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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반 위의 음유시인 - Geza Anda (게자 안다)

나베가 2009. 12. 8. 21:22
건반 위의 음유시인 - Geza Anda (게자 안다)


<훌륭한 모차르트 연주자로 널리 칭송받아 온 게자 안다의 진주처럼 영롱한 소리와 텍스처를 훌륭하게 이끌어 나가는 능력은 여전히 놀라움로 남아 있다.

안다의 뛰어난 동료들은 빠르고 위대하며 능숙했다. 하지만 그에게 음악은 구조와 비례에 대한 빈틈없는 이해와 깊은 연구를 통해서만이 발견되어지는, 심리적 중심에서 유기적으로 일어나는 존재였다. 그리고 연습이 중요했다.

보통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리스트의 작품에서 과격하게 몰아가며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무수히 많은 것에 즐거워하지만, 여전히 과장된 감정을 삭제하고 생기 있는 연주를 들려준다.

안다는 모차르트의 복합적인 작법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작곡가의 생각이 음표에 담겨 있다고 말하곤 했다. 소리의 아름다움은 각각의 음표에 존재한다는 걸 강조했고, 그 자신이 진주같이 영롱한 소리, 완벽하게 무게가 실린 소리를 내는지 정확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1940년, 데뷔 모대로 걸어 나오는 게자 안다는 늘씬하고 키 큰 소년의 모습이었지만, 그 실력에 있어서는 모든 기량을 갖춘 예술가와 다름없었다. 그나이로는 보기 드물게 나무랄 데 없는 테크닉을 소유했고, 선배 피아니스트를 통틀어 보더라도, 누구도 소유하지 못했던 감수성을 지녔던 안다는 30년간 지속된 연주 인생동안 전혀 시들 것 같지 않은 열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했고, 그는 각 작품이 스스로 움직이고, 그 내면에 이미 존재하는 완벽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그런 순수한 예술 세계를 보여주었다.

1921년 11월 19일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안다는 헝가리 예술이 한창 번창하던 환경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1932년 그는 빌헬름 박하우스를 만나 연주를 선보였다. 곧 박하우스의 추천으로 도흐나니는 다음 해에 안다가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에 들어갈 수 있도록 특별 장학금을 알선해 주었다.


음악원에서 잘 짜여진 엄격한 피아노 프로그램 속에서 안다의 실력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안다는 그곳에서 몇 년동안 테크닉을 먼저 쌓은 다음에야 표현할 수 있다고 가르치던 당시의 페다고지를 거쳤다.

"피아노를 치기 이전에, 우리는 인쇄된 악보를 살펴봄으로써 먼저 음악을 이해하고 흡수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언어를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죠. 먼저 문자를 배우고 페턴, 단어, 문장, 개념을 배우며, 그 다음에야 단어가 지칭하는 명시적인 의미와 함축적인 의미 따위의 난해한 차이를 배우게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다음으로 어떤 아티큘레이션에도 정확하게 연주해 낼 수 있도록 위해 난해한 패턴의 리듬 연습을 했다. 이 연습은 몇주간 계속되었고, 그런 다음에야 바흐 <칸타타>를 배울 수 있는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실내악 관한 바이너의 강의를 종종 들으러 갔었습니다......바이너와 함께 우리는 악기를 연주하는 법을 배운게 아니라 음악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음악의 프레이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모차르트의 작품이건 바르토크의 작품이건 음악을 접근하는데 어떠한 차이도 없어요"


모차르트로 돌아오다


안다는 모차르트 음악에 접근하는 데 처음에는 조심스럽기만 하다가 나중에는 대범해졌는데, 이는 클라라 하스킬과의 깊은 우정 때문이었다. 루마니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하스킬에게는 당시 잦은 질병이 그녀의 커리어에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는데, 1950년대에 안다와 만나 함께 연주하면서 가슴 떨리는 재회의 순간을 맞볼 수 있었다.

이 즈음에 안다는 풍부함으로 더욱 완숙해지는 듯 보였다. 이제는 비르투오소(민첩하고 간결한 손가락의 화려한 움직임)으로 인정받은 안다였지만, 그는 보다 높은 것을 얻길 원했다. 그리고 일에서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깊었던 그들의 우정은 안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갈리에라의 지휘 아래 필하모니와 함께 호흡을 맞춘 그들의 모차르트 <이중 협주곡, k.365>와 바흐의 <이중 협주곡, c장조> 음반은 두연주자가 음악적인 면에서 비슷한 이해 정도와 감수성을 지녔음을 보여주었다.

모차르트 작품에 영감을 얻고, 도전받은 안다는 여생 동안 모차르트의 스물다섯 곡의 독주 협주곡들을 연주하면서 시정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는 이작품들을 1962-1969년도이치그라모폰에서 녹음했다. (첫 전집 앨번이다)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의 카메라타 아카데카와 함께한 이 작업에서 그는 피아노에 앉아 지휘도 함께했다. 낭만주의 전통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안다는 자신이 소유한 위대한 재능을 잘 발휘했다.

안다의 제자였던 촌거 베르츠는 "모차르트는 그를 사로잡았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프랑크 푸르트에서 살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끝도 없이 그 작법의 복합적인 면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모차르트가 음표를 먼저 적어놓았다는 사실을 말했지요. 소리의 아름다움은 각각의 음표에 존재하고, 어떤 하나의 음표라도 그냥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이 작품이 복합적인 특징을 드러내고, 그렇지 않을 경우 모든 효과는 줄어든다고 말했습니다. 악보의 모든 음은 다른 나머지 모든 음에 속해 있고, 또 연관되어 있습니다. 나는 작곡가에도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그가 쓴 카덴차에 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안다의 연주스타일과 놀라운 손가락 컨트롤은 이어지는 베르트의 말에서 더욱 드러난다.

"그는 진주같이 영롱한 소리, 완벽하게 무게가 실린 소리를 내기 위해서 어떻게 건반을 다루어야 하는지에 관한 정확한 감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왼손을 강하게 발전시킬 것을 강조했어요. 그는 특히 모차르트에게 가혹했습니다. 왼손을 엄격하게 지키고, 오른손은 루바토로 연주하라는 모차르트의 의견을 강조했어요. 그의 음반에서는 잘 발달된 근육의 힘으로 표현되는 이러한 특징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술과 사랑으로 풍요로운 삶


안다의 방에는 그가 남기고 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를 통해 음악 이면에 가려진 그의 모든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일찍이 조각된 피에타상, 기원전 300년경으로 추정되는 그리스의 대리석 말머리, 책상 위에 놓여진 정교한 은세공 컵, 시, 역사, 음악학, 미술, 조각, 철학, 독일 고전 문학, 전기 , 서간집 등의 서적들과 리스트, 바르토크, 파가니니 그리고 1969년에 태어난 그의 아들 그러티안(바로 위의 아들은 1967년 태어나자 마자 죽었다)의 초상화 액자들이 있다.

그는 많은 일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전쟁통을 지나면서 자신의 길을 닦아 나갔던 하나의 젋은이로써, 그는 연주회의 일로 암스테르담이나 파리에 갈 때면 예술 서적을 사는 데 돈을 썼다. 후에 여력이 생겼을 때, 그는 친구들이나 손님들과 함께 나누는 그런 자비로운 삶을 좋아했다. 순수한 지성과 깊이에 대한 본성을 부여받은 안다는 대화를 하고 모든 사회 계층의 특별한 사람들과 한바탕 웃을 수 있는 그런 시간을 무척 사랑했다.

그가 받았던 빈번한 질문은 "어떻게 그럴 수 있지?"였다.

그만큼 안다는 모든 일의 진행과정과 사람들이 공예품을 만드는 과정 등에 매료되었다. 그는 목수에게 어떻게 들보를 만드는지 물었고, 농부에게는 어떻게 밭을 가는지 물었다. 급기야 그는 제본술까지 배웠다. 그는 도시 위에 있는 얕은 산등성이에 작은 산장을 가지고 있었고. 여름이면 이곳을 즐겨 찾았다. 또 자신들의 가축 떼를 방목하는 그곳의 농부들을 존경했다. 그들이 곡식을 가축 떼를 방목하는 그곳의 농부들을 존경했다. 그들이 곡식을 수확하거나 나무를 베는 일을 즐겁게 거들기도 했다. 물론 다음과 같이 양해를 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몇시간 정도 연습하러 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고개를 들고 끄덕였다.

"당신은 참을성 있는 이면을 지녔군요"

여생동안 음악을 창조하는 일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그것인 독주든 협주든, 실내악 연주든 가르치는 일이든, 축제에 참여하는 일이든, 그는 사람들이 알았기 때문에 연주회를 취소한적이 없었다. 트레이드마크인 강철같은 의지를 발휘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연주를 계속했다. 일반적으로 그는 자신의 연주가 좋았다고 생각했지만, 매일 연습하고 지속적으로 연구해 계속해서 개선해야 할 여지를 항상 남겨두었다. 안다는 많은 상을 수상했어도 스스로를 칭찬하지 않았다. 가끔 드물게 그가 예외적으로 특별히 잘 연주 했을 때면 그는 호르텐세에서 소년 같은 기쁜 미소를 지어보이며 속삭였다.

"자 또 우리가 해냈어. 안 그래?"

그는 후 병을 얻었다. 아마도 계속된 과로 탓이었을 것이다. 1974년, 그는 식도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런던에서 엄청난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느리고 조용하게 계속 연주를 계속했고, 계속 성장했다. 다음해에 병이 완화되었고, 계속 성장했다. 그러나 그가 연주 여행 계획을 계속 짜고, 연주를 하고 있을 때에도 그는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나는 다시는 이렇게 연주하지 못할 걸요"라고 말했다. 그는 연주를 계속 했다. 그의 삶의 본질이었다. 그는 끝까지 연주하려 했다. 인스부르크에서 <오중주> "송어"를 연주한지 일주일 후, 런던에서 낙관적인 진단을 받은 그는 이튿날인 1976년 6월 13일 취리히의 집에서 출혈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20년동안 취리히를 여러 번 방문하여 안다와 친구로 지냈던 미국인 목사 토머스 딕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안다는 무대위에서나 무대 뒤에서나 한결같이 진실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언젠가 취리히에 갔다가 그를 찾아갔던 날이 기억나요. 슈만의 한 곡을 연습하고 있었죠. 연주는 순수한 하나의 시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멈추고 물었어요. "내가 자넬 위해 무엇을 연주에 주면 좋겠나? 듣고 싶은 것을 말해보게" 나는 쇼팽의 <녹턴>중 한곡을 부탁했고, 그는 연주했습니다. 두어 군데 정도 실수가 있었지만, 그것은 음악의 아름다움 그 자체였고. 그 발현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그의 정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안다의 이런 키트적인 영혼의 정수는 음반을 통해 지속되었고, 그의 많은 음반은 CD로 재발매되었다. 또한 그의 이름으로 설립된 재단과 콩쿠르는 젋은 음악도들을 발굴하고 있다. 낭만적인 심장을 지녔던 그는 평온한 젊음과 탁월한 예술 세계 속에서, 계속해서 항상 낭만적인 삶을 지속시키며 살아 숨쉬고 있다.



글/ Linda Grenn . 번역 / 김지혜

INTERNATIONAL PIANO . January 2004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