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향의 뉴 웨이브 시리즈 II
프로그램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 2번
뒤티외, 교향곡 제1번
□ 출연자 프로필
재단법인 서울시립교향악단 Seoul Philharmonic Orchestra
2005년 6월, 재단법인으로 새롭게 태어난 서울시립교향악단.
스테판 드네부(Stéphane Denéve)
오늘날 국제적으로 최정상급 지휘자로 인정받고 있는 스테판 드네부는 현재 로열 스코티쉬 국립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네 번째 시즌을 맞고 있다.
2005년 9월 29일 그는 취임연주를 통해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연주력과 기획력 모두에 대해 극찬을 받았다.
BBC 프롬스, 에든버러 페스티벌, 비엔나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이들과 낙소스에서 출반한 루셀 시리즈의 첫 음반으로 2007년 디아파송 황금상을 수상했다.
2008년 출반된 이 시리즈의 두 번째 음반 역시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1995년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파리 음악원을 수석 졸업한 드네부는 솔티 경의 보좌역으로 파리 오케스트라의 ‘푸른수염 영주의 성’(1995), 파리 국립 오페라의 ‘돈 조반니’(1996)을 통해 커리어를 시작했다. 또한 조르주 프레트르를 도와 파리 국립 오페라와 ‘투란도트’(1997)를, 세이지 오자와와 사이토 키넨 페스티벌에서 ‘카르멜 수도회 수녀의 대화’를 무대에 올렸다.
폭 넓은 레퍼토리와 함께 현대음악에 대해서도 열렬한 지지를 보여주고 있는 스테판 드네부는 그레트리, 드뷔시, 라벨, 베를리오즈, 루셀, 포레, 풀랑 등 자신의 모국인 프랑스의 음악에 대한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그들의 작품을 연주해오고 있으며 최근 프랑스 현대음악 작곡가 기욤 코네송의 작품들을 세계 초연했다.
객원지휘자로서 파리 오케스트라,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톤할레 오케스트라, 도이치 심포니 오케스트라, 체코 필하모닉, 홍콩 필하모닉, 시드니 심포니, 멜버른 심포니, 뉴 제팬 심포니, 예테보리 심포니,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스웨덴 라디오 심포니, 로열 스톡홀롬 필하모닉, 로테르담 필하모닉, 베르디 오케스트라 등을 비롯, 북미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LA필하모닉,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피츠버그 심포니,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 신시내티 심포니, 달라스 심포니, 몬트리올 심포니, 토론토 심포니, 휴스턴 심포니, 세인트 루이스 심포니, 미네소타 오케스트라, 인디애나폴리스와 시애틀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을 지휘했고, 2006년과 2007년 여름, 델 솔 페스티벌과 투스칸 선 페스티벌에서 러시아 국립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스테판 드네부는 나탈리 드세이, 니나 슈템메, 장-이브 티보데, 표트르 안데르제프스키,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 라르스 포그트, 니콜라이 루간스키, 엠마누엘 액스, 니콜라이 즈나이더, 핀커스 주커만, 레오니다스 카바코스, 바딤 레핀, 길 샤함 등 세계적 연주자들과 긴밀한 유대를 맺으며 한 무대에 오르고 있다.
오페라 무대에서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코지 판 투테’를,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에서 ‘카르멘’을 지휘했고, 네덜란드 오페라와 ‘세 오렌지에 대한 사랑’을, 라 모네에서 ‘라 트라비아타’와 ‘목소리’를, 파리 국립오페라와 ‘돈키호테’ ‘라보엠’ ‘피가로의 결혼’을, 볼로냐 오페라 극장에서 ‘베아트리체와 베네딕트’를, 신시내티 오페라와 ‘기다림’‘카르멘’‘푸른수염 영주의 성’ 을 연주했다.
2008/09 시즌 주요활동은 BBC 심포니, NDR 심포니, 마지오 무지칼레, LA필하모닉,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도쿄 케트로폴리탄 심포니 오케스트라, 서울시향, 차이나 필하모닉의 객원지휘가 있다.
비비아네 하그너
뮌헨 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 비비아네 하그너는 지적인 연주와 열정적인 예술성으로 찬사를 얻고 있다. “균형과 당당한 확신”(더 타임즈), “테크닉과 예술성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주는, 소름끼치는 리사이틀”(워싱턴 포스트) 등의 찬사를 얻었고, 베를리너 모르겐포스트는 “비비아네 하그너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는 것은 매혹적인 경험이다. 사려깊고 명석하다. 그는 연주에서 안을 돌아보며 밖으로 빛을 발하는 것을 가장 멋지게 결합시키는 방법을 안다.”
12세의 나이에 국제 무대에 데뷔하였고, 1년 후 텔아비브에서 주빈 메타가 지휘하는 이스라엘 필하모닉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역사적인 조인트 콘서트에 참가한 이래, 비비아네 하그너는 차분한 무대 매너와 깊이있고 성숙한 연주로 명성을 쌓아왔다. 베를린 필하모닉,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체코 필하모닉, 바이에른 주립, 시카고 심포니,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등과, 아바도, 아쉬케나지, 바렌보임, 샤이, 에센바흐 등의 지휘자와 함께 연주해왔다. 최근에는 로린 마젤 지휘의 뉴욕 필하모닉, 샤를 뒤투아 지휘의 보스턴 심포니, 휴 볼프 지휘의 뮌헨 필하모닉 외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예테보리 심포니 등과 협연하였다.
주요 협주곡 레퍼토리를 탁월한 통찰력과 비르투오시티로 연주할 뿐만 아니라, 하그너는 새롭고 잘 알려지지 않은 음악의 열렬한 옹호자이기도 하다. 소피아 구바이둘리나, 칼 아마데우스 하르트만, 비톨트 루토스와프스키 등의 작품을 자주 연주하고 있으며 2002년에는 진은숙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켄트 나가노 지휘의 베를린 도이체 심포니와 세계 초연하였다. 사이먼 홀트의 새 바이올린 협주곡을 2006년 조나단 노트의 BBC심포니와 초연하였을 때, 선데이 타임즈는 그녀가 “음악의 영혼을 사로잡았다”고 평했다.
실내악 연주자로서, 잘츠부르크 부활절,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말보로, 라비냐, 뉴욕 모스틀리 모차르트 축제 등 세계 유명 축제에 출연해오고 있으며, 암스테르담 콘세트르헤보우, 바르셀로나 팔라우 데 라 무지카,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쾰른 필하모니, 런던 위그모어홀 등의 무대에 섰다.
이번 시즌에 일본에서 세미온 비쉬코프 지휘의 쾰른 서독일 방송교향악단과, 스페인에서 핀커스 주커만의 로열 필하모닉과 협연하며, 그 외에 몬트리올 심포니, 북독일 방송교향악단,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 등과 협연한다. 그 외에 위그모어홀에서 스티븐 코바체비치와 브람스, 버르토크 등을 연주하며, 메시앙 백주년 기념공연 및 엘리엇 카터 백주년 기념공연에도 출연한다. 하그너는 2009년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페스티벌의 상주 아티스트로 선정되었다.
바흐, 버르토크, 하르트만을 녹음한 첫 번째 독주 앨범이 알타라 레이블로 2007년에 출시되었고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을 녹음한 두 번째 앨범은 2009년 봄 나올 예정이다. 비비아네 하그너는 일본 음악재단이 대여한 1717년 스트라디바리우스 사세르노로 연주한다.
Violin Concerto G Minor No.2, Op.63 |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 2번 사단조 Sergei Sergeevich Prokof'ev 1891-1953
No.2 II. Andante assa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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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scha Heifetz, violin Boston Symphony Orchestra Charles Munch, Conductor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 프로코피예프는 바이올린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바이올린 협주곡을 2곡이나 작곡했고 이 앨범을 통해서 들을 수 있는 이 두 작품이 모두 발군의 작품으로 오늘 날 많이 연주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프로코피예프의 작곡활동은 크게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 1기는 1904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입학에서 1917년 러시아 혁명까지이고 제2기는 1918년부터 1933년까지의 망명시절, 제3기는 귀국 이후 1953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할 때까지의 약 20년간이다.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제1번이 1917년, 제2번이 1935년 즉, 제1번이 20대의 혈기왕성한 청년 시대 작품인 데 반해, 제2번은 40대 중반 무렵의 작품이며 두 작품 사이에 프로코피예프는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유럽에서 약 20년 가까운 생활을 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역시 20년 차이가 나는 두 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에서도 뚜렷한 양식의 대조를 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 2번 사단조 작품 63 Composed by Sergey Prokofi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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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코피예프는....
1891. 4. 23(구력 4. 11) 러시아 우크라이나 손초프카~1953. 3. 5 모스크바
20세기 러시아의 작곡가로 교향곡·협주곡·영화음악·오페라·발레·표제음악을 포함한 폭넓은 영역의 작품을 남겼다.
혁명전 시절
프로코피예프는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곳 농부들의 노래와 함께 한 농촌에서의 생활은 일생 동안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는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어린 프로코피예프의 첫번째 음악 교사였으며 그와 함께 오페라를 보기 위해 모스크바로 여행을 하기도 했다. 모스크바의 작곡가이며 음악 교사인 세르게이 타네예프는 소년 프로코피예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 러시아의 작곡가 라인홀트 글리에르에게 추천했다. 글리에르는 여름 동안 2번이나 손초프카를 방문해 그에게 음악이론과 작곡을 가르치면서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켰다. 그곳에서 보낸 기간 동안(1904~14) 프로코피예프는 창작에서 매우 빠른 성장을 보였으며, 음악적 사고에서 그가 보여준 독창성은 그의 선생을 놀라게 했다. 졸업을 하고 자신이 작곡한 최초의 대작인 피아노 협주곡 1번 D#장조 작품10을 직접 연주해 안톤 루빈스타인 상 피아노 부분을 석권했다.
음악원에서 프로코피예프는 음악의 학문적인 기초에 대한 확고한 기반을 쌓았으며 음악적 개혁에도 열중했다. 그의 이러한 열의는 음악적 혁신을 내세우는 진보적인 무리들에 의해 지지되었다. 그가 피아니스트로 등장한 최초의 공공 연주회는 1908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렸는데 진보적인 그룹을 청중으로 한 연주회였다. 얼마 후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와 비슷한 성향의 집단을 만나 그들의 호의적인 공감을 얻게 되는데 그들은 1911, 1912년의 모스크바 여름 교향곡 연주 시즌에 프로코피예프가 작곡가로서 데뷔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많은 새로운 음악적 아이디어를 응용하면서 그의 재능은 급속도로 개발되었다. 그는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특히 초기의 발레곡을 공부했지만 스트라빈스키의 혁신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당시의 새로운 연극·시·회화의 조류를 직접 접했던 것도 그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러시아의 모더니즘 시인들의 작품, 세잔과 피카소를 추종하는 러시아 화가들의 그림, 시대에 뒤떨어진 자연주의에 대항하는 실험적 작품을 공연한 프세볼로트 메이에르홀트의 연극 작품에 빠져 있었다. 1914년 프로코피예프는 위대한 발레 흥행사인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를 알게 되었고, 그후 15년 동안 디아길레프는 그에게 있어 가장 영향력있는 조언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910년 아버지가 죽은 후 비록 그의 어머니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만 보다 어려운 경제적 여건에서 살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최신 예술 조류를 접하기 위해 런던과 파리를 방문했다. 러시아에 팽배해 있던 폭풍전야와도 같은 긴장된 분위기가 그에게 회의감을 주어 그는 낭만주의적 이상을 믿지는 않았지만 본질적으로 건전한 그의 인생관은 흔들리지 않았다. 홀어머니의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징병에서 면제된 그는 계속 공부해 오르간을 완벽하게 익혔으며 모스크바와 그밖의 지역에서 연주회에 출연했다. 혁명 이전의 프로코피예프의 작품은 실험에 집중되어 있었다. 화성적 사고와 설계는 점점 복잡해져갔다. 디아길레프를 위해 고대 슬라브의 전설을 주제로 한 발레곡 〈알라와 롤리 Ala and Lolli〉(1914)를 작곡했으나 디아길레프는 이를 거절했다. 이렇게 되자 그는 이 음악을 관현악을 위한 〈스키타이 모음곡 Scythian Suite〉 작품20으로 개작했다. 1916년에 있었던 이 작품의 초연은 악평을 받았으나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작곡한 음악 중 최고의 것이었다. 역시 디아길레프가 위촉한 발레곡 〈일곱 광대를 조롱한 광대의 이야기 The Tale of the Buffoon Who Outjested Seven Buffoons〉(1915, 1915~20년 〈어릿광대 The Buffoon〉로 개작)는 민담을 근거로 작곡되었으며 러시아 음악을 혁신하려는 프로코피예프의 실험적 시도를 위한 자극이 되었다. 오페라에 대한 발레의 우위를 주장하는 디아길레프의 견해에도 불구하고(디아길레프에게 있어 오페라는 사라져가는 장르였음) 프로코피예프는 오페라에 대해 적극적이었다. 1911~13년에 작곡한 미숙한 오페라 〈마달레나 Maddalena〉에 이어 1915~16년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각색한 〈노름꾼 The Gambler〉을 작곡했다. 무소르크스키의 오페라 전통을 계승한 그는 섬세한 서정성, 풍자, 정확한 낭송, 극적 효과를 교묘하게 결합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단악장으로 된 피아노 협주곡 1번 D#장조(1911)와 4악장으로 된 피아노 협주곡 2번 G단조(1913)로 인정받았다.
러시아에서 2번의 혁명이 발발했던 1917년은 창작에서 풍성한 수확을 거둔 해였다. 1917년 2월 황제가 퇴위하자 그는 페트로그라드의 거리로 뛰쳐나와 승리의 기쁨을 표출했다. 사회적인 혁신에 크게 고무된 그는 1년 동안 엄청난 양의 신작을 쏟아냈다. 소나타 2곡, 바이올린 협주곡 1번 D장조, 〈고전 교향곡 Classical Symphony〉, 합창곡 〈그들은 일곱 Seven, They Are Seven〉을 작곡했고, 웅장한 피아노 협주곡 3번 C장조 작품26의 작곡을 시작했으며, 이탈리아의 극작가 카를로 고치의 희극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오페라 〈3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The Love for Three Oranges〉을 계획했다. 1917년 여름 그는 러시아의 좌익 예술 활동을 이끌었던 예술가 동맹에 가입했지만 내전으로 거의 9개월 동안이나 페테로그라드와 단절된 채 카프카스에 갇혀 있게 되었고, 1918년 봄이 되어서야 페트로그라드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난세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음악이 설 장소가 없다는 결론을 얻고는 러시아를 잠깐 떠나 해외순회연주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공식 허가를 얻은 프로코피예프는 내란이 격렬한 시베리아를 지나는 어려운 경로를 통해 여행했다.
다음 15년간은 일반적으로 프로코피예프의 생애에서 국외 체류 시기로 불린다. 계속되는 소련의 봉쇄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로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데도 불구하고 그는 러시아와의 접촉을 끊지 않았다. 외국에서의 처음 5년 동안은 대체로 '방황의 시절'로 특징지을 수 있다. 1918년 여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도중에 그는 도쿄[東京]와 요코하마[橫浜]에서 여러 차례 연주회를 가졌다. 뉴욕에서 있었던 '볼셰비키 피아니스트'의 획기적인 피아노 독주회는 호평과 악평의 양극적인 반응을 얻었다. 프로코피예프는 시카고 오페라 협회에 들어가 그곳에서 희가극을 위촉받았다. 이탈리아인이었던 오페라 제작자와 지휘자는 고치의 플롯에 의해 오페라를 만들려는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1919년에 완성된 〈3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의 초연은 1921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그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이 오페라는 서유럽은 물론 소련 내에서도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미국에서 스페인 혈통의 젊은 성악가 리나 루베라를 만나 결혼했고 두 명의 아들 스비야토슬라프와 올레크가 태어났다. 미국에서 계속적인 후원을 받지 못한 그는 1920년 봄에 디아길레프와 지휘자인 쿠세비츠키를 만나기 위해 파리로 떠났다. 그들은 곧 그를 서유럽 최고의 음악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폭넓게 인정받게 해주었다. 1921년 파리와 런던에서 디아길레프의 발레단에 의해 공연된 〈어릿광대〉, 1921년에 있었던 〈스키타이 모음곡〉의 파리 초연, 1924년에 공연된 〈그들은 일곱〉은 대단한 관심을 끌었으며 뛰어난 개혁자로서의 그의 명성을 확고하게 해 주었다. 프랑스에서 완성된 피아노 협주곡 3번의 성공적인 연주(1921)는 프로코피예프의 역동적인 민족양식의 정점을 기록했다.
1922~23년 남부 독일 바이에른 알프스의 에탈에서 1년 6개월 이상을 보냈다. 연속되는 초연의 피로에서 벗어나 창작 노선을 재검토한 그는 작품 출판을 준비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그당시 러시아의 작가 발레리 브류소프의 소설을 각색한 오페라 〈불꽃의 천사 The Flaming Angel〉의 기초 작업에 몰두했다. 여러 해 동안 작업(1919~27)을 해야 했던 이 오페라는 제작자가 없어 그의 생전에는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독일에서의 활동이 별로 주목을 끌지 못하자 1923년 가을 파리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집중적인 창작 활동을 계속하면서 풀랑크와 오네게르 같은 진보적인 프랑스 음악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23년 파리에서 초연되었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에 대한 비평에 반발해서 보다 전위적인 양식으로 기울었다. 이러한 경향은 쿠세비츠키가 위촉한 서사적인 교향곡 2번 D단조 작품40 같은 1920년대초의 작품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 작품의 강한 극적 속성과 충격적인 비례 감각은 자신이 개작한 오페라 〈불꽃의 천사〉로부터 주제를 가져온 교향곡 3번 C단조(1928)에서도 찾을 수 있다. 디아길레프와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그는 새로운 단막 발레 〈강철의 춤 Le Pas d'acier〉(1927 초연)·〈방탕한 아들 The Prodigal Son〉(1929 초연)을 작곡했다. 〈강철의 춤〉은 독창적인 무대 기법과 경제적 혼란 속에서 산업화를 시작한 1920년대초의 소비에트 러시아의 이미지를 대담하게 살린 연출로 파리와 런던에서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방탕한 아들〉은 성서에서 취한 주제와 서정적인 음악을 사용하고 있다. 이 작품은 정서적인 이완과 양식의 명료성에 대한 추구를 반영하고 있는데 이는 또한 현악 4중주 1번 D단조 작품50,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C장조 작품56(1932), 발레 곡 〈드네프 강 위에서 on the Dnieper〉에서도 나타난다.
1927년 소련을 여행했으며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러시아의 혁신적 음악가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혁신적인 제작자 메이에르홀트와의 협력을 강화했으며 메이에르홀트는 1929년 브뤼셀에서 공연된 오페라 〈노름꾼〉의 완전한 개작을 도왔다. 1920, 1930년대초 프로코피예프는 서유럽과 미국의 음악적 중심지를 여행하면서 피아니스트로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1925, 1930, 1933년의 미국 순회연주는 연일 성황을 이루었으며 이러한 성공으로 〈방탕한 아들〉의 음악적 재료를 사용한 교향곡 4번 C장조 작품47(1930,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50주년을 위해 위촉됨)과 현악4중주 1번(국회도서관을 위해 위촉됨) 등의 작품이 이어졌다. 그의 새로운 피아노 협주곡인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4번 작품53(1931)과 5번 G장조 작품55(1932)는 충동과 화려한 기교를 향한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물질적인 풍요와 대중적인 성공을 누리면서 서구 문화의 대표적인 인물들과도 친분을 가졌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는 점점 더 커져갔다. 1927, 1929, 1932년에 소련을 방문하고 나서 외국생활을 끝내고 모스크바로 돌아올 결심을 하게 되었다. 1933~35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그는 소련 문화계의 지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1933~53년의 20년이 그의 소련 시절에 해당되는데 이때 그의 사실적이고 서사적인 경향이 보다 확실해졌다. 전통적인 조성·선율 기법과 20세기 음악의 양식적 개혁의 결합은 보다 완전한 결실을 맺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앞서 몇 년 동안 여러 편의 고전적인 대작을 내놓았는데 이 가운데는 바이올린 협주곡 2번 G단조 작품63(1935), 발레곡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1935~36),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Alexander Nevsky〉(1938)를 위한 음악이 포함된다. 그가 작곡한 극음악과 영화음악들 중에는 이밖에도 〈키제 중위 Lieutenant Kije〉(1934)·〈이집트의 밤 Egyptian Nights〉(1934) 같은 다수의 모음곡과 교향악에 동화가 합쳐진 〈피터와 늑대 Peter and the Wolf〉(1936) 등이 있다. 오페라로 관심을 돌려 내전기간에 우크라이나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묘사한 〈세묜 코트코 Semyon Kotko〉(1939)를 민중의 삶을 다룬 현대적 감각의 드라마 형태로 작곡했다. 현대적인 오페라 부파인 〈수도원에서의 약혼 Betrothal in a Monastery〉(1940, 초연 1946)의 원작은 18세기 영국의 극작가 리처드 브린즐리 셰리든이 쓴 〈가정교사 The Duenna〉였다. 그는 다른 장르에 대한 자신의 역량을 실험하면서 레닌의 가사에 의한 기념비적 작품인 〈10월혁명 20주년을 위한 칸타타 Cantata for the 20th Anniversary of the October Revolution〉(1937), 서사적 칸타타 〈축배 The Toast〉(1939)를 작곡했다. 마지막 외국 여행에서 그는 할리우드를 방문해 유성영화의 기술적인 문제를 공부했다. 이때 얻은 경험을 13세기 튜튼족 기사들에 대항한 러시아인들의 영웅적인 투쟁을 그린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를 위한 충격적인 민족음악에 사용했다. 칸타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이 영화음악을 바탕으로 작곡되었다. 프로코피예프 예술의 극치 가운데 하나는 갈리나 울라노바가 주역을 맡은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이었다. 1930년대 내내 그는 작곡가 동맹의 조직 작업에 참여하여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로 활약했으며 소련 전역을 여행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그의 신상에도 변화가 있었다. 그는 가족을 떠나 시인인 미라 멘델스존과 결혼했고, 전쟁은 그의 민족 감정과 애국심을 자극했다. 전시의 난관에도 개의하지 않고 그는 부지런히 작품을 썼으며, 심지어는 1941년 모스크바가 소개되어 1944년까지 모스크바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닐 때도 작곡을 했다. 전쟁이 시작된 첫날부터 그의 관심은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 War and Peace〉를 바탕으로 한 대작 오페라에 집중되었다. 그는 러시아가 나폴레옹의 침략을 물리쳤던 1812년의 상황과 당시의 상황이 비슷하게 전개되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이 오페라의 초판은 1942년 여름에 완성되었지만 그후 이 작품은 10년 이상의 집중적인 작업을 거쳐 개작이 이루어졌다. 이 오페라를 듣는 사람들은 먼저 거대한 규모와 다음으로는 서사적인 낭송과 주인공들의 개인적인 운명을 그린 서정적인 장면들 사이의 독특한 결합에 놀라게 된다. 그는 더욱 민족적이며 서사적인 상을 그리는 쪽으로 기울어졌고, 이러한 경향은 교향곡 5번 B#장조 작품 100(1944)에 표현된 영웅적인 웅장함과 에이젠슈테인의 2부작 영화 〈폭군 이반 Ivan the Terrible〉(제1부 1944, 제2부 1948)을 위한 음악(1942~45)에 분명히 나타난다. 카프카스, 중앙 아시아, 우랄에 살면서 그곳 민속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러한 관심은 카바르디노발카리야의 주제에 의한 현악 4중주 2번 F장조 작품 92와 카자흐의 민담을 주제로 한 희가극 〈부자이 칸 Khan Buzai〉에서 찾을 수 있다. 어려웠던 당시의 흔적을 남긴 작품으로는 피아노 소나타 6번 작품 82(1940), 피아노 소나타 7번 작품 83(1942), 피아노 소나타 8번 작품 84(1944)가 있는데 이들 작품은 이미지의 극적인 갈등과 억제할 수 없는 역동성을 표출하고 있다.
무리한 작업은 프로코피예프의 건강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말년의 몇 년 동안 그는 거의 모스크바 교외에 위치한 그의 집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혁신적인 경향은 수그러들지 않아 막 끝난 전쟁의 비극에 대한 회상을 담은 교향곡 6번 E#단조 작품 111(1945~47),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와의 협의하에 작곡된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신포니아 콘체르토 E단조 작품 125(1950~52), 러시아의 민속적 정취가 풍기고 있는 바이올린 소나타 F단조 작품 80(1938~46,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에게 헌정)에 구현되어 있다.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프로코피예프는 대부분의 정력을 극음악에 쏟았으며 대표적인 예로는 오페라 〈진짜 남자의 이야기 The Story of a Real Man〉(1947~48), 발레 〈석화 The Stone Flower〉(1948~50), 오라토리오 〈평화의 수호 on Guard for Peace〉(1950)가 있다. 서정적인 교향곡 7번 C#단조 작품 131(1951~52)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1953년 그는 갑자기 뇌출혈로 죽었다. 책상에 2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6번, 피아노 소나타 10번과 11번, 카자흐의 희가극, 첼로 독주를 위한 소나타의 스케치를 포함한 미완성 작품들이 남겨져 있었다. 사후 소련 국내외에서 그의 인기는 급속도로 팽창했다. 1957년 교향곡 7번으로 소련 최고 영예인 레닌상을 받았다.
I.V. Nestyev 글
브리태니커 학습백과사전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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