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클래식(2008년)

KBS교향악단 제614회 정기연주회/오귀스탱 뒤메이/2008.4.25

나베가 2008. 4. 24. 20:08

두 거장의 만남, 지휘자 알렉산더 라흐바리 VS 바이올리니스트 오귀스탱 뒤메이

World Leading Conductor Alexander Rahbari
VS the most Famous Violinist Augustin Dumay


연주소개

KBS교향악단 제614회 정기연주회
The 614th Subscription Concerts of the KBS Symphony Orchestra

 

2008년 4월 25일(금) 20:00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이란 출신의 정상급 지휘자, 알렉산더 라흐바리와 벨기에 악파의 진정한 후계자 바이올리니스트 오귀스탱 뒤메이와 함께 하는 제614회 정기연주회. KBS교향악단은 오는 4월 25일(금) KBS홀과 예술의전당에서 오후8시,제614회 정기연주회를 마련합니다.

진중하고 세심한 브람스가 신중을 기하여 세상에 내놓은 바이올린 협주곡, KBS교향악단이 가장 선호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오귀스탱 뒤메이의 브람스를 만납니다. 또한, 이란 출신의 세계 최정상급 지휘자 알렉산더 라흐바리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10번, 억압 그리고 통제의 굴레에서 벗어나 음악적 해방을 맞은 쇼스타코비치의 인생역작으로 KBS교향악단의 풍부한 사운드로 함께 합니다. 두 거장 알렉산더 라흐바리와 오귀스탱 뒤메이와 만나는 KBS교향악단의 깊은 음색, KBS교향악단 614회 정기연주회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연주개요

일시및장소

- 2008년 4월 25일(금) 저녁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출연자

- 지휘 : 알렉산더 라흐바리 Alexander Rahbari
- 바이올린 : 오귀스탱 뒤메이 Augustin Dumay

프로그램

- 브람스 /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77
Brahms /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77

- 쇼스타코비치 / 교향곡 제10번 e단조 작품93
Shostakovich / Symphony no.10 in e minor, op.93

입장권

S석 60,000원 A석 50,000원 B석 40,000원 C석 30,000원 D석 20,000원
- 인터넷 예매: 인터넷 사이트에서 공연 시작 1일전까지 구입
․ 티켓링크http://ticketlink.co.kr (1588-7890)
- 공연 당일 현장 매표소 구입 : 공연시작 1시간 전부터 구입 가능
- 공연문의 : 781-2243~4 KBS 교향악단홈페이지 http://kbsso.kbs.co.kr

 

출연자프로필

지휘 l 알렉산더 라흐바리

 


- 24세에 테헤란음악원 지휘자 위촉
- 프랑스 부장송 국제 청소년지휘자콩쿠르 금상, 제네바 지휘자콩쿠르 은상
- 1979-84년,카라얀의 베를린필하모닉 초청 및 잘츠부르크 이스터축제 보조지휘자로 초청
- 스위스 로망드 외 120개 이상 세계적인 교향악단 초청 
- 체코필하모닉 영구객원지휘자, 벨기에 방송교향악단 수석객원지휘자 및 상임지휘자, 버츄오시 디 프라가 상임음악감독 역임 
 
Conductor / Alexander Rahbari
- Appointed director of the Teheran Conservatory of Music at age of 24
- Won the Gold Medal at The International Contest of Young Conductors in Besançon, France and a Silver Medal at the Geneva Conductor’s Competition.
- Invited to conduct the Berlin Philharmonic by Karajan in 1979, 1980,1982 and 1984. and to be his assistant at the Salzburg Easter Festival in 1980.
- Conducted more than 120 orchestras around the world such as Orchestre de la Suisse Romande and so on.
- Appointed as the Czech Philharmonic’s Permanent Guest Conductor and Principal Guest Conductor with the Belgian Radio and Television Orchestra and as Chief Music Director and Chief Music Director of the Virtuosi di Praga, etc..

바이올린 l 오귀스탱 뒤메이


- 1979년, 카라얀은 파리, 갈라콘서트에 요요마와 함께 초청
- 콜린 데이비스경,베를린필하모닉의 바르토크 협주곡제2번 초청연주 외 다수협연
- 베를린필하모닉, 런던심포니,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LA필하모닉 외 다수협연
- 멘톤음악축제 예술감독,왈로니아 로얄 챔버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
- 브뤼셀 퀸엘리자베스 음대교수

 

이자이, 뒤부아, 그뤼미오를 잇는 벨기에 악파의 후계자로 일컬어지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오귀스탱 뒤메이의 국제적인 명성은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때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파리에서 갈라 콘서트를 열 때 요요 마와 함께 뒤메이를 초청하였다. 뒤메이는 즉시 베를린 필과 콜린 데이비스와 함께 바르톡 2번 협주곡 협연을 초청받았으며, 이 연주로 뒤메이는 관객과 평단 모두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이후 뒤메이의 국제적인 명성은 높아져 베를린 필, 뉴 재팬 필하모닉, 로얄 콘서트헤보우,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 몬트리올 심포니, 런던 심포니, 로열 스톡홀름 필하모닉, LA 필, 바르샤바 필하모닉, 말러 체임버 등 세계 주요 오케스트라와 정기적으로 연주하고 있다. 또한 그는 콜린 데이비스경, 세이지 오자와, 샤를르 뒤트와, 쿠르트 잔더링, 볼프강 자발리쉬, 마르크 민코프스키, 쿠르트 마주어, 프란스 브루겐 등 최고의 지휘자들과 협연하고 있다.

뒤메이는 암스테르담 콘체르트헤보우, 브뤼셀 보자르 팰리스, 런던 퀸 엘리자베스홀, 위그모어홀, 바비칸센터, 이태리 라 스칼라, 베를린 필하모니에, 제네바 빅토리아홀, 샹젤리제 극장, 도쿄 선토리홀, 타이페이 국립 콘서트홀 등 세계 주요 공연장에서 리사이틀을 열었으며, 몽퇴르, 바스, 베를린, 루체른, 모나코, 엑상 프로방스, 라이프찌히, 몽펠리에, 라비니아, 뉴욕의 모스틀리 모차르트, Nante’s Les Folles 및 암스테르담 로베코 시리즈 등의 수많은 페스티벌에서 연주하고 있다.

2006-07 시즌, 뒤메이는 로테르담 필하모닉,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쿄토 심포니, 암스테르담 신포니에타, 리오 데 자네이로의 페트로바스 프로 무지카, 베를린 심포니, 로잔 체임버, 울스터 오케스트라, 챠이나 필하모닉과의 협연 일정이 있으며, 광저우 심포니와 월드 투어를 할 예정이다. 또한 부카레스트의 에네스쿠 페스티벌과 브뤼셀의 보자르 팰리스에서의 리사이틀도 예정되어 있다.

2003년12월, 뒤메이는 벨기에의 왈로니 로열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가 되어 유럽에서 지휘와 솔리스트를 겸하며 연주하고 있다. 그는 또한 2002년에서 2005년까지 멘톤 페스티벌의 예술감독으로 활동하며 페스티벌을 프랑스 리비에라 지역의 가장 인기있는 음악행사로 그 위상을 끌어올렸다.

도이치 그라모폰과 EMI에서 발매했던 뒤메이의 음반은 많은 음반상을 수상했는데, 그랑프리 디스크, 그라모폰상, 그래미상을 받은 바 있다. 가장 최근 발매된 음반으로는 마리아 후앙 피레즈와 녹음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및 카메라타 잘츠부르크를 직접 지휘하며 협연한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있다.

 

Violin / Augustin Dumay
- In 1979, Karajan invited to play as a soloist at a gala concert in Paris with the cellist Yo-Yo Ma.
- Invited to play Bartok's 2nd concerto with the 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and Sir Colin Davis
- Plays with the Berlin Philharmonic, the London Symphony, he Amsterdam Royal Concertgebouw, LA Philharmonic, etc..
- Artistic director of the Menton Music Festival, Principal conductor of the Royal Chamber Orchestra of Wallonia
- Teaches at the Queen Elizabeth College of Music in Brussels

 

공연후기...

몇년전 내한공연에서 그렇게도 감동을 받았던 <오귀스탱 뒤메이>가 왔다.

그것도 이번엔 KBS정기연주회의 협연자로 오니, 와우~ BC 플래티늄 카드 회원으로서 공짜로 보게 된것이다.

더우기 연주 곡목까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이니 연주도 듣기전부터 이미 환상속에 빠져버렸는 지도 모르겠다.

 

일찌감치 서두른다고 했지만 되려 차편 연결이 잘 안되서 최악으로 공연 시간 임박해서 도착을 했다.

보통 늦는 사람들을 배려해서 서곡 하나쯤은 넣는게 보통인데, 이번에는 연주곡들의 길이가 길어서인 지 서곡없이 처음부터 뒤메이가 등장을 했으니...

혹여나 늦을까...그러면 모든게 그냥 <꽝>인데....애간장을 태우며 온 공연이었다.

다행스럽게도~~~휴우~~

 

들뜬 기분으로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예당 2층 젤 앞자리....

이미 연주자들은 나와 있었고, 잠시후 지휘자<알렉산더 라흐바리>와 바이올리니스트 <오귀스탱 뒤메이>가 나왔다.

뒤메이는 키가 190센티미터가 훨씬 넘어 보였고, 라흐바리는 상대적으로 아주 작은키여서 그 둘의 키 차이가 얼마나 났는 지...

지휘대에 올라서서도 뒤메이보다 키가 작았으니 그만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암튼...지난번 LG아트에서 있었던 그의 리사이틀에서도 유난히 키가 작은 일본인 피아니스트와 연주를 해서

 맨 앞자리에서 앉았던 나로서는 그의 키가 마치 거인처럼...바이올린은 장난감처럼 보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도 이번엔 멀리 2층서 보니 그때보다는 덜 거인같아 보였다고나 할까....ㅎㅎ

 

너무나 큰 키 차이에서 온 작은 분심은 잦아들고 연주는 시작되었다,

먼저 KBS오케스트라 연주가 미끄럽게 시작되었다. 

너무나 아름다워 베토벤, 차이콥스키와 더불어 30여년 세월을 너무나 많이 들어왔던 바이올린 선율이 귓가를 행복하게 했다.

그렇게 익숙한...그래서 조금이라도 어색하면 금방 티가 날....

그러나 그의 연주는 숨을 쉴수도 없을만큼 객석을 몰고갔다.

어떻게 1악장이 끝나고 2악장이 끝나고, 3악장이 끝났는 지....

그저 아름다운 또다른 환상의 세계에 잠들어 있다가 깬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게 연주는 끝이났고 객석은 우뢰와 같은 박수로 가득 메워졌다.

키가 그렇게도 큰 뒤메이와 너무나도 작은 라흐바리는 손을 잡고 위로 쳐들었다.

그렇게 여러번 커튼콜을 했고, 자신들 스스로도 그 큰 키차이로 객석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끝없는 커튼콜에 이어진 앵콜곡.....

그의 현란한 연주에 객석은 더욱 환호했고, 뒤메이도 라흐바리도 KBS오케스트라 단원들도 흡족한 표정으로 같이 환호하며 감동을 나누었다.

그 모습이 연주못지않게 참으로 보기 좋았고 행복하게 했다.

 

감동을 추스리면서 인터미션 시간에 발코니 식구들을 만나러 2층 로비로 나갔다.

식구들 보다도 더 자주 만나는것 같다며 늘상 함께하며 웃던 식구들을 참으로 오랫만에 만났다.

특히 일숙언니....ㅎㅎ

잠시 우리는 오늘의 연주보다는 그동안의 일들로 얘기꽃을 피웠다.

그런데 모두들 사정이 있어서 뒤메이만 보고는 바삐들 가야만 한단다.

언니는 집안일로, 소희는 직장일로, 인애는 시험중이라서....ㅋㅋ

나와 명주씨만 왠지 덩그마니 남아있는 것만 같아 서운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모두들 가버리고....

2부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 연주가 시작되었다.

나는 뒤메이 공연에 물론 큰 기대를 했지마는 그 못지않게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에도 기대를 많이 하고 왔었다.

그동안 음반으로만 접했지, 실황으로 접하지를 못했어서 그 대곡을 실황으로 듣는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기 때문이다.

 

오옷~

가슴속 깊이까지 파고드는 현의 저음이 시작부터 가슴을 압박해 왔다.

어둡고 무겁고 암울한 느낌까지 주는 적막함....그러면서도 끝없이 펼쳐지고 있는 광활함이.....

한동안을 현의 저음이 이렇게 무대를 제압하고....그러다가 흐르는 오보에의 그 가녀림은 마치 내안에서 신음 소리로 들리는듯 했다.

그러다가 현에 바이올린 파트가 합세해서 음폭을 높여주고...

이어서 처음 오보에의 선율을 클라리넷이....

이렇게 모든 악기들이 서로 대화를 하듯 이어지는 시작은 광활하면서도 적막한 느낌이 극한으로 느껴와 마치 온몸에 한기가 스쳐지나듯

뭔가가 쭈뼛 쭈뼛 솟아오르는 듯 했다.

그러다가 한동안 거대함이 몰아치다 잦아들고 또 고요.....아름다움.....

마치 말러의 음악이 난해하면서도 거대함과 절대고요로 치닫는 아름다움으로 사람의 혼을 뺏어가듯....쇼스타코비치의 이 곡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라흐바리는 악보도 없이 그 기인 곡을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지휘를 해 나갔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연주도 그와 함께 너무도 잘해주었다.

목관악기, 현악파트, 금관악기, 타악기.....

아~~현이 깔리고 마치 독주를 하듯 퍼지는 목관악기들의 소리는......소름을 돋게했다.

 

위대한 쇼스타코비치!!

이런 가공할 만한 음악적 잠재력을 스탈린 체재아래서 심하게 압박을 당하고 있었다니....

어쩌면 그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던 감정들이 스탈린 사후 일순간에 폭발해 버린것은 아닐까...

 

연주가 끝나자 객석은 일순간에 '브라보'를 외치며 환호소리로 뒤엉켜졌다.

라흐바리도 몹시 흥분하고 감동하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커튼콜을 몇번이나 받았는 지.....

 

리허설때 악보를 전혀 안보고도 어디 어떤 음표가 잘못되었는 지...까지 집어내면서 맞추었다는 천재적인 라흐바리!!

그런 뒷얘기를 접하고 나니, 우리 속담에 작은 고추가 더 맵다고.....그 작은 체구에서 그런 가공할 만한 저력이 나온데는 그만한 실력과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이 있었음을 알수 있었다.

 

암튼....

훌륭한 지휘자와 훌륭한 연주자...

너무나도 아름답고 훌륭한 작품으로 짜여진<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

모든게 아름답고 감동적이었고 행복한 밤이었다.

 

베가.

  

Johannes Brahms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77
Jascha Heifetz, Violin
Chicago Symphony Orchestra
Fritz Reiner, Cond
제1악장 (Allegro ma non troppo)


 
제2악장 (Adagio)

 
제3악장 (Allegro giocoso ma non troppo vivace)
 

브람스(Brahms) /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77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작품 77은 그의 유일한 이 장르의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브람스의 최대 걸작의 하나로 손꼽힐 뿐만 아니라. 고금을 통틀어서 베토벤과 멘델스존의 협주곡과 더불어 가장 사랑받고 있는 역사적인 명곡이다. 악곡의 구조는 베토벤의 협주곡과 많은 점에서 닮아있다. 다른 작품들의 경우처럼 여기에서도 브람스는 고전주의적 형식미를 중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직접적으로 베토벤을 의식한 것으로 보아지며, 또한 조성이 베토벤과 같은 D장조라는 것과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정서가 풍부한 것도 아주 유사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 작품은 제1악장 서두에 나오는 제1주제 의 견실한 맛이라든지, 그에 이어지는 중후하고 풍요로운 음악성은 다른 작곡가들에게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브람스만의 개성으로 평가된다.

고독과 우수의 음악가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그는 서양 음악사상 가장 위대한 극소수의 음악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일찍이 로베르트 슈만이나 클라라가 '신이 보낸 사람'이라고 경탄했던 일이나, 한스 폰 뷜로우가 베토벤의 후계자로 지목하며 엄청난 찬사를 보냈던 일은, 오늘날 그가 서양 음악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나 그의 작품에 깃든 고결한 정신성을 생각하면,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었다.

 

 
쇼스타코비치 1940년대초
 
15곡의 교향곡을 비롯해 수많은 실내악곡, 협주곡 등으로 유명하며, 그중 많은 곡들을 예술에 대한 소련 정부의 규정과 검열하에서 작곡했다.
 
                                                                                     
                                                                                쇼스타코비치-<교향곡 5번 D단조> 4악장

 

초기생애와 작품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나 1919년에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했다. 1923년까지 레오니드 니콜라예프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1925년까지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와 막시밀리안 슈타인베르크(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사위)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1927년에 바르샤바에서 개최된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하여 심사위원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았지만 연주자로서 활동을 계속하지는 않았고 다만 자신의 작품만을 간혹 연주했다.

 
그는 바르샤바에서 피아노로 성공을 거두기 전에 이미 작곡가로서 더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교향곡 1번(1924~25)은 발표되자마자 급속도로 전세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 교향곡의 양식적 근원은 매우 다양하여 차이코프스키와 파울 힌데미트, 동시대인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등 매우 다양한 작곡가들의 영향이 나타난다. 이후 몇 년 동안 그가 쓰게 되는 음악들에서 그는 더욱 많은 작곡가들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었다.
 
당시 소련의 문화적 풍토는 상당히 자유로워 이고리 스트라빈스키나 알반 베르크와 같은 전위음악가의 작품들도 연주되었다. 벨라 바르토크와 파울 힌데미트가 러시아를 방문하여 자신의 작품들을 연주할 정도였으며, 쇼스타코비치는 공공연하게 당시의 전위적 경향들을 가지고 실험을 꾀했다. 니콜라이 고골리의 원저를 가지고 만든 그의 풍자 오페라 〈코〉에는 서양음악의 신음악적 요소들이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작품에서부터 이미 풍자수법이 양식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고 있었다. 이것은 전위음악 작품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랄한 풍자가 담긴 유머를 나타내기 위해 음향 자체를 왜곡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결과 다음에 작곡한 2번째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Ledi Makbet Mtsenskovo uyezda〉(나중에 〈카테리나 이츠마일로바 Katerina Izmaylova〉로 제목이 바뀜)은 더 좋은 작품이었지만 양식적인 측면에서는 퇴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당국은 이 오페라의 음악 어법이 너무 급진적이라 생각했다.
1928년 스탈린이 제1차 5개년계획을 시작하면서부터, 소련 문화는 철저히 통제받기 시작했고, 음악에서는 직접적·대중적인 양식이 요구되었다. 전위음악과 재즈 음악은 추방되었고, 한동안 정치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던 차이코프스키조차도 탄압을 받았다. 쇼스타코비치는 즉시 당국으로부터 비판을 받지는 않았지만, 일단 비판을 받게 되자 그것은 아주 혹독했다. 1936년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의 공연이 난데없이 당국의 비판을 받게 된 것은 공연장에 참석했던 스탈린의 개인적인 분노 때문이었다.
그는 정부기관지로부터 신랄하게 비판당했고,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뿐 아니라 당시 아직 초연되지도 않았던 교향곡 4번(1935~36)의 연주까지도 취소되었다. 그다음으로 탄생한 걸작인 교향곡 5번(1937)은 작곡가 자신이 '비판에 대한 한 소련 예술가(쇼스타코비치)의 응답'이라 묘사한 작품으로, 관의 규범을 잘 지켜나간 평범하고 '낙관적'인 작품일 것이라 기대되었지만 정반대로 진지하고 우울하기조차 한 애가풍의 음악이었다. 이 작품은 그러면서도 표현 방식이 매우 직접적이어서 청중들의 즉각적인 호응을 얻었으며 당국에서도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그는 교향곡 5번으로 초기 작품들에서 보였던 양식의 불안정에서 벗어나 마침내 개인적 양식을 만든 셈이 되었고, 이후 일련의 작품들에 계속하여 자신의 양식을 사용하게 되었다. 교향곡 4번, 5번 모두 구스타프 말러의 영향이 분명하게 보이지만, 교향곡 5번은 기법상의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교향곡 4번이 선율적 악상들의 자유로운 증식에 기초해서 만든 다소 산만한 작품인 반면, 교향곡 5번의 1악장은 선율의 집약적 사용이 특징으로 음악의 어떤 한 부분이 음악의 기초를 제공하면서도 끊임없이 절정을 향해 유기적으로 성장해나간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다른 작품들에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푸가와 샤콘 등 바로크의 단일 주제 양식(두 양식 모두 단일한 선율 악상의 계속적인 반복에 기초하여 성장함)에 대한 그의 선호를 반영한다. 단일한 표현 재료로부터 끊임없이 무언가를 발전시켜나가는 이러한 경향은 성숙기 작품들에서 주제 악상들의 반복으로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교향곡 5번에서부터 이미 장3도와 단3도의 병치에 입각한 다양한 배합 기법이 사용되고 있으며 작곡가 자신의 이름 철자 중 첫 자들만 뽑아낸 D-S-C-H에서 음을 유추시켜 D-E-C-B(S는 Es로 발음되어 E음으로 유추되고, H는 계이름으로 B음), 이 4음을 반복시켰다.

 
1937년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작곡과교수로 임명되었고,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에도 그는 계속해서 레닌그라드에 남아 있었다. 그는 그해 가을과 겨울에 점령된 도시 레닌그라드에서 교향곡 7번을 작곡하여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것은 음악의 질 때문이라기보다는(이 작품은 종종 진부하다는 비판을 받음) 곡이 작곡되었던 상황에 대한 낭만적 해석 때문이었다. 사실 그의 작품의 질은 일관되지 못했다. 음악 외적 힘이 음악을 통제할 때면 수사적이고 양식적으로 보잘것없는 공허한 기법들을 사용하는 경우가 너무 잦았다. 1942년 쿠이비셰프로 피난한 이후 1943년 모스크바 음악원의 작곡과교수로 모스크바에 정착했으며 1945년부터는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쇼스타코비치-<교향곡 10번> 1악장
 
 
후기생애와 작품

 

1940년대 중반에 쓴 작품들에는 교향곡 8번(1943), 피아노 트리오(1944), 바이올린 협주곡 1번(1947~48) 등 걸작들이 많이 있다. 이 작품들은 대체로 심각하고 음울하기까지 하여 당국으로부터 2번째 비판을 당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냉전이 시작되자 소련 당국은 더욱 강경하게 이념적인 통제를 했으며, 당시 일부 작곡가들이 사용하던 것보다 더 쉬운 음악 언어를 요구하게 되었다. 1948년에 모스크바에서는 안드레이 주다노프가 주재하는 악명 높은 회의가 열렸다. 그는 소련음악계를 주도한 음악이론가로서 쇼스타코비치를 포함한 당시 소련의 주요작곡가들을 공격했다. 그결과 소련 창작음악의 질은 이후 몇 년 동안 늪에 빠지게 되었다. 쇼스타코비치는 당국의 조치로 인해 모스크바 음악원과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의 교편 활동을 금지당하는 등 활동의 제약을 받게 되었지만, 현악4중주 4번(1949)과 특히 현악4중주 5번(1951)의 작곡을 통해 당국에 호소하여 극적으로 그의 음악 양식은 다시 당국으로부터 구제받을 수 있었다. 교향곡 10번이 작곡된 것은 스탈린이 죽은 해인 1953년이었고, 이때부터 그는 주다노프의 노선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이제 16년 전에 작곡된 교향곡 5번에서처럼 작품의 질에 직접 호소하게 된 것이다.

이후 그의 전기가 작품목록으로 꽉 찰 만큼 방대한 작곡 활동으로 이어졌다. 대체로 당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서 창작 활동을 해나갈 수 있었지만, 교향곡 13번(1962)에서는 가사(시인 예프게니 예프투셴코의 시에 의한 것으로 반체제적 내용) 때문에 초연 이후 연주를 금지당하는 등 약간의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그는 더이상의 방해 없이 교향곡 14번을 작곡했다. 이 곡은 죽음을 주제로 한 11개의 연가곡을 기초로 만든 곡으로, 당국에 호소하기 위해 만든 곡이 아닌 내적으로 깊은 감동을 주는 작품이었다. 그는 1949년에 미국을 방문했고, 1958년에는 이탈리아·영국 등 전유럽으로 순회공연을 다녔다. 그는 이미 로마에 있는 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 국립 아카데미의 명예회원으로 선출된 상태였고,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는 명예음악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6년에는 로열 필하모닉 협회의 금메달을 받았다.
 
상당수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사색적인 성향으로부터 내향성을 엿볼 수 있기는 하지만, 그는 대체로 사회성이 강한 사람이었다. 1953년 프로코피예프가 죽은 뒤 그는 러시아 최고의 음악가가 될 수 있었다. 그는 공산주의자였으며 실제로 정치 회의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작곡가로서는 당국의 정치적 이념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을 거부하여 실제로 당국과의 긴장관계에 처했을 때 작곡가로서 더욱 빛을 발하곤 했다. 그의 최고 걸작들은 당국의 통제 속에서 샘솟는 창작력이 진솔한 음악 언어(관리들은 언제나 그에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요구했음)와 만남으로써 가능한 작품들이었다.
 
Da. Brown 글
 


2악장 (Allegro)
USSR Ministry of Culture Symphony Orchestra
Gennady Rozhdestvensky, Cond


3악장 (Allegretto)
USSR Ministry of Culture Symphony Orchestra
Gennady Rozhdestvensky, Cond


4악장 (Andante. Allegro)
USSR Ministry of Culture Symphony Orchestra
Gennady Rozhdestvensky, Cond

스탈린 사후 쇼스타코비치에 내재해 있던 체제에 대한 반감을 표현했던 9번에 이어 이 10번은 그동안 스탈린에 대한 무조건적 추종으로 밀려나 있었던 개인 감정의 표현이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스탈린의 그림자가 남아있는, 선배인 무소로그스키의 “보리수 고두노프” 서곡의 주제가 사용된 2악장을 뒤로하면 커다란 스케일과 귀에 익은 현의 선율은 말러의 그것을 연상시키기도 하지요. 스탈린이 사망한 1953년도에 완성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