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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실공히 베토벤 피아니즘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피아노 소나타 서른두 곡은, 우리에게 마치 우주와 같은 웅대함을 펼쳐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주는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존재하지만, 동시에 시작과 끝을 찾을 수 없는 열린 공간이기도 하다. 서른두 개의 크고 작은 생명체들은 한데 모여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로 형성되며 갖가지 음악적 빛깔이 혼합되어 그동안 흔히 만나온 베토벤적인 스타일과 본질과는 전혀 다른 제3의 작곡가상이 결정되는 것이다. 베토벤 사이클의 완주란 한 곡의 소나타를 연주하는 것과는 이렇게 근본적인 접근 방법부터 다르며, 소나타 한 개를 연주할 때의 어려움의 서른두 배가 아닌 수십 수백 배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하루도 쉬지 않고 모두 여덟 번에 걸쳐 숨 가쁘게 펼쳐질 베토벤 사이클의 제1회는 그의 소나타들의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다. 작은 보석과 같이 반짝거림으로 가득 찬 19번, 씩씩한 남성적 기백의 20번과 함께 베토벤이 가장 사랑하는 조성으로 유명한 c 단조의 소나타 5번은 작은 규모지만 폭넓은 화성과 비장미로 사랑받는 곡이다. 그의 소나타 최초의 번호를 자랑하는 f 단조의 1번은 야심만만했던 젊은 베토벤의 혈기가 그대로 드러난 곡으로, 악성의 의욕이 느껴지는 네 개의 악장 모두가 인상적이다. 당당한 기교가 리스트를 예견케 하는 3번은 화려함과 달콤함, 기발한 아이디어를 골고루 갖춘 걸작이다.
2회는 베토벤이 어두운 힘과 정열만 지니고 있지 않았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낙천성이 강조된 무대다. 의젓함과 스케르초적인 익살스러움이 교차되는 10번을 지나, 로맨틱한 서정성과 탄력 있는 리듬감이 특징인 A장조의 2번이 연주된다. 또한 ‘전원’이라는 애칭의 15번은 시종 여유 있는 행보와 절제된 음의 배열이 개성적인 곡으로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는 작품이다. ‘비창’ 소나타로 인기 있는 8번은 그러나 부제와는 달리 밝고 건강한 리듬과 멜로디가 전곡을 수놓는 곡이다. 우아한 2악장과 고전적인 깔끔함이 적절하게 자리 잡은 3악장이 널리 알려져 있다. 3회에 연주되는 작품들에서는 악성의 고뇌와 그때그때 느껴지는 감성들이 여과 없이 그려진다. 초심자용으로 적합한 F장조의 6번은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기복 심한 다이내믹과 입체적인 뉘앙스가 두드러진다. 같은 작품번호 안에 묶여 있는 7번은 특히 피아니스트들에게 사랑받는 곡으로, 쾌적한 1악장과 이와 정반대의 대조를 이루어 깊은 슬픔의 세계를 그리는 2악장이 특히 유명하다. ‘환상곡 풍’ 이라는 부제와 함께 자유로운 악상과 지적인 멜로디를 표현하는 13번을 지나면, 베토벤식 표제음악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26번 ‘고별’ 을 만난다. 각각 ‘고별’ ‘부재’ ‘재회’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세 개의 악장에서 우리는 인간 희로애락의 표현에 베토벤이 얼마나 정통했는지 깨닫게 된다. 솔직하지만 그 시각이 무척 객관적이라는 점이 더욱 훌륭하다.
4회의 연주는 베토벤 창작 중기의 원숙함을 만끽할 수 있는 네 곡의 소나타로 구성돼 있다. 본격적인 중기 소나타의 시작이라고 할 16번 G장조는 전 서른두 곡을 통틀어 가장 즐거운 분위기이며, 전례 없이 긴 길이를 자랑하는 2악장에서는 풍자적인 유머도 풍긴다. 유독 여성 팬들이 많은 17번 ‘템페스트’에서는 소용돌이치듯 매력적인 서정성을 지닌 3악장이 인기가 높지만, 문학적 향기를 짙게 풍기는 1악장과 경건한 분위기의 2악장을 섭렵한다면 그 감상이 더욱 높은 감동과 함께 할 것이다. 22번 F장조는 두 악장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부제가 있는 곡들에 비해 인기는 낮지만 변주곡 안에서의 주제의 사용법이나 간결한 론도 형식의 미학에 집중하면 매우 흥미롭다. 23번 소나타, 일명 ‘열정’ 은 베토벤의 전 작품 중에서도 그 중앙을 차지할 수 있는 걸작이다. 엄청난 에너지의 분노와 슬픔, 그 감정들을 작곡가 특유의 의지와 결합시켜 뿜어내는 음의 홍수가 멋지다.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는 속도감 역시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매력이다.
베토벤 자신이 비르투오소적 피아니스트였다는 적극적인 증거물들이 5회 연주에서 등장한다. 작곡가 자신이 ‘대소나타’ 라고 부르며 자신감을 가졌던 11번 소나타는 비교적 보수적인 시각으로 쓴 네 악장 구성의 작품이며, 외향적인 표현이 두드러진다. 다음으로 쓴 12번 A flat 장조는 전작과 달리 파격적인 악장 구성이 눈에 띄는데, 1악장이 변주곡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3악장은 훗날 ‘영웅’ 교향곡을 연상시키는 ‘장송행진곡’ 으로 만들어졌다. 18번 소나타의 네 악장은 모두 빠른 악장으로 돼 있다는 점에서 그 어떤 소나타와도 차별화된다. 리드미컬한 2악장과 타란텔라풍의 4악장이 기교적 처리의 포인트가 된다. 동서고금의 소나타 가운데 가장 인기곡인 ‘월광’ 소나타 14번은 잘 알려진 1악장에 뒤따르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악장들이 감상의 포인트다. 아담한 규모이지만 우아함을 자랑하는 2악장과 아르페지오, 트레몰로 등 베토벤이 구사하는 화려한 피아니즘이 유감없이 그려진 3악장이 동반될 때 비로소 진정한 달빛의 감상이 끝나는 것이다. 6회는 작곡가 특유의 방대한 스케일 속에서 표현된 서정성을 확인하는 차례다. 24번 소나타는 ‘테레제’ 라는 별칭으로 불리는데, 여성의 이름을 딴 소나타답게 작은 구성이지만 수줍은 듯한 멜로디가 한없이 매력적이며, 낭만파적인 울림도 지니고 있다. 초기 소나타 가운데 가장 대곡인 4번 E flat 장조는 조성에서 연상되는 힘찬 악상과 함께 다양한 리듬의 향연을 펼친다. 고상함과 세련미를 동반하고 있는 2악장과 4악장의 깔끔한 마무리도 훌륭하다. 소품이지만 유창한 흐름과 탄탄한 구성이 좋은 9번에 이어지는 25번 역시 작은 소나타의 부류에 들어가지만 텍스트에서 요구되는 다양한 기교상의 숙제들이 원숙미를 느끼게 한다. ‘발트쉬타인’으로 불리는 21번은 작곡가의 웅대한 스케일과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엿볼 수 있는 곡이다. 확대된 다이내믹과 페달링으로 만들어지는 거대한 사운드에서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큰 그릇’ 이었던 베토벤의 실체를 본다.
이른바 베토벤식 대위법이 어떤 모양인지는 7회 연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첫 곡으로 연주된 27번 e단조는 여러모로 특이한 소나타로, 두 악장 구성이다. 정교한 다이내믹과 자유로운 루바토가 인상적인 1악장을 지나면, 슈베르트와 매우 흡사한 멜로디와 구성을 지닌 2악장을 만나게 되는데, 노래하듯 소담스러운 가락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28번 A장조는 개인적으로 필자가 가장 사랑하는 소나타다. 느린 소나타 형식의 주제가 마지막 악장에 다시 등장하는 것도 특이하며, 장대한 피날레 악장의 중간에 높은 완성도를 지닌 푸가가 삽입된다는 점이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가 시작됐음을 알린다. 피아니스트들의 영원한 시금석, 29번 ‘함머클라비어’는 귀가 들리지 않던 작곡가가 당시 새롭게 개량 일로에 있던 피아노라는 악기에 자신의 모든 어법을 실험해놓은 문제작이다. 한없이 침잠하는 듯한 3악장의 우주적인 규모도 놀랍지만, 자유로운 3성 푸가 안에 한 세기 이상을 뛰어넘는 현대적 울림을 심어 놓은 피날레 악장이 그 하이라이트다.
대미를 장식하는 8회의 레퍼토리는 건반을 초월한 경지에 기어코 이르렀던 베토벤의 승리를 들려준다. 차분한 싱코페이션이 인상적인 1악장과 격정에 가득 찬 2악장을 지나면 30번 소나타의 핵심인 변주곡 악장에 다다른다. 여기서는 리듬과 멜로디가 이질적인 요소가 아닌 하나의 핵심적인 음악적 원소로 화하며, 불타오르는 듯한 정열을 순간적으로 다스리는 혜안이 돋보인다. 31번 역시 매우 서정적인 주제의 소나타 형식으로 시작하는데, 그 모습이 매우 허허롭고 평온한 동시에 설득력을 지닌다. 이 곡 역시 피날레에 두 번에 걸친 푸가가 수놓아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삽입된 아리아 ‘탄식의 노래’ 는 가히 영혼의 만가라고 하겠다. 매우 심오한 깊이를 지닌 32번 소나타의 1악장은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이지만, 이미 형식의 굴레를 벗어난 베토벤의 자유로운 판타지가 그 핵심이다. 마지막 아리에타는 변주곡의 모습을 띠고 있으며, 주제와 이에서 파생, 응용된 모티프들이 마치 날개를 단 듯 날아다니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베토벤의 음표들은 여기서 분명 하늘나라로 향하며, 천상의 노래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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