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의 오페라글라스-벨리니<몽유병의 여인>
잠이 들면
'사랑에 빠지는' 여인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환자의 병명이 제목이다.‘ 결핵에 걸린 여자’,‘ 백혈병에 걸린 남자’
이런 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몽유병(夢遊病)’이란 중병도 아니고 치료를 안 해도 그
만인 그런 병이다. 어쩌면 병이라고 부를 것도 없는 현상일 수 있다. 어쨌거나 제목은 몽유병
에 걸린 한 아가씨를 지칭하고 있다. 실제 오페라 <몽유병의 여인> 무대 위에서도 여주인공은
두 번의 몽유병 상태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 몽유병이 오페라에서 갈등이 만들어지는 데 결정
적인 구실을 하게 된다. 더불어 더욱 흥미로운 것은 갈등의 해결 역시 몽유병에 의해서 이루
어지니, 그야말로 결자해지(結者解之)인 형국이다. 여기서 많은 사람이 흥미를 갖는 것은 몽
유병에 관한 것이다. 실제로 몽유병이란 어떤 것이며, 얼마나 많고, 또 오페라에서처럼 그렇
게 극적이고 황당할 수도 있는 것일까?
고요한 시골 마을에 과연 무슨 일이?
몽유병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 병은 어린이들에게 잘 생기고 성장하면서는 치료하지 않아도
없어지는 경우가 많다. 오페라에 나오는 아미나처럼 젊은 성인에게도 드물지만 생길 수 있다.
증상은 잠을 자다가 일어나서 걸어다니는 것인데, 그래서 몽유 또는 수면보행증(sleepwalking)
이라고 불린다. 걸어다닐 때의 모습은 매우 특징적이다. 멍하고 눈에 초점이 없는
듯 허공을 주시하는 얼굴이 몽유병이 아닌 경우와 차별된다. 목적지가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옆에서 말을 걸어도 대화에 반응하지 않는다. 흔들어서 깨
우려 해도 깨우기 쉽지 않다. 제3단계나 제4단계 수면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병은 잠들
고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인 두세 시간 안에 주로 생긴다. 그러므로 부모가 아이들을 재우고 나
서 방으로 돌아와서 밀린 일을 하면서 아직 잠들지 않고 있을 때, 아이의 몽유병을 직접 발견
하기도 한다. 몽유 상태를 보면 마치 물속에서 부유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일견 위험해보이기
도 하지만, 실제로 사고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몽유병 상태에 있는 아이들은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시골 같이 문이 허술한 경우에는 마을을 한 바퀴 돌기도 한다. 그럴 때면
다리도 건너고 밭도 돌아서 오는 것이다. 깨어난 다음 날 아침에 당사자는 간밤의 사실을 기
억하지 못한다. 대신 발바닥을 보면 새카맣게 되어 있어 지난밤의 흔적이 남아있기도 한다.
국제 질병 진단 기준에 보면 몽유병자는 현저한 사회적·직업적 곤란과 장애를 초래한다.
무대는 스위스의 어느 산골 마을이다. 오페라나 연극에서 무대를 스위스 산골이라고 지칭한
다는 것은 사실 시골이라는 것 외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경우가 많다. 유럽의 시골은 대부
분 스위스로 표현되며 그들에게 스위스는 바로 산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가이
며 전원극이 배경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과거 전통극에서 보여주는‘파스토랄레
(pastorale)’의 영향을 짐작하게 해준다. 만년설이 덮인 높은 산이 보이고,
그 앞으로 작고 예쁜 집들이 있으며 창문에는 제라늄 화분이 놓여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오페라에서 스위스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로는 이 <몽유병의 여인> 외에도 로시니의 <윌리엄 텔>, 베르디의 <루이
자 밀러>, 도니체티의 <연대의 딸>, 조르다노의 <페도라> 등을 들 수 있다. 하나같이 시골에
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의미하므로 굳이 스위스일 필요는 없다. 이런 배경에서 이야기는 시작
된다. 대본을 읽어보면 작은 마을의 광장을 중심으로 두 개의 건물이 놓여 있다. 한쪽엔 여관
이 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물레방앗간이 보인다. 이것 역시 다른 시골, 즉 시칠리아의 시골이
기는 하지만 한쪽에는 술집이 다른 한쪽에는 교회가 위치하는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연
상시킨다. 이러한 구조는 폐쇄적인 사회를 암시한다. 폐쇄적 세팅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이야
기인 것이다. 그것 역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나 <루이자 밀러>, <연대의 딸> 등과 유사
하다. 과거 유럽의 시골은 폐쇄적이었으며 도시와의 교통이 없는 한 자신들만의 문화 속에서
이야기는 흘러가게 된다. 이런 곳에서는 인간관계, 특히 연애의 갈등은 그들 사이에서만 성립
된다.
물레방앗간의 여주인 테레사는 딸 하나를 키우고 있는데, 그녀가 주인공 아미나다. 그녀는 마
을의 비교적 부유한 청년인 엘비노와 약혼한 상태로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엘비노를
사랑하던 또 한 명의 여자가 있었으니, 그녀가 여관 주인 리자다. 막이 오르면 독특하게도 주
인공이 아니라 연적인 리자가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가 먼저 나오는데, 이렇게 연적의 독
창이 먼저 나오는 것은 오페라의 구성상 대단히 예외적인 경우다. 오페라는 먼저 주인공이 나
와서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고 이어서 라이벌이 나오는 것이 보통의 구조다. 하지만 연적이
먼저 나오는 이런 형태는 벨리니의 다른 작품인 <청교도>에서도 볼 수 있다. 막이 오르면 리
카르도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오늘 다른 남자와 결혼식을 올린다며 한탄한다. 벨리니가
<몽유병의 여인>에서의 작은 시도를 성공으로 보고 이후 <청교도>에서 이런 구성을 확장시켜
2중 아리아로 부르게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리자에게는 또한 그녀를 짝사랑하는 알레시오라
는 마을 청년이 다가오게 되어 구조는‘알레시오-리자-엘비노-아미나’의 관계로 그림이 그
려진다. 이런 모습은 폐쇄적인 사회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결혼 준비는 축복 속에서 진행되고
음악은 유려하게 흘러간다. 관객들이 스위스의 풍광과 벨리니의 선율에 취해 있는 동안 그들
은 아직 아무런 사건이 없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그만큼 음악은 머리에 쏙 들어오도
록 쉽고 아름답다. 이 풍경은 30분 이상을 이어가는데, 이는 분명 과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
객들이 지루하다고 느끼지조차 못한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운 일이다.
몽유병으로 시작된 갈등, 몽유병으로 해결
극이 흐르면 마차의 방울 소리가 들려온다. 이 작은 마을에 보기 드문 고급 마차가 등장하니,
요즘으로 치면 최고급 리무진이다.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은 이 마을에서는 찾아볼 수도 없는
최고급 코트를 입은 당당한 체격을 둘러싼 노신사다. 그가 내리면서“이 아름다운 마을의 풍
경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구나”라고 말하는데, 이를 통해 그가 초행이 아님을 관객은 알게
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동안 결혼식에 쏠렸던 관객의 시선을
모두 자신에게 돌려놓았던 신사 로돌포는 결혼식이 준비 중임을 알고 마을 사람들에게 신부
가 누구인지 묻는다. 그러다가 신부 아미나를 보자 로돌포는 미녀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을 제
어하지 못하고 자신의 바람기를 드러내며 신부에게 접근한다. 이 대목에서 그는 조금 점잖은
돈 조반니에 다름 아니고, 이에 대해 질투로 화를 내를 신랑 엘비노의 반응은 <돈 조반니> 중
마제토의 그것과 같다. 로돌포가 아미나를 보고 놀라는 것은 그녀가 미인이라서만은 아니다.
그녀의 눈빛이 무언가를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 장면에서 결혼을 앞둔 아미나
가 어머니 테레사에게“이렇게 키워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라고 인사하는 장면이 있는데, 아
무리 예의 바른 규수라 할지라도 그녀의 표현은 과장되어보인다. 여기서 예민한 청중이라면
아미나가 테레사의 친딸이 아니라 주워 키운 아이이며, 그것을 알고 있는 아미나가 그동안의
보살핌에 감사를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오페라는 관객들에게 또 다른 추측을 하게 한다. 로돌포가 초행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오페라에서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지만, 결국 로돌포가 아미나의 생부라는 사실이 행간에
숨어있다. 관객이 그것을 알아채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오페라의 감상은 달라질 수 있다.
이야기가 전개되면 로돌포가 백작이라는 것이 밝혀지는데, 그는 이 마을의 지주인 셈이다. 그
런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 혹은 삼촌쯤 되었을 영주를 따라 마을에 묵었던 적이 있었으며, 여
자라면 사족을 못 쓰던 그가 사랑에 빠졌을 확률은 매우 높다. 즉 아미나를 본 그가 놀란 것은
그녀의 얼굴에서 짧았던 추억의 연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 로돌포는 리자의 여관에 묵
게 되고, 객실에서 여관 주인 리자와 조금은 농염한 친밀감을 교환한다. 그때 방문이 열리자
리자는 놀라서 문 뒤에 숨는데,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바로 잠옷을 입은 아미나다. 바로‘첫
번째 몽유병 장면’이다. 아미나의 모습을 본 로돌포는 몽유병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챈다. 아
미나는 로돌포의 침대로 들어와서 잠들어버린다. 아버지가 그리웠던 아미나가 무의식적으로
아버지의 침대로 파고든 것일까? 이 광경을 숨어서 지켜본 리자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것을
소문낸다.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여관 앞에 몰려오고, 그들은 로돌포의 방에서 아미나가 나오
는 것을 목격한다. 당연히 결혼식은 취소되고, 아미나는 영문도 모른 채 절망에 빠진다. 오페
라에서 보여주는 몽유병 상태의 적확한 묘사는 의학적으로도 감탄스럽다. 마치 정신의학 교
과서를 보는 듯하다. 이런 예는 도니체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서도 급성 정신병적 발
병 상황을 너무나 정확하게 그려낸 것과 유사하다. 펠리체 로마니나 살바토레 카마라노 같은
당대의 명 대본가들에게 더욱 신뢰와 존경이 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니, 과연 명인들이 쓴 오
페라 대본은 인간 탐구와 풍속사의 교과서라 할 수 있다.
파혼이라는 벼랑에 내몰린 아미나를 구해주는 것은 결국 로돌포다. 그는 무지한 마을 사람들
에게 몽유병이란 현상을 강의하고 시시비비를 가려준다. 마을 사람들뿐이었다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외부에서 온 권위자에 의해서 정리되는 것은 오페라에서 흔히 보여주는 현자(賢
者)의 수법이다. 베버의 <마탄의 사수>의 현자, <마술피리>의 자라스트로, <신데렐라>의 알리
도르 같은 이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들은 좁은 세계의 등장인물들로만은 해결할 수 없는 문
제에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고 위기에 빠진 주인공을 구해 클라이맥스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른바 하늘을 나는 용이나 황금마차를 타고 내려온 하강신(下降神)에 해당한다. <로엔
그린>의 왕, <탄호이저>의 영주, <코지 판 투테>의 돈 알폰소 등도 현자 내지는 하강신의 이미
지가 변형된 것이다. 로돌포의 설명은 마침 잠들었던 아미나가 다시 몽유병 상태로 등장함으
로써 마을 사람들에게 입증된다. 사람들이 떠들고 있을 때 테레사가 나와서“딸이 지쳐서 방
금 잠들었으니 조용히 해달라”라고 부탁하고, 이어 몽유병 상태의 아미나가 등장한다. 그녀가
그날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점, 잠이 들고 얼마 되지 않아 몽유병이 발현하는 점, 몽유병 동
안에 열렬하게 사랑을 갈구하는 그녀의 무의식이 그대로 표출된다는 점 등 역시 오페라의 진
행이나 묘사가 의학적으로도 얼마나 정확한지 보여준다. 아미나의 몽유병을 본 엘비노는 그
녀의 결백을 알게 된다. 그리고 빼앗아갔던 반지를 그녀의 손에 다시 끼워준다. 잠에서 깨어
난 그녀는 돌아온 반지, 즉 돌아온 엘비노를 보고서 피날레의 화려한 카발레타를 즐겁게 부른
다. 비극으로 분류되는 오페라이지만 결국 마지막은 극적인 반전 끝에 해피엔드로 마감하니,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의 발걸음도 행복해질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조건이 붙는다.
이 어려운 악보를 가수들, 특히 아미나 역의 소프라노와 엘비노 역의 테너가 제대로 소화했을
때이다. 물론 그것은 현실적으로 결코 자주 만날 수 있는 행운은 아니다.
글 _ 박종호 (정신과 전문의)
출처: 예술의 전당 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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