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의 연수 기회를 얻어 영국에 가기로 했을 때, 처음에는 좋은 공연 많이 볼 수 있겠다고 내심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좋은 공연’중에는 말로만 듣던 영국 최대의 음악축제, ‘프롬스(Proms)’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막상 영국에 도착하고 나니 이것저것‘정착 작업’에 바쁜데다 아이들 봐줄 사람도 없어, 공연 보러 갈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하고 지냈다.
그런데 영국에서 맞이한 세 번째 주말 저녁, 식사를 마치고 별 생각 없이 튼 텔레비전에서 눈이 번쩍 띄게 하는 공연을 방영하고 있었다.
"어, 안나 네트렙코 아냐? 저 지휘자는 지난번 BBC 심포니 내한공연 때 봤던 얼굴이네? 아하, 프롬스구나!"
내가 영국에 와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린 2007년 프롬스의 폐막 공연(The last night of the Proms)이 BBC-TV를 통해 생중계되고 있었던 것이다. 프롬스 시즌에 영국에 도착했다는 걸 잊고 있었군, 뒤늦게 깨닫고는 텔레비전 화면에 눈을 고정했다.
확실히 여타 음악회와는 다르다. 물론 연주가 진행될 때는 모두 조용히 경청하는 분위기지만, 연주가 끝날 때마다 열광하는 관객들의 모습은 무슨 스포츠 경기나 록 콘서트에 온 듯했다. 턱시도에 나비넥타이, 청바지에 티셔츠, 형형색색의 분장과 의상이 공존했다.
화면에 비치는 무대 바로 앞 객석은 한 곡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말 그대로 들썩거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서 있다. 흥이 나면 호흡을 맞춰 몸을 숙였다 일어났다 하면서 춤추는 물결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영국 국기인 유니언 잭을 비롯해 색색의 깃발들이 객석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이거야말로‘축제’였다.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까지 등장하는 걸 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화면은‘공원의 프롬스(Proms in the Park)’공연이 열리고 있는 런던 하이드 파크로 바뀌었다. 이번에는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가 나와 노래한다. 요즘‘포스트 파바로티’후보로 지목되고 있는 페루 출신의 테너. 더 이상 화려하기 어려운 출연진이다.
방송은 로열 앨버트홀과 하이드 파크뿐 아니라 카릭퍼거스, 글래스고, 스완지, 티즈밸리 등 영국 전역을 다원 연결했다. 각 지역마다 로열 앨버트 홀의 메인 공연 실황을 보여주는 대규모 스크린이 설치돼 있고, 그 지역 대표 오케스트라와 유명 솔리스트들이 출연하는 공연이 진행되고 있었다. 구름처럼 모여든 관객들의 모습 자체가 장관이었다.
로열 앨버트 홀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도 등장해 관객들의 열광적인 환호성을 이끌어냈지만, 역시 이 날의 여왕은 안나 네트렙코였다. 레하르의‘주디타(Giuditta)’중 ‘너무나 뜨겁게 입맞춤하는 내 입술’을 부른 네트렙코는 정열적인 춤까지 선보이면서 붉은 장미꽃을 한 송이, 한 송이, 청중들을 향해 던졌다. 객석의 열기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공연 후반부에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1번에 노랫말을 붙인‘영광과 희망의 땅(Land of Glory and Hope)’이나, 영국 국가가 연주될 때는 객석이 마치 축구 국가대표 대항전 응원석 같았다. 함께 노래 부르고, 색색의 깃발을 흔들며 즐거워하는 관객들을 보면서 지극히 영국적인 축제의 피날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 실황을 끝까지 본 딸아이가‘이렇게 재미있는 음악회는 처음 봤어!’하고 웃었다.
폐막 공연만 본 아쉬움을 안고, 뒤늦게 올해 프롬스 프로그램을 공식 웹사이트에서 확인했다. 7월 19일부터 9월 8일까지, 거의 두 달 동안 로열 앨버트 홀에서 70회 이상의 오케스트라 연주회가 열렸다. 이리 벨로흘라베크가 이끄는 BBC 심포니 외에도 런던 심포니와 발레리 게르기예프, 보스턴 심포니와 제임스 레바인,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와 마이클 틸슨 토마스, 빈 필하모닉과 다니엘 바렌보임…. 쟁쟁한 이름들이 즐비하다. 연주곡도 헨델의 바로크 음악에서 토마스 아데의 현대 음악까지 시대를 망라한다. 메인 콘서트 외에도 공원의 프롬스, 프리 콘서트 토크, 포럼, 실내악 페스티벌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다. 이런 행사들은 대부분 BBC 텔레비전과 라디오, 인터넷을 통해 중계됐다.
그런데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프로밍(Promming)’‘프로머(Prommer)’라는 단어가 자꾸 튀어나온다. ‘프롬스(Proms)’를 즐기는 것, 즐기는 사람. 사전에는 나오지 않지만 프롬스 팬들에게는 익숙한 단어다.‘Promenade Concert’에서 유래된‘Prom’은 관객 일부가 서서 즐기는 음악회다. 그러니 제대로 프로밍을 하려면 매년 프롬스가 열리는 런던 로열 앨버트 홀의 프로밍석에서 음악회를 봐야 한다.
프로밍석은 오케스트라 바로 앞쪽에 1000명 이상이 서서 음악회를 볼 수 있게 만들어진 자리다. 이 프로밍 티켓의 가격은 불과 5파운드. 만 원 안 되는 가격으로 세계적인 수준의 음악회를 감상할 수 있다. 내가 방송으로 봤던 그 열광적인 청중들이 모두 프로밍석의 프로머들이었던 것이다.
관객 리뷰를 보니 시즌 티켓을 사서 올해 프롬스 공연을 모두 섭렵했다는 이, 50년 동안 프롬스를 방송으로만 보다가 올해 처음으로 로열 앨버트 홀에 가서 생애 최고의 날을 보냈다는 이, 독일에서 프롬스를 26년째 보고 있다는 이,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공연 평들을 쓰고 있었다. 매서운 비판도 있었지만, 이들이 모두 프롬스의 팬이요, 프로머들이라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1895년 프롬스가 처음 시작됐을 때 내건 목표는‘가장 다양한 음악을, 가장 뛰어난 연주로, 대규모 청중들에게 들려주는 것(widest possible range of music, performed to the highest standards, to large audiences)’이었다. 또 BBC는 80년 전 프롬스 주최사로 참여하기 시작하면서‘음악의 메시지를 민주화하고, 그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 돌아가도록 한다(truly democratizing the message of music, and making its beneficent effect universal)’는 취지를 밝혔다. 이런 목표와 취지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는 듯하다.
올해는 폐막 공연만 텔레비전으로 보는 데 그쳤지만, 이제 내년 프롬스 일정을 알았으니, 다음에는 나도 본격적인 프로머가 돼보고 싶다. 영국 사람들은 당일 판매하는 프로밍 티켓을 사기 위해 줄을 서는 것 또한 프롬스의 오랜 전통이요, 프로밍의 일부라고 한다. 내년 여름에는 나도 로열 앨버트 홀 앞에 늘어선 긴 줄에 동참할 수 있기를. ‘이렇게 재미있는 음악회는 처음’이라던 딸아이까지 함께.
이 글을 쓴 김수현은 1993년 가을부터 SBS기자로 일하고 있으며 공연 관련 분야를 오랫동안 취재해왔다. 현재 영국 연수 중, 워릭대학교에서 문화정책을 공부하고 있으며, 세 살짜리 둘째 아이가 빨리 자라서 온 가족이 함께 공연장 나들이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