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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소-권지혜

나베가 2006. 4. 27. 01:55

만남에 있어서 첫인상이 중요하듯이, 이 책의 표지와 제목에서 느껴지는 첫인상은 내겐 좋지않았다.

남편이 사온 이 책이 그저 쉽게 읽고 웃을 수 있는 그런 책일거라고 ....-내가 아주 싫어하는-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아니다' 였다는 것이다.

7편의 단편에서 보여주는 메시지는 차라리 '슬픔'에 가까웠다. 그래서 '폭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는 .....끝없이 절망의 나락에서 허우적대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것 같지만, 결국에선 삶의 긍정적인 끈을 잡아채는......속악한 욕망과 생에 대한 긍정을 얽고 꼬아만든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아이러니컬한 국면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삶의 순간들....

거의 모든 작품에 등장하는 불구성을 지닌 인물들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베어먹은 사과 한 알'에서의 용복이 각시. '스토커'에서의 보험설계사의 귀머거리 남편. '가슴에 찍힌 새의 발자국' 에서의 소연이.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한 소연은 어찌보면 순진하고, 또 어찌보면 위악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작가는 '과연 온전한 삶이 있는가' 하고 반문한다. 

절망에서 시작해서 딱히 희망이라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절망이 아닌 것은 분명한 그 무엇에서 끝난다는 사실이 이 소설에서 주는 중요한 메시지이다.

 

우리 주변에서 늘상 일어나고 있는 삶을 소재로 한 너무나 평범한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그래서 더 작가가 말하려고 했던 의도를 독자로 하려금 생생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든  소설이다.

 

자폐아인 어린 아들때문에 가정이 해체될 위기를 맺게 된 아버지가 아이와 함께 동반자살을 결심하고 바다로 향하는 표제작 '폭소'에서 말없이 아이를 보살피던 아내는 언젠가 부터 성교중에 교성을 지르는 대신 폭소를 터뜨린다. 여기에서 아내의 폭소는 곧, 삶의 무자비함에 대한 통곡인 동시에 온전한 삶에 대한 신랄한 조롱을 내포하고 있는것이다.

콘크리트 방조제에 빠진 아들을 살려내려 혼신을 다하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을 보고, 삶은 '의지'가 아니라 '본능'이라고 말하면서...작가는 일순간에 이 작품을 생에 대한 '긍정'으로 반전시키고 있다.

 

"삶이란 건 숨이 막힐정도로 아귀가 꼭맞게  돌아가야 하는 바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굴렁대를 쥐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만의 굴렁쇠를 굴리다가 굴렁쇠를 놓치기도 하는것.

놓쳐버린 굴렁쇠처럼 가끔은 삶이 주는 그런 우연성. 삶이란 것이 얼마나 인간의 의지를 배반하는 우스꽝스런 것일 수 있는 지를 나는 그에게 말하고 싶은 걸까." 

 

연거푸 사업에 실패하고 노름꾼으로 전락해 버린 아버지, 생활고에 찌든 어머니의 짜증, 동생의 죽음, 과외금지 조치이후 지쳐버린 주인공 '나'가 선택한 것은 성재와의 성적경험을 선택한다. 첫경험을 위해 계획적으로 떠난 여행의 하룻밤이, 성재가 술이 잔뜩 취해서 '지킬것을 지키지 못했던 과거의 괴로움을 토로하며, 널 지켜줄거야'라며 횡설 수설...그의 여물지 못한 성기만을 보여준채 잠들어 버린다.  수치심에 다 토해버리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삶을 후회하는 주인공...귀국후, 아버지는 늘 매운 '풋고추'를 드시며 호탕하게 웃으셨지만, 세상살이 견디는 묘약으로 먹었었노라는 얘기를 듣는다. 이젠 '나'도 풋고추를 먹으면서 울지 않는다.

 

한 보험설계사가 벙어리남편을 이용해 일종의 판촉활동으로 고객주변에 마치 스토커가 있는것처럼 상황을 꾸며나간다. 스토킹에 시달리던 주인공은 목숨의 부질없음과 두려움으로 그녀가 스토커인지도 모르고 보험을 들게된다. 이런 상황설정을 만들 수 있다는 인간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지....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 부부를 이처럼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세상의 속악함 자체라는 것이다. 불구인 남편까지 책임져야 하는 삶의 고달픔으로 그녀는 울수조차 없다. 울지 못하는 것은 본능의 억압이기에 더 비극적이다. 옛 애인들의 뒤를 추적해 보고, 발신자번호로 찍힌 스토커 집에 전화를 하고, 또 치매에 걸린 언니 시아버지의 해괴한 행동에 스토커라고 내 뱉는 묘사에서 우리 모두는 '스토커'가 될 수 있음을 내비치기도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 선과 악을 구분지을 수 없는 이 모호함의 주범은 단지 삶 그 자체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핍의 세계가 집약된 '행복한 재앙'은 병원에 입원한 교통사고 환자들의 이야기이다. 조금이라도 보험금을 더 타내기 위해서 보험사와 병원과 환자들간의 펼쳐지는 줄다리기는 욕망과 아이러니로 가득한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들을 이와같이 나이롱처럼 질기게 만든것은 모진 삶에 연유한다.

 

"퇴원을 하여 거리로 나서며 그들은 자신의 볼을 꼬집어볼지도 모른다. 그리고 햇빛 속애서 살아 잇음을 느끼고 순간이나마 행복해할 것이다.그러나 순간은 잠시, 다시 끊임없이 고통스럽고 남루한 일상에 치를 떨며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견디며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산 자들에게 주어진 행복한 재앙이 아닐까."

 

'설탕'은 작가의 교수생활의 체험이 묻어난 작품으로 동해안의 한 3류대학이 배경이다. 설탕에 적당히 중독된 제자들에게 인생은 소금과 같은 것이라고 가르치는 문학교수가 있었다. 군대간 선배의 애인이며 아이스크림과 케익을 만드는 것이 취미인 미나와 기분 꿀꿀할 땐 섹스로 풀고 문자나 날리며...그렇게 감각적인 삶을 살아간다. 미나(설탕)에 중독된 삶은 달콤하지만 파멸의 길로 가기에 늘 불안한 맘을 가지고 있다. 어느날, 미나는 자취를 감추고 현우는 바닷가에서 혼자 걷는 문학교수를 만난다.

"살다보면 자신만이 자신을 위로해줘야 할 때가 있다는....."

취기가 있는 교수와 첫사랑을 배경으로 쓴 리포트를 비롯한  마음속 깊은 얘기를 나눈다.

  "삶에는 그런 결정적인 순간이 있지. 그런 순간을 잘 포착하는 것은 본능일 거야. 인간은 암튼 자신의 생에선 결국 최선을 다  하려고 하거든. 죽음도 마찬가지고..."

 

임신중이었던  미나는 돌아와서 고민끝에 임신중절을 하고, 소금이 닷되는 나올만큼 울어재끼고는....파리 유학을 떠난다.  교수말따나 깊이 아파본 사람은 바다를 이해할 수 있다고....미나가 씁씁하고 짭짤한 소금맛, 눈물맛을 알게 된 것일까...

 

설탕에게도 운명의 순간이 있는 것이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아야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