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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ard Bernstein (레너드 번스타인)

나베가 2009. 12. 8. 23:05

Leonard Bernstein (레너드 번스타인)

              

 

번스타인은 1918년에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 러시아 Rovno에서 이주한 유태인 가족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샘 번스타인은 회사원이었으며, 처음에는 번스타인의 음악에 대한 관심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번스타인은 종종 루이스(아들의 별칭)를 오케스트라 공연에 데려갔다. 한번은 번스타인이 피아노 공연을 듣고 곧 마음이 사로잡혀서 곧장 어린 나이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 기간에 번스타인은 보스턴 라틴 스쿨에 다녔다.


보스턴 라틴 스쿨에서 졸업한 후, 번스타인은 하바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월터 피스턴에게서 음악을 배우고,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하여 지휘를 프리츠 라이너에게서 배웠다. 커티스에 있는 동안, 번스타인은 또한 Helen Coates와 Heinrich Gebhard에게서 피아노도 배웠다.


그는 지휘자, 작곡가, 피아니스트, 그리고 교육자로서 크게 인정받았고, 특히 대중들에게는 장기간의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으로서 가장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그는 또한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들을 객원 지휘했으며,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음악을 썼다. 그는 또한 세 개의 교향곡, 두 개의 오페라, 다섯 개의 뮤지컬 음악 외에 다수의 작품을 썼다. 번스타인의 정치적 성향은 확고한 좌파였지만, 다른 동시대인들과는 달리 그는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1950년대에 블랙리스트에 오르지는 않았다. 1960년대 말 혹은 1970년대 초반에, 그는 [흑표범단(Black Panther Party)[1]을 위해 자선 공연을 하기도 했으며, 공개적으로 베트남 전쟁을 반대했다.

1943년 11월에, 그는 아픈 브루노 발터의 대역으로 뉴욕 필을 지휘해 지휘자로 데뷰했으며, 즉시 성공을 거뒀다. 1949년에 그는 올리비에 메시앙이 작곡한 튀랑갈릴라 교향곡을 세계 초연했다. 1957년에 그는 텔 아비브에서 Mann Audiotorium의 개관 공연을 했으며, 거기에서 많은 녹음을 진행했다. 1960년대에, 그는 미국에서 공영 텔레비전을 위한 《청소년을 위한 연주회》 시리즈로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의 작곡은 유대교 전례 음악(특히 그의 교향곡 1번과 3번, 그리고 치체스터 시편), 구스타프 말러, 조지 거슈윈, 그리고 그의 친구 아론 코플랜드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1989년의 크리스마스 날(12월 25일)에 번스타인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베를린 장벽 붕괴 기념식의 일부로서 연주했다. 공연은 20개국 이상 100만 명 가량의 청중에게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다. 그 때에, 번스타인은 프리드리히 쉴러의 〈환희의 송가〉 가사를 바꿔서, 단어 '환희(Freude)'를 '자유(Freiheit)'로 바꾸어 사용했다. “나는 베토벤이 우리에게 그의 축복을 내렸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번스타인이 말했다.

번스타인은 많은 음악가들 사이에서 크게 인정받는 지휘자였으며, 특히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정기적으로 객원 지휘하며 그들 사이에서도 인정받았다. 그는 특히 구스타프 말러, 아론 코플랜드, 요하네스 브람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그리고 당연히 그의 자작곡에서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그의 지휘 양식이 신파조에 짜증나게 하고 주의가 산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휘하면서 춤추고 발작하듯이 기뻐하고는 했던 것이다. 번스타인의 개인사는 지휘자로서의 영광, 작곡가로서의 생산성, 그리고 그의 열정 넘치는 정치적 활동으로 인한 비판 사이에서 고통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번스타인은 또한 그의 가족에 대한 헌신과 그의 양성애적 성향 사이의 충돌을 느꼈다고도 전해지지만, Arthur Laurents(웨스트사이드 스토리에서 번스타인의 조력자)는 Charles Kaiser(《The Gay Metropolis》의 저자)에게 번스타인은 단지 “결혼한 게이였다. 그는 전혀 충돌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단지 게이였다”라고 말했다. 다른 번스타인의 친구인 Shelly Rhoades Perle는 번스타인의 전기작가인 Meryl Secrest에게 자신은 “그가 성적으로는 남성을, 감성적으로는 여성을 원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번스타인은 그의 만년에 우울증 발병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음원출처: http://myhome.hanafos.com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West Side Story, 1961)/Maria

미국 태생의 피아니스트,작곡가이자 지휘자.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당대 최고의 지휘자가 된 첫 음악가가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이다.

1943년 가을,25세인 그가 뉴욕 필하모니의 지휘대에 섰을 때까지 미국 일류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한결같이 외국 출신이었다.

예컨대 뉴욕 필하모니의 상임지휘자는 유고 태생의 아르투르 로진스키(Artur Rodzinski)였고,NBC 교향악단은 이탈리아 태생의 아르투르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보스톤 심포니는 러시아 태생의 세르게이 쿠세비츠키(Sergei Koussevitzky),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헝가리 태생의 유진 오먼디(Eugene Omandy),샌프란시스코 심포니는 프랑스 태생의 피에르 몽퇴(Pierre Monteux),피츠버그 심포니는 헝가리 태생의 프리츠 라이너(Fritz Reiner),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에리히 라인스도르프(Erich Leinsdorf) 등이었는데,이중에서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따라서 그뒤 1957년 레너드 번스타인이 뉴욕 필하모니의 상임지휘자로 뽑혔다는 것은 미국 음악계에 있어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미국 오케스트라가 사상 처음으로 미국 태생의 상임지휘자를 갖게 된 셈이다.

이러한 번스타인의 지휘자로서의 성공은 대 유럽 콤플렉스를 완화시켰고 나아가 로버트 쇼(Robert Shaw),도날드 요하노스,마이클 틸슨 토마스(Micheal Tilson Thomas) 등 미국인 지휘자의 앞길을 개척하는 결과를 낳았다.

뿐만 아니라 비 유럽인이었던 오자와 세이지(Seiji Azawa)나 주빈 메타(Zubin Mehta) 등이 대두하게 된 것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1918년 8월 25일,미국 매사추세츠 주(州) 로렌스(Lawrence, Massachusetts)에서 태어났다.

그의 양친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박해를 받다가 미국으로 이주한 유태인이었다.

레너드 번스타인에게는 어려서 흔히 있는 신동시대는 전혀 없었고,따라서 8세 때까지는 음악과는 무관한 환경에서 평범하게 자랐다.

유태계 우크라이나인 이민 가정이라 가난을 면치 못했던 그는 8세 때에야 피아노 공부를 시작하였고,그러나 15세에는 매사추세츠 주립교향악단과 그리그(Edvard Grieg)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는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1939년 하버드대학 음악부를 졸업한 뒤 재학중에 알게 된 명지휘자 드미트리 미트로풀로스(Dimitri Mitropolos)의 추천으로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원에 들어갔다.

거기서 지휘법을 프리츠 라이너에게 배웠고,그뒤 탱글우드에서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에게 사사했고 그의 조수로 일하였다.

또한 작곡은 윌터 피스톤(Walter Piston),관현악법은 랜달 톰프손(Randall Thompson),피아노는 러시아 태생의 여류 피아니스트 이자벨라 벤젤로바(Isabella Vengerova)에게 사사했다.

지휘자로서 데뷔는 23세 때 하버드 학생오케스트라와 자작의 극장음악 <아스토파네스의 평화>를 연주한 것이 처음이나,1940/1941년 탱글우드 음악제에서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에 발탁되어 보조 지휘자로 활동한 것이 공식데뷔였다.

1943년 아르투르 로진스키의 추천으로 당시 로진스키가 상임지휘자로 있던 뉴욕 필하모니의 부지휘자가 되었다.

그러던 중 그해 11월 14일,동 교향악단의 정기연주회에서 객원지휘를 하게 되었던 브루노 발터(Bruno Walter)가 급환으로 출현할 수 없게 되자,리허설 없이 대역으로 지휘했던 것이 크게 성공을 거두어 일약 미국 악단의 총아로 떠오르게 되었다.

한편 번스타인은 그 시기에 작곡가로서도 서서히 인정받고 있었고,1945년부터는 뉴욕 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도 겸직하게 되었다.

또 1946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제 출연을 시작으로 1947년부터 근동 및 유럽 여러 나라에 연주 여행을 하였고,1953년 밀라노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서 오페라를 지휘하였다.

더욱이 1951년부터 버크셔 음악 센터의 지휘과와 오케스트라의 주임을 맡았고,브란디스 대학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번스타인은 1957년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를 발표하였으며,1958년부터 1959년의 시즌에 미트로풀로스의 후임으로서 뉴욕 필하모닉의 예술과 경영면에서도 토스카니니의 재임 시대에 비견되는 황금 시대를 연출하였다.

 

1953년 레너드 번스타인은 미국인 지휘자로는 유사이래 처음으로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객원지휘를 한 것을 비롯해서 구미 각지에서 활발한 객원지휘 활동을 펼쳤다.

1957년 레너드 번스타인은 미트로풀로스의 희망에 따라 이 그리스출신의 거장과 뉴욕 필하모니 상임지휘자로 공동 취임하게 되었다.

이후 1958년 미트로풀로스가 사임한 뒤에는 단독 사임지휘자의 자리를 이어 받았다.

그리하여 당시 질적으로 저하되어 있었던 동 악단을 순식간에 토스카니니가 재임하고 있던 황금시대의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이듬해 1959년에는 동 악단을 이꿀고 유럽에서 러시아(구;소련)에 이르는 순회연주여행을 했고,1961년에는 아시아 일대를 순회하여 각각 압도적인 대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1962년 봄,상임지휘자의 계약갱신 때 다시 7년이라는 기간이 연장된 것도 번스타인의 실력과 인기가 그만큼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969년까지 12년 동안 뉴욕 필하모니의 상임지휘자로 있었는데,그 재임기간 중에만도 939회의 연주회를 기록했다.

1969년 보다 광범한 무대를 찾아 뉴욕 필하모니 상임지휘자의 자리를 피에르 블레즈(Pierre Boulez)에게 물려주고 물러났는데,뉴욕 필하모니는 그에게 전례없는 계관지휘자의 칭호를 증정했다.

그뒤 번스타인은 미국과 유럽을 내왕하면서 활동했는데,특히 런던 교향악단과 빈 필하모니는 특별히 친밀한 관계였다.

1965년 5월 코펜하겐에서 열린 덴마크의 대표적인 작곡가 칼 닐센(Carl August Nielsen)의 <교향곡 제3번 - 에스판시버>의 연주,1966년 3월 빈 음악제에서 빈 필하모니를 지휘한 베르디의 <팔스타프>의 연주,역시 빈 필하모니를 지휘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베토벤의 <피델리오> 등의 연주는 모두 절찬을 받았고 세계적인 화제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이제 번스타인은 세계적인 거장으로 우뚝 섰으며 그의 나이와 경력으로 봐 그의 큰 활약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이제까지 오페라 부문에서는 앞에서 말한 스칼라 극장에서의 케루비니의 <메디아>(주역은 칼라스)의 지휘가 유일한 체험이었다.

그러나 1963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과 1966년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의 <팔스타프>,1968년 역시 빈에서의 <장미의 기사>,1970년과 1972년 메트로폴리탄에서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와 <카르멘>,1978년 빈의 안 데어 빈 극장과 밀라노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서의 <피디리아> 등으로 오페라에도 의욕을 불태웠다.

그리고 1981년 1월부터 뮌헨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녹음(디지털 녹음)도 하였다.

말년에는,전부터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이스라엘 필하모니를 비롯하여 빈 필하모니와 프랑스 국립관현악단에의 객원 연주를 자주 하였고,그에게 장시간 출연의 기회가 막혀 있었던 베를린 필하모니에서도 지휘를 하였다. 
레너드 번스타인이 남긴 레코드는 수 없이 많다.

여기서 그의 대표반을 든다는 것은 카라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매우 어렵다.

헤아리기보차 어려운 너무나도 많은 레코드,그리고 갖가지 명연반들을 일일이 열거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중에서도 단연 비교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앨범만 들기로 한다.

우선 미국 작곡가들의 것으로는 뉴욕 필하모니를 지휘한 그로페의 <그랜드 캐년>,코플랜드의 <아팔라치아의 봄>,<엘 살롱 메히코> 등은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연반이다.

그리고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 운명>에서는 미국인답지 않은 중후하고 논리적인 해석을 보여 단연 이체를 띤다.

말러의 전 교향곡은 모두 뛰어난데,그중에서도 <교향곡 제1번 - 거인>,<제4번 교향곡>,<제8번 교향곡>,<대지의 노래> 등이 탁월하다.

그밖에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1번>과 <교향곡 제5번>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실연을 듣고 절찬해 마지 않았던 명연주이다.

오페라반으로는 메조 소프라노 혼,테너 맥크라켄,바리톤 크라우제 등을 기용하여 메트로폴리탄 가극장 관현악단을 지휘한 <카르멘> 전곡반,빈 국립가극장 멤버들을 지휘한 <팔스타프> 전곡반 등이 단연 빛을 발한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작곡가로서도 <교향곡 제1번 - 예레미아>,<제2번 - 불안의 시대>,<제3번 - 카디시> 등을 비롯하여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팬시 프리>,발레곡 <춤추는 대(大) 뉴욕> 등이 있다.

그는 1944년 1월 피츠버그에서 자신의 <예레미아 교향곡>을 초연하였고,이어 4월 18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발레 <팬시 프리>를,12월 28일 뉴욕 어델피 극장에서 뮤지컬 <춤추는 대뉴욕>을 초연하여 작곡가로서도 확고한 명성을 수립하였다.

특히 1971년 케네디 기념관 준공식 때 그 자신의 지휘로 연주한 <미사곡>은 경이적인 성공을 거두었고,그 실황녹음 레코드는 그해에만 20만 장이 팔렸다.

또한 그는 해설자로서도 아주 인기가 많았는데,우리나라에서도 티비로 방영되었던 <청소년 음악회> 시리즈는 가장 시청율이 높은 인기 프로그램의 하나였다.

그리고 지휘자로서 피아니스트인 음악가는 많지만 번스타인의 피아노 연주는 일류급이었다.

스스로 피아노를 치면서 뉴욕 필하모니를 지휘한 거쉬인의 <랩소디 인 블루>,<파리의 아메리카인>,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줄리어드 현악4중주단과 협연한 슈만의 <피아노 오중주곡>,빈 필하모니와 협연한 모짜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15번> 등은 그의 피아노 솜씨가 어떠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또 보스턴 팝스의 연주회에서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의 지휘와 피아노 연주를 하는 등,1인 2역의 연주를 처음으로 공연하였다.

다니엘 바렌보임이 그렇듯이 피아노 방면에서의 번스타인의 능력은 놀랄 만하다.

한폄 음악학자로서의 번스타인은 그의 풍부한 경험을 엮은 저서 <음악의 기쁨, The Joy of Music>,<음악을 이야기하다, The Infinitive Variety of Music> 등의 값진 노작들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뉴욕 필하모닉이 떠받드는 지휘자 1979년 6월 29일과 30일의 뉴욕 필하모닉의 연주 때,100여 명이나 되는 단원들의 한결같이 지휘자 번스타인을 받드는 정신이 무대 전면에 나타난 것은 가장 흐뭇한 정경이었다.

번스타인이 쉬는 곳은 세종문화회관 무대 조금 아래에 있는 방이었는데,연주 시각이 알려지면 오케스트라 단원 두 사람이 번스타인이 쉬는 이 방의 문을 공손히 두드리고 들어가서,위대한 지휘자를 보호하는 뜻으로 그를 모시러 온 두 단원 중 한 사람은 번스타인 뒤에 서서 에스코트하여 무대까지 정중히 모시는 것이었다.

이런 광경은 일반적인 오케스트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장면이며 오직 존경하는 지휘자 번스타인을 모시는 이 뉴욕 필하모닉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 두 단원의 에스코드를 받으며 무대 옆까지 온 번스타인이 이 오케스트라 왼쪽으로 나있는 단원 사이의 빈틈을 통하여 지휘대를 향해 걸어갈 때 모든 단원이 정색하여 존경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것은 그 1년 전인 1978년 라인스도르프가 번스타인을 대신하여 왔을 때에는 볼 수 없던 광경이었다.

번스타인은 이 오케스트라의 상임을 떠났으나 여전히 단원들에게서 '레니'란 애칭으로 불리우고 있으며 어떤 때에라도 번스타인이 지휘해 주는 것을 반기는 사랑으로 맺어진 때문이었다.
이같이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존경과 사랑으로 맺어져 있기 때문에 이들의 연주는 진지하고 경건하며 온 힘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
이 연주회장에 왔던 음악평론가 K씨는 "번스타인이 10년 동안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로 있을 때 무엇보다도 정신을 더 부르짖어 기술이 다소 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그의 드높은 덕성으로 이런 결함을 극복할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의 이번 연주회에서도 그러한 것을 느꼈는데 번스타인은 어떤 초월적인 세계를 갖고 있었다.

이 한 지휘자의 드높은 음악 정신과 인간 정신에 모든 단원들이 영적으로 뭉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듯 기막힌 연주를 하게 되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1989년의 크리스마스 날(12월 25일)에 번스타인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베를린 장벽 붕괴 기념식의 일부로서 연주했다.
공연은 20개국 이상 100만 명 가량의 청중에게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다.
그 때에,번스타인은 프리드리히 쉴러의 <환희의 송가> 가사를 바꿔서,단어 '환희(Freude)'를 '자유(Freiheit)'로 바꾸어 사용했다.
“나는 베토벤이 우리에게 그의 축복을 내렸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번스타인이 말했다.

번스타인은 많은 음악가들 사이에서 크게 인정받는 지휘자였으며,특히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정기적으로 객원 지휘하며 그들 사이에서도 인정받았다.
그는 특히 구스타프 말러,아론 코플랜드,요하네스 브람스,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그리고 당연히 그의 자작곡에서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그의 지휘 양식이 신파조에 짜증나게 하고 주의가 산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휘하면서 춤추고 발작하듯이 기뻐하고는 했던 것이다.
번스타인의 개인사는 지휘자로서의 영광,작곡가로서의 생산성,그리고 그의 열정 넘치는 정치적 활동으로 인한 비판 사이에서 고통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번스타인은 또한 그의 가족에 대한 헌신과 그의 양성애적 성향 사이의 충돌을 느꼈다고도 전해지지만,아서 로렌츠(Arthur Laurents;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에서 번스타인의 조력자)는 찰스 카이저(Charles Kaiser; The Gay Metropolis의 저자)에게 번스타인은 단지 “결혼한 게이였다.
그는 전혀 충돌감을 느끼지 않았다.그는 단지 게이였다”라고 말했다.

번스타인은 그의 만년에 우울증 발병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번스타인은 칠레 출신의 여배우인 펠리시아 몬테알레그레(Felicia Montealegre)와 1950년에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몬테알레그레는 번스타인의 세 번째 교향곡인 <Kaddish>의 1960년대 뉴욕 필하모닉과의 연주에서 화자(본래 이스라일 출신의 전설적인 여배우 Hanna Robina가 공연했던 역할)로 참여했다. 
번스타인 자신은 한 명의 사랑하는 아버지였음에도 불구하고,그는 음악 세계에서 그의 난잡한 성생활로 악명높았다.
부부는 1970년대에 그녀가 번스타인이 여러 동성애 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안 후에 이혼했다.
그의 아내와의 결별 이후에,번스타인은 1971년부터 그의 파트너였던 톰 코크란(Tom Cochran)과 살았다.
그는 그의 아내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심하게 아프게 되었을 때에 그녀를 간호하기 위해 돌아왔다.

닉슨 대통령을 암살하려 시도했던 정신병자 사무엘 빜(Samuel Byck)은 그의 계획의 세부를,한 사람으로서도 지휘자로서도 존경했던 번스타인에게 보냈었다고 한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1990년 8월 19일 탱글우드에서 벤자민 브리튼의 <Four Sea Interludes>와 베토벤의 <제7번 교향곡>을 보스톤 심포니와 함께 생애 마지막으로 지휘했다.

그리고 1990년 10월 14일,향년 78세를 일기로 페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레너드 번스타인의 유해는 뉴욕 브루클린의 그린우드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