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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와 개혁의 교차점에 선 빈 오페라의 전통/ 노승림 | 음악 칼럼니스트)

나베가 2008. 1. 14. 00:52
보수와 개혁의 교차점에 선 빈 오페라의 전통
  빈 슈타츠오퍼 커버스토리
  노승림음악 칼럼니스트)





Before 1869


 빈 슈타츠오퍼의 전통은 약 3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오스트리아를 통치하고 있었던 합스부르크 가는 대대로 음악애호가의 집안이었으며, 프란츠 요제프 1세 또한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작곡을 즐겼던 황제는 음악의 중심지 파리를 동경했고, 자신이 통치하는 수도 빈을 파리 못지않은 음악의 중심지로 만들고 싶었다.
1857년 12월, 마침내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빈 구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던 성벽과 요새를 모두 허물어버리고 그 자리에 대로(大路)를 건설할 것을 포고했다. 이 길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링 스트라세’(Ring Strasse)이다. 그는 링 안쪽으로 예술과 관련된 기관과 건물을 집중적으로 지어 올리라고 명했으며 그 중에는 두 개의 궁정 극장도 포함돼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연극을 위한 장소였으며, 다른 하나는 음악극, 즉 오페라를 위한 장소였다. 특히 (빈슈타츠오퍼의 전신인) 궁정오페라극장을 위해서는 이전에 존재했던 케른트너토어 극장과 아주 가까운 마(馬)시장을 점지해주었다. 1709년 개관한 케른트너토어 극장은 궁정오페라극장이 세워지기 전까지 빈의 음악적 요충지였다. 베토벤이 교향곡 9번 <합창>을 초연하기도 했던 유명하면서도 유서 깊은 명소였지만 요제프 1세는 공간이 협소하다는 이유로 이 건물을 과감히 철거해 버렸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도시를 화려하게 꾸미기 위하여 유명 건축가들을 불러 들였다. 궁정오페라극장을 위해서는 빈의 유명 건축가 아우구스트 폰 지카르트스부르와 에두아르트 판 데어 뇔을 영입했다. 돈독한 친구이기도 했던 이들은 콤비가 되어 각각 건물의 외부와 내부 디자인을 맡아 조화롭게 완성시켰다. 꼭 그들이 아니더라도 오페라극장에 공을 들인 당대 유명 예술가들의 이름은 부지기수이다. 그 중에서도 슈베르트의 절친한 친구이자 슈베르티아데의 일원이었던 화가 모리츠 폰 슈빈트는 휴게실 로비에 저 유명한 <마술피리> 연작 시리즈를 프레스코화로 남겼다.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공습당시에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오페라극장 건축을 주도했던 두 명의 건축가는 하지만 결국 개관을 직접 두 눈으로 보지 못했다. 감성이 심하게 예민했던 판 데어 뇔은 빈 시민들이 자신의 인테리어가 품위가 없다고 개관 전부터 혹평을 하자 이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으며,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지카르트스부르 또한 심장마비로 사망해버린 것이다.


구스타프 말러


 1869년 5월 25일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가 독일어로 상연되는 가운데 빈궁정오페라극장은 화려하게 개관식을 가졌다. 개관식에는 황제가 참석한 것은 물론 개관식을 위한 작품 또한 그 자신이 직접 선정한 것이었다. 이는 참으로 묘한 인연인데, 1788년 빈에서 초연될 당시만 해도 <돈 조반니>는 빈 시민들에게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오페라였기 때문이다. 당시 황제였던 요제프 2세는 이 작품을 무척 좋아했지만, 결국 관객들의 냉담한 반응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중도에 객석에서 일어나야 할 정도였다. 그는“이렇게 멋진 작품이 빈 시민들한테는 먹혀들지 않는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빈을 제외한 모든 도시에서 환영을 받던 모차르트였지만, 정작 모차르트가 가장 사랑했던 도시 빈은 그가 죽을 때까지 인정해주지 않고 정당한 대우를 하기를 거부했던 유일한 도시였던 것이다. 그런 모차르트의 작품을 그가 죽은 뒤, 빈을 대표하는 오페라극장이 개관 기념 작품으로 선정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빈궁정오페라극장은 개관한 그 순간부터 극장장과 지휘자(카펠마이스터)가 함께 쌍두마차로 극장을 운영했다. 초반에는 음악감독보다 극장장의 입김이 거셌다. 초대 극장장인 프란츠 폰 딩엘슈테트를 시작으로 요한 헤르베크, 프란츠 야우네르, 그리고 빌헬름 얀 등을 거치면서 그들의 예술적인 카리스마로 인해 오페라 극장은 날이 갈수록 시민들 사이에서 인기를 더해갔다. 하지만 빈궁정오페라극장의 최초의 절정은 극장장이 아닌 지휘자에 의해 이루어졌으니, 그가 바로 작곡가겸 지휘자, 구스타프 말러였다.
 말러가 지휘자로 임명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함부르크 극장의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던 그의 이름은 숱하게 거론됐지만 아직은 실세라 할 수 없었고 더구나 그가 유태인이라는 점이 정치적으로 거부 대상이 되었다. 궁정오페라극장을 선망하고 있던 말러는 이에 과감히 자신의 종교를 버리고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또한 당시 극장장이었던 에두아르트 발라사크와 극장 전속 오페라 가수이자 지휘자 파움가르트너의 어머니였던 로자 파피에르 파움가르트너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내 마침내 1897년 4월 15일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5월 11일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지휘하며 이 극장에서 데뷔했다.
 말러가 극장의 지휘자로 취임한 1897년은 음악적으로 매우 의미가 깊은 해였다. 안톤 브루크너가 그 이전 해에 숨졌고, 1897년 브람스가 반년 만에 영면했으며, 쇤베르크가 자신의 첫 리트 작품집을 출판한 이 시기에는 옛 전통이 사라지고 새로운 시대가 지평선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 교두보의 위치에 다름 아닌 말러가 서 있었다. 말러는 극장장을 설득시켜 자신의 정열과 독특한 예술정신을 통해 드라마와 음악이 동등한 비중을 차지하는 완벽한 오페라를 만들어보고자 결심했다. 실제로 1897년부터 1903년까지 말러는 시각적인 측면보다는 음악적 해석을 개혁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던 중 부인 알마 말러가 소개해준 연출가이자 조형예술가인 알프레드 롤러와의 만남은 그의 오페라 인생에 새로운 분기점을 마련해주었다. 롤러의 예술세계에 반한 말러는 그를 궁정오페라극장의 총무대감독으로 임명하여 음악적·시각적 완성도를 동시에 추구했다. 1903년 2월 그들이 함께 처음으로 만든 오페라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롤러가 시도한 다채로운 빛과 색의 조명 예술은 당시로서는 천재지변에 가까운 무대 미학이었다.
 음악적으로도 말러는 당시 유행하던 화려하고 거드름을 피우는 듯한 목소리를 지양하고 참신하고 개성적인 목소리를 불러들였다. 말러 이후 성악가들은 자발성과, 상상력, 그리고 지성을 모두 겸비해야만 빈궁정오페라극장에 입성할 수 있었으며, 그렇게 말러와 함께 오페라를 작업한 안나 폰 밀덴부르크라든가 레오 슐레차크는 오늘날까지 빈오페라극장이 배출한 시대의 명가수로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말러는 또한 당시 유행처럼 번지며 악영향을 끼쳤던‘박수부대’의 관습을 금지시켰으며 연주장에 뒤늦게 도착한 관객이 연주 도중에 입장하는 것을 엄금하는 등 최적의 공연 환경을 정착시키는 데 남다른 노력을 했다. 무엇보다 그가 혐오하던 것은 '전통'이었다. '전통은 곧 타락'이라고 괴팍한 주장을 내세우던 말러의 신념은 '작품이란 연주회마다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데 있었으며 전통에의 안주는 곧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급진적인 말러의 정책은 물론 반대세력의 공격도 엄청났다. 하지만 결국 말러의 개혁은 눈에 두드러질 만큼 오페라극장의 문화를 변화시켰으며 황제조차도 말러를 “오페라극장 개관 이래 가장 단기간에 오페라를 수준급으로 올려놓은 인물”이라고 그를 치하하였다.
 1897년부터 1907년까지 말러가 빈궁정오페라극장에 상연한 작품은 1백 여개에 다다른다. 그는 기존의 레퍼토리를 고수하면서도 차이코프스키의 <예프게니 오네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화재>, 오펜바흐의 <호프만의 이야기> 등 신작들을 초연하는 데 두려움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모차르트와 바그너의 작품을 빈의 레퍼토리로 정착시키는 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말러가 연주한 레퍼토리들은 (오늘날 3분의 2가 사라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다수가 오늘날 빈슈타츠오퍼 정규 레퍼토리의 큰 줄기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말러의 업적을 기려 빈 슈타츠 오퍼에서는 몇 년 전부터 구스타프 말러의 기일인 5월 18일에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주도로 그를 추도하는 콘서트가 개최되고 있다. 1995년 첫 회 콘서트는 세이지 오자와가 지휘했으며 그 이후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1996), 리카르도 무티(1997), 로린 마젤(1998), 주빈 메타(1999), 주세페 시노폴리(2000), 리카르도 무티(2001) 등이 이 콘서트에서 포디엄에 섰다.


전쟁과 폭격, 그리고 카라얀


 말러의 개혁 시도와 참신한 정신은 그가 건강상의 이후에도 퇴임한 이후에도 오페라 극장에 그대로 뿌리를 내렸다. 20세기에 들어와 빈 궁정오페라 극장에는 언제나 현대 오페라들이 시시때때로 상연되었다. 1920~1930년대 빈 시민들은 궁정 오페라 극장에서 크셰네크의 <조니는 연주한다(Jonny Spielt Auf)>, 힌데미트의 <캐딜락>(Cardillac), 코른골트의 <헬리아네의 기적>(Wunder der Heliane), 그리고 클레멘스 크라우스가 지휘하는 베르크의 <보체크>(Wozzeck)의 초연을 목격했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은 당시 정치적으로 득세하던 사회주의자들의 방해공작으로 점차 쇠퇴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1945년 3월 12일, 다섯 발의 폭격을 맞은 빈 궁정오페라극장과 더불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전시에도 꾸준히 문화생활을 유지하였으며 오페라를 일상으로 여기고 있었던 빈 시민들에게 초토화된 빈 궁정오페라 극장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빈의 오페라 역사는 단절되지 않았고 또 다른 오페라극장인 폴크스오퍼와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그 명맥이 유지됐다. 이 두 극장은 빈 오페라정신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궁정오페라극장이 부재 중이었던 10년의 공백을 채워주었다.
 1945년 5월 24일 빈 정부는 빈 슈타츠오퍼(빈 국립오페라극장)의 재건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오스트리아 건축가 에리히 볼텐슈테른과 오토 프로싱어가 위촉됐다. 남아 있던 지붕과 회랑의 계단, 그리고 슈빈트의 <마술피리> 프레스코화와 더불어 최첨단 기술 장비들이 새롭게 보급됐다. 이 과정에서 일부 시민들은 '귀족사회의 잔재'라는 이유로 박스석을 없애버리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볼텐슈테른은 박스석을 그대로 남겨두는 대신 발코니 석 정면에 걸려 있던 화려한 바로크풍의 장식을 과감하게 걷어내 보다 현대적이고 서민적인 극장으로 그 모습을 변모시켰다.
재건 10년 만인 1955년 11월 5일, 빈슈타츠오퍼는 베토벤의 <피델리오>를 상연하며 두 번째 시대를 열었다. 새로운 지휘자로 임명된 카를 뵘의 지휘 아래 진행된 이 개관식은 오스트리아 방송국을 통해 전 유럽에 생중계됐으며, 유럽인들은 새로운 공화국의 생존 사인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빈 슈타츠오퍼의 극장장으로 부임하면 모두 성공한다”는 예술계의 루머(?)는 종전 이후 빈 슈타츠오퍼 극장장을 역임한 에곤 제펠너 이후부터 거론되었다. '빈 슈타츠오퍼'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개관한 오페라극장은 카를 뵘이라는 뛰어난 지휘자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에곤 제펠너에 의해 다시 말러 이전처럼 극장장이 주도권을 잡는 양상을 보여주었다(여기에는 카를 뵘의 부드럽고 온화한 성격이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를 뵘의 뒤를 이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입성하면서, 시소는 다시 한 번 반대편으로 기울어졌다.
 1956년 빈 슈타츠오퍼의 제안을 받은 카라얀은 그 자신의 칭호부터 이전의 '카펠마이스터'에서 '예술감독'으로 바꾼 뒤 말러처럼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전쟁을 거쳐 재개관한 오페라극장은 아직 작품성에 있어 옛 완성도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독단적인 시민들의 취향, 정부의 간섭, 편협한 관료주의가 극장의 진보를 가로막고 있었다. 카라얀은 오페라극장의 작품들의 수준이 떨어진 주요한 이유를 스튜디오 체제에 있다고 보았다. 즉 한 가수가 전 시즌 계약을 맺어 작품에 상관없이 모든 작품들에서 주역을 맡아 연습할 틈도 없이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는 제도였는데, 이와 같은 시스템을 고집하는 오페라극장은 당시 빈 슈타츠오퍼와 지방의 조그만 극장밖에 없었다. 일류 가수들이 전 세계 오페라극장을 비행기를 타고 누비고 있었으며, 대중들은 레코드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최고의 가수들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카라얀인 보수 세력들의 항의를 외면하고 스튜디오 체제를 폐지하는 대신 라 스칼라 극장과 프로덕션 교환 시스템을 제안했다. 또한 모든 작품들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공연하던 전통을 폐지하고 오페라를 원어로 상연하며 빈 슈타츠오퍼를 국제적인 극장에 편승시켰다. 카라얀은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리오 델 모나코와 레나타 테발디를 주역으로 세워 베르디의 <오텔로>를 이탈리아어로 상연했다. 이는 근대 이후 외국 출신의 성악가에 의해 독일어가 아닌 언어로 상연된 최초의 공연이었다. 하지만 카라얀이 희망했던 라 스칼라와의 공동 프로덕션 기획은 그의 재임 기간이 끝날 때까지도 성사되지 못했다. 그만큼 빈의 문화적 자존심과 보수주의는 강력한 것이었다.
 카라얀의 빈 슈타츠오퍼 시절의 업적에 대해서는 찬반이 엇갈린다.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시리즈를 비롯해 <파르지팔>, 그리고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레장드> 공연은 그러나 큰 성공을 거두었고, 세계가 다시 한 번 빈 슈타츠오퍼를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카라얀은 관제적으로 운영되던 오페라 극장의 관습을 개혁하고 대신 철두철미하고 주도면밀한 준비를 통해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상연하는 전통을 새로 세웠다. 하지만 스스로 독재적이고 권력욕이 강했던 카라얀에게 빈의 보수성은 매번 넘을 수 없는 성벽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새로 부임한 극장장 에곤 힐베르트와의 불화로 인해 그는 더 이상 빈에 미련을 가지지 않았다. 1956년 빈 슈타츠오퍼에 사직서를 제출한 그는 이후 잘츠부르크로 옮겨가 페스티벌을 통해 그곳에 스스로 자신만의 오페라 제국을 건설했다.


최초의 아시아 지휘자 세이지 오자와


 에곤 힐베르트 이후 빈 슈타츠오퍼의 주도권은 다시 극장장에게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후 극장장들은 레코드 시대와 더불어 점점 이름값이 높아지는 지휘자들의 정체성을 존중해주는 쪽을 택했다. 하인리히 라이프 긴틀은 로린 마젤(1982~1984)을, 클라우스 헬무트 드레제는 클라우디오 아바도(1986~1991)를 측근으로 두었다. 1992년부터 빈 슈타츠오퍼 극장장을 맡고 있는 이오안 홀렌더는 2003년 자신의 음악적 파트너로 일본 출신의 지휘자 세이지 오자와를 지명했다. 아시아 지휘자가 보수적인 빈 슈타츠오퍼에 입성했다는 소식은 당시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의 파트너십은 오는 2010년까지 이어질 예정이며, 그 이후 그들은 각각 지휘자 프란츠 벨저 뫼스트와 독일어가 유창한 프랑스 출신의 극장장 도미니크 메이어에게 차세대 바통을 넘겨줄 예정이다.   


 


                    


1악장 (Bedächtig, Nicht eilien)

                                     말러 / 교향곡 제4번 사장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