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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베젠동크 시에 의한 5개 가곡

나베가 2006. 7. 15. 11:02

베젠동크 시에 의한 바그너 5개가곡

마틸데와의 이루지못한 사랑의 애절한감정 용해

독일가곡의 새방향 제시 - 거인 바그너의 '인간'담겨


'마틸데 베젠동크 시에 의한 다섯개의 가곡'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엄청난 오페라들 가운데 끼어 빛을 보지못하고 있지만 독일가곡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준 걸작이며 거인 바그너의 인간적 내음이 마디마디에 박혀, 이루지못한 사랑에의 애절한 감정이 깊숙히 용해되어있다.

15세때 처음으로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는 너무도 감동한 나머지 음악가가 될것을 결심, 18세때는 라이프치히대학에 들어가 음악과 철학을 공부해서 20세에는 벌써 최초의 오페라인 '혼례'를 작곡한 바그너는 1834년 그의나이 22세때 라우프시테트에 있는 베토만극장의 지휘자로 취임하면서부터 여성편력이 시작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최초의 연인은 민나 플라너라는 가수였다. 아름다운 몸매에 노래도 잘불러 바그너느느 첫눈에 반해 버렸는데 민나 플라너가 러시아공연을 위해 떠나자 바그너는 러시아에도 따라갔는가하면 그후 쾨니히스베르크 가극장으로 자리를 옮기자 이번에도 따라가 드디어 1836년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네살이나 연상인 민나와의 결혼은 순탄치가 않았고 더우기 그녀의 질투심은 바그너로서는 도저히 참을수 없는것 이어서 그 이듬해엔 홀연히 집을떠나 소위 '방랑시대'로 이름지어진 방랑생활이 1842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가 바그너로서는 가장 어려움을 많이 겪던시절이었다고 생각되는데 계속되는 실직생활로 빛에 몰려 한때는 감옥에 간 일도 있었다.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위해 그는 아무도 몰래 독일을 빠져나와 파리로 진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파리로 가는도중 예기치못한 폭풍우를 만나 몇번씩 사경을 헤매야했고 마음과 몸이 만신창이가 된채 겨우 파리에 도착했을때도 파리는 그를 따뜻하게 맞이해주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바그너는 가극 '리엔치'를 작곡, 이곡이 드레스덴에서 초연되게 되자 지긋지긋한 파리를 떠나 다시 드레스덴으로 자리를 옮겼고 드레스덴의 작센궁정극장의 악장으로까지 임명을 받아 비로소 생활의 여유를 찾을수 있게 되었다.

'궁정지휘자 시대'로 불리는 이시기에 그는 작곡가로서보다는 지휘자로써 빛나는 활동을 전개했는데 특히 아직까지도 베토벤에 대한 이해가 완전치 못했을뿐아니라 더우기 교향곡9번은 완전히 해석이 가해지지 못한 상태에서 바그너는 지휘봉을 들어 교향곡9번(합창)을 감동적으로 재현해 냄으로써 크게 호감을 얻었고 그가운데에서도 스위스에 본거지를 두고있던 베젠동크백작은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바그너에게 깊은 호감을 갖게 되었다.

지휘자로써 또는 작곡가로써 기반이 잡히고 일생을 통해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맞이했다고 생각될즈음 프랑스에는 2월혁명이 발발했다. 혁명의 여파가 드레스덴에까지 미치자 자유주의자인 바그너는 곧 혁명쪽에 가담, 1849년 공화정치에대한 열렬한 주장을 폈고 혁명이 실패하자 다시 큰 초상화와 더불어 현상금까지붙는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리스트의 조언에따라 잠시 드레스덴을 떠나기로한 바그너는 1849년 6월 스위스 취리히로 망명길에 올랐고 잠깐이면 되리라고 생각했던 망명생활은 취리히에서만도 9년이란 세월을 보내야만했다. 취리히에 도착한 바그너는 저작활동과 교수직을 맡아 활동을했는데 이때 베토벤의 교향곡 9번연주를 통해 알게된 베젠동크(Wesendonk)백작의 호의로 취리히교외에 있는 아름다운 베젠동크의 별장을 제공받아 그곳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오랬동안 부인 민나와의 별거생활에서 오는 인간으로써의 고독감이 한꺼번에 밀려닥침을 경험한 것은 참으로 오랬만에 조용한 시간을 갖게된 베젠동크의 저택에서였고 푸른 자연과 맑은 시냇물 그리고 온갖 새들이 지저귀는 전원속에서 바그너는 새로운 사랑을 찾아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한편 베젠동크백작의 부인 마틸데(Mathilde)는 아름다운 몸매에 교양을 갖춘 부인으로 시작에도 뛰어난 여인이었다. 넓은 저택에서 세기의 예술가 바그너와 미틸데의 만남은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도 문제가 많은, 다시말해 그들은 필연적인 사랑의 불길속으로 타들어갈수밖에 없었던것이다. 그러나 이소식을 전해들은 부인 민나의 적극적인 방해공작과 백작부인으로써의 마틸데에 대한 여러가지 장해요인이 작용, 이들의 사랑은 끝내 슬픔으로 끝나고 말았다. 너무도 사랑하고 너무도 함께있기를 원했던 이때의 마음을 베젠동크부인은 사랑의 시로 만들어 보냈고 바그너는 이시에 선율을 붙여 불후의 가곡인 '베젠동크 시에의한 다섯개의 가곡'이 탄생되었다.


제1곡은 '천사'라는 제목으로 '나는 어릴때 천사의 이야기를 들은적이있다. / 하늘나라의 거룩한 기쁨을 버리고 땅으로 내려온 천사의 이야기를.... / 불안한 마음을 간직한채 피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구하면 / 천사는 나를 하늘나라로 인도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이루지 못한 바그너와의 사랑은 천국에서라도 이루겠다는 애절한 소원이 담겨져있고, 2곡 '멈추어라'는 '인생의 괴로움을 처음으로 느꼈을때 오는 허무감속에 모든 희망의 종말을 맞게되고 이젠 나의 마음도 모든 희망을 버리게되었네'라고 하며 쓸쓸함을 만끽시켜준다. 3곡 '온실에서'는 '온실속의 식물이나 우리는 같은 운명을 나누어 가지고 있으며 빛은 우리를 비추고 있으나 우리의 고향은 여기가 아나다'라고 부르짖고는 4곡 '괴로움'으로 넘어간다.

'태양이여, 저녁에는 언제나 빨갛게 물들어 바다 저편으로 가라 앉지만 / 아침이 되면 그대는 또다시 찬란히 빛을 발한다. / 그대 태양처럼 죽음이 생명을 낳고 고통후에 기쁨이 온다면 / 나도 희망을 갖고 싶으나...'하며 불안한 마음을 끝내 저버리지 못한채로 마지막 5곡 '꿈'에 다다르면 '얼마나 멋진꿈이 내마음을 둘러싸고 있는가? / 날마다 빛나고 나의마음을 행복하게 하는꿈 / 봄의 따사로운 햇빛이 흰눈속에 핀 꽃송이에 입맞춤하는 꿈, / 그래서 꽃은 피고 향기를 발하고 그대의 가슴속에 불타올라 / 결국엔 무덤까지 함께 가게하네.'


구구절절이 이루지못한 사랑에의 집념이 피눈물로 엉켜진 마틸데의 사랑의 시는 그대로 바그너의 마음속에 알알이 박혀 바그너 자신이 말했듯이 '일찌기 이처럼 아름다운 노래를 쓴일도 없거니와, 나의 모든 작품가운데에서도 이곡과 비교할수 있는것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곡은 처음에는 피아노반주로 만들었지만 후에 바그너의 제자인 모틀이 관현악반주로 편곡, 지금에 와서는 오키스트라 반주로 노래되고 있다. 이곡의 부분적인 초연은 마지막곡인 '꿈'이 마틸데의 생일인 1857년 12월 23일 먼저 연주되었고 그후 전곡이 발표되었다.

끝내 이루어지지못한 마틸데 베젠동크와의 사랑에 대해서 마틸데의 고백이 5개의 가곡속에 포함되었다고 한다면 바그너가 쓴 사랑의 고백은 그로부터 2년후에 완성된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통해 승화되고 있다고 하겠다. 첫아내는 민나와의 불행한 관계로 인해 참사랑을 경험치못한 바그너는 참사랑의 기쁨을 이악극을 통해 표현코자 했으며 뒤이어 경험한 유부녀 마틸데와의 쓰라린 사랑의 경험은 이 악극의 마지막 3막에서 트리스탄의 시체의에 이졸데가 쓰러지게 함으로써 자신의 아픔을 표현해 내었고 브란네게의 품에서 다시 깨어난 이졸데가 비몽사몽간에 부르는 '사랑의 죽음'이라는 아리아를 통해 영원한 사랑으로 승화 시키고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사랑의 죽음'을 노래하는 이졸데의 아리아는 노래라기 보다는 통곡의 소리이며 격렬한 오키스트라의 반주는 더욱 듣는이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다.

물론 바그너는 그후 리스트의 딸로 지휘자며 제자인 한스 폰 뷜러의 부인이었던 코지마를 만나 많은 비난을 감수하면서 결혼했고 이 결혼은 결과적으로 바그너의 예술에 크게 보탬이되어 다행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바그너의 작품가운데에서 진한 사랑의 내음이 느껴지고 또 사랑의 충동에의해 작곡된 최상의 작품이 '베젠동크의 5개의 가곡'과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이고 보면 마틸데 베젠동크와의 사랑은 비록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바그너의 일생을 통해 지울수없는 진한 '족적'이 아닌가 생각된다.

글: 한 상우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