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나는 고전음악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비틀스와 롤링 스톤즈를 비롯한 60~70년대 팝음악에 빠져 지냈다. 그것이 80년대 대학가의 일반적인 풍경이기도 했다. 어디를 가나 ‘음악다방’이 있었고 연예인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던 디제이(DJ)라는 존재가 있었다. 그렇다고 고전음악을 전혀 몰랐던 건 아니다. 누나와 여동생이‘초보자에겐 쉽고 전문가에겐 어렵다’는 모차르트를 너무도 사랑했기에 언젠가 나도‘귀가 뚫릴 날’이 찾아오리라 짐작은 했다.
대학 3년을 마치고 강원도 화천으로 입대해 나는 과연 클래식 음악 전도사를 만났다. 해남이 고향으로 광주에서 대학을 다니다 입대한 고참이었는데 내가 문학을 한다고 하자 각별히 챙겨주며 틈만 나면 늘 고전음악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요점은 음악이 있기에 삶이 너무도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집에 두고 온 와피데일이라는 영국제 스피커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게 큰 항아리만한 건데 돌처럼 무거워. 런던의 안개처럼 소리가 깊고 장중하지. 저 유명한 명기인 탄노이나 로이드도 모두 영국의 기후를 고려해서 만들었다는 거야.”
그리고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과 첼리비다케의 삼각관계에 대해서도 들려주었다.
“푸르트벵글러는 오스트리아에서 온 키 작은 카라얀을 싫어했어. 권위적이고 대중 지향적이었거든. 그래서 베를린 필을 첼리비다케에게 물려주려고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지. 카라얀에 비해 지명도가 떨어졌던 거야. 아무튼 푸르트벵글러의 연주는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이고 독일인 특유의 철학적인 사유가 있어.”
이런 얘기들을 귀에 닳도록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고전음악에 관심이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제대 후에 나는 광주로 찾아가 시청 앞에 있는 ‘베토벤’이라는 고전음악다방에서 그와 만났다. 독신의 여성이 혼자 꾸려가는 집으로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훗날 그는 이 다방에서 나주 출신의 여성과 만나 결혼까지 했다. 음악이 맺어준 커플이었다. 그리고 그 결혼식 사회를 내가 보았다. 그렇게 광주를 자주 오가다 나는 ‘포레’라는 중고 오디오점에서 마란츠 앰프와 로이드 스피커와 테크닉스 턴테이블을 들고와 정식(?)으로 클래식에 입문했다. 1990년 무렵이었다.
그후 팜므파탈과 연애에 빠진 사람처럼 날마다 명동 ‘부루의 뜨락’에 드나들며 오리지널 LP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 중 대부분은 베토벤의 음반이었다. 헨릭 쉐링이 연주한 명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과 푸르트벵글러의 ‘전쟁 음반’도 여기서 어렵사리 구했다. 그리고 10년 넘게 고집스레 LP만을 들었다. 카트리지나 바늘을 구하기 위해 수시로 용산전자상가와 청계천에 드나들었음은 물론이다. 오랜 세월 베토벤에 빠져 지내다 보니 바이올린 협주곡 음반은 약 40종, 교향곡 5번 음반은 100종이 넘는다. 그리고 여전히 지휘자와 악단과 연주 시기별로 나뉘어 듣는 재미에 빠져 살고 있다.
1990년대 중반에 유럽에 처음 갔을 때도 내가 먼저 찾아간 곳은 저 황금빛의 거대한 베를린 필하모닉 홀이었다. 클라우디아 아바도가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기 전이었다. 블라드미르 아쉬케냐지의 연주가 있는 날이었으나 늦게 찾아가 아쉽게도 연주는 볼 기회가 없었다. 독일에서 오스트리아 빈으로 기차를 타고 가 먼저 찾아간 곳도 베토벤의 무덤이었다. 들고 간 꽃다발이 하나뿐이었는데 옆에 슈베르트의 무덤이 있어 무색했던 기억이 난다.
지난 17년 동안 수많은 음악을 들으며 축복 속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돌아보니 내가 클래식에 입문한 해는 소설가로 등단한 해와 정확히 맞물려 있다. 나는 고전음악을 들으며 휴식하고 때로 사유하며 대위법과 교향곡의 조형미를 소설 속에 재현해보려고 노력했다. 카잘스와 피에르 푸르니에와 야노스 슈타커의 바흐 연주를 들으면서는 시적인 공명을 소설에서 추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내게 영감을 가져다준 수많은 이름들이 떠오른다. 비행기 사고로 요절한 지네트 니뵈, 역시 불행하게 살다간 자클린 뒤 프레, 비행기 공포증의 괴짜 피아니스트 글랜 굴드, 아름다운 정열의 화신 마르타 아르헤리치... 도무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빌헬름 박하우스의 베토벤 연주, 엄격한 할아버지 카를 뵘의 모차르트 레퀴엠, 지금도 내가 가장 즐겨 듣는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베토벤 5번 연주, 정경화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 그리고 지난 10여 년 동안 나는 얼마나 자주 예술의전당에 드나들었던가.
음악에 관한 취향을 물어올 때 나는 흔히 3B라는 표현을 쓴다. 베토벤, 바흐, 비틀스. 요즘에야 비틀스를 비롯한 팝송은 거의 듣지 않지만, 그리고 옛날처럼 많은 시간을 들여 고전음악을 들을 형편도 못되지만 베토벤과 바흐만큼은 늘 곁에 두고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무래도 단순해지고 또 깊이를 추구하게 되는 것 같다. 요즘은 새삼스럽게 첼리비다케가 연주한 뮌헨 필하모닉의 음반을 자주 듣는다. 오래 전에 비디오 자료에서 젊은 날의 그를 본 적이 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베를린 필 앞에서 베토벤의 <에그먼트 서곡>을 연주하던 아름다운 청년을 말이다. 이제는 푸르트벵글러가 왜 그를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는지 알 것 같다. 여기서 다시 카라얀을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푸르트벵글러는 그가 나중에 바위처럼 묵묵히 사유하는 ‘은발의 은자’가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하다.
대학 3년을 마치고 강원도 화천으로 입대해 나는 과연 클래식 음악 전도사를 만났다. 해남이 고향으로 광주에서 대학을 다니다 입대한 고참이었는데 내가 문학을 한다고 하자 각별히 챙겨주며 틈만 나면 늘 고전음악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요점은 음악이 있기에 삶이 너무도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집에 두고 온 와피데일이라는 영국제 스피커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게 큰 항아리만한 건데 돌처럼 무거워. 런던의 안개처럼 소리가 깊고 장중하지. 저 유명한 명기인 탄노이나 로이드도 모두 영국의 기후를 고려해서 만들었다는 거야.”
그리고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과 첼리비다케의 삼각관계에 대해서도 들려주었다.
“푸르트벵글러는 오스트리아에서 온 키 작은 카라얀을 싫어했어. 권위적이고 대중 지향적이었거든. 그래서 베를린 필을 첼리비다케에게 물려주려고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지. 카라얀에 비해 지명도가 떨어졌던 거야. 아무튼 푸르트벵글러의 연주는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이고 독일인 특유의 철학적인 사유가 있어.”
이런 얘기들을 귀에 닳도록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고전음악에 관심이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제대 후에 나는 광주로 찾아가 시청 앞에 있는 ‘베토벤’이라는 고전음악다방에서 그와 만났다. 독신의 여성이 혼자 꾸려가는 집으로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훗날 그는 이 다방에서 나주 출신의 여성과 만나 결혼까지 했다. 음악이 맺어준 커플이었다. 그리고 그 결혼식 사회를 내가 보았다. 그렇게 광주를 자주 오가다 나는 ‘포레’라는 중고 오디오점에서 마란츠 앰프와 로이드 스피커와 테크닉스 턴테이블을 들고와 정식(?)으로 클래식에 입문했다. 1990년 무렵이었다.
그후 팜므파탈과 연애에 빠진 사람처럼 날마다 명동 ‘부루의 뜨락’에 드나들며 오리지널 LP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 중 대부분은 베토벤의 음반이었다. 헨릭 쉐링이 연주한 명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과 푸르트벵글러의 ‘전쟁 음반’도 여기서 어렵사리 구했다. 그리고 10년 넘게 고집스레 LP만을 들었다. 카트리지나 바늘을 구하기 위해 수시로 용산전자상가와 청계천에 드나들었음은 물론이다. 오랜 세월 베토벤에 빠져 지내다 보니 바이올린 협주곡 음반은 약 40종, 교향곡 5번 음반은 100종이 넘는다. 그리고 여전히 지휘자와 악단과 연주 시기별로 나뉘어 듣는 재미에 빠져 살고 있다.
1990년대 중반에 유럽에 처음 갔을 때도 내가 먼저 찾아간 곳은 저 황금빛의 거대한 베를린 필하모닉 홀이었다. 클라우디아 아바도가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기 전이었다. 블라드미르 아쉬케냐지의 연주가 있는 날이었으나 늦게 찾아가 아쉽게도 연주는 볼 기회가 없었다. 독일에서 오스트리아 빈으로 기차를 타고 가 먼저 찾아간 곳도 베토벤의 무덤이었다. 들고 간 꽃다발이 하나뿐이었는데 옆에 슈베르트의 무덤이 있어 무색했던 기억이 난다.
지난 17년 동안 수많은 음악을 들으며 축복 속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돌아보니 내가 클래식에 입문한 해는 소설가로 등단한 해와 정확히 맞물려 있다. 나는 고전음악을 들으며 휴식하고 때로 사유하며 대위법과 교향곡의 조형미를 소설 속에 재현해보려고 노력했다. 카잘스와 피에르 푸르니에와 야노스 슈타커의 바흐 연주를 들으면서는 시적인 공명을 소설에서 추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내게 영감을 가져다준 수많은 이름들이 떠오른다. 비행기 사고로 요절한 지네트 니뵈, 역시 불행하게 살다간 자클린 뒤 프레, 비행기 공포증의 괴짜 피아니스트 글랜 굴드, 아름다운 정열의 화신 마르타 아르헤리치... 도무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빌헬름 박하우스의 베토벤 연주, 엄격한 할아버지 카를 뵘의 모차르트 레퀴엠, 지금도 내가 가장 즐겨 듣는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베토벤 5번 연주, 정경화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 그리고 지난 10여 년 동안 나는 얼마나 자주 예술의전당에 드나들었던가.
음악에 관한 취향을 물어올 때 나는 흔히 3B라는 표현을 쓴다. 베토벤, 바흐, 비틀스. 요즘에야 비틀스를 비롯한 팝송은 거의 듣지 않지만, 그리고 옛날처럼 많은 시간을 들여 고전음악을 들을 형편도 못되지만 베토벤과 바흐만큼은 늘 곁에 두고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무래도 단순해지고 또 깊이를 추구하게 되는 것 같다. 요즘은 새삼스럽게 첼리비다케가 연주한 뮌헨 필하모닉의 음반을 자주 듣는다. 오래 전에 비디오 자료에서 젊은 날의 그를 본 적이 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베를린 필 앞에서 베토벤의 <에그먼트 서곡>을 연주하던 아름다운 청년을 말이다. 이제는 푸르트벵글러가 왜 그를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는지 알 것 같다. 여기서 다시 카라얀을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푸르트벵글러는 그가 나중에 바위처럼 묵묵히 사유하는 ‘은발의 은자’가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하다.
이 글을 쓴 윤대녕은 소설가로 소설집 <은어낚시통신> <남쪽 계단을 보라>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 <누가 걸어간다> <제비를 기르다>를 냈으며 장편소설로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미란> <눈의 여행자>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등이 있다. 오늘의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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