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서유럽 (2003.12~2004.1)

19.이탈리아/폼페이<pompeii>,나폴리

나베가 2010. 2. 10. 18:08

폼페이<Pompeii>

 

지금은 내륙()이 되었으나, 당시에는 베수비오 화산의 남동쪽, 사르누스강() 하구에 있는 항구도시였다. 비옥한 캄파니아 평야의 관문에 해당하여 농업 ·상업 중심지로 번창하였으며, 제정()로마 초기에는 곳곳에 로마 귀족들의 별장들이 들어선 피서 ·피한의 휴양지로서 성황을 이루었다. 폼페이의 기원은 매우 오래 되었으며, 처음에는 오스키인()들이 취락을 이루고 살았다. BC 470∼BC 424년경에는 에트루리아인()이 차지하였고, 그 뒤 BC 80년까지는 삼니트인들이 도시를 지배하였다.

그동안 남부 이탈리아에 많은 식민시()를 건설한 그리스인들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으며,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특히 BC 3세기 중반부터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이 매우 컸다는 사실이 발굴 결과 밝혀지고 있다. 그후 동맹시전쟁(, BC 91∼BC 88) 때에는 동맹시 쪽에 가담하였으므로 BC 89년에 로마의 장군 술라의 공격에 굴복,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그 뒤부터 급격히 로마화()하였다.

제정로마 초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폼페이는 고대도시로서는 규모가 상당히 컸으며, 인구는 2만∼5만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인구가 일정하지 않은 것은 인구의 계절적 변동폭이 크기 때문이었다. 폼페이에서는 대폭발이 있기 이전인 63년 2월에도 큰 지진이 일어나 큰 피해를 입었으며, 그 뒤 다시 복구되어 전보다 훨씬 훌륭한 도시로 재건되었으나, 79년 8월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2∼3m 두께의 화산력()과 화산재가 시가지를 덮어버렸다.

당시의 분화상황은 소()플리니우스가 실감있게 전해주고 있으며, 대부분의 주민은 참화를 면했으나 2,000여 명이 사망하였다. 분화가 멎은 뒤 재보()를 발굴한 사람도 더러 있었으나, 15세기까지 폼페이의 존재는 잊혀졌다. 16세기 말부터 소규모 발굴이 시작되고 1748년부터 본격 발굴에 착수하여 꾸준히 발굴이 계속되었으며, 옛 시가의 거의 절반 정도가 발굴되었다.

벽화를 포함한 초기의 발굴품은 대부분 나폴리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가급적 현지에서 복원한다는 방침이다. 전성기에 갑자기 멸망하였으므로, 당시 로마 도시의 일상생활을 자세히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들이 발굴되었으며, 그것들은 상당히 쾌락적이고 현세 향락적인 도시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폼페이의 많은 벽화를 통하여 유품이 적은 헬레니즘 회화를 엿볼 수 있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벽돌쌓임이 빼곡하고 가즈런함이 바로 로마양식이라는데, 그 정교한 기술력과 섬세함이  정말 압도적이다.

 

 

 

 

담쟁이 넝쿨이 가득한 건물내엔 사람이 살고 있는것 같았다.

하긴...나오면서 보니 까페가 있는것 같기도 했었다.

 

 

 

사진엔 안 나왔지만....

건물 내부장식이 너무나 근사했고 아름다웠다는...

입구 바닥 모자이크도 화려하고 정교함이 일품이었다.

 

 

 

 

 

나폴리....
 
영어명은 네이플스(Naples)라고 한다. 로마·밀라노 다음가는 이탈리아 제3의 도시이다. 나폴리만() 안쪽에 있는 천연의 양항으로, 배후는 베수비오 화산의 서쪽 기슭까지 이르고 있다. 따라서 시가는 동쪽으로 차차 높아지는 경사지에 자리하고, 토양은 비옥한 화산재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아열대산인 오렌지의 가로수가 끝없이 연속되는 모래 해안은 배후의 베수비오 화산과 더불어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이룬다. 따라서 예로부터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라는 유명한 속담이 전해올 만큼 세계적인 관광도시의 하나이다.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최저 평균 기온이 8℃ 이하로 내려가지 않고 연교차가 적은 점에서도 이탈리아의 도시 중 기후가 가장 좋다. 여름은 건조하나 사실상의 건기()는 1개월 미만으로 농업용수 문제도 다른 도시에 비해 절실하지 않다. 아주 드물게 눈이 내리는 일도 있으나, 연중 온난하여 주변 일대에는 오렌지·올리브·토마토 등 과실이 많이 산출된다. 또한 부근의 비옥한 캄파니아 평야에서는 맥류·과실류의 집산가공이 활발하다.

나폴리는 그 이름이 말하여 주듯 그리스의 식민도시 네아폴리스가 그 기원이나, 이에 대응하는 팔레아폴리스가 어디에 있었던가 하는 데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어 일치하지 않는다. 화산분화를 피해 온 주민들에 의하여 건설된 것으로 짐작된다. 고대 로마시대에도 번영하였던 항도로 알려졌으며, 로마시대의 기본적인 가로망은 현재 시의 중심지에 그대로 남아 있다. 중세를 통하여 나폴리에는 비잔틴문화의 영향이 강하였으나 12세기 이후에는 에스파냐 세력의 영향이 강해졌으며, 남이탈리아를 지배하는 나폴리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18세기 말 부르봉 왕조 지배하의 나폴리는 인구 40만을 헤아려 이탈리아반도 최대의 도시였다. 1860∼1861년 G.가리발디에게 정복되어 양()시칠리아 왕국의 수도로서의 시대는 끝났으나, 그후에도 현재에 이르기까지 남이탈리아의 중심도시로서 근대공업의 발전도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가장 앞서 있다. 나폴리항은 제노바 다음가는 이탈리아 제2의 상항()인데, 이 항구가 1924년에 확장되고부터 현대 나폴리의 발전이 비롯되었다. 공업은 서쪽 포지리포 지구 및 남동 해안을 따라서 발전하고 주택지구도 교외에 부단히 발전해 갔으나, 남부 각지에서 흘러들어오는 인구에 의한 빈민문제 등 사회문제도 심각하다.

공업으로는 전통적인 식료·섬유피혁공업과 병행하여 금속·화학·기계공업 등도 활발하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대부분의 시가지·항만시설이 파괴되었으나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 주로 17∼18세기의 바로크 양식의 교회 ·왕궁 등은 복구되었다. 나폴리는 베수비오 화산과 나폴리만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세계 3대 미항의 하나로 알려졌으며, 가까이에 있는 폼페이의 유적이나 카스텔 누보 등의 건물, 또 나폴리 민요·요리 등으로 관광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나폴리만에 면한 소도시들은 나폴리의 위성도시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으며, 동시에 활발한 어항, 마카로니 생산의 중심지, 카메오 등 조개세공의 산지로서 유명하다. 또한 1224년에 창설된 종합대학과 동양연구대학, 1737년 이래의 산카를로 가극장() 등이 있어 학예중심지로도 유명하다. 박물관으로는 BC 79년 베수비오의 화산재로 매몰되었던 부근의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두 도시의 귀중한 고고학적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이밖에 해양박물관, 유럽 유수의 수족관(), 육·해군기지, 음악학교 등이 있다.<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우리나라 부둣가에 가면 고깃배만 가득한데....ㅎㅎ

여기 나폴리에선 세계 휴양지답게 모두 요트다.

외국인의 그림에서 배들의 묘사에 왜 돛이 그리도 강조되어 그려졌는 지....여기와서 알게 되었다는.....ㅎㅎ

여름에 요트들의 돛이 활짝 펴졌을때 보면 그 또한 장관이리라!!

바로 앞엔 노천까페가 즐비한데....시간이 없어서 잠시 머물다만 온....너무나 아쉬운 나폴리 관광이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항구에서.....ㅉㅉㅉㅉ

 

뿐만아니라 기인 일정에서 사람들의 여윳돈이 바닥이 나서 카프리 여행을 할 수 없었다는 비극!!

아닌게 아니라 1인당 120유로나 되는 옵션관광이.....나처럼 혼자가 아니고 적어도 둘...아님 일가족이 오면 100만원이나 되는 선택관광을 하기란 쉽진 않다.

선택이 아닌 아예 여행비에 포함이 되면 모르지만....암튼 이래서 또 이탈리아만 다시 와야 한다는 결론...

그땐 여름에 와서 제대로 이탈리아의 뜨거운 태양과 정렬을 느끼고 싶다!

 

 

 

 

벨리니의 <몽유병의 여자> 중에서 로돌포 백작의 아리아
'그리웠던 아름다운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