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클래식(2010년)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내한공연/11.20일.토/아람누리 음악당

나베가 2010. 11. 6. 16:41

 

 

 

 

미국 오케스트라 가운데 가장 유럽적인 사운드를 들려주며 세계 최상급 관현악단으로 평가받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Clevland Orchestra)가 32년 만의 내한공연을 갖습니다.

1918년 창단 이래 조지 셀, 로린 마젤,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 등 거장 지휘자들을 두루 거치며 탄탄한 조직력과 정밀한 사운드를 갖춰온 이들은 이미 수많은 음반을 통해 애호가 및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으며, 이제는 미국의 Big 5를 넘어 전 세계 Big 5 오케스트라의 반열에 오를 만한 명문 오케스트라로 인정 받고 있습니다.

2002년부터 섬세한 감각과 정확한 비팅, 날카로운 분석력을 바탕으로 런던 필, 취리히 오페라, 빈 슈타츠오퍼 음악감독에 오르며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지휘자 프란츠 벨저 뫼스트(Franz Welser-Möst)를 음악감독으로 맞아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들은 이번 내한공연의 프로그램을 협연자 없이 모두 오케스트라 작품으로 선보입니다.
 

최고의 기량을 바탕으로 드뷔시, 모차르트, 베토벤 등 다양한 분위기의 정통 레퍼토리를 미국과 유럽 오케스트라의 장점을 극대화한 변화무쌍한 사운드로 선보일 이들의 명연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Cleveland Orchestra)오케스트라

    1918년 피아니스트이자 공연기획자였던 아델라 프렌티스 휴즈와 초대 수석지휘자 니콜라이 소콜로프가 공동으로 설립했다. 창단 초기부터 미국 동부 투어를 진행하였으며, 라디오 실황방송에 참여하였고 다양한 음반의 녹음도 활발히 진행하였다. 

    소콜로프에 이어 부임한 수석지휘자들은 음악감독의 역할도 병행하였으며, 아르투르 로진스키(1933~1943), 에리히 라인스도르프(1943~1944), 조지 셸(1946~1970), 피에르 불레즈(음악고문 1970~1972), 로린 마젤(1972~1982),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1984~2002)에 이어 현재는 프란츠 벨저 뫼스트가 지난 2002년부터 2017~2018년을 임기로 음악감독직을 수행하고 있다. 

    특유의 엄격한 리허설로 연주력 향상에 주력했던 아르투르 로진스키와 에리히 라인스도르프에 이어 1946년 음악감독으로 발탁된 조지 셀이 장기 집권하면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는 그 실력과 명성을 제고하고 자신들의 존재를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1950년대에 그는 미국과 유럽 오케스트라의 장점을 모두 살린 최상급 관현악단을 목표로 체계적인 계획 수립과 엄격한 연습을 감행했으며, 오케스트라의 구조를 바꾸고 체질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수십 명의 단원들을 가차없이 해고했으며, 그보다 더 많은 단원들이 스스로 오케스트라를 떠나기도 하였다. 

    그는 1970년에 타계할 때까지 오케스트라를 채찍질해 야심 찬 레코딩 스케줄을 소화해 내면서 전세계의 수백만 애호가들에게 음악의 감동을 전달했으며, 미국의 Big 5 오케스트라에 들 만큼 높은 수준을 유지시키고 세계 각지로 순회공연을 하는 등 국제적인 면모 갖추게 하였다. 또한 오케스트라에 독특하고 뚜렷한 유러피언 색채를 덧입혀 베토벤, 브람스, 브루크너와 말러 등의 작품에서는 헤비급 지휘자와 악단만이 선보일 수 있는 정통 유러피언 사운드를 선보였다. 특히 드보르자크와 야나체크, 바르토크 등 동구권 작곡가들의 작품에 있어서 셀의 해석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후 폰 도흐나니의 재임 시절에는 떡갈나무에 비유되는 셀의 우직함 대신 특유의 유려한 ‘실키 사운드’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특히 브루크너와 브람스의 교향곡 등에서 더없이 포근하면서 엄격함이 내재된 순도 높은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2002년부터 제8대 음악감독인 지휘자 프란츠 벨저 뫼스트의 지휘 아래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연주활동을 선보이고 있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는 정기적으로 빈 무지크페라인 홀, 스위스 루체른 페스티벌 등 유명 공연장 및 음악 페스티벌 무대를 비롯해 빈 슈타츠오퍼, 취리히 오페라 등 유수의 오페라단과 공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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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란츠 벨저 뫼스트(Franz Welser-Most)상임 지휘자
     

    1960년 오스트리아 린츠 태생으로 바이올린을 전공했으나 1978년 때 교통사고로 손가락에 부상을 입고 지휘자로 전향했다.

    이듬해 카라얀 국제 지휘 콩쿠르에 최연소로 입상하였으며, 1985년 그의 청년기 지휘 활동을 지켜보던 안드레아슨 폰 베닉센 남작이 후견인을 자청해 그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본명 프란츠 메스토를 프란츠 벨저 뫼스트로 바꾸었다. 남작은 벨저 뫼스트를 ‘21세기의 푸르트뱅글러’로 만들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는 1985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데뷔 후 1986년 헤수스 로페스 코보스의 대역으로 런던 필을 지휘할 기회를 얻어 모차르트 ‘레퀴엠’ 연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1990년 클라우스 텐슈테트의 후임으로 런던 필 음악감독과 취리히 오페라 음악감독에 취임하는 등 눈부신 성과를 빚어낸 그는 그 동안 수수한 분위기였던 취리히 오페라를 독일권에서 가장 빛나는 오페라 하우스로 끌어올렸으며, 수많은 공연 영상이 DVD로 소개되었다. 1998년 빈 필 정기연주회에 성공적으로 데뷔했고, 2002년부터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직을 수행하고 있다

    2007년 빈 슈타츠오퍼에서 새로운 연출의 바그너 ‘니벨룽겐의 반지’를 성공적으로 지휘한 벨저 뫼스트는 2010년 가을부터 세이지 오자와의 후임으로 빈 슈타츠오퍼 총감독에 취임할 예정으로, 오스트리아 출신의 지휘자가 빈 슈타츠오퍼의 사령탑을 맡기는 1964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사임한 후 36년만의 일이다.

    국내 팬들에게는 1995년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에서 소프라노 조수미와 협연하면서 첫 선을 보인 바 있으며, 2011년에는 매년 클래식 계 최대의 관심사 중 하나인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 지휘자로 결정되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프로그램 

 

드뷔시   <목신의 오후> 전주곡
Debussy    Prelude

 

모차르트  디베르티멘토 D장조 K.136
Mozart     Divertmento in D Major, K.136

 

베토벤   교향곡 제3번 Eb장조 Op.55 <영웅> 
Beethoven  Symphony No.3 in Eb Major Op.55

 

 

Prelude a l'apres-midi d'un faune, L.86

 

드뷔시 /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C. Achille Debussy 1862∼1918

Paris Radio Symphony orchestra

 


Prelude a l'apres-midi d'un faune
Paris Radio Symphony orchestra

Prelude a l'apres-midi d'un faune

오케스트라로된 <목신의 오후의 전주곡>은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의 거장 말라르메의 시에 의거하여 작곡한 명곡입니다. 드뷔시가 2년 동안에 걸쳐 쓴 역작인데, 1894년 32세 때 작곡하여 다음해 여름에 박표하여 대단한 호평을 받아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습니다. 시인 말라르메는 드뷔시보다 20년이나 연장자이면서도 그와 같은 교우를 맺었는데, 그는 말라르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바 있습니다. 이 곡은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내용인데, 머리와 몸은 사람이고 허리부터 아래는 짐승과 같이 생긴 목신의 이야기입니다.

“이 목신은 양떼를 이끌면서 피리를 불며 춤을 춥니다. 때는 무더운 여름 날 오후인데, 그 목신이 시실리 해변의 산림이 우거진 그늘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눈을 떠 봅니다. 그런데 어제 오후에 하얀 몸의 금발을 한 귀여운 물의 요정들과 만났던 일이 생각납니다. 물의 요정들은 호숫가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그러나 그것이 현실이었는지 잘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 아니 목욕을 한 것은 백조의 무리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역시 물의 요정들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백합꽃이 핀 것일까? 이같이 목신은 멍하니 누워 딩굴면서 회상을 더듬는 것이었습니다. 나아가서는 사랑의 여신 비너스를….일어나는 몽룡한 육감, 그리고 관능적인 희열을…얼마 안 되어 환상의 요정은 사라지는데, 온화한 일기에 풀의 향기 그윽한 조용한 오후, 목신은 다시금 잠이 드는 것입니다”

곡은 대체로 시의 내용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를 구상적으로 취급했다기보다는 모호하여 극히 포착하기 힘든 환상적인 분위기와 관능적인 꿈과 같은 흐리멍텅한 희열을, 음으로써 자유로운 표현 등으로 훌륭하고 세련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플루트로 주요 테마가 연주되며 계속 오보와 클라리넷이 이를 발전시켜 하아프가 가볍게 여운을 남깁니다. 마치 여름 날 가벼운 미풍이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기분입니다. 다시금 플루트와 첼로가 나오고 혼의 소리에 하아프가 조용히 이를 뒷받침하며 여러 가지 환상이 교차됩니다. 정열적인 멜로디가 나오는데, 환상에서 욕망으로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크라이맥스에 이르자 갑자기 환상이 꺼지는 분위기인데, 다시 플루트의 선율이 계속됩니다. 이같은 진행으로 마지막 제1테마가 현악기에 재현되어 조용하게 끝납니다. 

 

 

 

 

 

 

 

 

 

 

Symphony No.3 in E major, Op.55 - Eroica

베토벤 교향곡 3번 마장조 영웅

Ludwig van Beethoven (1770 - 1827)

 

Berliner Philharmoniker - Herbert von Karajan

 

     

작곡 : 1803~4년
초연 : 비공개 초연은 1804년 12월 로프코비츠 후작의 사택에서, 공개 초연은 1805년 4월 7일  비엔나의 안 데어 빈 극장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짐.

출판 : 1806년
헌정 : 로프코비츠 후작
편성 :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바순 2, 호른 3, 트럼펫 2, 팀파니, 현악 5부

연주시간 : 약 50분

     

인 간의 해방을 부르짖던 베토벤의 일면을 찾아볼 수 있는 곡이다. 1789년 일어난 프랑스의 혁명에서는 코르시카 섬 출신의 일개 포병 사관이었던 나폴레옹이 반란을 평정하고 국내 최고 사령관 이 되었다. 민중의 권리를 옹호하고 자유의 정신에 불타 있던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을 흥미 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리고 그는 당시 빈에 주재하고 있던 프랑스 대사와 대사관의 비서이자 바이 올리니스트였던 루돌프 크로이쩌로부터 프랑스에 자유와 질서를 가져온 나폴레옹의 업적에 대해 자세히 들을 기회가 있었다. 플라톤의 '공화국'을 숙독한 바 있었던 베토벤은 이 시대의 영웅의 자태를 보여준 나폴레옹을 자신의 작품으로 찬미하고 싶었다.

그 리하여 33세 때인 1803년 여름 이 교향곡의 작곡에 착수하여 1804년 봄에 완성시켰다. 스코어의 표지에는 '보나파르트'라고 썼으며 밑에 자신의 이름 '루비트비히 반 베토벤'이라 적어 이를 프랑스 대사관을 통해 파리로 보 내려고 할 무렵,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이 빈에 퍼졌다. 

이 소식에 분개한 베토벤은 그 사본의 표지를 찢어 버렸다고 한다.

"저 사나이도 역시 속된 사람이었어. 그 역시 자기의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민중의 권리를 짓 밟고 누구보다도 심한 폭군이 될 것이야."

라 고 외치면서 말이다. 이후 다시는 나폴레옹에 대해 언급도 안 했다는 그는 2년 뒤 이 곡을 출 판하면서 '한 사람의 영웅을 회상하기 위해 작곡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17년 후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었다는 보도를 듣고 비로소 '나는 그의 결말에 어울리는 적절한 곡을 써 두었다' 라고 했다는 베토벤. 이는 이 작품의 제2악장에 있는 '장송 행진곡'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악장 : 생기 있는 빠르기로(Allegro con brio) 내림 마 장조 3/4

 

Staatskapelle Dresden

Herbert Blomstedt

 

소 나타 형식. 그러나 규모가 크고 두 개의 주제가 의외로 다양하고 풍부한 악상을 지니며 이들 재료를 낱낱이 구사하고 있다. 1주제는 첫부분의 강력한 두 개의 화음 후에 저음역의 현악기에서 엄숙하게 등장한다. 2주제는 부드럽고 온화하게 클라리넷으로 연주되며 바이올린으로 옮겨간다.

발 전부는 매우 정성스럽게 대위법적으로 짜여지며, 극적인 힘을 지니고 커다란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공식적으로 제시부의 재료를 다시 출현시키는 재현부 후에 또다른 새로운 발전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충실한 코다가 나오고 이 당당한 악장을 마무리한다.

 

2악장 : 대단히 느리게(Adagio assai) 다 단조 2/4

Berliner Philharmoniker - dir. Herbert von Karajan

자유로운 3부 형식. {장송 행진곡}의 악장이다. 현의 주제가 나타나며 장중한 걸음걸이로 나아간다. 중간부는 다장조로 밝아지며, 영웅의 생전의 업적을 기리는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제1부의 주요 선율이 다시 나타나며 그에 토대를 둔 푸가토가 차례대로 펼쳐진다. 마지막으로 다시 주요 선율이 모습을 보이며 슬픔과 체념을 품은 채 곡을 중단하고 인상깊게 마무리한다.

 

3악장 : 스케르초. 빠르게 생기있게(Allegro vivace) 내림 마 장조 3/4

Berliner Philharmoniker - dir. Herbert von Karajan

3부 형식. 1부는 빠른 스타카토의 움직임으로 시작하며, 차츰 힘을 증대시켜 간다. 중간부 트리오는 호른의 선율로 매우 아름답다. 그리고 다시 1부가 반복된다.

 

4악장 : 매우 빠른 속도로(Allegro molto) 내림 마 장조 2/4

Berliner Philharmoniker - dir. Herbert von Karajan

같은 베이스의 선율형을 자유롭게 몇 차례 반복하여 그 위에 변주를 쌓아나가는 파사칼리아와 비슷한 형태를 취한다. ff로 격렬히 연주되는 서주 후에 피치카토의 1주제를 중심으로 하여 베이스에서 몇 차례 반복된다. 이 것은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끝 곡에 베이스에서 빌려온 것이다. 이윽고 가볍고 평온한 2주제가 등장한다. 전체적으로는 푸가토와 그 밖의 대위법적인 기교들이 나타나며 커다랗게 정점을 향해 진행한다. 거기에 긴장이 풀리고 마지막에는 다시 한 번 압도적인 코다로 전곡을 마무리하게 된다.

베 토벤이 음악계 선배들의 영향을 받아 모방적인 음악을 만들던 시기를 벗어난 첫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곡은 그만의 강한 개성과 힘의 균형이 훌륭하게 나타나는 곡이다. 후에 바그너는 이 곡의 4개의 악장을 '활동, 비극, 정적의 경지, 사랑'이라고 평하면서 참된 베토벤의 모습이 이 곡 안에 다 있다고 했다.

     

개설

이 곡은 1804년 봄에 완성 되었다. 신들러의 「베토벤 전」에 의하면 베토벤은 프랑스 초대 집정관이었던 나폴레옹에게 바치는 이 곡의 부본을 프랑스 대사관을 통해 파리로 보내려고 하던 차에 나폴레옹이 5월 18일 황제에 즉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분개해서 그 악보의 표지를 찢어버린 후 악보를 마루바닥에 내동댕이쳤다고 한다. 그 표지에는,

Bonaparte
Ludwing van Beethoven
이라는 글이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프 랑스 혁명은 1789년에 일어났다. 코르시카 섬 태생의 일개 포병사관이었던 나폴레옹은 1795년 10월에 의회군을 지휘, 이 대혁명에 참가하여 반란군을 평정함으로써 일약 최고사령관 자리에 오르고, 마침내는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이 되어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신 출귀몰의 위력을 떨친 나폴레옹이야말로 베토벤의 눈에는 자유정신과 인간 해방의 기수로서 새 시대를 고하는 세기적 영웅으로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1798년 2월부터 4월까지 빈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베르나도트 장군이 베토벤과 개인적 친분을 가지게 되면서 그는 베토벤의 예술을 높이 평가하게 되고, 베토벤은 그를 통해 영웅 나폴레옹에 대해 더욱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혁명의 풍운아, 영웅에게 바치는 교향곡이 탄생된 것이다.

베 토벤의 제자였던 리스(Ferdinand Ries,1784-1838)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 『그 녀석도 결국 속물이었군. 그 녀석도 역시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민중의 권리를 짓밟고 그 누구보다도 더 지독한 폭군이 되겠지!』하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2 년이 지나서 출판된 파트 악보에는 「신포니아 에로이카」라고 이탈리아어로 쓰여져 있었으며 역시 이탈리아어로 된, 「한 사람의 영웅에 대한 추억을 기리기 위해서」란 부제가 붙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 곡을 나폴레옹 일대기의 표제악으로 생각하고 들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교향곡 「제2번」까지 희미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던 소위 희유성은 이 「제3번」에서는 그 자취를 감추고, 한층 더 진실한 도덕성이나 윤리성 같은 그 어떤 상한 힘을 이 「제3번」은 지니고 있다. 베토벤 자신도 「제9번」이 완성되기까지는 이 곡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다.

「제 3번」은 확실히 장대한 곡이다. 시간적으로도 종래의 상식을 벗어나 50분이나 소요되는 긴 곡이다. 그러나 이점에 대해서는 작곡자 자신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으며 1806년에 출판된 악보 중의 제 1 바이올린 파트에는, 『이 교향곡은 일반 다른 곡들보다 길므로 연주회에서 후반부 보다는 가능한 전반부에서 연주하는 것이 좋겠다. 즉 서곡 1곡에다 아리아 1곡, 또는 협주곡 1곡 다음에 연주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청중들은 앞 부분에서 이미 지쳐버리게 되므로 이 곡의 효과는 그만큼 상실하게 된다』라고 기술했을 정도다. 심지어 전술한 클레멘트 주최의 초연에서는 제2부의 첫 곡목으로 되어 있었다.

     

◆작품해설 각 악장별 분석

하 이든이나 모짜르트의 영향이 엿보이는 「제1번」이나「제2번」과는 달리 이 「제3번」부터는 음악적으로 일대 비약을 보여준다. 즉 규모가 엄청나게 방대해졌고 독창적인 수법이 대담하게 구사되어 베토벤의 개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제1악장의 길이만 하더라도 종전 교향곡의 전곡과 거의 맞먹는다. 또 제2악장에 장송행진곡을 사용했다던가 종악장에 장대하고도 호화 장려한 변주곡을 넣은 것 따위는 당시로서는 커다란 모험이었다.

 

·제1악장 : 알레그로 콘 브리오, E 플랫 장조, 4분의 3박자, 소나타 형식,

장 대한 제1악장은 우선 그 당당한 구성에 압도된다. 이것은 소나타형식으로 쓰여졌지만 전개부들은 종래의 관념을 완전히 깨뜨리고 제시부의 배나 되는 규모를 갖는다. 소나타 형색의 권화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악장은 주제의 새로운 활용법, 활발한 운동성, 극적인 수법 등 그의 종횡무진한 테크닉과 다채로운 악상이 넘쳐 흐른다.

 

·제2악장 : 「장송 행진곡」아다지오 앗사이, C 단조, 4분의 2박자,

유명한 제2악장은 영웅의 이미지와 죽음이 합치된 서사시로서 종교적 정화를 느끼게 해준다. 또 장중한 장송 행진곡 부분도 훌륭하지만 마지막 심판 나팔을 연상케 하는 듯한 시그널로 시작되는 웅대한 푸가 부분도 마음을 울렁거리게 한다.

 

·제3악장 : 이 악장은 일전하여 가벼운 음조를 취하는 스케르쪼-알레그로 비바체, E 플랫 장조, 4분의 3박자다.

A - B - A의 3부 구조를 취했으며, 「제 9 교향곡」제 3악장의 선구를 이루는 것으로 되어 있음, 본격적인 스케르쪼인 제3악장엔 트리오 부분에 호른이 사용되는 등 베토벤 특유의 발랄한 주제가 구사되어 있다.

 

·제4악장 : 피날레-알레그로 몰토, E 플랫 장조,

4분의 2박자의 짧은 도입에 이어서 현의 피치카토로써 저음 주제가 제시된다. 이것이 변주된 후에 목관 악기로써 주제 멜로디가 나타나는 것은 작품 35의 「피아노 변주곡」에 있어서의 주제 제시와 동일한 방법에 의한 것이다.

이 주제는 방금 전에 언급했듯이 1795년에 작곡된 「12개의 콘트라탄쯔」의 제 7곡에 사용되었고, 이어서 1800년경에 작곡된 발레곡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종곡에, 또한 작품 35의 「변주곡」 주제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제 3의 교향곡」 종악장에 사용된 것이다. 제4악장(종악장)은 이 주제를 기초로 하여 일곱 개의 변주를 하며 그 후에 긴 코다를 두는 형태로(8개의 변주)로 이루어진 웅대하고 호쾌한 악장으로 이것은 <영웅>이란 이름에 어울릴 만큼 힘차고 늠름하다.

     

빈 의 제19구의 데부링에 있는 베토벤 하우스는 특히 [영웅]의 집으로서 알려져 있으며, 그 가까이에는 '[영웅]의 거리'라고 명명되어 있는 도로가 있다. 베토벤은 33세의 1803년 여름, 데부링에서 교향곡 제3번 영웅]의 작곡에 몰두했다. '[영웅]의 거리'는 그것을 연관지어 명명한 것이다.

베 토벤은 전부 9곡의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그 중 [교향곡 제3번]은 특히 중요한 의미를 뜻하고 있는 작품의 하나로 그는 이것을 나폴레옹에게 헌정할 것을 생각하고 작곡했던 것이다. 자유의 정신에 불타 민중의 권리를 옹호한 인간 베토벤은 나폴레옹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자기보다 1세 연상의 '코르시카의 영웅'인 나폴레옹이 인류에게 자유와 평화를 초래할 구세주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교향곡 제3번]은 그와 같은 나폴레옹을 포함한 영웅들의 행위를 교향곡의 형식으로 나타내려고 했던 것이다.

베토벤은 악보가 완성하자 [제3번 E장조 교향곡] 총보 속표지 상에 '보나파르트' 아래에 '루트비히 반 베토벤'이라 적어 헌정할 작정이었다.

그 러나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황제로 즉위하자 베토벤은 크게 실망하였다. "그 놈도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던가, 머지 않아 그 놈은 틀림없이 온갖 인권을 짓밟고 자기의 야심을 만족시킬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고 그는 총보의 속표지를 찢었으며 그 뒤에 영웅의 추억을 기리기 위해 [영웅 교향곡]이라고 적었다. 그 이래로 베토벤은 나폴레옹에 대해서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이 [영웅]은 연주시간이 약 50이 걸리는데, 그때까지 그렇게 긴곡이 없었으므로 너무 길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이에 베토벤은 "50분이 길다고? 두고보게, 너무 짧다고 불평들 할걸세" 하며 자신있게 말했다고 한다.

이 곡은 나폴레옹과 매우 관계가 깊은 작품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나폴레옹의 생애나 업적을 그린 것은 아니다. 다만 17년 후에 나폴레옹이 몰락해서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토벤은 "나는 이런 날이 올 것을 알고 미리 결말에 적절한 음악을 써 두었다"라고 했다. 그것이 이 곡의 2악장에 있는 [장송 행진곡]이다.

이 곡은 1805년 4월 7일 빈에서 초연되었을 때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 당시 전례가 없던 장대한 음악이었으므로 청중들로부터 공감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후 이 작품에서는 지금까지 그의 선배들의 영향인 모방기에서 벗어난 독창적인 것으로 그의 감정을 나타내는 강한 개성의 힘과 양식의 균형으로 훌륭한 곡임을 증명하였다. 전부 4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제2악장의 [장송행진곡]은 유명인이 죽었을 때 흔히 단독으로 연주되는 일이 많다.

아름다운 이웃은 참마음 참이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