘 그랬다.

'잘했다고.....'

 

자신의 박수로도 모자라 객석에 손짓을 하며 모두 일으켜세워 기립박수를 쳐주도록 해 서울 시향의 노력를 칭찬해 주었었다.

지금은 일부러 그리하지 않아도 기립박수는 물론이고, 티켓 사기도 힘든 서울 시립 오케스트라가 되었다.

서울 시향은 2014년 영국 BBC 프롬 연주에 일본 다음으로 아시아 처음으로 초청되서 6천명 관중의 기립박수를 받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도 부천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명실상부 우리나라 최고의 오케스트라 반열에 올린 임헌정을 만났으니

그리 되기를 기대해 본다.

앞으로 남은 브루크너 전곡 연주에 거는 기대도 크다.

 

 

 

Bruckner, Symphony No.7 in E major

브루크너 교향곡 7번

Anton Bruckner

1824-1896

Eugen Jochum, conductor

Royal Concertgebouw Orchestra

Hitomi Memorial Hall, Tokyo

1986.09.17

 

Eugen Jochum/Royal Concertgebouw Orchestra - Bruckner Symphony No.7 in E major

 

지난 회에 들었던 브루크너의 교향곡 4번에 이어 오늘은 7번을 듣겠습니다. 이 두 곡은 브루크너가 남긴 교향곡 중에서도 오늘날 가장 많이 좋아하는 음악일 겁니다. 4번은 앞서 설명했듯이 ‘낭만적’이라는 표제가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측면이 있고, 브루크너의 다른 교향곡들에 비해 음악의 구조가 좀 더 간명하고 곡의 분위기도 비교적 밝습니다. 그런데 7번은 왜 인기가 있는 걸까요? 그에 대한 해답은 아마 느린 2악장에 있을 겁니다. 바그너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작곡한 것으로 알려진 약 20분가량의 긴 악장이지요. 듣는 순간에 곧바로 가슴을 파고드는 아름다운 선율이 등장합니다. 누구라도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을 겁니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에서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면서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저는 지금, 지휘자 오이겐 요훔(1902-1987)이 1965년에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해 녹음한 LP를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 지휘자는 같은 시기에 활약했던 카라얀이나 카를 뵘 등의 유명세에 가려져 이름이 덜 알려진 측면이 있지요.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요훔에게 더 마음이 갑니다. 특히 말년에 녹음한 음반의 표지에 실려 있는 그의 사진들을 보노라면, ‘아, 이렇게 늙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들곤 합니다. 엄격하면서도 온화한 표정이 참으로 인상적이지요.

음악도 그렇습니다. 그의 음악은 엄격함과 온화함의 조화를 보여줍니다. 예컨대 젊은 시절의 요훔을 극찬했던 선배 지휘자 푸르트벵글러(1886-1954)와 비교해보면 음악적 해석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푸르트벵글러는 음악이 무엇보다 시간의 예술이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줬던 지휘자였지요. 그에게 텍스트의 고정 불변성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는 해석, 다시 말해 낭만성과 즉흥성이 강한 연주를 들려줬다고 할 수 있지요. 반면에 요훔의 해석은 주지적이고 치밀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토스카니니(1867-1957)처럼 ‘악보에 있는 그대로’를 강조하면서 독재자로 군림한 지휘자는 아니었습니다. 훨씬 유연했다고 볼 수 있지요. 게다가 브루크너의 교향곡, 그중에서도 7번은 요훔에게 아주 특별한 레퍼토리였습니다. 스물네 살이던 1926년 뮌헨 필하모니를 지휘하면서 데뷔했는데, 이때 연주했던 곡이 바로 브루크너의 7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후에도 평생토록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자신의 대표적 레퍼토리로 삼았고 독일 브루크너 협회의 회장을 지내기도 했지요. 그래서 저는 적어도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을 들을 때면 요훔의 음반을 가장 자주 꺼내 들곤 합니다.

바그너 신봉자로 ‘공공의 적’이 된 브루크너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교향곡 7번

자, 지난 회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브루크너는 1868년에 음악의 도시 빈에 들어섭니다. 마흔네 살이었을 때입니다. 이때부터 교향곡 작곡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상당히 늦은 나이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요즘 세상에서는 마흔두 살 정도면 젊은 축에 속하겠지만 옛날에는 사정이 많이 달랐지요. 모차르트와 슈베르트처럼 거의 요절한 음악가들은 물론이거니와 베토벤이 수많은 걸작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은 57세였을 때, 요즘으로 치자면 한창 일할 나이였습니다. 또 말러가 10번 교향곡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난 시기도 쉰 살을 갓 넘겼을 때입니다. ▶성 플로리안 수도원. 브루크너는 어렸을 때 이곳 소년 성가대원으로 활동했고, 나중에는 오르간 연주자로 봉직했다. 이 수도원에는 브루크너 오르간(사진 전면 위), 브루크너의 방 등 그를 기념하는 것이 많으며 지하에는 그의 무덤이 있다.

브루크너는 그렇게 뒤늦은 나이에, 날고 긴다는 음악가들의 각축장이었던 빈으로 옵니다. 그때부터 72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28년 동안 빈의 음악가로 삽니다. 하지만 순탄치 않았지요. 빈의 주류 음악가들은 안스펠덴 출신의 촌뜨기를 대놓고 무시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브루크너는 요즘 말로 ‘듣보잡’이었지요. 게다가 브루크너는 사교와 정치에 서툰 사람이었습니다. 주류 사회를 비집고 들어갈 만한 세련된 매너와 화술을 전혀 갖추지 못한, 그야말로 ‘촌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브루크너가 빈에 도착했을 무렵, 당시 음악계는 두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지요.

한편에는 브람스를 지지하는 정통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바그너의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찬양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19세기 음악사의 마지막 논쟁을 대변하는, 브람스파와 바그너파의 대립이 치열한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한데 지난 회에도 언급했듯이 브루크너는 바그너 신봉자였습니다. 우직한 성품의 그는 대놓고 바그너 편을 들었지요, 당연히 그 반대파로부터 험한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음악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1825-1904)의 브루크너 비판은 집요하고 노골적이었습니다. 브람스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그는 브루크너를 아예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버렸지요. “음악적 논리가 결여돼 있고 표현이 부자연스러운 엉성한 음악” “바그너를 숭배하는 노예” 등의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물론 브루크너를 공격했던 인물들은 그밖에도 많습니다. 하지만 브람스 진영을 대표했던 평론가 한슬리크, 당대에 상당한 음악적 권력을 휘둘렀던 그의 악평은 브루크너를 꽁꽁 옭아매는 사슬로 작용했습니다. 그 덕분에 브루크너는 빈에서 고생이 막심했지요.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음악적으로도 그랬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빈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로 손꼽히는 빈 필하모닉은 한때 브루크너의 교향곡 연주를 아예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가요? 적어도 교향곡이라는 장르에 국한하자면, 브루크너는 같은 시기에 활약했던 음악가 브람스를 오히려 능가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브람스는 브루크너보다 9살 연하이지만, 슈만의 지지와 후원을 받았던 그는 브루크너가 빈으로 들어섰을 때 이미 음악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지요. 브루크너가 빈에 발을 들여 놨던 1868년에 브람스는 <독일 레퀴엠>을 발표해 대성공을 거둡니다. 하지만 1897년에 64세로 세상을 떠난 그는 교향곡 분야에서 4곡의 음악을 남기는 데 그쳤지요. 반면에 브루크너는 빈에서 살던 28년 동안 교향곡 2번부터 9번까지(마지막 악장은 미완), 모두 8곡을 작곡합니다. 물론 두 사람의 교향곡은 개성과 색감이 많이 다르지요. 회색빛 우울함을 주조로 삼고 있는 브람스의 교향곡에 견주자면, 금관악기를 전면에 내세운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은 훨씬 찬란한 음색을 구사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빈의 음악계에서 오래도록 조롱의 대상이었던 브루크너에게 마침내 한 줄기 햇살이 다가온 것은 1884년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딱 50이 되던 해였지요. 그해가 저물어 가던 12월 30일, 독일 라이프치히의 오페라극장에서 교향곡 7번 E장조가 초연됩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지요. 브루크너가 그때까지의 음악 인생에서 맛 봤던 최고의 기쁨, 어쩌면 최초의 기쁨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본인도 이에 대해 “박수소리가 15분 동안 끊이지 않았다”는 기록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교향곡 7번은 그렇게 라이프치히에서 성공적으로 초연된 이후, 뮌헨과 빈에서도 연주되면서 브루크너에게 드디어 음악가로서의 명성을 안겨줍니다.

브루크너가 이 곡을 작곡했던 것은 1881년부터 1883년까지였지요. 한데 그는 자신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던 빈에서 초연하는 것이 두려웠던 모양입니다. 라이프치히에서 초연할 것을 권한 인물은 제자이자 친구였던 요제프 샬크였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등장하는 또 하나의 인물이 바로 지휘자 아르투르 니키쉬(1855-1922)입니다. 훗날 한스 폰 뷜로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하모닉을 죽을 때까지 이끌었던 지휘자이고, 20세기의 여러 지휘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이지요. 헝가리 태생의 그는 1879년부터 라이프치히 오페라단을 지휘했는데, 바로 그 몇 해 뒤에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 E장조를 초연했습니다.

교향곡 7번 E장조는 본격적으로 금관의 규모를 확장한 곡이지요. 바그너가 음악극 <니벨룽의 반지>에 사용하기 위해 개발했던 금관악기 ‘바그너 튜바’를 네 대나 배치해 놓고 있습니다.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애도를 그렇게 표현했던 것 같습니다. 바그너 신봉자다운 태도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브루크너는 이후의 교향곡들, 즉 8번과 9번에서도 계속해서 이 악기를 사용해 바그너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있습니다.

Herbert von Karajan/Wiener Philharmoniker - Bruckner Symphony No.7 in E major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Wiener Philharmoniker

Musikverein, Grosser Saal, Wien

1989.04

 

1악장: 알레그로 몰토

1악장은 앞서 들은 교향곡 4번과 마찬가지로 현악기의 트레몰로로 시작해 첼로가 상승하는 선율을 노래하듯이 연주하면서 시작합니다. 여기에 호른이 가세합니다. 일설에는 브루크너가 꿈에서 들었던 선율을 옮겨 놓은 것이라고도 합니다. 두 번째 주제는 좀 더 생기 넘치는 리듬감을 보여주고, 세 번째 주제에서는 금관의 팡파르가 두드러집니다.

2악장: 아다지오

2악장은 앞서 얘기한 대로 바그너를 향한 추모의 마음을 담은 악장이지요. ‘매우 엄숙하고 아주 느리게’라는 지시가 붙어 있습니다. 바그너 튜바와 비올라가 함께 연주하는 애절한 멜로디에 귀를 기울여 보기 바랍니다. 연주시간 20분이 넘는 긴 악장입니다.

3악장: 스케르초

3악장은 빠른 템포의 스케르초 악장입니다. 첫머리부터 등장하는 독특한 리듬 형을 몸으로 기억하면서 음악의 진행을 따라가면 됩니다. 중간부(트리오)에서 부드럽고 목가적인 선율이 등장했다가 앞에서의 리듬 형이 다시 나타납니다.

4악장: 피날레

마지막 4악장은 바이올린의 트레몰로에 이어서 1악장에 등장했던 주제를 리드미컬하게 연주하면서 시작합니다. 일반적인 소나타 형식과 상당히 다른 전개 방식을 보여주는, 어찌 보면 약간 혼란스러운 악장이기도 합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금관의 활약이 점차 두드러지면서, 웅장하면서도 긍정적인 분위기를 드러냅니다. 그러다가 종결부에 이르러 처음의 주제가 다시 상승하는 음형으로 펼쳐지다가 힘차고 강렬하게 마침표를 찍지요.

 

추천음반

1. 카라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89, DG. 카라얀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지휘자다. 나치 시절의 정치적 행적을 물론이거니와, 20세기 중후반에 매체와 음반을 독점하다시피 했던 카라얀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애호가들은 여전히 적지 않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에 빈 필하모닉을 이끌고 녹음했던 브루크너 7번은 피해 가기 어렵다. 한마디로 치밀하고 탐미적인 연주다. 카라얀은 베를린 필하모닉과도 같은 곡을 녹음해 음반(1975년)으로 남겼지만, 빈 필하모닉과의 연주가 한 수 위라는 평가가 중론이다. 빈 필하모닉의 음색은 베를린 필하모닉에 비해 역시 좀더 밝다. 카라얀이 브루크너의 음악에 어느 정도로 정통한 지휘자인지를 잘 보여주는 연주다.

2. 세르지우 첼리비다케, 뮌헨 필하모닉, 1994, /EMI. 인터넷 동영상으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연주다. 생전의 첼리비다케(1912-1996)는 녹음을 별로 탐탁찮게 여겼던 까닭에 남겨 놓은 음반이 그다지 많지 않다. 카라얀에 비하자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1994년의 브루크너 7번 연주를 실황으로 담아낸 음반이 한층 가치를 지닌다. 이듬해에 녹음한 9번과 더불어 첼리비다케의 중요한 브루크너 녹음으로 남아 있다. 1979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했던 뮌헨 필하모닉 단원들과의 이심전심이 느껴지는 연주다. 악보의 이면에 담긴 어떤 명상을 탐구하는 듯한, 느릿한 템포의 해석을 들려준다. 브루크너의 종교음악을 대표하는 걸작 <테 데움>이 함께 수록돼 있다.

[p.s.] 본문에서 언급한 오이겐 요훔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는 추천음반 리스트에는 올리지 않았습니다. 국내 매장에서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훔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을 두 차례에 걸쳐 녹음했습니다. 앞에서도 썼듯이 브루크너에 매진했던 지휘자입니다. 기회가 되면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 시절에는 음악을 멀리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 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

 

출처 : 문화웹진 채널예스>칼럼>음악>‘내 인생의 클래식 101’ 2014.07.14

http://ch.yes24.com/Article/View/25698

 

 

Anton Bruckner(1824-18960) SYMPHONY NO.7 IN E MAJOR Constantin Floros

안톤 브루크너는 오늘날 곳곳에서, 베토벤과 함께 말러 사이에 가장 중요한 교향곡 작곡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에 반해 생전에는 동료 작곡가들 사이에서 거의 인정 받지 도, 이해되지도 못했다. 말년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이 그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뒤에야 그가 남긴 작품들은 그 위대성을 인정 받았다. 차츰 사람들은 브루크너 초기 교향곡 작품들이 아방가르드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브루크너가 새롭고 기념비적인 교향곡 양식과 대담하고 현대적인 음언어를 창조해 내 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브루크너는 예순 살이 되도록 빈에서 작곡가 대접을 받지 못했다. 1884년까지 빈에서 그의 작품은 거의 연주되지 않았다. 1877년에 교향곡 제3번의 초연은 누가 보아도 실 패였다. 1881년에는 교향곡 제4번이 그런데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제5번은 브 루크너 생전에 빈에서 연주된 바 없고, 제6번은 1883년에 가운데 두 악장 만이 연주되 었다. 후고 볼프도 1891년, 브루크너가 빈에서 좀처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탄하 였다. 빈의 음악정치학적 상황이 브루크너의 교향곡이 전파되는데 불리하게 작용했음은 명 백하다. 에두아르드 한슬릭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주의자들은 브루크너가 리하르트 바 그너의 신봉자임을 자처한다는 이유로 그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은 브루 크너를 극단적인 아방가르드, 또 신성한 교향곡의 세계를 어지럽히는 '무서운 아이'( enfant terrble)로 보았다. 보수주의자들은 집요하게 브루크너를 '무정부주의자' '질 풍노도의 예술가' '야생의 작곡가' '화성의 이단자' 따위로 불렀다. 브루크너에 공감 을 보이던 동시대인들도 그의 음악을 정확히는 이해하지 못했다. 브루크너의 제자들마 저 그의 교향곡의 합법칙성과 엄격한 구조적 논리를 언제나 이해한 것은 아니다. 이해받지 못하고 비웃음마저 당하던 브루크너의 교향곡 작법은 교향곡 제7번에서 처 음으로 돌파구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제7번은 브루크너에게 성공을 가져다준, 그리 고 그 결과 다른 교향곡들도 연주회장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첫 작품이다.1885 년 3월 10일 뮌헨에서의 역사적인 연주가 있고 나서 오래지 않아 교향곡 제7번은 세계 음악의 수도 빈에 당당히 입성하였다. 이 작품의 초연 이야기를 간략하게 밝혀 두는 것이 좋겠다. 브루크너는 교향곡 제7번을 쓰는 데 1881년 9월부터 1883년 9월까지 만 2년을 할애했 다. 총보가 완성된 뒤에도 브루크너의 충실한 두 제자 요제프 샬크와 페르디난트 뢰베 가 1884년 빈 리하르트 바그너 학회에서 이 교향곡을 두 대의 피아노로 소개했다. 샬 크는 라이프치히에서도 피아노 연주를 계획하여 이를 라이프치히 시립극장의 초대 악 장으로 있던 아르투르 니키쉬와 의논했다. 니키쉬는 이 교향곡을 보고는 당장에 흥분 하여, 자신이 손수 이 작품을 4,5월에 있을 바그너 추모 연주회에 올리겠다고 나섰다. 연주회는 9월로 미루어졌다가, 다시 브루크너가 '제자들이 많이 오는 데 큰 의미를 두 어 강의가 없는 기간에 연주할 수는 절대로 없다'고 하여 12월 30일에야 개최되었다. 기대하던 대성공이 처음부터 온 것은 아니었으나 이제까지의 냉담하던 반응은 깨뜨릴 수 있었다. 바그너 계열의 지휘자 헤르만 레비는 이 곡에 감명을 받아 1885년 3월 10 일 뮌헨에서 있는 한 연주회 프로그램에 이 곡을 집어넣었다. 이 날 연주가 브루크너 에게는 승리의 신호가 되었다. 작품의 음악적인 질뿐만 아니라 다른 요소들도 이례적 인 성공을 거두는데 이바지했다. 당시 뮌헨은 바그너주의자로 자처했으며, 교향곡의 아다지오 악장이 리하르트 바그너의 비명으로 받아들여지기 바란다는 말이 돌고 있었 던 것이다. 이어 있은 뉴욕, 암스테르담, 런던, 보스턴, 프라하 등지의 연주에서도 교 향곡 제7번은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교향곡 제7번의 놀라운 힘의 근원이 어디에 있을까? 이 교향곡은 기본적으로 음건축적인 면에서 앞의 교향곡들의 그것과는 거의 다를 바 가 없어 보인다. 첫 악장은 여러 개의 차원으로 나뉘어 있고 나머지 악장들을 세 개의 주제복합체 위에 쌓아져 있으며 예외 없이 브루크너의 다이내믹의 형식원리는 크게 보아 상승하는 모습을 띠고 있다. 그러나 세밀히 관찰해 보면 섬세한 특수성을 느낄 수 있다. 형식상의 분절의 개관이 쉽고, 동기들이 이전보다 더 우아하고 인상적이다. 주제들은-브루크너 작품에서 늘 그러하듯-강한 대조를 보이지만 끈임없는 흐름을 이루 며 움직이도록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즐겨쓰던, 악장 중간에 모든 악기군을 입다 물게 하는 수법도 매우 드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밝은 E 장조로 된 이 제7번은 점 점 밝아지면서 진행한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이점에서 제7번과 견줄 것은 제4번 교 향곡뿐으로, 둘은 '낭만적' 음향효과에 대한 편애를 공통점으로 지니고 있다. 총보를 자세히 분석해 보면 개념의 대담성과 음언어의 현대성과 독특한 구조적 논리 에 놀라게 된다. 음악의 대담성과 현대성은 화성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 화성면에 서도 브루크너는 브람스보다도, 그리고 스스로 속한다고 느끼던 신독일악파보다도 진 보적이다. '진보적'이라 함은 3도의 가온 관계가 브루크너의 창작에서 브람스보다 중 요한 역할을 하며, 변화음을 사용한 화성에 더욱 큰 의미가 주어지고, 반음계 화성과 뚜렷한 불협화음을 자주, 자유로이 사용하며-무엇보다도-동시대 다른 작곡가들에 비해 조순환의 확장이 훨씬 넓다는 점을 가리킨다. 교향곡 제7번의 아다지오 악장에 대해 몇 가지 언급하는 것이 설명에 도움이 되겠다. 이 아다지오 악장이 명성을 얻은 데는 그 뒤에 숨은 이야기가 이바지한 바 크다. 브루 크너의 편지에 따르면 아다지오 악장은 1883년 1월 22일, 리하르트 바그너의 죽음을 예견하면서 완성한 것이다. 바그너의 부음을 받았을 때 브루크너는 코다 부분을 쓰고 있었다. 부음에 접하자마자 써내려간 튜바와 호른의 패시지가 '거장의 서거에 부치는 애가'로 받아들여지기를 브루크너는 원했다. <테 데움>의 마지막 패시지와의 주제적 연관은 아다지오 악자의 밑바닥에 "non cofunder in aeternum"이란 기독교적 내세관이 깔려 있음을 보여준다. 형식적으로는 두 개의 대조적 주제를 가진 론도로 되어 있으며 , 제1주제는 다시 나타날 때마다 점점 고조되는 물결로 강하게 뻗어나가고 있다. 마지 막 상승은 여러 단계로 이루어지면서 화성적으로 극도로 대담하게 써내려간 인상을 주 며 C장조로 절정에 이른다. 시작 부분의 음울한 C#단조와 이 밝은 C장조의 절정은 극 단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브루크너가 여기서 펼쳐나가고 있는 힘차고 대담한 선율 의 움직임은 당대의 (그리고 이후에도) 교향악에서 다시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에두아르드 한슬릭이 브루크너의 작품들 가운데서 가장 압축된 것에 속하는 이 교향 곡을 하필이면 "거대한 뱀과도 같은 교향곡"이라 불렀는지 이는 기이한 느낌을 준다. 한 평문에서 한슬릭은 거침없이, 이 교향곡이 "너무나 부자연스럽고 거만하고 병적으 로 부패한 것으로" 보여 무어라 말할 수 없다고 하고 있다. 교향곡을 "수십번의 트리 스탄 연습으로 신경과민이 된 한 관현악 작곡가의 허황된 꿈"이라 표현한, "독일에서 가장 인정받는 작곡가"의 한 사람과 의견을 같이 하는 셈이다. 한슬릭은 브루크너 속 에서 바그너의 아류만 발견하고 그의 독창성은 전혀 찾지 못할 정도로 브루크너에 대 해 적대적인 태도로 일관한 것이다. 한슬릭은 브루크너의 부분적으로 격앙되고 고조된 언어를 못마땅해하고, 그로서는 일부러 꾸민 것같이만 생각되는 새롭고 낯선 음에 혼 란을 느꼈다. "표현의 병적인 고조", 이것은 그가 브루크너는 물론 바그너에게도 늘상 퍼부은 비난의 말이다. 예술의 역사는 번복의 역사이기도 하다. 당대보다 더 나은 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후 대의 사람들은 에두아르드 한슬릭이 놓친 그의 음악의 질을 깨닫고 마침내 브루크너를 인정하고 아끼고 그에 대해 경탄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브루크너를 듣는 전세계의 많 은 사람들을 열광에 빠뜨리는 것은 그의 표현의 강도와 폭, 불타는 열정, 뜨겁고 장중 하고 환상적인 것에 대한 그의 애착, 환호하는 듯한 마무리, 그리고 그의 교향악에 깃 든 숭고함이다.

 

Anton Bruckner - Symphonie Nr.7 E-Du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