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쿠르즈(2007.12)

20.이집트 쿠르즈여행 9일/알렉산드리아..카타콤베로 가는 길.

나베가 2008. 2. 19. 03:04

2007.12.28

알랙산드리아

 

 

 

이제 여행에서의 마지막...알랙산드리아를 향해 달리고 있다.

카이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이렇듯 광활한 대지의 연속이다.

더우기 자욱하게 낀 안개는 한치의 앞도 안보인다는 말처럼 정말 버스 바로 옆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한...마치 동화속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마냥 꿈결같은 길을 무려 1시간 이상 달렸다.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음악소리 조차 평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이 아련함에 더욱 가속도를 붙여 어느 유적지를 관광하는 것 못지않는 신비스러움을 느끼게 했다.

 

 

 

 

 

  안개속을 뚫고 푸르른 대지를 지나 이제 알랙산드리아에 도착....톨게이트를 지나고 있다.

역시 톨게이트의 기둥들부터 여늬 톨게이트와는 사뭇 구별이 되는것이 알랙산드리아 답다.

 

알렉산드리아는 카이로에서 180킬로미터 북서쪽 지중해 남안에 위치해 있는 인구 400만의 이집트 제 2의 도시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의 제국(帝國) 내에 세운 도시 중 자기 이름을 붙인 것은 이곳 외에도 많이 있지만, 가장 유명한 도시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이다. BC 331, 대왕은 이곳을 정복하고 아프리카정복의 전진기지로 이 도시를 건설했으나  알렉산더 대왕은 이 곳을 다시 방문하지 못했다. 이 후 프톨레마이오스시대에 이집트의 수도가 되어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우고 지중해 연안지역에서 로마 다음으로 큰 경제의 중심지로서 발전하였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계획은 이 도시를 세계제국의 중심으로 만들려는 것이었으나, BC 31년의 악티움 해전과 BC 30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멸망으로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로마 정기에는 다시 번영하였으나, 이 무렵부터 유대인의 식민지가 된 느낌을 가졌으며, 그리스도교도 전파되어 종교적 분쟁의 거리로 화하였다. 그러나 이슬람들이 수도를 카이로에 세운 이래 쇠퇴일로를 걸어 제2의 도시로 전락하였다. 14세기 대 지진으로 말미암아 도시는 황폐화 되었고 나폴레옹이 이 곳을 점령했을 때는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이집트의 제일의 항구도시 일뿐만 아니라 기계, 시멘트, 조선, 구리정제, 석유정제 등의 공업과 곡물, 종이, 면화거래 등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상공업의 중심지이다. 지중해 기후로서 이집트의 휴양관광지로서 명성를 높이고 있다

 

 멀리 대형마트 까르푸가 보인다.우리나라에서 보다 훨씬 규모가 커 보인다.

 

 지하도를 지나고 있는 중이다.

지하도 벽의 타일 문향 역시 남다르게 보였다.

 

 

 

여행을 하다보면 수도없이 헌병들을 볼수 있는데, 내겐 복장이 정말 독특해 보였다.

바지는 그냥 똑같지만 상의가 스웨터로 되어있다는게.....

진한 국방색니트에 빨강색 견장을 대고 빨강색 베레모를 쓴 경찰들의 복장이 아주 편하면서도 나름 패션너블해 보였다.

비단 이들뿐만이 아니라 교통경찰인 지...암튼 그들 복장도 상의는 모두 니트로 되어있었다는...

 

 

 

 

 

 

 바다가 시야를 탁트이게 하는 알랙산드리아의 시내는 이처럼 깨끗했지만....이곳을 지나 우리가 가고있는 <카타콤베>를 향하는 길은 오래된 아주 낡은 건축물들과

인도 바라나시의 야시장 거리를 방불케 할 만큼  거리 상인들로 가득한...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순간이동을 한것 처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카타콤베로 가는 길....

마치 전쟁이라도 난것처럼 모든 종류의 차들이 나와서 서로 뒤엉켜 붙어있다.

노란색 자동차는 전차인데 밀려서 마치 열차가 이어져 있는것만 같다.

이러한 광경은 인도 바라나시에서나 볼수 있는 풍경인 줄 알았더니....

하긴 여긴 짐승-소, 말, 돼지,개...등은 없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인것인가???

이렇듯 몇분안되는 거리가 이렇게도 서로 다를 수가 있을까!!

카타콤베를 보기도 전에 그저 이 거리의 풍경이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관광객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이 광경들을 바라보느라 되려 차가 막히는 것에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않았다.

 

 

 

 

<장의사겸 장례식장>이다.

형편이 어려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른다고 한다.

우리네의 어두침침한 어두운 분위기하고는 정반대의 풍경이다.

하긴...우리나라도 재래식으로 장례를 치르는 꽃상여를 생각하면....

 거리시장에는 정말 없는게 없다.

 

 

 

 

 

 

  

 

 

 과일이 풍성하다.

얼마나 과일값이 싼지..1000원이면 바나나, 귤, 오렌지등은 한 보따리를 살수 있다.

이집트에 있는동안 가장 맛있고 탐스러웠던 과일은 석류였다.

여름철 과일이라고 하는데도 지금도 많이 나와있었고 가격도 환상적이어서 10달러어치면 우리일행 모두에게 두주먹을 쥔만큼 커다란 탐스런 석류들이 한개씩 돌아간다.

으음~~ 넘 맛있어!!

 

 

  

위, 아래 사진은 거리 다방풍경이다.

남자들은 휴일이면 이곳에 앉아서 담배를 피거나 물담배를 피면서 친교를 나눈다.

낭만이라곤 전혀 찾아볼수 없는 그런 풍경이지만.....

 

 헉!! 이곳에도 마차가??

 

 나란히 펼쳐놓은 그릇과 신발들이 ....나름 소박함을 풍긴다.

 

 

 정말 인간이 살면서 필요한 것들은 모두 다 나와있는 것만 같다

.

로마양식의 이집트 최대 지하분모인<카타콤베>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사진을 찍을수 없었다.

 콤 엘 슈카파는 아랍어로 질그릇 파편 무더기란 뜻이라 한다. 아마도 발굴되기 전에는 질그릇 쪼가리들만이 쌓여 있었던 듯하다. 무덤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제사에 쓸 음식을 담아온 질그릇을 집으로 가져가지 않고 이곳에 버리고 갔기 때문에 주위가 온통 질그릇 파편들로 덮여 있었을 것이다. 1892년 질그릇 파편을 보고 유적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이 지역을 발굴했으나 아무것도 발견 못했다. 1900년 어느 날 수레를 끌던 당나귀 한 마리가 발이 빠지면서 구덩이에 쳐 박혔다. 당나귀가 카타콤으로 가는 문을 연 셈이다. 1995년이나 되어서야 일반인에게 공개하기 시작한 이 곳은 1~2 세기경에 만들어진 이집트 최대의 지하분묘로서 로마 양식으로 지어진 지하 3층의 공동묘지 이다. 기독교 공인 전에 그리스도 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던 지하 교회나 무덤을 카타콤 이라고 부른다. 본래는 신분이 높은 가족용 지하묘지로 만들어 졌다가  3세기 이후는 일반 시민의 공동묘지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 지하묘지가 바위를 뚫어 만들어 졌다. 가운데가 뻥 뚫린 지름이 6미터나 되는 우물 같은 구조의 수갱(竪坑) 가장자리에 만들어진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면 둥근 천정이 있는 원형의 방이 나오고 왼편으로 25평 남짓의 큰 방이 있는데 유족들의 대기실 겸 식당으로 사용된 시설이라고 한다. 방 한 가운데 자 모양으로 사람들이 앉을 자리가 툇마루처럼 만들어 져 있는데 폭이 2미터 정도나 되어 누워서 대기하기도 했던 듯하다. 전체 길이는 10미터 정도. 지금은 그냥 석상(石床)이지만 당시에는 부드러운 쿠션이 깔려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가운데 있어야 할 식탁은 보이지 않았다. 가운데 계단을 몇 발자국 올라가면 양 옆으로 각기 남 녀 모습의 석상이 있고 그 앞에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석관이 있다.  그 앞쪽 벽에는 코브라 두 마리가 태양을 이고 있는 모습이 부조 되어 있다. 여기에 묻힌 사람은 그레꼬로만 시대의 파라오인가? 왜 이름을 알리는 표지가 없을까? 그 주위로는 관 하나가 들어감직한 구멍들이 질서정연하게 파여 있다. 이런 작은 무덤들은 계단을 통해 곳곳에 있어 수백 개는 되는 듯 했다.

 

이날은 얼마나 관광객이 많았는 지 석관앞에서 설명을 듣기위해 얼마나 기인 시간을 기다렸는 지...그나마 허둥지둥 설명을 듣고있는데도 우리뒤에서 기다리는 다른나라 관광객들이 또 야단법석을 피웠다. 우리의 가이드...한 성깔 하면서 제압하고는 마저 하던 설명을 마쳤다. 그 뒷편으로도 수도 없이 많은 굴들이 파져 이어져 있었고,물이 스며 들어와 더이상 발굴하는 것을 중지했다고 했다. 아닌게 아니라 뒷편으로 들어가니 바닥에 물이 스며들어와 있었다.

참~ 모든게 대단해 보이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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