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꼭 봐야 할 전시의 개념에는 역사적, 정신적 의미와 시대적 가치 같은 공통점이 내재되어 있으며 이는 통상 과거와 미래라는 두 가지 다른 방향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성징을 온전히 완성시키는 전시 유형으로 개인 간 선호와 취향, 감상 기준에 따라 소위 블록버스터라 불리는 대규모 기획전과 비엔날레와 같은 실험적인 성향의 전시들을 꼽을 수 있다. 시간적인 관점에서 이들은 시제의 규정을 자유롭게 여기고 예술이라는 텃밭에서 당시의 상황과 정신성을 일궈낸다. 특히 어제의 역사를 내일의 비전으로 치환하는 책무는 그것 자체로 동시대 문화를 이끄는 또 하나의 강력하고 단단한 축이 되곤 한다.
하지만 블록버스터와 비엔날레는 목적에 따라 각기 다른 성격을 갖는다.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블록버스터 전은 일단 ‘대중 친화적인 성격’ 아래 ‘수익’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 이유로 통상 15세기 르네상스시대부터 20세기 초중반에 이르는 유명 아티스트와 명화들을 전면에 내세워 인기몰이에 전념하게 되고 가급적 롱런함으로써 수익을 극대화한다. 만약 이러한 전시들이 단발로 그치거나 <반 고흐>나 <피카소>, <르누아르> 등 잘 알려진 작가가 아닐 경우 수지타산에 막대한 지장을 받는다. 유명세만큼이나 작품임대료가 비싸고 몸값에 비례한 보험료 역시 상상을 초월하는 탓이기도 하지만 인지도가 떨어질 경우 단지 생소하다는 이유로 외면당하기 십상이기에 전시 기획자들은 수입을 높일 수 있는 구조에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다.(때문에 낚시성 전시들도 횡행하곤 한다.)
이에 비해 수익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비엔날레는 그 특성상 명망성에 기댄 상투적인 작품들이 아닌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작가와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동시대 미술의 현주소와 향방을 조언하는 데 주안점을 두기에 훨씬 개념적이고 철학적인 담론을 기저(基底)에 깔고 있으며 직접 체험해야만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꼭 봐야 할 전시 형태로 남는다. 물론 매우 난해한 조형언어들을 쏟아내 현대미술에 대한 ‘난독증’을 부추기는 측면도 없지 않으나 늘 새로움을 섭취하려는 욕구를 만족시키고 작가와 작품에 대한 디테일한 탐구가 가능해 기꺼이 시간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을 전시로 각광받고 있다.
올해는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초대형 기획전과 2년에 한 번 열리는 비엔날레가 동시에 개최된다는 점에서 예년과 달리 조금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상반기만 해도 이미 모네, 반 고흐, 레핀, 몬드리안, 밀레, 루벤스, 척 클로즈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작가들의 전시가 국내 주요 국공립미술관을 제집 안방처럼 들락거렸으며 세계 유수의 명품 보석전과 고대 문명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관람객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짝수 해를 맞은 올 하반기엔 아방가르드한 세계적인 비엔날레가 중요 전시일정의 대부분을 차지함으로써 대기 중인 또 다른 블록버스터들의 본격적인 공세에 앞서 관객들의 발길을 끌어 모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10월부터 12월까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전시로는 국내 3대 비엔날레라고 불리는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와 전반기 블록버스터의 열기를 이어갈 <서양미술거장 전:렘브란트를 만나다>와 <프랑스 국립 조르주 퐁피두센터 국립현대미술관 전>을 꼽을 수 있다.
먼저 9월에 오픈해 오는 11월까지 이어지는 광주비엔날레(9.5~11.9)와 부산비엔날레(9.6~11.15)는 동시대 미술의 현재와 미래를 유추할 수 있음은 물론 미술의 도전성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번쯤은 꼭 봐야 할 전시로 손색이 없다. 이 중 처음으로 주제 없이 외국인 감독에 의해 큐레이팅 된 2008광주비엔날레는 ‘연례보고(Annual Report)’라는 큰 테두리 안에 지난 1년 동안 전 세계 미술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화제의 전시 36개와 부대전시 두 개를 결합해놓아 과거 비엔날레와의 선을 뚜렷이 한다. 특히 올해엔 제3세계 미술을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있어 이채로움을 더한다.
생경함과 날것의 묘한 여운을 체감할 수 있는 2008 광주비엔날레, 사유의 여백이 공존하는 작품들이 주를 이뤄 보다 편안한 감상을 즐길 수 있는 부산비엔날레는 지역에서 열리기 때문에 비교적 시간 및 비용 투자가 적지 않으나 현대미술 마니아라면 꼭 들여다봐야 할 색다른 문화 포석으로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부득이 멀리 떠날 수 없는 이들에겐 국내 3대 비엔날레 중 하나에 해당하는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로 위안을 삼으면 된다. 1천만 서울관객을 모으겠다는 야심만만한 의욕 아래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오는 11월 5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미디어아트비엔날레에는 손끝을 따라 움직이는 스크린 속 나비, 관객의 율동에 의해 자유자재로 바뀌는 화면, 휘황한 사인아트 등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예술세계를 느낄 수 있도록 구성되며 26개국 70개 팀의 미디어아트 작품 77점이 선보인다.
비엔날레의 향연이 막을 내리면 다시 대규모 기획전들이 공습을 시작한다. 먼저 오는 11월 7일부터 내년 2월 26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펼쳐지는 <서양미술거장 전: 렘브란트를 만나다>는 17세기 최고의 번성기를 누리던 서유럽의 잔잔한 일상을 담은 작품들과 당시 사람들의 삶을 투영했던 정신과 감정들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명작들을 만날 수 있다. 베르메르와 더불어 네덜란드가 낳은 빛의 거장 렘브란트의 <나이 든 여인의 초상>을 비롯해 신화를 소재로 더욱 신비로운 화면을 구성한 화가 부쉐의 <헤라클레스와 옴팔레>, 서민들의 일상을 예술로 승화시킨 브뤼겔의 풍속화 연작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로 인정받은 거장들의 아름다운 작품 76점이 공개된다. 이밖에도 초상화의 대가 반 다이크, 정물화의 거목 얀 반 휘섬 등 러시아 국립푸시킨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의미 있는 작품들과 조우할 수 있다.
예술의 전당과 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온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국립현대미술관전인 <프랑스 국립 조르주 퐁피두센터 국립현대미술관 전>이 개최된다. 이번 전시는 세계 최고의 근?현대 유럽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퐁피두센터의 명실상부한 대표작들로 구성되어 있어 높은 질적 수준을 담보한다. 우리에게도 낯익은 피카소와 마티스, 미로와 브라크, 레제와 같은 유명 작가들의 회화작품은 물론 드 키리코, 피카비아, 레제, 칸딘스키, 클라인, 뒤뷔페 등 근,현대 미술사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쟁쟁한 작가들이 참여해 <서양미술거장 전>과 관객 쟁탈을 놓고 자웅을 겨룰 전망이다.
<아르카디아, 천국의 이미지>라는 대주제 아래 ‘황금시대’ ‘아르카디아’ ‘풍요’ ‘덧없음’ ‘쾌감’ ‘전령사’ ‘조화’ ‘암흑’ ‘되찾은 아르카디아’ ‘풀밭 위의 점심’ 등 총 10개의 소주제로 분류해 20세기 초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예술계의 흐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교육적인 전시이기도 한 <프랑스 국립 조르주 퐁피두센터 국립현대미술관 전>은 70만 관객을 동원하며 미술도 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루브르박물관 전(2006년), 밀레의 <만종>을 중심으로 걸작들을 선보인 오르세미술관 전(2007년)과 함께 프랑스 3대 미술관 기획전에 방점을 찍는 전시라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 오는 11월 22일부터 2009년 3월 22일까지.
한편 연말을 기점으로 비엔날레와 렘브란트 전, 퐁피두센터 전이 물러가면 그 뒤를 작품 <키스>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작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최근 큰 이목을 끌고 있는 중국을 포함한 러시아, 인도, 브라질 등 브릭스 국가들의 전시들이 줄을 잇는다. 특히 내년 초 열리게 될 클림트 전에는 빈 벨베데레미술관 소장품인 <쥬디스>, <아담과 이브> 등 클림트의 빛나는 작품 100여점이 국내 처음으로 소개되어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아르누보 특유의 맛깔스러움을 음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진>
광주비엔날레. hans haacke-trickle up-낡은소파,설치-1992
부산비엔날레. 홍현숙-바람의 주문-비닐봉투,혼합재료,2008
부산비엔날레. 박종빈-그를 바라봄, 판지에 흑연가루,2007
렘브란트전 출품작. 부쉐-헤라클레스와 옴팔레
퐁피두전 출품작. 앙리 마티스-붉은 색 실내
퐁피두전 출품작. 파블로 피카소-누워있는 여인
퐁피두전 출품작. 페르낭 레제-여가(자크 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
퐁피두전 출품작. 호앙 미로-블루 II
이 글을 쓴 홍경한은 대학에서 미술실기를, 대학원에서 이론을 전공하고 여러 매체에서 기자로 재직하다 현재는 월간 <퍼블릭아트> 편집장을 맡고 있다. 미술 현장의 부조리한 ‘말할 수 없는 비밀’들을 접할 때마다 이젠 시골에서 ‘개’나 키워야지 하면서도 ‘개’ 키울 돈이 없는 현실에 좌절한 채 매일 이런저런 미술이야기들을 하며 지내고 있다. 최근 문화비평서 <고함>을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