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클래식(2008년)

피아노의 여제 마르타 아르헤리치,&서울시향,정명훈/2008.5.7/예당

나베가 2008. 3. 3. 09:59

피아노의 여제 마르타 아르헤리치, 세계가 사랑하는 마에스트로 정명훈. 카리스마 넘치는 두 거장의 만남!

 

 

 

 

오케스트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2008년 5월 7일
입장권:R석 22만원, S석 17만6천원, A석 13만2천원, B석 8만8천원, C석 5만5천원(VAT포함)
-단체할인-30명이상 10%할인, 장애유공 50%할인(동반1인포함)
->CMI콜센터02-518-7343)
-중복할인 불가

(주)CMI

 

 

 

 
  카리스마 넘치는 두 거장의 화려한 만남!

열정적이면서도 감성적인 건반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카리스마로 대중을 사로잡으며 이 시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마르타 아르헤리치, 세계가 사랑하는 마에스트로 정명훈. 카리스마 넘치는 두 거장이 드디어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인 명연을 펼친다. 정명훈과 아르헤리치는 세계 주요 무대에서 여러 차례 호흡을 맞춰왔지만 국내 무대에서 함께 연주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더욱이 이번에 선보일 프로그램이 아르헤리치의 연주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이라 그녀의 공연을 기다려왔던 많은 음악애호가들에게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오랜만의 단독협연으로 기대 모으는 아르헤리치의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3번
 
특히 피아노 파트가 매우 화려하고 기교적인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프로코피예프의 다섯개 피아노 협주곡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역동적이면서도 서정성이 매우 뛰어나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이다. 또한 이 곡은 지휘자 샤를르 뒤투아와 녹음하여(EMI Classic, 1998) 아르헤리치에게 1999년 42회 그래미상 최고 오케스트라 협연 솔리스트 연주 부문 수상을 안겨 주었던 곡이기도 하다. ‘그녀의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3번 연주는 뛰어난 기교와 섬세함으로 프로코피예프의 서정성을 잘 끌어낸다’(런던 타임즈 2004. 3)는 평을 받고 있는 만큼, 아르헤리치의 연주로 감상하는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더욱 특별한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또한 ‘영적인 지휘자(Chef spiritual 르 몽드 2002)’(2002년)’라 얘기되고 있는 정명훈이 국내에서 처음 연주하는 브루크너 교향곡 6번도 음악애호가들의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국내 클래식명연으로 기록될 잊지 못할 감동

‘아르헤리치의 연주를 듣는 것은 언제나 역사적인 순간에 동참하는 것’(르 피가로 2006. 12)이라 얘기될 만큼 20세기 최고의 거장으로 군림하고 있는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1941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1957년 3주 간격으로 열렸던 두 개의 국제 대회(제네바 국제 콩쿠르, 부조니 국제 콩쿠르)우승, 1965년 쇼팽 국제 콩쿠르 우승으로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로서 부동의 명성을 확립했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협연과 독주무대를 크게 줄이고 다른 많은 아티스트들과의 실내악 연주에 주력해오고 있었다. 이번 무대는 지난 ‘94년 내한공연에서 피아노 줄이 끊어질 만큼 열정적인 타건으로 국내 음악애호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아르헤리치만의 화려한 연주를 오랜만에 다시 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이자 정명훈과의 협연으로 인하여 국내 클래식계의 명연으로 기록될 것이다. 계의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 Martha Argerich

“콘서트장에서 아르헤리치의 연주를 들을 때 마다, 그녀의 음악을 접할 수 없는 콘서트장 밖의 모든 사람을 동정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연주를 듣는다는 것은 언제나 역사적 순간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크리스티앙 메를랭 <르 피가로 2006년 12월>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5세에 빈센초 스카라무차(Vincenzo Scaramuzza)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그녀의 천재성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8세 때 모차르트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연주로 데뷔무대를 가졌다. 1955년 유럽으로 이주하여 마갈로프, 굴다, 리파티, 스테판 아스케나제에게 사사를 받았다. 1957년 아르헤리치는 부조니 국제 콩쿠르와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을 한 후, 활발한 연주활동을 시작하였고, 1965년에는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함으로써 연주력과 대중적인 인기를 지닌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로써의 명성을 확립한다.
아르헤리치는 바흐부터 메시앙에 이르는 광범위한 레퍼토리를 연주하고 있으며, 저명한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유럽과 미국, 일본의 음악 페스티벌에 초대받고 있다. 실내악 또한 그녀의 음악인생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와 정기적으로 연주활동을 하고 있으며, 피아니스트 넬슨 프라이어와 알렉산드르 라비노비치와도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작품들을 연주하고 있다. 1994년부터 아르헤리치는 일본에 있는 벳부 비콘플라자에서 필하모닉 홀의 명예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1995년에는 “’95 벳부 아르헤리치 콘서트”에서 세계 음악 팬들이 고대하던 독주회를 10년 만에 가져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1996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훈장(the Order of Artistic and Cultural Merits)을 수상하였고, 1997년에는 로마 산타체칠리아 국립 음악원(Accademia Nazionale di Santa Cecillia)의 멤버가 되었다.
1996년부터 벳부 아르헤리치 음악제(Music Festival Argerich’s Meeting Point in Beppu)의 총 감독을 맡게 되었고 아시아를 포함한 전 세계의 음악가들과 연주를 하고 있다. 또한 아르헤리치는 음악 페스티벌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열어 젊은 음악가들을 이끌고 있으며, 음악을 만들어가는 그녀의 혁신적인 방법은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1999년 9월부터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는 마르타 아르헤리치 피아노 콩쿠르가 열리고 있으며, 2001년에는 브레스치아 베르가모에서 열리는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국제 피아노 제 2회 페스티벌에서 수상하였다. 2001년 11월부터 벳부 아르헤리치 음악제의 자매축제로, 그녀의 감독아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헤리치 음악제>가 열리고 있으며, 2007년 3월 이후로 아르헤리치 아트재단의 대표를 맡고 있다.

 

 

아르헤리치는 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으며, 다섯 살이 되는 해에 빈센초 스카라무차로부터 피아노를 배우면서 서정미와 감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녀는 여덟 살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며 데뷔했다.

1955년에는 가족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이사해 프리드리히 굴다에게 사사하였고 이후에는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스테판 아쉬케나제에게서도 배웠다. 열 여섯 살이 되던 1957년에 그녀는 3주 동안 제네바 국제 콩쿠르페루치오 부조니 국제 콩쿠르에서 동시에 우승하는 기록을 세웠다. 스물살 때, 연주 경력의 위기를 겪던 그녀는 페루치오 부조니 국제 콩쿠르에서 만났던 아르투로 베네데니 미켈란젤리를 찾아가 배우게 된다.

아르헤리치는 바르샤바에서 1965년에 열린 제7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하였다. 당시 그녀의 연주에는 당돌하고 대담한 해석을 보여주었던 프레데리크 쇼팽연습곡 C 장조(Op. 10, No. 1)가 있다. 이듬해 링컨 센터의 위대한 연주가 시리즈를 통해 미국에 데뷔하게 된다.

 연주 경력

그 해 그녀는 첫 번째 녹음을 하게 되는데, 쇼팽, 브람스, 라벨, 프로코피예프의 곡이 포함되었다. 몇 년 뒤 그녀는 쇼팽의 소나타 3번, 폴로네이즈 A flat 장조, Op. 53 등의 곡을 녹음하였다. 그녀의 기교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비견될 정도로 당대에서 최고 중의 하나로 인정 받는다. 실제로, 프로코피예프의 토카타리스트헝가리 광시곡 6번과 같은 그녀의 초기(열 아홉살 당시) 콩쿠르 연주곡들의 녹음은 해당 작품의 표준적인 연주로 인정받고 있다. 일부 비평가들로부터 강약법과 템포가 과장된 것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녀의 연주는 열정적이고 독특한 음색으로 특징지어진다.

아르헤리치는 인터뷰에서 솔로 연주를 할 때면 무대에서 '외로움'을 느낀다고 종종 밝혔다. 1980년대 이후로 그녀는 솔로 연주보다는 피아노 협주곡, 실내악곡 주로 연주한다. 또한 라흐마니노프메시앙, 프로코피예프와 같은 20세기 서양 고전음악 작곡가들의 작품도 녹음했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차이콥스키피아노 협주곡 1번이 함께 실려 있는 음반 등이 유명하다.

로버트 첸과의 첫 번째 결혼 생활 뒤, 1969년부터 1973년까지 지휘자샤를 뒤트와와 결혼 생활을 했으며, 피아노 연주가인 스티븐 코바셰비치가 그녀의 세 번째 남편이다.

아르헤리치는 매년 페스티발을 열어 젊은 피아노 연주자들을 발굴하고 키우는 데 일조하고 있으며, 중요한 콩쿠르의 심사위원으로도 자주 참여하고 있다. 1980년의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세 번째 라운드에서 크로아티아 출신의 피아노 연주자 이보 포고렐리치가 탈락한 데 대해 아르헤리치가 불만을 품고 항의하는 차원에서 심사위원을 사퇴하자 포고렐리치에게 대중의 이목이 집중된 바 있다.

 수상 경력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 마르타 아르헤리치 (피아노 솔로),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 -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2번3번》 (2006년)
마르타 아르헤리치, 미하일 플레트네프 - 《프로코피예프(플레트네프 편곡):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신데렐라〉 모음곡》, 《모리스 라벨: 어미 거위》 (2005년)
샤를 뒤투아 (지휘), 마르타 아르헤리치 (피아노 솔로), 몬트리얼 심포니 오케스트라 -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1번피아노 협주곡 3번》/《버르토크: 피아노 협주곡 3번》 (2000년)
우승 - 1위 (1965년)



세계가 사랑하는 마에스트로 정명훈

1974년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피아노 부문 준우승을 차지하며 국제무대에 등단한 정명훈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부 지휘자로 출발하여 지휘자로서 거듭난다. 유럽 최정상 오케스트라들과의 정기연주회에 이어 정상급 북미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자로 활동했고 1986년 <시몬 보카네그라>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데뷔하여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이탈리아 비평가 선정의 `프레미오 아비아티 (Premio Abbiati)'상과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상'을 받는 등 외국 지휘자로는 전례 없는 뜨거운 사랑과 격찬을 받았다. 1989년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감독 재직 당시의 개관 기념작 <트로이 사람들>이 세계 음악계의 격찬을 받은 데 이어 프랑스 극장 및 비평가 협회의 ‘올해의 아티스트’로 선정, 1992년에는 그의 공헌을 기리는 프랑스 정부의 `레종 도 뇌르' 훈장을 받았다. 1990년부터 도이치 그라모폰의 전속 아티스트로 활동하며 세계적인 음반상들을 휩쓸었는데 그 중에는 <투랑갈리라 교향곡> <피안의 빛> <그리스도의 승천> <세헤라자데>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불새 모음곡> <오텔로> 등 수없이 많은 걸작이 있다. 1995년 이후 프랑스 음악인들이 선정하는 ‘클래식 음악 승리상’에서 최고 지휘자상을 포함, 3개 부문을 석권했을 뿐만 아니라 메시앙이 정명훈에게 직접 헌정하여 화제를 모은 <4중주를 위한 협주곡>녹음도 주요 업적 중 빼놓을 수 없다. 2003년 역대 수상자 중 최초로 권위 있는 프랑스 ‘클래식 음악 승리상’을 ‘95년에 이어 두 번 째 수상하였다.
또한 피아노 연주자로 참여해 바르톨리와 함께 녹음한 <사랑의 노래>가, 바스티유 오케스트라 연주의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과 동시에 모두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의 우수 음반에 선정되는 이변을 낳기도 하였다. 르 몽드는 `마에스트로 정명훈은 영적인 지휘자(Chef spirituel)’(2002년)라고 평하였다. 일본에서는 ‘올해 최고의 연주회’로 선정된 '95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일본 데뷔 공연과 일본 클래식 최고의 공연을 기록한 '96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공연을 비롯해 그가 특별예술고문을 수락한 도쿄필하모닉과의 연주 등 정명훈 열풍이 이어지고 있다. 국내에서는 `95년 유네스코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고 음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정부가 수여하는 최고 문화훈장 ‘금관훈장’을 받았다. 1996~1999년과 2000~2003년에는 한국 명예 문화대사로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2004년 3월부터 2006년 3월까지 문화홍보외교사절로 활동하고 있다. 2002년 국내 한 방송사 프로그램에서 실시한, 5대 문화예술부문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음악분야 최고의 대표예술인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2007년에는 서울시향을 대중에게 더 가까이 이끌어온 그의 문화리더로서의 뛰어남을 인정받아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함께 2007 이미지 디딤돌상을 수상하였다.
1997년 1월 아시아필하모닉오케스트라를 창단,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를 맡았고, 2000년 5월부터 프랑스의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의 음악감독 및 상임지휘자, 2001년 4월부터 일본 도쿄필하모닉의 특별 예술고문, 2006년 1월부터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 교향악단의 새로운 역사 - 서울시립교향악단

세계적 교향악단을 목표로 2005년 6월 재단법인으로 새롭게 태어난 서울시립교향악단은 마에스트로 정명훈을 예술고문으로 영입하여 오케스트라의 기본과 방향을 새로이 정립하고, 단원 전면 오디션을 통해 최고의 기량을 갖춘 연주자들로 조직을 재구성했다. 또한, 전문 기업경영인 출신의 이팔성 대표이사와 10여명의 국내외 전문 인력으로 사무국을 구성하여 공연 전반에 걸친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활동의 기반을 마련했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역사는 1945년 계정식, 현제명, 김성태를 중심으로 설립된 고려교향악단에서 연원한다. 1945년 10월 계정식의 지휘로 창단연주회를 가진 고려교향악단은 1948년 10월 제26회 정기공연을 끝으로 중단되었다. 한편, 1948년 1월 김생려를 중심으로 창단된 서울교향악단은 김성태의 지휘로 창단 공연을 가진 후 롤푸 자코비와 김생려가 지휘봉을 들었다. 1949년 <필하모니>라는 음악잡지까지 만들었던 이 교향악단이 사라지게 된 것은 한국전쟁 때문이다. 그러나, 1950년 11월 해군은 해군정훈음악대를 조직하여 이 명맥은 이어졌고 시 공관에서 제1회 연주회를 개최하게 된다. 이 오케스트라는 1954년 해군교향악단으로 개칭되었고, 결국 1957년 8월 1일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창단되기에 이른다.

김생려가 초대 상임지휘자로 재직한 1957년부터 1961년까지의 시기의 서울시향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당시로서는 실험적인 레퍼토리와 훌륭한 연주를 통해 한국 교향악단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2대 지휘자 김만복(1961-69)은 미국에서 지휘를 전공하고 돌아온 전문 지휘자로서 수많은 작품을 한국 초연하는 한편, 국내 창작곡도 공연하는 등 많은 공로를 남겼다. 3대 지휘자 원경수 이후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정재동은 1974년부터 1990년까지 오랜 기간동안 서울시향과 호흡하면서 안정된 앙상블을 선보였으며, 이후 박은성(1991-92), 원경수(1994-96), 마르크 에름레르(2000-2002) 등의 지휘자가 서울시향과 함께 하였다.

서울시향은 넓은 레퍼토리와 세련된 앙상블을 자랑한 정기연주회 이외에도 많은 공연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사랑받았다. <범세대음악회>를 통해 국내작곡가에게 곡을 위촉, 초연함으로써 국내 창작곡의 기반을 넓히는 한편 세대를 뛰어넘어 호흡할 수 있는 음악을 관객들에게 제공하였고, 서울시향이 한국에 정착시킨 <팝스 콘서트>는 여름의 무더위에 지친 시민들에게 시원한 청량제를 제공하였다. 56년부터 시작된 <소년소녀 협주회>는 정경화, 백건우, 정명화, 이경숙, 강동석에서 최희연과 양성원, 장한나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가들 대부분을 배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서울시향은 많은 해외공연을 통해 한국의 교향악 수준을 널리 알렸는데, 특히 1982년과 1986년 미국 순회연주, 1988년 유럽 16개 도시 순회연주 등을 통해 음악의 본고장에서 인정받았다.

세계무대에 우리민족의 예술성과 저력을 확인시키며, 세계적 문화도시 서울의 상징으로, 나아가 대한민국의 자부심으로 자리매김할 서울시립교향악단은 최고의 기량과 완벽한 앙상블, 그리고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정성과 마음으로 항상 시민과 함께, 국민과 함께 성장해 나갈 것이다.

마에스트로 정명훈과 함께 대한민국 교향악단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오케스트라의 새로운 이름이다.
 

 공연후기....

 

그녀가 왔다!!

꿈에도 그렸던 그녀가 2006년 LG아트센터에서 실내악 연주로 잠깐 얼굴을 보여준 뒤, 이렇게 빨리 다시 그녀를 볼수 있으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는데 말이다.

그것도 그래미상을 거머쥔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들고서라니....

 

인터넷 티켓창이 열리던 날....

지난번 LG아트센터 공연 예매시에 아예 컴터 예매창에 들어가지도 못했던 것을 감안해, 클럽 아그들에게 들어가면 무조건 예매해 달라고...이중 부탁까지 하며 난리굿을 펼쳤던 ....평소엔 싼 좌석중에서 좋은 자리를 배정받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우리 클럽 식구들이지만, 이 공연 만큼은 감히 거금을 턱턱 투자하는.....

너무나 안타까웠던 것은 로얄석에 투자를 하기엔 넘 부담스러워 그에 버금가는 횡재를 누릴수 있는 합창석을 일반인에겐 판매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이렇게까지 티켓예매에 사투를 벌이는 우리들을 제쳐두고  오늘 저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로비에서 잠깐 발코니 식구들과 인사를 나눈 뒤, 나는 평소와는 다르게 말을 아끼고 그냥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일숙언니와 명주씨에게 연락을 할까.... 평소처럼 핸폰 메시지를 두두리려다 나는 그만두었다.

이 대단한 세기의 연주를 듣기위한 마음을 좀 추스리려고...

어쩌면 명주씨도, 일숙언니도 그러고 싶을것 같다는 느낌이 전해져서....

 

객석이 어두어지고 무대가 환히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대단한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는 좀체로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그 시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던 기다림이 있은 뒤, 그녀는 떠나갈 듯한 환성속에 나타났다.

꺄아악~~~악~~!!!

환성이 채 가라앉지도 않았는데, 클라리넷의 그윽한 소리가 무대에서 부터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손은 피아노를 누비기 시작했다.

 

이젠 너무나도 늙어버린 그녀의 손은 여리디 여린 곱고 길쭉하게 뻗은 아름다운 피아니스트의 손이 아니었다.

감정을 한껏 실어넣어 나비처럼 너울거리며 춤을 추는....그런 손...그런 몸짓도 아니었다.

그저 우리네 살림꾼의 손처럼 떡두꺼비 처럼 생긴 손으로 그저 피아노를 이리 저리 어루만지기도 하고 피아노 위에서 펄쩍 펄쩍 뛰기도 하고....

마치 피아노를 가지고 놀고 있는 것만 같은데.... 

 

무대에 울려퍼지는....

내 귓가에 닿는 피아노 소리는 마치 옥구술이 굴러다니는 아니, 내가 아는 세상의 모든 보석들이 나와서 부딪히며 내는 반짝이는 소리.....

형언할수 없는 빛깔로 빛을 발하고 있는 보석의 향연같았다고나 할까.....

동화속...환상적 세계에  초대되어 그만 나는 어리둥절 헤메이고 있는 듯한 ......

 

어떻게 저렇게 피아노를 칠수 있을까!!!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지???

 

너무나 선명한 명료함.....

신기에 가까울 정도의 테크닉과 신비스런 소리...

잔잔하게 노는 오케스트라와 한껏 나비처럼 하늘거리며 놀던 피아노는 점차 빠른 템포로 클라이막스를 향해 내달음을 치고 있었다.

그렇게 끝모를 줄 모르고 내던 질주는 어느순간 꽝~ 하며 1악장을 마무리했다.

아~~~

내입이 턱하니 벌려져 있었다는 걸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여늬때 같으면 한 악장이 끝나면 괜한 기침들을 해대던....그런 여지도 느낄 수 없이 2악장은 시작이 되었다.

오보에를 비롯한 목관 악기의 한없는 아름다운 선율이 바이올린에 실려 무대에 산들 바람을 일으키고

이내 피아노 선율은 나비가 되어 산들바람을 타며 이리 저리 날아다녔다.

때로는 세찬 바람에 휘청거리기라도 하듯 거세어졌다가도 이내 잠잠해지고....

 

너무나 한가로운 오후...

하늘로  부터 반짝이는 햇살은 쏟아져 내리고....

뭔가 형언할 수 없는....

마치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듯한 느낌... ,

무중력 상태에서 붕붕 떠다니는 듯한 소리가 나또한 무아지경으로 만들었다.

 

다시 분위기는 급진전되어 또다른 클라이막스를 향해 내달리고,

또다시 목관악기들과 피아노의 대화는 귀여울 정도로 토닥 토닥 거렸다.

그러다가 일순간 모두 사라지고 첼로와 베이스만이 무겁게 내리깔렸다.

갑자기 밀어닥치는 광활함이....

한없이 쓸쓸했고,

너무나 고독하다고 느껴졌다.

그런 광활함속에서 오직 피아노 건반 한개가 깊게 내리 눌려지며 울려퍼졌다.

 

와아~~

그 여운은 마치 오케스트라 전체가 클라이막스로 치달아 올라 내는 소리보다도 더 큰 울림과 여운을 안겨주었다.

 

웅장하게 시작한 3악장은 너무나도  잔잔하게 흘러갔다.

그렇게 거세지기도 했다가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기도 하며 마음을 살랑이게 하더니, 어느순간 다시 그녀의 손은 거세게 치달리기 시작했다.

오케스트라의 거세어짐과 함께 그녀도 온몸을 실은 채 마치 광기에 젖은 듯 피아노를 두둘겼다.

그랬다.

피아노를 치는 것이 아니라 광기에 젖어 피아노를 두둘긴....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명료함이란 ....압도적이라는 말을 이런때 쓰는거구나 생각들게 했다.

 

객석은 환호 소리로 뒤덮였다.

흰머리가 성성한 기인 머리를 휘날리며 허리가 바닥에 닿을듯 깊게 꾸벅 절을 하는, 아르헤리치....ㅎㅎ

키신이 그 특유의 터럭머리를 휘날리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아주 특이하게 절을 하는것 만큼이나 이색적으로 보였다.ㅎㅎ

 

잦아들지 않은 환호에 수차례 드나들었던 커튼콜....

급기야 그녀는 피아노앞에 다시 앉았다

 

<스카를라티.피아노 소나타 d단조>

영롱하게  울려퍼진 피아노 소리는...

문득 기타로 연주하는 알함브라의 궁전을 떠오르게 했다.

또르르~~ 이중음을 내는듯한.... 너무나도 어려워 보이는 저 고난이도의 테크닉!!

피아노의 여제로서의 그녀의 비르투오조를 맘껏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앵콜의 행렬...

쇼팽의 <마주르카>

슈만의 <어린이의 정경>

 

마치 격정적이었던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라도 시켜주는 듯 했던....

마지막 앵콜곡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쳤다.

결코 잊지못할 너무나도 감격적인 순간이...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인터미션 시간에 송은씨가 기다리고 있는 발코니 식구들을 보자고 나가자고 함에도 만류하고, 난 그냥 자리에 앉아 감동을 추스렸다.

건너편에 일숙언니도 보였지만, 언니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ㅎㅎ

 

2부 부르크너 교향곡 6번.....

정명훈과 서울시향의 실황으로 듣는 부르크너는 정말 대단했지마는 사실 아르헤리치의 프로코피예프에서 헤어나지 못해서......

ㅎㅎ

 

또다시 여제를 볼수 있는 행운을 안을까???

명주씨는 다음에 또 와도 기꺼이 로얄석 <1층 7열 ...>을 나꿔채겠다고 다짐을 했다.ㅎㅎ

작년에 일본 뱃부 페스티발까지 가려고 했었다니까...그에 비한다면야 로얄석 티켓값이 ......ㅎㅎ

 

여제님, 부디 건강하소서!!

 

<2008.5.8. 베가>

 

 

                      아르헤리치 싸인....<이 싸인은 낮부터 예술의 전당에서 연주자 출입구에서 아르헤리치를 기다리던

뭥뭥이가 급기야 여사님 싸인도 받고, 간절함이 관계자의 맘을 움직여 리허설까지 보았던 뭥뭥이 재산목록에서 가져온 것임.) 

 

 

 

 

 

 

프로코피예프 피아노협주곡 3번

Prokofiev (1891~1953)

 

 
1. Andante - Allegro

2. Andantino

3. Allegro ma non troppo
        
  



Anton Bruckner(1924~1896)안톤 부르크너 -교향곡 제 6번 A장조-

Symphony No.6 in A major

 

 

 

1.Majestoso

 

2.Adagio. Sehr feierlich

 


3악장 (Scherzo. Nicht schnell - Trio. Langsam)
Berliner Philharmoniker / Herbert von Karajan, Cond
 

 

 

 

4.Finale. Bewegt. doch nicht zu schn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