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Vladimir Ashkenazy
한국의 음악 애호가들에게도 너무나 친숙한, 피아노를 한번이라도 다루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애잔한 추억을 가지고 있는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1937년 7월 6일 모스크바 서쪽의 도시 고르키에 있는 음악가의 집에서 태어났다. 6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7세 때에는 학생 오케스트라와 하이든의 곡을 협연하며 천재성을 드러냈으며, 1955년 18세 때 쇼팽 국제 콩쿠르에 출장 2위에 입상하였고,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명피아니스트인 레프 오보린에게 사사했다. 이듬해인 1956년 벨기에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에 출장하여 당당히 1위로 우승하였다. 1961년에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유학중이던 아이슬랜드의 여류 피아니스트와 결혼하였고, 그 이듬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출장하여 영국의 존 오그던과 함께 공동 1위로 입상하면서 세계적으로 1급 피아니스트로 인정을 받게 됐다. 그러나 소련정부의 간섭과 통제에 반발하여 63년 서방으로(영국)으로 망명하게 되고 이후 아쉬케나지의 피아니즘은 더욱 활짝 피어 국제적인 대가의 위치에 오르게 됐다.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의 피아노 음은 선명하면서도 산뜻한 기교가 도처에서 찬연하게 빛나고 있는데, 종소리처럼 투명한 약음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을 띠고 고조하는 최강음까지 다양하고 세밀한 음색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런 테크닉을 무기로 그는 레카토의 선율과 화려한 피아노적 패시지, 정열적인 화음을 교차시킨다고 비평가들은 말한다.
1970년부터 지휘에 입문해 1974년 지휘자로 첫 녹음을 실시했다. 입문 당시 필하모니아, 런던 심포니, 로열 콘서트헤보,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작업을 함께 했고 1987년 로열 필 음악 감독에 취임해 1994년까지 직위를 유지했다. 1989년 로열 필을 이끌고 소련에 들어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역사적인 귀향 공연을 가졌다. 현재도 지휘자로서의 활동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데, 이는 피아노로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의 음악적 발로의 연장선이다.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 체코 필하모닉, NHK 교향악단의 음악감독과 수석 지휘자를 역임했다.
콘서트와 리사이틀 피아니스트로 은퇴를 선언한 이래 현재는 시드니 심포니와 유럽연합 유스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지휘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데카 클래식에선 여전히 독집과 듀오 음반을 피아니스트로 출반 중이다. 그동안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NHK교향악단, 체코필하모닉, 유럽연합 유스오케스크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신분으로 내한했다.
피아니스트 보브카 아쉬케나지
Vovka Ashkenazy
블라디미르의 장남으로 모스크바 태생. 아이슬란드로 이주해 6살부터 피아노를 사사했고 바비칸 센터에서 리처드 히콕스 지휘/런던 신포니에타 협연으로 데뷔했다. 1989년 이탈리아 바이올리니스트 안드레아 카펠레티와 ‘만하임 소나타’ 앨범(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K301~K306)을 녹음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영국의 유명 오케스트라와 자주 협연하고 있으며 솔로 및 실내악 분야도 활발히 활동중이다. 클라리넷 주자인 동생 드미트리와 함께 결성한 유럽 솔로이스츠 앙상블에도 1996년부터 정기적으로 참가학도 있다. 아버지와 함께한 듀오앨범과 자신이 결성한 트리오 녹음들이 각각 데카, 낙소스로 발매되었다.
라벨 / 네손을 위한 연탄곡 ‘어미 거위’ - 마르타 아르헤리치 외
Martha Argerich & Mikhail Pletnev p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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