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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에서의 죽음(Death in Venice) 2007.7.29/DVD

나베가 2007. 7. 30. 11:25


4악장 (Adagietto. Sehr langsam)


 

감독
루키노 비스콘티   이탈리아출신.1909-1976
출연
더크 보가드 (구스타브)  영국출신  1921년생
비요른 안데르센 (타지오)  스웨덴출신. 1955년생.베니스에서의 죽음으로 데뷰.
                                                                      요코 만화 <베르사이유 장미> 주인공 <오스칼> 실제 주인공인물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미소년 타지오를 연기한 그는 이후에도 헐리웃 배우와의 염문설, 사고설 등 수많은 가십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가 죽었다고 알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그는 여전히 스웨덴에서 연기활동을 하고 있으며, 음악활동도 겸하고 있다.
 

제작노트...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를 모델로 삼았다는 토마스 만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앞서 만든 <신들의 황혼>과 이후에 만든 <루드비히> 사이에서 루키노 비스콘티의 ‘독일 3부작’ 혹은 ‘탐미주의 3부작’으로 불린다. 요양을 위해 물의 도시 베니스에 온 독일의 늙은 대작곡가는 무심히 발견한 조각 같은 외모의 아름다운 폴란드 소년의 모습에서, 그가 오랫동안 갈구하고 있던 정신적인 미와 관능적인 미의 완전한 결합체를 발견해 낸다. 그가 인생의 황혼기에 겪게 되는 황홀과 고뇌, 환희와 절망은 정신과 감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예술가의 그것과 맞아떨어진다. 그것은 결국 네오리얼리즘의 세계를 지나 탐미적 경향을 보였던 루키노 비스콘티 자신의 고민과도 일맥상통한다. 비스콘티는 원작의 설정인 주인공 소설가를 직접 음악가로 바꿨으며 말러의 ‘교향곡 제5번’을 깔아 그 관능을 입체적으로 묘사한다. 구스타프는 감성에 따른 삶을 일종의 타락으로 생각했고 동성애 역시 그 시대의 타락 형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타지오에 대한 이끌림을 스스로 느끼게 되는데 이것은 구스타프에게 혼돈이며 참을 수 없는 인식이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관능적인 사랑에 대한 찬가이자 죽음에 대한 찬가다. 그것은 예술가의 존엄성과 그 비극적 달성으로 완성된다. <씨네 21에서 발췌>

 

이 영화를 접하게 된 동기....후기...

 

요즘 작곡가 <말러>에 입문을 했다.

며칠전 풍월당에서 주최하는 말러 전문 연구가 <김문경>씨의 말러 강의를 들으러 갔었다.

거기서 말러에 대한 전반적인 개요를 들으면서 이 영화를 배경으로 편집한 <말러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를

한편의 뮤직비디오로 보았다.

가슴 절절하게 파고 드는 아름다움에 ....그저 극중에 구스타프가 타지오의 절대적인 미에 반해 이제까지의 자신의 삶의 철학을 순간에 뒤엎고 타지오라는 자석의 극에 끌려서 옴짝 달싹도 할수 없었듯이 ....

순간에 나도 <말러>에게 포로가 되고야 말았다.

김문경의 해설과 같이 똑똑 떨어지는 리듬을 깨고 그저 바닷속을 유영하는 해파리처럼...

도저히 그 아름다운 바닷속을 뚫고 헤엄쳐 나올 수가 없을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 음반을 플레이어에 얹고는 4악장만을 끝없이 repeat했다.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나는 그렇게 빨려들어갔다.

 

그리고...

얼마후 또 그의 말러 강의를 들으러 갔다.

이번엔 아예 말러 교향곡 5번이 강의 주제였다.

지난번 전체적인 개요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세분해서 5번을 들었다.

그리고 이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

 

비스콘티 감독이 토마스 만 작품을 가지고 <말러>를 염두에 두고 소설가를 대신 음악가로 바꾸고,

배경음악으로도 말러음악을 전체적으로 스며들게 만든....마치 영화를 본다기 보다는 한편의 말러의 삶을 그의 음악과 함께 뼈저리게 느끼게 만드는....

자신의 재능과 고뇌와 노력으로 절대적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던 한 노 음악가 구스타프는...

한 순간에 나타난 타지오-절대적인 미에 빨려들면서, 자신이 고뇌하던 가치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마는.... 

친구 알프레도와의 대화에서 이 영화가 추구하려고 하는 가치가  그대로 나타난다.

아름다움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신의 영역이라는 거.....

그리고 그 신의 영역에 들어선 사람은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는...

 

어쩌면....

그는 그래서 편안하게 죽어갔을 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이 그렇게도 추구하던 아름다움에 대한 고뇌가 자신의 노력을 벗어난 신의 영역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이 추구하던 음악에서처럼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타지오도 절대 잡을 수 없기에 고통스러웠지만,

마지막으로 신이 내린 그 절대적 아름다움에 포로가 되어서, 죽는 그 순간까지 희열을 맛볼 수있엇기에...

 

영화가 전체적으로 대사가 거의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음악이 지배적이라,  두 주인공 <구스타프>와 <타지오>는 정말 어려운 배역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관객으로 하여금 끝없이 빨려들어갈 정도로 역할을 아주 빼어나게 소화해 냈다.

 

어쩌면....

원작자 <토마스 만>이나 연출가 <비스콘티>나 작곡가 <말러> 나

하나같이 <절대적인 미>를 쫓아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끝없이 바닷속을 유영하고 있었을 ...

비록 절대적인 미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을 지언정 그 가까이까지 간...

 

말러...

지상 최고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베니스...

기네스북에도 올라가 있는 미소년 <비요른 안데르센>

죽기 3년전에 만든 어쩌면 연출가로서의 극점까지 올라가 있을 <비스콘티>...

 

대사가 필요없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 대사가 불필요했을 것이다.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이 지배적이지만, 해변에서 타지오가 세워진 기둥을 번갈아 잡으며 빙빙돌고, 그 뒤를 구구절절

쫓는 구스타프...그 장면에서 3번 5악장 알토 솔로가 나온다.

아아!! 그 장면에 그 노래라니...정말 압권이다.

 

말러에 입문을 하고나서 연일 5번과 3번에 뻐져 살았다.

27일 KBS정기 연주회 레파토리가 더불어 말러 3번이었는데, 그날이후...여지껏 CD플레이어에서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연주한 베를린 필 음반을 내려놓지 않고 연일 듣고 있다. 

잠자는 시간만 빼고는.....

 

한 음악에 이처럼 빠져들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

 
 

      

 

 

-베니스에서의 죽음. 토마스 만 저, 민음사, 안삼환역-에서 옮기다.

예술은, 외적 생활이 비록 수도원에서와 같이 조용히 영위된다 하더라도,결국에 가서는, 몹시 무절제하게 격정과 향락에 빠진  삶도 도저히 불러 일으키지 못할 그러한 신경과민, 악습,피로와 호기심을 낳게 되는 것이다p.435-

 

 

 

비할수 없이 숭고하고 준엄한 표정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고수머리를 한 그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은 하늘과 바다 깊숙한 곳에서 내려온

귀여운 신과 같이 아름다웠으며, 이제 그 모습이 바다에서 달려나오고 있었다. 그 광경이 신화적인 상상을 불러 일으켰다.

그 광경은 마치 태초의 시간, 형식의 기원과 신들의 탄생에 관한  시학자체와도 흠사하였다.

에센바흐는 눈을 감고, 자기 마음속에서 울리기 시작하는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p464

 

 

아름다움만이 사랑스러운 동시에 눈에 보일 수 있는 것...

그러니까 아름다움은 느낄 수 있는 자의 길이란다.  예술가가 정신에 이르는 길이란다....중략.

우리 시인들은 에로스가 옆에 와서 안내자로 나서지 않고는 아름다움의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이야. p 525

 

 


 <씨네 21/afocal >  글을 옮기다.

 시간이 정지해버린 도시같다, 베니스는. 어쩌면 그래서 죽음이라는 테마가 잘 어울리는 장소일지 모르겠다. 확연히 보여지는 시간의 정지는 돌이킬 수 없이 상실과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라는 레몽 벨루 Raymond Bellour의 말이 기억난다.

20세기초, 휴양을 위해 이 수상도시를 찾는 구스타프는 마치 저승으로 가는 어두운 강을 건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의 늙고 병든 몸과 탁한 바다위를 흔들리며 떠가는 곤돌라가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머지않아 맞닥뜨리게 되는 콜레라의 위협은 한층 더 죽음의 대기를 짙게하고 있다. 비스콘티의 베니스는 니콜라스 뢰그의 <쳐다보지 마라 Don’t look now (1973)>에서만큼이나 음습하고 불안하다. 화려한 광장을 벗어나면 낡고, 눅눅한 골목들이 이윽고 미로가 되어버리고, 그 속에서 누구라도 길을 잃을 듯 하다. 기실 구스타프는 이미 치유되기 힘든 병들로 잠식되어진 존재다. 단지 의학적인 병뿐아니라 죽은 딸이 만든 정서적 공황, 그 상실감을 채워보려 더욱 집착했던 예술에 있어서의 실재와 이상간의 괴리등이 그를 한층 더 쇠약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동시에 베니스는 또다른 탄생, 혹은 다른세계로의 틈입의 가능성을 깨닫게 해주는 장소다. 영화가 담고있는 가장 큰 사건은 늙은 음악가와 폴란드 귀족소년 타지오의 만남이다. 회한과 의혹이 교차하는 노구가 순정한 아름다움을 담은 소년을 스치면서 짧은 여정이 온통 욕망과 열정으로 물들어버린다.

 

 

 

 이렇게, 영화는 아름다움과 죽음이라는 두 중심테마를 가지고 있다. 낭만주의의 총애를 받던 이 두 테마는 때로는 구체적으로 때로는 추상적으로 서로 연관되며 일관적인 서사적 분절과 조합을 가능하게 한다.

노인의 (타지오에 대한)집착과 경이로운 시선의 근거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그가 회상하는 대화장면을 따라가보자.

알프레드 : 자네 말에 의하면 아름다움은 정신적 역량으로 부터 만들어진다는게 아닌가 ?
구스타프 : 그럼 자네는 예술가의 재능이 그것(아름다움)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거부하는가 ?
알프레드 : 그렇다네. 난 그러한 능력을 인정할 수 없어.
구스타프 : 그럼 예술가의 노력은…
알프레드 : 노력, 노력에 의한 아름다움이라고 ? 그것 참 대단한 환상이군. 아닐세. 아름다움은 일순간에 튀어오르는 것이야. 작가의 사고나 추정으로 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란말이야.

그들의 짧은 대화가 우리에게 들려주듯, 구스타프는 이상적 예술론을 주창하며, 음악적 미학의 근원을 정신, 창조력으로부터 찾는다. 미학적 관점에 관한한 예술가는 재현의 단계에서의 창조자로 그치지 않고, 창조 그 자체의 주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에 반해 알프레드의 미학관은 발견의 미학이다. 아름다움은 예술가의 역량을 초월한 곳에 존재하다가 어느순간 발견되거나 이해되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예술가가 (음악적) 재현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다.

타지오의 출현은 이 대립되는 의견 사이에서 튀어올라서는 긴장의 끈을 끊어버리고 구스타프를 일순간에 운명적 아름다움의 세계로 세차게 몰아간다. 아름다움은 운명적이다. 영화가 인용하는 독일시인의 표현처럼 ‘눈으로 그것을 보는자에게 죽음이 예비되어 있는’ 초인적인 힘이며 진리이다.

그것을 타지오의 존재로 부터 발견한 구스타프, 온통 매료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사회적 허울을 잃고 맹목적 욕망에 심신을 온통 내맡기는 자신을 깨닫지 못한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이란 단지 욕망의 대상일 뿐,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것이 구스타프의 비극의 정체이다. 그의 베니스에서의 여정은 미처 아름다움을 자신의 작품으로 전환하지 못한채 꺼져버리는 짧은 예술적 인생의 매장식과도 같다.

이처럼 타지오를 향한 구스타프의 열정은 영화의 서사적 전개 속에 비극의 발판을 마련하는 동시에 긴장을 이끌어나가는 에너지이기도 하다. 타지오는 순수의 상징인 동시에 욕망의 대상이다. 노교수의 반응은 엿보기로 유형지어질 수 있다. 그는 소년을 관찰하고, 그의 대화를 엿들으며 욕망의 대상과의 관계를 유지한다. 이 욕망의 주체-객체 사이의 전이는 뭔가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 때 중단된다. 타지오의 친구들이 소년을 노교수의 시선 밖으로 이끌어내기도 하고, 타지오 가족들 사이의 모국어로 진행되는 대화가 그의 청각적 개입을 거부한다.

간혹 타지오는 노교수의 환상 속에서 소유의 대상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그러나 환상 외에서 미소년은 엿봄의 일방적 즐거움의 대상일 뿐이다. 타지오가 능동적인 ‘교환’의 주체로의 변신을 시도할 때 구스타프의 탐미는 (혹은 탐욕은) 혼란스러워진다. 이 소년, 주인공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는 듯 친구들과의 장난 중에 꽤나 당돌한 시선으로 주인공을 직시함으로서 그를 당황스럽게 한다.

 

 

타지오의 이미지는 양성적인 동시에 양립적이다. 그의 긴머리와 고운선의 얼굴, 가느다란 몸매들은 소년을 남자와 여자 사이 어느곳에 위치시킨다. 또다른 면에서 그는 순수를 상징하는 듯 하지만, 간혹 도발적 행위를 통해 장난기 이상의, 마치 관찰자의 의도를 짐작한다는 듯한 표현을 하기도 한다. 그는 또한 노교수의 감성과 이성을 오가며, 자극과 도덕적 금기를 상기시킨다. 구스타프가 베니스의 뒷골목 보다 더 낡은 모습으로 초라해져보이는 데에는 이 심리적 불능으로부터 비롯되는, 도망할 곳을 찾는 자의 열패감 때문일것이다. 구스타프의 열정은 이율배반적이거나 금지의 대상이다. 완벽한 아름다움은 언뜻 엿보이지만 도달할 수 없고, 도덕적 압박감은 주인공의 절망 속에 녹아있다. 이런 긴장들이 노구로 부터 토해지는 밭은 기침으로 표현된다.

다른 한편, 영화의 묘사를 감안해보건데, 열정은 주인공의 고립과 대립적 주제인 늙음/젊음으로 부터 쉽게 떼어내 생각할 수도 없겠다. 영화가 유발할 수 있는 도덕적 거북스러움은 구스타프의 행동에 또다른 유형의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누그러질 수 있다. 만일 타지오가 되돌이키고 싶은 순수의 시간을 상징한다면, 혹은 노교수가 그 속에서 생을 마치고 싶어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상징한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동성애의 욕망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시간의 두 지점에 위치한 인물들의 교통을 통해 돌이킬 수 없는 시간으로 부터 상처받는 한 인물의 자기와의 화해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은 아닐까.

베니스의 모습은 노교수의 모습에 잘 어울린다. 인간의 시간 속에서 사라진 것들에 대한 향수가 여기 정지된 ‘옛날’ 속에 배어있어서일까. 사라지는 이들이 남기고 가는 것은 모두 소중하게 느껴져요, "The Mother"의 등장인물 대런이 말했지만, 반대로 사라지는 이들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것은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일까. 좀 더 절실하지 않을까. 구스타프는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완벽한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완성되지 않을 악보를 쓰는 예술가였을까, 아니면 미지의 영역이던 감각적 아름다움에 너무 늦게야 눈을 떴던 한낫 늙고 쇠약한 영혼이었을까.

마지막 장면의 해변에 보이는 카메라는 그의 마지막 욕망을 상징하는 듯 하다. 그가 맛보았던 아름다움을 영원으로 바꾸어놓고 싶어하는,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 그의 앞에서 바다비늘처럼 웃고있는 타지오와 자신을 동시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기고 싶어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