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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벳부 아르헤리치 페스티벌 in Seoul'을 위해 내한하는 마르타 아르헤리치

나베가 2009. 7. 30. 18:44

'벳부 아르헤리치 페스티벌 in Seoul'을 위해 내한하는 마르타 아르헤리치
  김재용음악 칼럼니스트





80년대 초 당시 세계 최정상의 피아니스트였던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솔로 활동을 그만두고 실내악에 전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연주자로서는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40대 초반에 내린 이런 결정은 많은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 말을 잠시 휴식을 취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고, 실내악 무대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거장 피아니스트의 참여를 즐겼다. 하지만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그 이후로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아르헤리치는 독주 무대에 서지 않았다. 이따금 있는 오케스트라와의 협연무대를 제외하면 아르헤리치의 모습은 다른 연주가들과 어우러지는 실내악 무대에서만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반적인 연주자라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기 마련이겠지만, 아르헤리치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아르헤리치를 찾았고, 다른 피아니스트와는 전혀 다른 동선으로도 세계 최정상의 연주자로서의 명성을 이어가는 단 하나의 예외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1941년 6월 5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5세의 나이로 아르헨티나의 명교수 빈센초 스카라무차에게 엄격한 지도를 받았고, 겨우 8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남미의 대표적인 연주회장인 콜론 극장에서 모차르트의 협주곡 20번과 베토벤의 협주곡 1번을 연주하면서 데뷔 무대를 가졌다. 1955년 그녀는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유럽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빈 음악원의 명교수 자이들호퍼에게 피아노를 배우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자이들호퍼는 자신의 제자였던 프리드리히 굴다에게 그녀의 레슨을 맡겼고, 아르헤리치는 굴다와의 관계를 통해 큰 도약을 이루게 된다. 이때 아르헤리치의 나이는 14살이었으며, 굴다는 25세의 젊은 피아니스트였다. 굴다는 아르헤리치에게 진정한 음악적인 아름다움을 가르쳐주었으며, 음표 하나하나를 깊게 생각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1년 뒤인 1956년 아르헤리치는 연주 활동을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겨우 3주 사이로 부조니 국제 콩쿠르와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 출전해 모두 1위를 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때 제네바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한 피아니스트가 바로 마우리치오 폴리니이다. 1960년에는 도이치 그라모폰과 전속 계약을 맺고 데뷔 음반을 레코딩해 '아르헤리치 열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녀는 그 때문에 혹사당하기 시작했다. 해마다 150회나 되는 연주회는 아르헤리치를 신경쇠약 직전까지 몰고 갔고 결국 모든 연주회 계약을 취소하게 되었다. 이 시기 아르헤리치가 선택한 것은 다시 피아노를 배우는 것이었다. 1961년 아르헤리치는 미켈란젤리에게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지만, 몇 번의 레슨만으로 미켈란젤리와의 만남은 끝을 맺었다. 이러한 아르헤리치에게 용기를 준 사람이 바로 명피아니스트 스테판 아슈케나지이다. 피아노를 연주할 용기를 얻게 된 아르헤리치는 1965년 쇼팽 콩쿠르에 참가해 당당히 우승했고, 이후 세계 정상급의 연주자로 그 누구보다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아르헤리치 이전 1960년 쇼팽 콩쿠르의 우승자가 바로 마우리치오 폴리니였고, 제네바 콩쿠르에서 우승과 준우승을 나눠 가진 이들 두 사람은 미켈란젤리라는 스승과도 함께 연결되어 있다. 폴리니는 자신의 모든 스승 중에서 미켈란젤리에게 가장 큰 가르침을 얻었다고 했지만, 미켈란젤리는 자신의 제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아르헤리치를 꼽았다. 아르헤리치는? 미켈란젤리에게 배운 것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아르헤리치는 여류 피아니스트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힘들 정도로 압도적인 연주를 들려준다. 아르헤리치의 연주는 다이내믹한 표현과 풍부한 음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동시에 말할 수 없이 예민한 감각도 갖추고 있다. 아르헤리치는 활동 초기 이러한 연주를 통해 쇼팽과 리스트를 중심으로 하는 낭만파의 작품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정열적인 표현에 작품에 대한 보다 원숙한 접근이 더해지면서 한층 내면적인 깊이가 더해진 연주를 들려주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 아르헤리치는 갑자기 멈춰 서서 실내악으로 연주의 초점을 돌렸다. 실내악에서 듣게 되는 아르헤리치의 연주는 정말로 뛰어났다. 독주 무대에서 보여주었던 압도적인 연주 위에 천부적으로 타고난 앙상블 감각을 확인시켜주었던 것이다.
아르헤리치의 최근 활동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실내악 연주와 젊은 음악가들에 대한 후원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가지 모습은 일본의 벳푸에서 열리는 벳푸 아르헤리치 뮤직 페스티벌(別府アルゲリッチ音?祭)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아르헤리치는 1994년 평소 친분이 깊었던 일본의 피아니스트 이토 쿄코와 함께 실내악 페스티벌을 기획했다. 그리고 3년간의 예비 연주회를 거쳐, 1998년 ‘벳푸 아르헤리치 뮤직 페스티벌’이 탄생했다. 벳푸는 바로 이토 쿄코가 사는 온천 휴양 도시이다. 연주자와 관객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뮤직 페스티벌을 만들겠다는 아르헤리치와 이토의 소망은 1998년 이후 오늘날까지 성공적으로 이어졌다. 이 음악축제의 성공 이후 세계 각지에서 비슷한 기획이 이어지게 되었다. 2001년 11월부터 벳푸 아르헤리치 음악제의 자매 행사로 열리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헤리치 음악제’와 2002년 6월부터 루가노에서 시작된 마르타 아르헤리치 프로젝트 등은 벳푸의 성공을 남미와 유럽에서도 이어가려는 시도이다.
아르헤리치는 음악제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열어 많은 젊은 음악가에게 도움을 주었고, 주목받는 젊은 연주자들을 음악제 무대에 서게 해주었다. 아르헤리치 자신이 젊은 시절 신경쇠약 직전까지 가서 연주 활동을 중단했던 경력을 지니고 있었던 만큼, 젊은 연주자들의 고민과 어려움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크게 공감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도움을 주고자 노력해왔다. 아르헤리치의 도움을 받은 연주자로 우리에게 친숙한 피아니스트가 바로 임동혁이다. 아르헤리치가 한국의 젊은 피아니스트 임동혁을 후원해온 것은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당시 17살의 젊은 연주자였던 임동혁의 연주를 지켜본 아르헤리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세계 각지의 음악 페스티벌에 임동혁을 초청했으며, EMI 음반사의 ‘젊은 피아니스트’ 시리즈로 데뷔 음반을 출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EMI는 아르헤리치의 의견을 받아들여 파격적인 조건으로 그의 데뷔 음반을 출시했고, 임동혁은 이 음반으로 ‘황금 디아파종 상’을 수상해 아르헤리치의 추천이 적절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아르헤리치의 모든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벳푸 아르헤리치 뮤직 페스티벌’은 이미 한국인에게 친숙한 무대이기도 하다. 2007년 ‘벳푸 아르헤리치 뮤직 페스티벌 서울 스페셜 콘서트’라는 제목으로 아르헤리치가 내한하여 한국과 일본의 여러 연주자와 함께 실내악 무대를 가진 바 있고, 오는 2009년 5월 24일에도 다시 아르헤리치와 함께하는 스페셜 콘서트가 있을 예정이다. 이 음악제의 총감독을 맞고 있는 아르헤리치와 천재 트럼페터인 세르게이 나카리아코프, 그리고 아르헤리치가 전폭적인 후원을 해온 피아니스트 임동혁이 함께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번 공연은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난번 스페셜 콘서트와는 달리 실내악이 아닌 아르헤리치의 협주곡 연주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 깊은 인연을 지니고 있는 임동혁과 한 무대에 선다는 점, 그리고 아르헤리치의 중요한 활동 영역 가운데 하나인 젊은 신인 음악가와의 연주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 등 화제를 모을 여러 모습을 이번 서울 공연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