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치니 [Giacomo Puccini 1858∼1924]
이탈리아 작곡가. 루카 출생. 조상 대대로 음악가 집안이었고, 아버지 미켈레는 루카에서 작곡·연주·교육 분야에서 활동하였으나, 푸치니가 5세 때 병사하였다. 어릴 때에 특수한 음악가적 재능을 발휘한 것도 아니며, 학업성적도 우수하지 못했으나 푸치니는 어머니의 노력과 격려, 그리고 죽은 아버지의 제자 안젤로니의 훌륭한 지도로 재질을 키워갔는데, 그 결과 16세 때 오르간경연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그 뒤부터 작곡을 시작하는 등 음악에 대해 열정을 쏟았다. 1880년 밀라노음악원에 입학, A. 폰키엘리와 G. 팟치니에게 배웠다. 그의 졸업작품 《교향적 카프리치오》는 매력있는 역작이라는 호평을 받았으며, 루카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여기에는 뒤에 《라보엠》에 사용된 선율이 있었으며 그 관현악법에는 뒷날의 작품과 상통되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 푸치니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한 폰키엘리는, 시인 F. 폰타나에게 그를 위한 오페라 대본의 집필을 부탁하여 《지젤》과 같은 제재로 그의 첫 오페라 《빌리》를 쓰기도 하였다. 이 작품도 역시 독특하고 슬픈 매혹적 선율과 멋진 장면 묘사로 인정을 받았다.
그 뒤 A.F. 프레보의 명작에서 취재한 《마농 레스코》를 작곡, 93년 트리노레지오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대본 자체의 많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개성이 강하게 나타나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이 작품으로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지위가 확고해졌다. 제 4 작은 96년의 《라보엠》이었는데, 인기작이었다. 다음 작품은 V. 사르두의 희곡에 의한 《토스카》로 《나비부인》과 같이 처음에는 인기를 얻지 못했으나 오늘날에는 《라보엠》 《토스카》 《나비부인》이 푸치니의 3대 명작으로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한편 1920년 여름에는 C. 곳치의 극에 입각하여 《투란도트》의 오페라화를 결심, 극작가와 함께 완성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인후암으로 병상에 눕게 되었고, 24년 11월 브뤼셀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미완성 부분은 F. 알파노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의 작품의 제재는 대중과 밀착되어 있었다. 즉 《투란도트》 이외의 주인공은 대개 서민적 인물이며 거기에는 대개 비운·박복한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여 일반 청중들의 동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좋은 대본이 없으면 나의 음악은 쓸모가 없다>라는 말을 푸치니는 자주하였으며 따라서 제재의 선택과 대본 만드는 데 열심이어서 G. 자코사와 L. 일리카의 대본으로 《마농 레스코》 《라보엠》 《토스카》 《나비부인》 등의 명작을 탄생시켰다. G. 베르디 이후 이탈리아 최대의 오페라작곡가로 불린다.
Giacomo Puccini (1858∼1924)
교회음악의 전통을 이어받은 명문 출신으로 조부 도메니코 Domenico도 극작가였다. 1864년에 아버지를 여의고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1874년 루카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교향곡 전주곡(1876)과 뒤에 미사곡으로 다듬어지는(1880) 많은 종교음악을 작곡했다.
1876년 피사에서 상연된 아이다를 보고 큰 감명을 받은 후 그는 오페라에 전념하기로 결심하여 1880년 뛰어난 성적으로 밀라노 음악원의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여왕으로부터 특별 장학금을 받은 그는 이 음악원에서 바치니 Bazzini, 폰키엘리에게 배웠다. 그리고 1883년 교향적 카프리치오를 작곡하여 졸업장을 받게 된다(그는 13년 후 라 보엠 La Boheme에서 이 곡의 일부를 그대로 사용했다). 또한 가곡이나 현악4중주곡도 작곡했지만 그의 작품의 독창성 및 근대성이 발휘된 것은 최초의 오페라 빌리 Le Villi에서였다.
이것은 하이네와 테오필 고티에의 작품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으로서 1884년에 밀라노의 델 베르메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이것은 산초뇨 청소년 센터가 주최하는 콩쿠르의 심사위원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리코르디 출판사의 주목을 끌게 되어, 이 출판사는 이 젊은 음악가와 신뢰 관계를 맺고 경제적으로도 그를 원조하는 데 동의한다.
그래서 푸치니는 뮈세의 술잔과 입술 La Coupe et les levres의 원작에 기초하여 4년만에 에드가 Edgar를 작곡했으나 1889년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의 초연은 실패로 끝났다. 그는 이것을 4막에서 3막으로 개작하여 1892년 페르라라에서 상연하였는데 먼저보다는 호평을 받았다. 그래도 리코르디는 푸치니에 대한 신뢰를 계속 버리지 않고 후원해 주었다. 한편 그는 친구의 부인인 엘비라 Elvira와의 괴로운 대정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결혼할 수 있게 된 것은 1904년이었다.
1889년 사르두 V. Sardou의 토스카 La Tosca를 사라 베른하르트 Sarah Bernhardt가 연기하는 것을 본 이래, 푸치니는 이 주제에 정열을 기울이고 있었으나 그 권리를 얻을 수 없었다. 그는 마스네의 마농의 성공이 있은 지 4년 후 이 테마를 다루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리하여 몇몇 대본 작가와 오랫동안 실랑이를 벌인 끝에 1893년 토리노에서 마농 레스코 Manon Lescaut의 상연을 실현시켰다.
그것은 베르디의 팔스타프가 밀라노에서 초연되기 1주 전이었다. 이것은 대성공을 거두어 이 작품은 같은 해에 이탈리아 전역, 남아메리카, 러시아, 스페인, 독일에서도 상연되고 이듬해인 1894년에는 리스본, 부다페스트, 런던, 프라하, 몬테비데오, 필라델피아, 그리고 멕시코, 바르샤바, 뉴욕, 아테네 등지에서 잇달아 상연되었는데 프랑스에서의 상연은 1906년에 이루어졌다(니스 및 보르도에서).
그 이후 베르디의 뒤를 이을 음악가로서 명성을 높인 푸치니는 루카 근처의 토레 델 라고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뮈르제 Murger 원작의 라 보엠을 작곡한 것은 이곳에서였다. 1896년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토리노에서 상연된 이 오페라는 마농 레스코의 후기 낭만파적 감상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오케스트레이션과 하모니가 매우 참신했고 초연 당시에는 이 작품에 대해서 찬반 양론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순식간에 이름을 높여 갔다. 한편, 프랑케티가 관대하게도 그에게 권리를 양도했기 때문에 푸치니는 마침내 토스카 Tosca를 작곡할 수 있었으며 이것은 1900년 로마에서 초연된 후 즉시 전세계에서 상연되어 그 대담한 어법에도 불구하고 가장 전통적인 청중 앞에서도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프랑스적 감성에 바탕을 둔 5개의 주제를 다룬 다음, 런던을 여행하는 도중에 푸치니는 존 루터 롱 John Luther Long의 희곡을 발견, 여기에서 나비부인 Madame Butterfly의 악상을 얻었다. 그러나 1903년의 큰 자동차 사고로 그 완성은 늦추어졌다. 그리고, 1904년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의 초연에 실패한 3개월 후 브레시아에서 공연할 때는 새로운 버전에 의해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에서 자작의 감독을 하고 있던 무렵, 그는 벨라스코 Belasco의 작품 속에서 새로이 타향살이의 테마미국의 서부 지방를 찾아내었다.
서부의 아가씨 La Fanciulla del West는 1910년 카루소와 데스틴 주연,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초연되어 화려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일로 해서 푸치니의 기분도 훨씬 밝아졌다. 그는 작품 속에서 매우 분방한 어법을 구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생활에서 매우 심각한 위기를 경험해야 했다. 아내인 엘비라 푸치니가 젊은 하녀를 아무 근거도 없이 남편의 애인이라고 고발하여 그 하녀를 자살하게 했는데 그 일에 책임이 있다는 판결이 내려졌던 것이다.
어떤 종류의, 특히 프랑스의 신문 잡지는 비난을 퍼부어 댔으나 영광의 절정에 있던 푸치니는 다양한 제작 활동에 몰두하고 있었다. 빈풍의 오페레타를 계획하고 있었으나 정치적 상황이 바뀌어 오페라로 만들기로 했고(제비 La Rondine[초연 1917 몬테카를로]), 3부작으로 묶여진 세 개의 짧은 작품을 완성시켰다(초연 1918 뉴욕). 외투 Il Tabarro는 디디에 골드 Didier Gold의 베리스모 극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 인상주의적인 음악의 분위기로 잘 알려져 있다.
수녀 안젤리카 Suor Angelica는 르네상스 초기의 피렌체를 무대로 한 감상적이고 비통한 비극이다. 잔니 스키키 Gianni Schicchi는 단테의 지옥편에서 따온 것으로서 푸치니는 그것을 희극의 큰 전통과 다시 결부시켰다. 베르디는 이미 팔스타프에서, 또한 특히 볼프 페라리는 금세기 초 골도니에게서 착상을 얻은 서정적 희극에서 이러한 전통의 명성을 부활시키고 있었다. 푸치니는 그의 최후의 오페라 투란도트 Turandot의 테마를 또 한 사람의 베네치아 고전주의 작가 카를로 고치 Carlo Gozzi에게서 차용했다.
이 작품에서는 작가가 일생에 걸쳐서 꿈꾸고 있던 대오페라의 규모 앞에서 이국적인 우화(페르시아의 전설에서 취해진 중국풍 주제)는 뒷걸음질쳐지고 있다. 대담한 화성법이 사용되고 또한 연주가 무척 어려운 이 작품은 작자 자신의 손에 의해 완성되지 못했다. 그는 목구멍의 농창(膿瘡)을 앓고 있었는데, 수술의 보람도 없이 브뤼셀의 사립병원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 오페라는 푸치니가 남긴 초고를 적절히 개변하여 친구인 알파노 Alfano에 의해서 완성되었으며, 1926년 4월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제1회 상연에서는 류가 죽는 장면에서 막을 내렸다. 여기에서 작자가 절필했던 것이다.
오랫동안 푸치니의 명성은 오해 위에 구축되어 있었다. 그를 찬양하는 사람도, 그를 비방하는 사람도 모두 그의 작품 전체가 베리스모의 흐름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으로 믿고 있었으나 그것은 그가 분명히 피하고 있었다. 또한 이 명성은 처음에 19세기 오페라의 전통적인 애호가들의 찬의(贊意)도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그들은 그의 오페라에서의 서정의 유출에 매혹되어 작품이 뛰어난 극적 효과에 이끌리기는 했지만 그의 연극의, 그리고 오케스트라 및 화성의 표출에서의 매우 중요한 혁신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했다.
그래서 이 영광은 X엘리트 음악사가들에게는 의문스러운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러나 그 엘리트들도 푸치니의 악보를 연구하는 수고는 거의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드뷔시, 포레, 뒤카스 등이 그들의 명예가 되지 않는 판단을 표명했다면, 푸치니에 대한 찬미의 마음을 처음부터 큰 소리로 나타낸 것은 말러, 라벨과 같은 작곡가들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두 사람의 근대 음악의 전문가, 미국인 모스코 카너 Mosco Carner와 프랑스인 르네 레보비츠가 음악사가로서 처음으로 푸치니를 금세기의 위대한 혁신자의 한 사람으로 꼽았다.
실제로, 푸치니는 밀라노의 스카필랴투라 scapigliatura의 한복판에서 자라났다고는 해도 베리스모의 지배에서 도피했으며 그의 기호는 그로 하여금 낭만주의 쪽으로 이끌려 갔다(최초로 그를 고무한 인물은 하이네, 고티에, 뮈세였다). 그와 동시에 엄격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베르디가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오케스트라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고, 다시 이탈리아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새로운 화성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끝으로, 그의 연극적 구조의 감각은 대본 작가들과의 잇따른 다툼과 대본의 간결함(극단적인 단축화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지만)이 증명하고 있는 바와 같지만, 그것은 그를 낭만파적 화려함이 지나친 베리스모와는 대조적 입장에 서는 작가로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프랑스 문화에 대한 친밀함은 그에게 샤브리에의 작품에 통하는 화성 표현을 쓰게 하고, 또 그 확고한 작곡법은 때로는 드뷔시를 예고하고 있다. 한편 음색의 독립성과 음세포의 단독성으로 이루어진 분산된 오케스트레이션은 라벨을 10년 이상이나 앞선 것이었다.
라 보엠은 라벨의 오케스트라만으로 된 첫번째 작품보다도 12년이나 전에 작곡되었다. 그리고 오페라의 구상에 있어서 푸치니는 근년의 연속선율(連續旋律)의 기교를 일거에 도입하고(토스카에 있어서의 바그너풍 반음계성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떨어져 있는 아리아를 배제하고 있다. 그의 작품 중 모놀로그는 항상 장면에 잘 어울리며 바그너의 오페라의 경우보다도 짧고 줄거리에서 생략할 수 없는 부분이며, 항상 음악적 담화 속에서 이어져 있다.
그것은 이 작곡가의 발전과 더불어 점점 작아지고 가장 후기의 작품에서는 아리아의 개념에는 동화할 수 없는 것으로까지 되어 있다. 푸치니의 천재성은 노래의 개념화에 있어서 노래소리의 영속성을 완전한 상태로 유지했다는 점에 있다. 단순히 알기 쉬운 선율의 연속을 복잡한 오케스트라법과 대조시켰을 뿐만 아니라 베리스모의 작곡가들과는 반대로 성역의 전체에 걸쳐서 목소리가 온갖 뉘앙스를 표현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의 오페라 주제만이 때로는 인생의 단면의 미학에서 출발하고 있으나 그 줄거리는 시간적으로나 지리적으로도 종종 너무나 이방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전면적으로 인정하기란 어렵다.
결국 투란도트의 장려한 시도를 제외하면 초기의 오페라에서 차이코프스키, 마스네, 카탈라니 등에 의한 유럽 후기 낭만파의 한 작품으로 위치하게 할 수 있는 마농 레스코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은 베베른의 작품에 사용되었던 표현을 사용한다면 음악적 희박화라는 현상으로의 진전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라 보엠처럼 동시대의 사람들에 있어서는 미지의(최후의 작품을 썼던 무렵의 림스키 코르사코프를 제외하면) 대담한 작품이 태어났던 것이다.
다시 거기에 전면적인 반음계의 사용(토스카 첫머리의 스카르피아의 노래), 음조(音調)에 의한 음계의 사용(서부의 아가씨), 외투의 인상주의나 투란도트 제1막의 음열 등이 덧붙여지게 된다. 이상의 오페라 작품 외에 푸치니의 작품으로는 12여곡의 가곡, 미사곡(1880), 베르디를 추도하여 작곡된 레퀴엠(1905)을 포함한 몇 개의 종교 작품, 교향적 전주곡(1876)과 교향적 카프리치오(1883)의 두 찬가, 아다지에토(1883), 오케스트라를 위한 행진곡(1896), 국화(菊花) Crisantemi(1890)를 비롯한 현악4중주곡 등이 있다.
자료출처: 웹사이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