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오페라

푸치니의 투란도트

나베가 2011. 3. 27. 15:11

박종호의 오페라글라스-푸치니의 투란도트

 

투란도트의 오페라?

NO,류를 위한 오페라!!

 

투란도트>는 사실 푸치니의 다른 작품들보다 덜 대중적이며, <라 보엠>이나 <나비부인> 등
에 비해 그리 알려지지 않은 것이 전 세계적인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이 오페라에 대해 비교적‘잘 알고 있다고’생각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 한때 국내에
서 유행했던 야외 오페라로 촉발된 영향력이 클 듯하다. 당시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공연된
<투란도트>는 뛰어난 마케팅으로 오페라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감상해야 할
작품으로 여겼을 정도다. 공연장에 갈 생각도 없이 주말 오후를 빈둥거리던 필자는 갑작스런
지인의 초청으로 호기심 반, 상암동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놀라웠다. 과장하자면 지하철의
모든 승객들이 <투란도트>를 보러 가는 것 같았다. <투란도트>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 학
생들, 전화로친구에게“오페라보러간다”라고떠드는직장인,“ 엄마오페라보러가니까밥
차려 먹어”라고 전화하는 아주머니…. 대체 언제부터 서울 시민들이 오페라에 이처럼 관심을
갖고 있었던 걸까? 게다가 스타디움 앞에 늘어선 그 인파란! 김밥과 음료수를 파느라 정신없
는 상인들까지 합세해 아마도 이날은 한국 오페라 역사상 가장 놀라운 하루가 아니었을까?
야외 오페라에서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미덕이라면 그날의 공연 자체가 아니라 그곳에 간 사
람들 중 단 몇 명이라도 오페라하우스로 발걸음을 이끄는 것일 터이다. 돌이켜볼 때 그러한
효과가 얼마나 충족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날 나눠준 피상적인 줄거리를 쥐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전혀 클래식적이지 않은 소리를 참아내며, 관객들이 푸치니의 예술세계에 얼마나
접근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은 지금도 의심스럽다.


복잡하고 예민한 인간 심리의 드라마
오페라 <투란도트>는 흔히 떠올리듯‘무시무시한 중국 공주를 사랑한 남자가 그녀와 결혼하
기 위해 수수께끼에 도전하고, 결국 문제를 맞혀 공주와 결혼하게 된다’라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당시 상암 공연의 문제점 중 하나는 연출가가 중국의 영화감독 장 이머우였다는 사실
이었다.‘ 붉은수수밭’,‘ 인생’등으로큰명성을얻었으니만큼당연히최고의<투란도트>를
연출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장 이머우에게 연출을 맡겼다는 것은 중국의
색깔을 살리겠다는 의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따라서‘인간사의 보편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을 오직‘중국에서 일어난 일화’정도로 축소시킨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상
암에서 오페라를 올리기 전에 이미 장 이머우는 피렌체 시립 극장에서 최초의 <투란도트>를
올렸다. 당시 호평을 받았던 것은 무대를 장식한 중국식 부채들과 기와지붕들의 이미지였다.
그것은‘사실적인’것이 아니라 디자인적으로 상당히 세련된‘상징적인’장치들이었다. 사람
들은 그에게 앞으로 더욱 발전된 연출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의 유럽 오페라 입성은 오페라의
기반과 이해가 취약한 조국의 부름을 받았고, 그는 유명한 자금성 공연의 연출을 맡았다. 이
는 패착이었다. 장 이머우는 이 작품이 가진 인간적인 갈등과 희생 그리고 심리적인 복선을
파헤치는 대신 중국의 화려함과 거창함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데 집착했다. 출연자들은 비
단을 칭칭 휘감고 현란한 장식으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았다.

 

의상과 무대는 모두 명나라 시대의 것이었다. 중국 문화의 위대함을 보여주려는 당대 경제성장국 중국의 조급한 심리를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작품을 더욱 치졸한 무대와 조악한 소품으로 다시 다운그레이
드해 상암으로 재수입한 것이다. 하지만 <투란도트>는 명나라가 배경이 아니다. 악보에‘전설
의 시대’라고 명시되어 있으니, 그 화려한 중국 비단과 금 장식은 전혀 관계없는 것들이다. 더
나아가 중국은 이 작품의 배경일 뿐, 작품을 분석해보면 이곳이 반드시 중국이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이 말은 <투란도트>의 배경이 한국이든 일본이든 아프리카든 아니 유럽 어느
나라라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 <아이다>가 코끼리의 이야기가 아니듯, <투란
도트>는 중국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투란도트>는 인간, 복잡하고 예민한 인간 심리의 드라
마이다.


사랑이 아닌‘승리’, 그러나 결국‘사랑’
중국을 빼고 이야기하자. 한 남자가 있었다. 칼라프는 중앙국가의 변방에 있는 작은 나라의
왕세자였다. 그런데 그만 그의 나라가 중앙국가에게 침략당하여 멸망한다. 그는 하루아침에
왕위 계승자에서 보통 남자로 전락한다. 중앙국가로 온 그는 그곳의 공주 투란도트가 결혼 상
대자를 고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를 쟁취하려면 수수께끼에 도전해야 한다. 세 문
제를 다 맞히면 공주와 결혼하게 되지만, 틀리면 목이 날아간다. 공주를 보자마자 칼라프는
수수께끼에 도전한다. 그런 그에게는 전왕인 늙은 아버지와 그를 따르는 어린 몸종 류가 있다.
그를 남몰래 사랑하는 류는 눈물로 그의 도전을 만류하지만, 칼라프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
는다. 칼라프는 대본처럼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낸 공주의 자태에 반한 것이 아니다. 그는 공
주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의 목표는 오직‘공주와의 결혼’이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잃어버
린 왕권을 되찾는 유일한 길이다. 그가 다시 왕권을 갖고 나라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은 투란도
트와 결혼하는 길뿐. 그러니 나중에 그의 도전을 만류하는 3정승인 핑·팡·퐁의 설득도 무
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겉으로는 냉엄해 보이지만, 실은 유약하고 낭만적이고 귀엽기도 한
핑·팡·퐁은 그에게“투란도트를 포기하라”면서 대신“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겠다”고
제의한다.“ 미녀? 재물? 원하는것은다주리라….”그러나칼라프는일언지하에거절한다. 당
연하다. 투란도트만 얻으면 그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는데, 왜 황금을 택하겠나. 그녀는 황
금알을 낳는 황금거위인데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칼라프는 수수께끼 세 개를 다 맞추게 된다. 그러나 투란도트는 약속을
어기고 결혼을 거부한다. “바탕도 뿌리도 모르는 자와 결혼할 수 없다”라는 것이 이유였다.
칼라프는 대신“내가 문제를 낼 테니, 공주가 맞추면 내 목을 가져가고 맞추지 못하면 결혼하
자”라고 새로운 제의를 건넨다. 그는 이 대목부터 갑자기 당당해진다. 칼라프와 투란도트의
위치가, 즉 갑과 을의 상황이 졸지에 바뀌어버린 순간이다. 그의 문제는“내 이름을 맞추라”
는 것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미지의 기사가 나타나서 그녀와의 결혼을 앞둔 것은 기사 로엔
그린이다. 다만 <로엔그린>과는 달리 이름을 여자가 알아맞혀야 하고, 이름을 알면 결혼을 거
부할 수 있는 역환경이 주어진다. 그때 자신의 승리를 장담하면서 칼라프가 부르는 노래가 바
로‘공주는 잠 못 이루고’이다. 이 유명한 아리아는 푸치니의 다른 오페라의 테너 아리아 같
은 종류의 사랑 노래가 아니다. 칼라프는 투란도트를 사랑하여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가 (이 게임에서) 승리자가 될 것이다”라고 노래할 뿐이다. 그는 투란도트를 사랑하여 그
녀를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갖는 것이‘필요하다.’그가 추구하는 것은 아리아 속 그
의 마지막 외침“빈체로(승리자)”에서 보여주듯, 사랑이 아니라 승리이다. 이때 칼라프와 함
께 있었던 것이 알려진 류가 잡혀온다. 공주가 그녀로부터 그의 이름을 알아내려 하자 그녀
는 고문으로 자기가 입을 열까 두려워 재빨리 자결한다. 그녀의 죽음은 칼라프를 살리는 길
이지만, 한편으로는 칼라프가 자기 아닌 다른 여자에게 가는 것을 도와주는 결과가 되기도
한다.

 

류의 죽음으로 투란도트는 여자가 되고
어디서 류의 그런 희생이 나올 수 있을까? 류의 첫 번째 노래‘주인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에서처럼, 정말 왕자님의 미소 한 번으로 그녀는 목숨을 바치는 사랑을 하게 된 것일까? 그녀
가 말하는“비밀스런 사랑”이라는 것이 과연 류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을까? 어쩌면 칼라프
가 그녀와‘어떤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었을까? 정확히 알 수 없겠지만 나는 칼라프가 류를
버렸다는 데에 무게를 두고 싶다. 이제 류는 전형적인 푸치니 오페라 프리마돈나의 반열에 서
게 된다. ‘사랑하고, 배신당하고, 자결하는’공식은 <나비부인>과 같다. 게다가 자기를 버린
남자의 앞날을 위해 자결함으로써 그녀는 비극의 여주인공들 중에서도 으뜸이 되는 것이다.
오페라는 류의 죽음으로 일단 완결된다. 그러니 이 작품의 제목은 어찌 보면‘투란도트’가 아
니라‘류’라 해도 무방하다. 류가 죽은 대목부터 오페라는 사실상 점점 활력을 잃어간다는 것
을 눈치 챌 수 있다. 푸치니가 작곡한 대목이 여기까지인 것이다. 투병을 하던 푸치니는 여기
까지만 작곡하고 후두암 수술을 받으러 브뤼셀까지 가지만, 그는 죽어서 고국으로 돌아온다.
뒷부분은 그때까지 남아있는 푸치니의 스케치와 그의 친구인 지휘자 토스카니니의 기억을 토
대로 젊은 작곡가 프랑코 알파노가 완성했다. 그런데 푸치니는 오직 병 때문에 뒷부분을 쓰지
못한 걸까? 어쩌면 류의 죽음과 함께, 푸치니의 기력과 영감이 다 소진돼버린 것은 아닐까?
그의 취향으로 보건대, 푸치니의 히로인은 투란도트가 아닌 류일 것이다. 류의 죽음은 이를
지켜본 투란도트에게 충격을 준다. 투란도트는 류의 죽음으로 비로소 사랑의 실체를 직접 눈
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대체 사랑이란 무엇일까?’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녀가 류로부터
사랑을 배우는 순간이다.

투란도트는 보통 사람이 근접할 수 없는 저 높은 천상에서 천자의 딸로 있다가 비로소 지상으
로 내려온다. 그녀도 여자가 된 것이다. 그 순간부터 투란도트는 사랑을 아는 여자가 되어, 류
의 프리마돈나 자리를 비로소 승계한다. 류가 죽을 때까지 오페라의 주인공은 류이며, 그녀가
죽고 나서 비로소 투란도트가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아주 짧다. 투란도트
는 아무런 갈등이나 제약도 없이 쉽게 칼라프의 팔에 안기기 때문이다. 그러니 류의 죽음 이
후의 드라마는 김빠진 맥주처럼 싱겁게, 예상 가능한 해피엔딩을 향해 그저 흘러갈 뿐이다.
류가 죽었으니 더 이상 쓸 에너지가 고갈된 것도 있지만, 푸치니가 그 이후를 쓰지 못한 또 하
나의 이유가 있다. 그는 한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그릴 줄 몰랐다. 푸치니의 모
든 오페라의 여주인공들은 막이 올라감과 동시에 남자 주인공에게 한눈에 반하거나, 이미 사
랑하고 있다. 전자가 <라 보엠>, <나비부인>, <마농 레스코>, <제비>, <서부의 아가씨> 등이며,
후자가 <토스카>, <외투>, <쟈니 스키키> 등이다. 이는 푸치니의 여성 편력과 무관하지 않다.
생전에 대단한 미남에 멋쟁이였던 그는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여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일 따위는 푸치니 사전에 없었다. 도리어 여성을 떼어놓기 위한 갖은 노력이
그의 생애 적지 않은 수고였다. 그러니 그런 푸치니가 류를 쓸 수는 있어도, 사랑을 모르는 투
란도트의 마음이 칼라프에게 향하도록 만들 줄 몰랐던 것이다. 그러니 펜을 놓은 채 고민하다
결국 작품은 미완으로 남았다. 칼라프는 자신의 입지를 위해 류를 버리고 공주를 택했다. 이
런 일은 고대 중국이 아니더라도, 주변 어디에서나 지금도 일어나는 일이다. 오페라 <투란도
트>는 야망으로 한 여성을 버린 남자의 이야기이며, 그에게 희생되어 버림받은 여성의 이야
기이다. 또한 이 작품은 한 소프라노에게서 다른 소프라노에게 사랑이 이행되고, 주인공도 계
승되는 독특한 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오페라 <투란도트>는 투란도트의 오페라가 아니
라 류의 오페라다.

 

글 _ 박종호 (정신과 전문의)

출처: 예술의 전당 홈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