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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의 중심에서 보석같은 콘서트를 만나다
장일범 | 음악평론가, KBS클래식 FM '생생클래식' DJ
프랑스 에메랄드 코스트의 디나르 페스티벌 개막식을 시작으로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하는 루체른 페스티벌의 개막 공연, 그리고 음악 애호가의 로망, 브레겐츠 오페라 페스티벌의 ‘아이다’에 이르기까지! 역대 최강의 콘서트로 무장한 2009 유럽 음악제 투어는 지난 8월, 한 여름밤의 꿈과 같은 멋진 공연의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브레타뉴 오케스트라와 백건우의 디나르 오프닝 콘서트
프랑스 대서양 연안 에메랄드 해변의 아름다운 휴양 도시 디나르. 평소에는 인구가 10만이지만 휴가철에는 50만 인구가 되는 이 브르타뉴의 도시에는 20년째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있다. 1989년 음악애호가 스테판 부테에 의해 자그맣게 시작한 디나르 페스티벌은 매년 테마를 갖고 진행되어왔는데 2009년 올해의 주제는 '해피 버스데이'다. 탄생 20년 성인식을 축하하는 뜻 깊은 축제의 장이 펼쳐진 것이다.
1994년 문학청년이자 음악애호가였던 스테판 부테가 심장마비로 급서한 후 그에게 음악적인 조언을 해주던 백건우에게 음악감독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왔고 도시의 작은 페스티벌이었던 이 페스티벌을 15년째 맡아온 백건우는 프랑스에서 여름에 가장 주목받는 개성 넘치는 국제 페스티벌로 탈바꿈했다. "올여름 진정한 음악을 들으려면 디나르로 가라"는 <르 피가로>, <텔레라마> 등 프랑스 언론의 강력한 찬사를 받아온 피아니스트 백건우 앞에는 늘 '한국의 피아니스트' 백건우라는 부연 설명이 붙었다. 백건우의 애국심을 읽게 하는 대목이었다.
지난 8월 8일 밤 9시 19세기에 지어진 샤토의 포르 드 브르통 성벽을 배경으로 펼쳐진 소나무 울창한 숲속 공원 콘서트는 언제나 그러하듯 디나르 시민들을 위한 무료 야외 오프닝 음악회였다. 여름이지만 날씨가 제법 쌀쌀해 점퍼를 입고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약 3500여 명에 이르는 청중들이 운집한 가운데 디나르 시 문화 행정 담당관인 실비 마예의 다정한 20주년 탄생 축하 멘트가 있은 후 폴란드의 세계적 작곡가 크쥐스토프 펜데레츠키가 지휘한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8번이 브르타뉴(주립)오케스트라에 의해서 첫 곡으로 연주되었다.
펜데레츠키는 원래 멘델스존의 교향곡 4번 '이탈리아'를 연주하려던 계획을 바꿔 드보르자크의 보헤미아 색채 가득한 이 곡을 연주해주었는데 1889년에 작곡된 8번 교향곡에 작품번호 88번, 드보르자크가 영국을 8번 방문한 후 작곡한 작품이라는 점이 8월 8일이라는 숫자와 매우 잘 어울리는 절묘한 선택이었다. 2부에서는 오랜 시간 두터운 음악적 우정을 쌓아온 펜데레츠키와 백건우의 무대였다. 뉴욕 9·11테러를 보고 충격에 휩싸인 펜데레츠키가 만든 피아노 협주곡으로 펜데레츠키 자신은 '신포니아 콘체르탄테'로 쓴 곡이라고 공연 후에 필자에게 밝히기도 했다.
2001년 액스의 연주로 뉴욕에서 초연된 후, 2005년 개정판이 피아니스트 백건우에게 헌정되었으며 마드리드에서 함께 연주했던 이 곡은 박진감 넘치는 서두로 출발해 격렬하게 펼쳐졌다. 갑자기 무대엔 정적이 찾아들고 피아노 솔로의 아름답고 달콤한 천상적인 코랄이 흐르는데 펜데레츠키는 분노 속에서도 이 코랄을 가장 먼저 썼다고 한다. 희생된 영혼들을 천국으로 보내주는 아름다운 이 곡은 본인 표현에 의하면 크리스마스 캐럴과도 같고 그의 가톨릭적 세계관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했다. 펜데레츠키, 백건우, 브르타뉴 오케스트라의 긴장감 넘치는 연주는 손에 땀을 쥐게 만들어주었고 곡이 모두 끝나자마자 디나르의 청중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립해서 뜨겁게 박수를 보내는 장면이었다. 그들이 '한국' 피아니스트이자 디나르 피아니스트이기도 백건우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20주년의 감동적 모멘트였다. 8월 22일까지 스테판 부테 홀에서 공연되는 이번 디나르 페스티벌은 무엇보다도 20주년 '해피 버스데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미하일 루디, 프레데릭 기, 후세인 세르멧 등 중국, 이탈리아, 터키, 레바논, 스페인, 러시아, 프랑스 등 유럽의 중심보다는 전 세계를 상징하는 실력 있는 피아니스트들이 디나르를 찾아 다채로운 음악의 세계를 펼쳐 보이는 것이 올해의 특징이다.
아바도와 유자왕의 루체른 페스티벌 오프닝 콘서트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지휘를 따라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리듬을 타며 파도를 만들었다. 8월 12일 수요일 스위스 루체른 KKL콘서트홀에서 펼쳐진 오프닝 공연에서 아바도가 지휘한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구스타프 말러 교향곡 1번 '거인'의 한 장면이었다. 최고의 의상 경연장을 방불케 한 성장한 청중들이 콘서트홀을 가득 메운 이날 아바도가 가장 사랑하고 인생에서 가장 깊은 인연을 맺은 베를린 필,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단원들과 내로라하는 솔리스트들이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통해 하나가 됐다.
신선한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베를린 필의 명단원들, 바이올린에 콜랴 블라허 비올라에 볼프람 크리스트, 첼로에 나탈리아 구트만과 하겐 콰르텟의 클레멘스 하겐, 베이스에 알로이스 포쉬에 이르기까지 일가를 이룬 연주자들이 모두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되었고 TV카메라 촬영 자리 때문에 바이올린 한 명이 빠진 123명 풀 편성의 유럽 클래식의 신구 세대가 함께 자리에 앉아 청년 말러의 연애 실패와 좌절, 지옥에서 천국으로 새로운 희망을 노래하는 '거인'을 들려주었다.
1악장에서는 트럼펫 주자들을 백스테이지에 배치, 아른하게 들려오는 효과를 들려주었으며 나무 플루트를 사용, 저 멀리서 울려 퍼지는 새소리를 빼어나게 표현해주기도 했다. 포쉬가 베이스 솔로로 연주한 3악장 장송행진곡을 뒤따르는 목관악기들의 감칠맛은 진정한 말러 사운드를 내주기에 충분했다. 건축적으로 그러나 자연스럽게 3개의 악장을 이끌어온 아바도의 리드는 4악장에서 대폭발했다. 이 폭발은 유럽 음악계를 굳건하게 지켜오고 있는 루체른 페스티벌의 새로운 희망 찬가였다.
매년 루체른 페스티벌 오프닝 공연을 통해 말러의 교향곡들을 연주해오고 있는 아바도. 위암을 이겨내고 부활, 유럽의 청년 음악도들을 길러낸 아바도를 단원들은 진정으로 존경하고 있음이 연주를 통해 느껴졌다. 아바도의 눈빛만 봐도 이들은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강압적인 것이 카리스마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었다. 그의 몸은 예전보다 수척했지만 아바도의 온화한 소프트 카리스마는 단원들을 자유로우면서도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게끔 이끌었다. 공연이건 음반이건 이보다 아름다운 말러를, 또 교향곡 공연을 들은 적이 없었다. 위암 이후 베를린필을 사임하고 유럽의 청소년들을 훌륭한 음악가로 키우기 위한 작업에 주력해온 아바도의 아름다운 꿈과 비전은 이렇게 아름답게 결실을 맺고 있었다.
1부에서는 요즘 최고의 주목을 받고 있는 20대 초반의 중국 출신 여성 피아니스트 유자왕이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했다. 얼마 전 런던 심포니와 같은 곡을 협연, 대서특필되기도 했던 유자왕은 기계적인 빠른 테크닉과 불과 얼음을 모두 갖춰야 하는 이 곡에서 전광석화처럼 빛났다. 유자왕의 속주는 40년 전 아바도의 베를린과 레코딩한 여제 마르타 아르헤리치를 떠올리게 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느린 부분에서의 깊이와 표현력이었는데 앞으로 경험과 인생 체험을 통해 채워질 부분이었다. 무엇보다도 아바도의 유자왕을 감싸고 풍부하게 받춰주는 관현악은 협연에서 오케스트라의 덕목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깨달음을 주었다.
유자왕은 계속된 커튼콜에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빠른 소나타로 청중의 갈증을 해소해주었다(아바도와 유자왕의 이날 공연은 8월 15일에 다시 한번 연주되기도 했다).
둘째 날인 8월 13일에는 작년 루체른 페스티벌의 상주 작곡가였던 영국 작곡가 조지 벤자민이 지휘한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심포니 콘서트1 공연이 이어졌다. 공연장의 분위기는 첫날과는 사뭇 달랐다. 최고의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고 한껏 멋을 부리며 빈자리가 단 하나도 없던 어제의 열띤 공연장 분위기와는 달리 분위기는 차분했고 빈자리도 상당히 많았다.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주축 멤버들인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출연했지만 아바도와 벤자민, 누가 지휘봉을 잡느냐에 따라 청중이 달라지는 건 인지상정이었다. 올해 페스티벌의 주제인 '자연'(Nature)답게 첫 곡은 바그너의 '지그프리트 목가.' 바로 이곳 루체른 호반의 트립셴에 있는 바그너의 집에서 사랑하는 아내 코지마의 생일인 12월 25일에 연주된 아름다운 전원 목가는 루체른이라는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하고도 섬세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두 번째 곡은 올 페스티벌의 상주 작곡가인 외르크 비드만의 오보에 콘체르토가 연주됐다. 루체른 페스티벌이 의뢰한 신작인 이 작품의 협연자는 오보에의 대가 하이츠 홀리거였다. 비드만과 음악적으로 다양한 창조를 하고 있는 홀리거는 나이를 잊은 듯 저음에서 고음까지 신들린 테크닉으로 연주를 해주었고 그가 창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순환호흡은 위력적이었다.
2부 첫 곡인 조지 벤자민의 1981년 작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겨울의 마음'(A Mind of Winter)은 월레스 스티븐스의 '눈사람'(The Snow Man) 텍스트를 사용한 작품으로 눈보라와 겨울바람 등 겨울의 이미지를 젠 스타일로 처리한 작품이었다. 이날의 피날레는 슈만의 교향곡 2번.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예의 역동적인 연주로 정신병과 클라라와의 푸가 공부 후에 작곡된 이 곡의 미감을 풍부하게 살려냈다. 전 세계 최고 지성의 아티스트들이 집결하는 올여름 루체른 페스티벌은 9월 19일까지 계속됐다.
브레겐츠 페스티벌 '아이다'
푸치니의 '토스카' 거대한 눈 버전으로 전 세계적인 히트를 친 브레겐츠 페스티벌. 작년에 개봉한 007 '퀀텀 오브 솔리스'의 무대가 되어 화제를 낳고 대박을 터뜨린 브레겐츠판 '토스카'가 막을 내리고 2년마다 다른 작품으로 교체되는 이곳에서 금년에는 베르디의 그랜드 오페라 '아이다'가 그래험 빅의 연출로 상연됐다.
8월 14일 저녁 브레겐츠 페스티벌이 열리는 보덴제 호수에 일몰이 시작되고 주위가 사위어가면서 공연 시작 시간인 9시가 가까워오자 거대한 호수 위의 무대로 7000여 명의 청중이 들어섰다. 무대 위에는 푸른 빛깔의 거대한 자유의 여신상이 여러 갈래로 부서져 있었다. 현대의 뉴욕일 수도 있고 나일 강변일 수도 있고 가상의 어느 나라일 수도 있는 공간. 그곳에서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빨래도 하고 면도도 하고 뛰어놀기도 하는 등 어느 곳을 봐야 할지 모를 정도로 재미있는 움직임들을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주었다.
청중이 처음 집중하게 되는 장면은 자살한 듯 꼭 껴안은 익사체의 젊은 남녀를 인양하는 크레인의 모습이었다. 비극적인 극의 결말을 미리 보여주는 전주곡이었다. 이집트 공주 암네리스 역을 부른 이아노 타마르(전체 캐스팅 중 가장 유명하다)는 화려한 의상을 입은 채 노예들을 개처럼 끌고 다녔고 여러 조각으로 깨진 자유의 여신상은 이집트인들에게 자유를 빼 앗긴 에티오피아 노예들의 상태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제복 등에 경찰(Polizia)이라고 써 있는 전투경찰들이 객석을 가르며 나타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라다메스(루벤스 펠리차리)는 배를 타고 등장, 첫 아리아 '청아한 아리아'를 부른다.
흑인 소프라노 인드라 토마스가 부른 아이다는 역대 아이다 최고의 진정한 노예 의상이었고 '이기고 돌아오라'를 저도 모르게 따라 부르는 동안 하늘에서 무언가가 펄럭거려 주목했더니 무녀장이 수녀(천사)의 모습으로 변신, 하늘에서 크레인을 따라 고공비행했다. 어떻게 저 위에서 공포를 느끼지 않고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경악스럽고 환상적인 무대 장치였다. 암네리스와 아이다의 피 튀기는 신경전의 2중창에서는 슬픔을 표현하려 한 듯 인공강우가 내리기도 했으며 신탁을 받고 에티오피아 원정을 떠나는 원정 대장 라다메스가 쾌속선을 타고 쏜살같이 떠나는 장면도 매우 재미있었다.
아이다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인 라다메스가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올 때 펼쳐지는 개선행진곡 '이집트의 영광'에서는 흩어져 있던 자유의 여신상의 얼굴이 하나가 되었고 라다메스는 전리품으로 타고 갔던 배 위에 황금 코끼리를 타고 개선했다. 또 발레 장면에서 펼쳐진 물위의 모던 댄스 장면은 무척 신선하고 유쾌했다. 또 3막에 라다메스가 고민하다가 국가를 배반하고 아이다와 도망치려 하는 장면에서는 조명만으로 파도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집트의 사제가 아니라 가톨릭의 사제들이 행진하고 라다메스를 심판하는 모습에서의 흰옷을 입은 사제들의 모습도 장관이었다.
마지막 장면은 라다메스가 스핑크스 안에 갇히는 것이 아니었다. 라다메스는 이미 복면을 쓴 채 물에 빠뜨려져 처형을 당하고 저승으로 가는 배 안에 타고 있었고 아이다도 그와 함께 마지막 2중창 '대지여, 안녕'을 부르며 배는 호수에서 역시 거대한 크레인에 의해 하늘로 들어 올려져 승천했다. 환상적이었고 아름다웠다. 이번 브레겐츠 페스티벌의 '아이다'는 작년 토스카와 마찬가지로 매우 재미있었다. 전혀 지루할 틈 없이 펼쳐지는 이벤트의 연속이 바로 이번 아이다의 특징이었다. 지형지물인 호수를 적재적소에 활용하고 거대한 두 대의 크레인으로 장식들을 들어 올려 배경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테크닉의 승리를 보여주었다. 2년 후에는 조르다노의 ‘안드레아 쉐니에’를 공연하겠다니 과연 프랑스 혁명의 모습을 이 창작의 섬, 플로팅 스테이지에서 과연 어떻게 펼쳐낼지 궁금해진다.
이 글을 쓴 장일범은 음악 평론가 및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KBS1FM <장일범의 생생 클래식> DJ이다.
Gustav Mahler;
Symphony No.1 in D major "Titan"
1. Langsam. Schleppend [16:13]
2. Kräftig bewegt [7:23]
3. Feierlich und gemessen, ohne zu schleppen [10:32]
4. Stürmisch bewegt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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