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오페라

매트오페라/ 돈 카를로: 베르디 /호암아트홀 /4.17.일.am.11시

나베가 2011. 4. 16. 17:32

HOAM Art Hall 2011

Met Opera on Screen

 

꿈의 무대, 스크린으로 만나는 2010/11시즌 뉴욕 메트 오페라

 

베르디  카를로                        

Verdi Don Carlo

 

2011. 4. 16(SAT) 11am / 5pm

2011. 4. 17(SUN) 11am / 5pm

 

 

이런 총체극을  적이 있는가?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 VARIETY

로베르토 알라냐의 통한의 노래” - NEW YORK TIMES

 

 

로베르토 알라냐, 사이먼 킨리사이드, 페루치오 풀라네토  

<돈 카를로>를 위한 역대 최고의 화려한 캐스팅 !

 

  

 

지난 해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으로 지명된 젊은 명장 

야닉 네제 세겡 지휘

 

 

 

 

 

런던 내셔널 시어터 예술감독이자  영화 <크루서블> 등을 감독한 

니콜라스 하이트너 경의 메트 데뷔작 

 

 

 

 

 

지휘: 야닉 네제 세겡 Yannick Nézet-Séguin

연출: 니콜라스 하이트너  Sir Nicholas Hytner

  

 카를로: 로베르토 알라냐 Roberto Alagna

엘리자베타  발루아: 마리나 포플라프스카야 Marina Poplavskaya

펠리페 2세 페루치오 풀라네토 Ferruccio Furlanetto 

 

 

로드리고사이먼 킨리사이드 Simon Keenlyside  

 

 

  

 

1/2

104 (1시간 44)

인터미션1

15

3 

49

인터미션2

15

4 

87 (1시간 27)

: 271 (4시간 30)

 

  

 베르디의 <돈 카를로> 중에서 엘리자베타의 아리아
Giuseppe Verdi (1813 - 1901) / 'Non pianger, mia compagna'
'울지 말아요, 친구여'
from Don Carlo (Act 1)


 

 

[메트 오페라 온 스크린] 시리즈는 매 작품 상영 전
클럽발코니 clubbalcony.com과 호암아트홀 hoamarthall.org, credia.tv를 통해
해설영상을 제공합니다.

돈 카를로

Don Carlo

G. Verdi


 정준극 블로그에서 펌 http://blog.daum.net/johnkchung/5197554

 

오페라 돈 카를로(Don Carlo)는 독일의 문호 프리드리히 폰 쉴러(Friedrich von Schiller)의 희곡에 기본을 둔 것이다. 원제목은 Don Carlos이지만 이탈리아어로 작곡되었기 때문에 Don Carlo라고 했다. (파리에서의 초연 때에는 Don Carlos라는 타이틀 이었다.) 불후의 명작에 오페라의 황제가 곡을 붙였으니 위대한 작품으로 태어나지 않을수 없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명제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신에 대한 절대적인 의지(依支)’이다. 베르디가 활동하던 당시의 이탈리아는 지금처럼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으며 더구나 북부 지방은 상당부분이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 있었다. 따라서 이탈리아 국민들은 너나 할것 없이 나라의 통일과 해방을 염원하고 있었다. 베르디는 그의 오페라를 통하여 이탈리아의 통일과 해방을 소리 높이 외쳤다. 조반나 다르코(Giovanna d'Arco)와 나부코(Nabucco)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돈 카를로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스페인의 압박으로부터 해방코자 하는 플란더스(오늘날의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일부지역) 사람들의 염원을 이탈리아의 경우에 비추어 그려놓았다. 베르디는 신앙심이 돈독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사랑, 부귀, 권세 따위에 운명을 걸고 있지만 절대자인 신의 입장에서 보면 이 모든 것들은 한낱 부질없는 일에 불과하다는 것이 베르디의 신앙이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나약한 존재일 뿐이므로 절대적 존재인 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러한 베르디의 종교관은 ‘운명의 힘’(La Forza del Destino), 에르나니(Ernani), 그리고 돈 카를로에 잘 나타나 있다. 오페라 돈 카를로는 그랜드 오페라중의 그랜드 오페라이며 비극중의 비극이다.

돈 카를로 비엔나 슈타츠오퍼 공연

 

 

오페라 돈 카를로는 신에게 의지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 도출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 인간적인 격정과 애증이 전편을 통하여 끊임없이 분출되고 있는 그런 작품이다. 자기의 아버지와 정략적으로 결혼할 수밖에 없었던 여인을 사랑하는 젊은 왕자의 번뇌, 친구의 우정을 배신으로 받아 들여야만 했던 갈등, 애타는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데 대한 분노, 자식의 반항을 무자비하게 처리해야 하는 아버지의 애증, 그리고 용서...이렇듯 돈 카를로에는 인간이기에 감내할 수밖에 없는 사랑과 증오의 드라마가 도처에 구비 치며 흐르고 있다.

 

엘라자베타(엘리사베스) 왕비 역의 아날리사 라스팔리오시(Annalisa Raspagliosi)

 

사람들은 베르디의 수많은 오페라 중에서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와 리골레토(Rigoletto)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한다. 극적인 스토리와 감동적인 아리아가 너무나 훌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르디의 작품을 이해하면 할수록 돈 카를로가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왜 그런가? 우선 전반적으로 음악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민속적인 향취가 묻어 있는 아리아는 정말 일품이다. 합창도 장엄하다. 성악 파트 못지않게 오케스트라 역시 드라마틱하여 마음에 파고든다. 테마 멜로디가 오케스트라를 통하여 신비롭게 울려 퍼질 때에 듣는 사람들은 말할수 없는 감동에 휩싸이게 된다. 그래서 쉴러의 원작은 도적적 가치관에 중점을 둔 한편의 드라마이지만 베르디의 오페라 오페라는 장엄한 인간 드라마일뿐만 아니라 신의 뜻을 묻는 차원 높은 드라마라는 평을 받고 있다. 돈 카를로는 베르디의 네 번째 작품이다. 베르디의 오페라에서는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특별한 동정을 받는다. 리골레토가 그러하며 에르나니가 그러하고 일 트로바토레와 라 트라비아타가 그렇다. 돈 카를로도 그러한 부류에 속한다. 상식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도저히 용납할수 없는 대상들에게 사람들의 동정심이 쏠리게 되어 있다.

 

카를로 왕자(도밍고)와 에볼리

 

 

무대는 16세기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이다. 주인공인 돈 카를로(Ten)는 스페인 왕국의 왕자(Infante)이다. 부왕인 필리베 2세(Philippe II: Bass)는 철권과 같은 독재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이다. 아버지와 아들간의 문제라면 스토리가 단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기에 왕비인 엘리자베스(Sop)와 왕족인 에볼리(Eboli: MS)공주가 등장하며 또한 카를로 왕자의 절친한 친구 로드리고(Rodrigo: Bar)자작이 참여함으로서 스토리는 단연 활기를 띠게 된다. 여기서 잠시 필립2세에 대한 배경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필립2세(Felipe Il de Habsburgo)는 타이틀에서 볼수 있듯 이미 당시부터 유럽을 제패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이다.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의 샤를르5세 황제였으며 어머니는 포르투갈의 이사벨라 공주였다. 샤를르5세의 적자로서 1556년 스페인 국왕으로 등극한 필립2세는 나폴리와 시실리의 왕이라는 자리도 물려받았다. 필립2세는 포르투갈의 마리아 공주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가 이 오페라의 주인공 카를로 왕자이다. 어머니 마리아 공주는 1546년 카를로를 낳은지 몇달후 세상을 떠났다.

 

로드리고 자작과 돈 카를로

 

 

어린 카를로는 어머니 없이 고모의 손에서 자랐다. 카를로 왕자의 아버지인 필립2세는 영국의 메리 여왕과 결혼하였다. 메리 여왕은 저 유명한 블라디 메리(Bloody Mary)로서 헨리 8세의 첫 번째 왕비인 캐서린의 딸이다. 결혼은 했지만 두 사람은 함께 생활한 일도 없다. 하지만 필립2세는 영국의 섭정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2년후 메리 여왕이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소생이 없었다. 필립2세는 이번에는 메리 여왕의 뒤를 이어 영국 여왕이 된 엘리자베스와 결혼코자 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인 앤 볼레인의 딸이다. 그러나 그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다. 여러 이유에서였지만 특히 종교문제가 컸었다. 마침 그 즈음에 스페인과 프랑스간의 60년에 걸친 해묵은 전쟁이 끝을 맺게 되었다. 프랑스가 굴복하였다. 스페인과 프랑스는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내용중의 하나가 프랑스 국왕 앙리 2세(Henri II)의 딸 엘리사베스 드 발루아(Elisabeth de Valois)와 스페인 국왕과의 결혼이었다. 프랑스의 엘리사베스 공주는 원래 스페인의 카를로 왕자와 결혼키로 약속되어 있었다. 한편, 스페인에서는 국왕인 필립2세와 아들 카를로 왕자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결국 필립2세는 아들 카를로 왕자를 반역죄로 체포하여 유폐했다. 카를로 왕자는 음식을 거부하며 항거하다가 2년후에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필립2세는 프랑스와의 평화협정을 내세워 젊은 엘리사베스 공주와 결혼하였다. 그러므로 오페라의 내용과 실제의 역사적 사실과는 자못 차이가 있다. 오페라에서는 필립2세와 엘리자베스 공주가 결혼한 후에 카를로 왕자가 부왕에게 항거하여 결국 죽음에 이른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지만 그건 오페라일 뿐이다. 사족으로 한마디 더 한다면 필립2세와 엘리사베스 왕비 사이에는 아들 후사가 없었으며 딸만 둘을 두었다. 그리하여 필립2세는 아들을 얻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안나 공주(막시밀리안 황제의 딸)과 결혼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 나중에 필립2세의 뒤를 이어 스페인 국왕이 된 필립3세이다.

 

 에볼리 공주의 '베일의 노래'(Dolora Zajick)


그러면 카를로 왕자에 대한 진실은 무엇인가? 과연 쉴러의 희곡에 표현된 대로 용감한 젊은 왕자인가? 두명의 아름다운 여인들이 그를 정열적으로 사랑했었을까? 스페인의 압정에 항거하는 플란더스의 독립을 위해 부왕인 필립2세에 대결하였을까? 기왕 얘기가 나온 김에 돈 카를로에 대하여 조금만 더 설명코자 한다. 우선 베르디의 말을 들어보자. 베르디는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내용은 거짓이다. 돈 카를로는 바보이며 미치광이이다. 엘리자베스는 돈 카를로를 사랑한 일이 결코 없다. 친구인 포사(로드리고)는 드라마가 만들어 낸 상상의 인물이다. 필립2세의 치하에서는 로드리고와 같은 인물이 존재할수 없었다. 필립2세는 마음이 연약한 인물이 아니다. 쉴러의 드라마는 역사적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오페라 돈 카를로의 스토리도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드라마에는 셰익스피어 스타일의 진실이나 심오함이 하나도 없다. 하기야 몇 년에 걸친 스페인 왕실의 복잡한 사건과 이에 관련되는 인물들을 단 며칠만에 압축하여 그려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돈 카를로의 아버지 필립2세(Ferruccio Furlanetto)

 

 

역사에는 돈 카를로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카를로 왕자는 1545년 필립2세 왕과 그의 첫 번째 부인인 포르투갈의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무척 난산이어서 태어날 때에 두뇌에 이상이 생겼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지능이 매우 얕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전적인 사항도 간과할수 없다. 카를로의 아버지와 어머니, 즉 필립2세와 마리아 공주는 4촌간이었다. 이외에도 가족들 간의 근친결혼이 수없이 많았다. 증조할머니인 후아나(Juana)와 또 그 증조할머니의 할머니는 모두 정신이상자였다. 게다가 가까운 조상들 중에 간질병 환자도 더러 있었다. 카를로 왕자가 이들의 병력을 유전 받았으리라는 추측은 쉽게 할수 있다. 지능이 떨어졌던 카를로 왕자는 일곱 살이 되도록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고 한다. 게다가 생긴 모습도 문제였다고 한다. 약간 꼽추였으며 한쪽 어깨가 너무 높이 솟아 있고 가슴은 움퍽 들어갔으며 얼굴은 정박아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몸이 약하다 보니 병치레도 많아 빈번하게 열병에 걸려 며칠씩이나 고생을 했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성격이었다. 못된 짓은 도맡아 하는 난잡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매일 친구들과 술과 여자들만 찾아 다녔다는 것이며 더구나 포악한 성격이어서 이유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참을만 한데 더 곤란한 것은 아버지인 필립2세를 살해할 생각까지 했다는 것이며 자기를 사랑하는 에볼리 공주는 아버지의 지령을 받은 스파이로 보았다는 것이다. 필립2세는 이런 아들을 도저히 그대로 둘수 없어서 구금하여 결국 죽게 만들었다. 나중에 필립2세는 ‘하나님, 저에게 수많은 왕국을 주시었으나 어찌하여 이 왕국들을 다스릴 아들은 주시지 않았습니다.’라며 비통해 했다고 한다. 아무튼 역사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카를로에 대한 이런 내용들이 모두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미지수이다. 그건 그렇고 이제 오페라로 되돌아가 보자. 스토리가 사실에 부합된 것인지 아닌지를 두고 논란할 필요는 없다. 예술로만 간주하면 된다.

 

필립2세(페루치오 푸르라네토)와 엘리사베스 왕비(아날리사 라스팔리오시)


제1막 제1장은 마드리드의 산 유스테(San Yuste) 대성당이다. 카를로 왕자의 할아버지이며 필립왕의 아버지인 샤를르5세의 묘소가 있는 거룩한 성당이다. 카를로 왕자가 친구 로드리고 자작을 은밀히 만난다. 로드리고는 당시 스페인의 지배아래 있는 네덜란드(플란더스)로부터 방금 돌아왔다. 로드리고는 카를로 왕자에게 플란더스의 백성들이 카를로 왕자를 새로운 통치자로 추대하고 싶다는 말을 전한다. 사실 카를로 왕자는 벌써 얼마전부터 플란더스의 항쟁 지도자들과 은밀히 서찰을 주고받아 왔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무리 친구이지만 로드리고에게 말할수 없었다. 플란더스의 항쟁지도자들과 연통하는 것은 스페인에 대한 반역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도 지금 카를로 왕자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자기와의 결혼을 약속한 프랑스의 엘리자베타(엘리사베스) 공주가 자기 아버지인 필립왕과 결혼했기 때문에 견딜수 없었던 것이다. 카를로 왕자는 로드리고에게 플란더스의 일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며 지금은 아버지와 결혼한 왕비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이 번민에서 탈피할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며 친구의 조언을 구한다. 로드리고는 카를로가 왕비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크게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플란더스로 가서 그들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모든 것을 잊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필립왕에게 플란더스 총독으로 보내줄것을 청원하라고 제안한다. 사실 카를로 왕자는 스페인을 떠나야 할 입장이었다. 만일 부왕 필립이 자기와 왕비의 관계를 알게 된다면 죽음을 면할수 없기 때문이었다. 카를로와 로드리고가 부르는 Dio, che nell'alma infondere(신이여, 우리의 영혼을 채우소서)가 심금을 울린다. 무척 힘차고 아름다운 곡이다.


돌이켜 보건대 스페린 필립왕의 아들 카를로와 프랑스 앙리왕의 딸 엘리사베스(엘리사베타)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평화를 다지기 위해 일찍이 약혼하였다. 카를로는 엘리사베스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여 개인적으로 파리를 찾아 갔다. 카를로는 폰텐블로(Fontainbleau)에 산책 나온 엘리사베스 공주를 멀리서 보고 단번에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나중에 정식으로 카를로를 만난 엘리사베스도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폰텐블로에서 만나며 서로의 사랑을 다짐하여왔다. 얼마후 파리에 있는 스페인 대사가 카를로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카를로의 아버지인 필립왕이 엘리사베스 공주와 결혼키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필립왕은 프랑스와 스페인간의 평화를 완전히 다지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합당하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그런 아버지가 다 있나? 아들과 약혼한 여자와 결혼하겠다니! 하지만 필립왕으로서는 막강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무슨 방법인들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로서는 필립왕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을수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사베스는 너무나 놀랍고 두려워서 성당의 제단에 나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야 하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으나 운명의 힘은 엘리사베스를 한 구석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엘리사베스 공주는 나이 많은 필립왕과 결혼하게 되었고 실의에 넘친 카를로는 스페인으로 돌아가 번민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필립왕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부인 모두와 사별한 형편이었다.


베르디의 돈 카를로는 크게 두가지 버전이 있다. 1867년의 파리 버전과 1884년의 밀라노 버전이다. 파리에서 초연된 파리 버전은 거의 5시간이나 걸리는 대규모였다. 전체 5막중 1막은 파리의 폰텐블로에서 카를로 왕자와 엘리자베타(엘리사베스) 공주가 처음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두 사람의 사랑이 한창 무르익을 때 카를로 왕자의 아버지인 스페인의 필립2세 왕이 엘리사베스 공주와 결혼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엘리사베스 공주가 성당의; 제단 앞에 꿇어 엎드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야 하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장면이 모두 파리 초연에서의 1막에 들어 있는 내용이다. 밀라노 버전은 카를로 왕자와 엘리사베스 공주의 파리 장면을 모두 삭제한 것이다. 그래서 마드리드의 산 유스테 성당의 수도원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밀라노 버전은 파리 버전의 여러 장면을 삭제하여 공연시간을 3시간 반으로 줄인 것이다.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공연되는 버전은 대부분 밀라노 버전이다.


제1막 제2장은 수도원의 정원이다. 아름다운 에볼리 공주는 카를로 왕자를 극진히 사모하고 있지만 왕자는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눈치이다. 에볼리 공주는 Canzone del velo(베일의 노래)라는 유명한 아리아를 부른다. 만돌린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무어(Moor)풍의 감미롭고 흥겨운 노래이다. 노래의 내용은 사라센 왕에 대한 것이다. 왕비에게 싫증을 느낀 왕은 베일을 쓴 미지의 여인을 보고 사랑을 고백하지만 실은 왕비가 왕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베일을 쓰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잠시후 엘리사베스 왕비가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귀부인들과 함께 나타난다. 모두들 왕비에게 예의를 표한다. 로드리고는 다른 사람들이 눈치 못하는 가운데 왕비에게 다가와 카를로 왕자를 비밀리에 한번만이라도 만나 줄것을 간청하면서 쪽지를 전한다. 쪽지에는 만날 장소가 적혀 있다. 엘리사베스 왕비는 카를로 왕자로부터의 전언을 받자 놀랍고도 반가운 심정에 가슴이 벅차다. 그렇지만 만일 잘못되면 죽음까지 생각해야 하는 화가 미칠것 같아 두려움에 휩싸인다. 카를로 왕자가 정원에 들어 왔다가 왕비를 보고 번민에 싸이게 된다. 이 모습을 본 에볼리 공주는 카를로 왕자가 자기를 사랑하는 나머지 번민에 빠져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카를로 왕자와 에볼리 공주는 먼 사촌간이다. 더구나 에볼리 공주는 필립왕의 정부 노릇도 하고 있었다. 모두들 자리를 떠나고 무대에는 카를로 왕자와 엘리사베스만이 남아 있다. 두 사람은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가운데 만난다. 카를로 왕자는 필립 왕이 자기를 플란더스로 보내도록 잘 말해 달라고 간청한다. 왕비가 주저하다가 그렇게 하겠다고 수락한다. 그러자 카를로 왕자는 엘리사베스가 이제는 더 이상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멀리하려는 것이라고 믿는다. 카를로와 엘리사베스의 듀엣 Io vengo a domandar가 가슴을 저민다. ‘이제 단 하나 남은 보물을 잃었다’는 애절한 내용이다. 왕비의 발아래 엎드려 죽고만 싶어 하는 카를로! 그제야 왕비는 아직도 카를로가 자기를 애절하게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필립 왕에게 말하여 카를로를 멀리 보내도록 하겠다는 것도 실은 엘리자베스가 카를로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다시한번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기쁨에 충만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이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든다. 명예를 생각해야 하는 왕비는 애써서 이별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카를로가 마치 마지막인듯 엘리자베스를 포옹하려 하자 왕비가 묻는다. ‘자기를 속박에서 해방할수 있으며 잔혹한 비난에서 자유로울수 있겠는가? 당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당신의 어머니와 결혼할수 있는가?’ 왕비는 카를로에게 이성을 되찾을 것을 호소한다. 남들의 눈이 두려운 카를로는 왕비와 오래동안 함계 얘기를 나눌 형편이 아니었다. 카를로가 번민 속에 떠나고 잠시 후에 필립왕이 시종들과 함께 등장한다. 필립왕은 왕비가 정원에 홀로 있는 것을 보고 시녀인 다렘버그 백작부인을 호되게 꾸짖으며 당장 프랑스로 돌아 갈것을 명령한다. 왕의 명령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엘리사베스는 프랑스에서 함께 온 다렘버그(d'Aremberg) 백작부인과 슬픈 작별을 고한다. 다렘버그 백작부인의 고독한 엘리사베스의 유일한 친구였다. 왕비가 부르는 아리아 Non pianger, mia compagana(친구여, 슬퍼하지 마오)가 아름답다.


제2막은 제1장은 왕비궁의 정원이다. 한밤중이다. 카를로가 엘리사베스를 기다리고 있다. 카를로는 엘리사베스가 보냈을 것으로 생각되는 쪽지를 받고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실은 에볼리 공주가 카를로에게 몰래 보낸 편지였다. 에볼리 공주는 자기의 정체를 가리기 위해 베일을 쓰고 나타나 기둥 뒤에 숨어서 카를로를 지켜본다. 카를로는 Sei tu, bella adorata(그대, 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아리아를 부른다. 엘리사베스에 대한 불타는 심정을 담은 아리아이다. 이 노래를 들은 에볼리는 카를로가 자기를 생각하여 부르는 노래인줄 알고 기쁨에 넘쳐 있다. 그 때 로드리고가 들어와 카를로를 만난다. 에볼리는 아직도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로드리고가 떠나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다가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카를로의 애타는 듯한 사랑의 호소가 자기에 대한 것이 아니라 왕비에 대한 것임을 알아차리고 배신감에 몸을 떤다. 분노를 참지 못한 에볼리 공주가 베일을 벗고 이들의 앞에 나타나 카를로와 왕비와의 불륜을 폭로하겠다고 위협한다. 로드리고는 왕자를 난관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칼을 빼어 들어 에볼리를 죽이려 한다. 카를로가 막아선다. 겨우 목숨을 건진 에볼리는 복수를 다짐하며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로드리고는 카를로에게 플란더스의 독립항쟁과 관련하여 플란더스 지도자들로부터 받은 서찰이나 문서가 있으면 자기에게 줄것을 요청한다. 카를로는 로드리고가 자기의 친구이기 이전에 필립왕의 심복인 것을 생각하고 주저한다. 하지만 카를로는 로드리고와의 우정을 생각하여 그를 믿고 서찰을 건네준다. 카를로는 그 자리를 떠나면서 로드리고에게 공연히 플란더스의 서찰을 건네준 것을 크게 후회한다. 잠시후 필립왕이 등장한다. 마침 남아 있던 로드리고는 ‘폐하, 플란더스에서 돌아왔습니다’라는 아리아를 부른다. 로드리고는 목숨을 던질 것을 각오하고 필립왕에게 플란더스 백성들을 해방하고 자유를 줄것을 간청한다. 필립왕은 로드리고의 충직함을 가상히 여겨 스페인 왕실을 위해 충성을 다해 줄것을 당부한다. 로드리고가 감격한다. 필립왕은 로드리고에게 카를로와 왕비가 무언가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 같으므로 두 사람의 관계를 몰래 살필 것을 부탁한다.


제2막 제2장의 무대는 아토챠(Atocha) 성모 대성당 앞의 광장이다. 이단자에 대한 화형이 집행될 예정이다. 수도승, 수녀, 사형집행인이 등장하고 이어 화형당할 죄수들이 끌려 들어온다. 뒤를 이어 다시 신부와 수녀들이 입장하고 로드리고를 비롯한 귀족들이 입장한다. 이번에는 귀부인들의 안내를 받으며 왕비가 들어온다. 잠시후 왕실의 헤럴드(메신저)가 등장하여 왕의 입장을 알린다. 필립왕이 근엄하게 입장한다. 마치 아이다의 개선장면과 마찬가지로 그랜드 오페라의 진수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웅대한 음악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군중들은 Spuntato ecco il di d'esultanza(축복과 환희의 날이 밝았다)는 장엄한 합창을 부른다. 잠시후 카를로가 플란더스 지도자들과 함께 필립왕 앞에 등장한다. 이들은 플란더스를 돌려 달라고 간청한다. 이어 카를로는 자기를 플란더스 총독으로 임명해 달라고 청원한다. 그러나 필립왕은 이같은 제안을 단호히 거부하며 모두를 쫓아내라고 명령한다. 필립왕은 만일 카를로가 세력을 잡게 되면 언젠가는 자기에게 반역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왕의 완고함에 격분한 카를로는 칼을 빼어 들고 왕을 살해하려 한다. 왕은 옆에 있는 로드리고에게 카를로의 칼을 빼앗고 체포하라고 명령한다. 로드리고가 왕의 명령을 받아 카를로를 제압한다. 로드리고는 반역행위를 평정한 로드리고에게 공작의 작위를 수여한다. 그러나 카를로는 그렇게 믿었던 친구 로드리고가 자신의 칼을 막은데 대하여 몹시 의아해 한다. 카를로가 감옥으로 끌려간후 장송곡과 같은 음악이 울려 퍼진다. 막강한 종교재판관의 권세에 의해 이날 화형(auto-da-fe)당할 이교도들이 화형을 당한다.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온다. 지상에서 핍박받는 무고한 자의 자유를 하늘나라가 약속한다는 내용이다.

 

 이단자에 대한 화형장면


제3막은 필립왕의 거실이다. 동이 터온다. 깊은 침묵 속에 잠겨 있는 왕의 아리아가 허공을 누른다. Ella giammai m'amo(왕비는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아리아이다. 필립왕은 왕비가 카를로와 함께 자기를 속이고 있다고 믿고 있다. 왕은 종교재판관을 부른다. 반역을 꾀한 카를로의 죄를 어떻게 다스릴지 협의하기 위해서이다. 종교재판관은 왕국의 평화와 높은 도덕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므로 카를로의 반역행위와 부도덕에 대하여 카를로를 죽여도 좋다고 허락한다. 종교재판관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도 왕국의 평화를 위해서는 희생되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이와 함께 종교재판관은 왕궁에 왕자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 있다고 하면서 로드리고를 종교재판에 회부하게 하여 줄것을 요청한다. 로드리고는 오래전부터 종교재판관의 횡포에 항의해 왔다. 종교재판관은 이를 교회의 권세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로드리고를 제거할 기회만 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카를로 왕자를 죽여도 좋다고 허락하면서 대신 로드리고의 목숨을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필립왕은 교회의 권위에 승복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인식한다.

 

 철권 통치로 유명했던 필립2세


종교재판관이 떠나자 곧이어 왕비가 급한 걸음으로 들어온다. 왕비는 보석함을 도둑맞았기 때문에 왕에게 이 사실을 고하러 온 것이다. 그런데 왕의 손에 그 보석함이 들여 있는 것이 아닌가? 어떤 미지의 사람이 왕에게 전달한 것이다. 왕은 왕비에게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열어 보라고 말한다. 왕비가 열기를 주저하자 왕이 직접 힘으로 보석함을 연다. 그 안에서 카를로의 초상화가 발견되었다. 왕비가 오래전 카를로와의 약혼때부터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있던 것이다. 왕비의 불륜에 대한 확증을 잡은 왕은 그 자리에서 왕비에게 ‘부정한 여인, 간음한 여인’이라는 심한 모욕과 함께 비난을 퍼붓는다. 그러한 소동 중에 로드리고와 에볼리 공주가 급히 들어온다. 네 사람은 이 치욕스런 장면이 각각 자기들 때문에 비롯되었고 이에 대한 업보가 돌아온 것으로 생각한다. Ah, sil maledetto(아, 당신을 저주한다)은 필립왕, 로드리고, 에볼리, 엘리사베스 왕비가 부르는 4중창이다.

 

 필립왕, 엘리사베스 왕비, 카를로 왕자, 에볼리 공주, 로드리고 공작의 중창 카리카추어


에볼리와 왕비만이 남아 있게 되자 그제서야 에볼리는 왕비에게 그동안 왕비를 곤경에 빠트리게 했고 증오했던 것을 진심으로 후회하며 용서를 빈다. 그리고 자기가 왕비의 보석함을 필립왕에게 전달했다고 고백한다. 이 모든 음모가 에볼리의 소행인 것을 알게 된 왕비는 자기는 어차피 목숨을 버려야 할 입장이므로 에볼리를 용서한다. 에볼리는 자기가 한때 필립왕의 정부였음을 고백하며 필립왕이 오히려 부도덕함으로 비난받아야 마땅하다고 털어 놓는다. 기가 막힌 왕비는 마음을 가다듬고 에볼리에게 영원이 추방당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수녀원으로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살것을 명한다. 왕비가 나가고 홀로 남은 에볼리는 자기의 아름다움으로 무든 저주가 시작되었음을 탄식하는 아리아를 부른다. 유명한 O don fatale(아름다운 저주)이다. 에볼리는 마지막으로 자기가 할수 있는 일은 갇혀 있는 카를로를 죽음으로부터 구해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제3막 제2장은 감옥의 한 구석이다. 갇혀 있는 카를로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로드리고가 찾아온다. 카를로에게 작별을 고하기 위해서이다. 로드리고는 친구인 카를로를 살리기 위해 플란더스의 비밀 서찰을 자기가 받은 것으로 하여 카를로 대신 죄를 뒤집어 쓸 생각이다. 플란더스 반란 지도자와의 내통은 반역이며 반역은 곧 죽음이다. 로드리고는 카를로에게 억압받고 있는 플란더스 백성들을 버리지 말라고 간절히 요청한다. 그 때 어둠속에서 총성이 울리더니 로드리고가 쓰러진다. 카를로를 죽이기 위해 필립왕이 보낸 암살자들이 로드리고를 카를로로 오해하고 총을 쏘았던 것이다. (어떤 버전에는 로드리고를 죽이기 위해 종교재판관이 보낸 암살자라고 되어 있다.) 로드리고는 죽어가면서 카를로에게 다음날 산 유스테(San Yuste)수도원에서 엘리사베스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며 카를로를 플란더스로 도망가는 것을 도와 줄것이라고 말한후 숨을 거둔다. 잠시후 필립왕이 나타난다. 필립왕은 카를로가 죽지 않고 로드리고가 죽어 있는 것을 보고 놀라더니 단번에 카를로를 로드리고 살인범으로 몰아붙인다. (다른 버전에는 필립왕이 카를로를 용서해주기 위해 왔다고 되어 있다.) 이에 격분한 카를로가 왕이야 말로 살인범이라고 소리높이 외친다. 이때 한떼의 백성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이들은 카를로를 플란더스의 지도자로 세워 달라고 요구한다. 그 중에는 가면을 쓴 에볼리 공주도 포함되어 있다. 에볼리는 카를로에게 어서 속히 도망가라고 하면서 도와준다.

 

산 유스테 성당에서의 피날레

 

 

제4막은 산 유스테 성당안 납골당이다. 필립2세의 부왕인 샤를르5세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석관이 놓여 있다. 샤를르5세는 손자인 카를로를 무척이나 귀여워해주고 아껴준 사람이다. 엘리사베스가 카를로를 기다리고 있다. 엘리사베스는 마지막으로 카를로와 작별을 고하고 싶었다. 그리고 플란더스를 위해 카를로가 가야한다고 믿고 카를로에 대한 사랑을 버리기로 작정한다. 엘리사베스는 파리의 폰텐 블루에서 카를로를 처음 만났을 때의 행복했던 순간을 회상하며 눈물에 젖는다. Tu, che le vanita conoscesti(세상의 허무함을 아시는 그대여)는 엘리사베스의 아리아이다. 카를로가 나타난다. 두 사람은 이별을 슬픔을 나눈다. 두 사람의 듀엣 E dessa는 저 세상에서 만나자는 내용이다. 카를로는 친구 로드리고의 죽음으로 플란더스를 도와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된다. 왕과 종교재판관이 수하들을 거느리고 나타난다. 왕은 카를로를 종교재판관에게 넘겨주어 자기의 권력을 보장코자 한다. 갑자기 에배처의 문이 열리고 어떤 수도승이 카를로를 에배처(채플)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다른 버전에는 왕의 근위병들과 대결할수 없다고 생각한 카를로가 할아버지 샤를르5세의 석관 뚜껑이 신비스럽게도 열리자 그 속으로 뛰어 들어 몸을 피한다고 되어 있다. 카를로가 석관안으로 뛰어든후 석관의 뚜껑이 닫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카를로가 샤를르5세의 석관 속으로 뛰어 들어감은 세상의 모든 번뇌와 애증을 신에게 의지한다는 의미이다. 이어 하늘로부터 ‘천국에서만이 평화를 얻는다’라는 외침이 들린다. 필립왕과 종교재판관은 그 수도승이 샤를르5세임을 알고 놀람과 함께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Si, per sempre!(영원히)라는 대합창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막이 내린다. 

 

 


 

 

로베르토 알라냐 (Roberto Alagna, 1963~ )


1963년 6월 7일 프랑스에서 시칠리아 출신의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난 알라냐는 전통적인 음악수업을 전혀 받지 못한 특이한 성악가이다. 그의 소년 시절, 음악과 관련된 추억이라곤 열네 살 때 ‘위대한 카루소’라는 영화를 본 것이 전부였다.

“카루소 역을 맡은 마리오 란자의 노래를 듣는 순간 성악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 영화는 제 미래의 모델인 된 셈입니다.”
그러나 그 꿈이 현실로 다가오기까지는 많은 시련이 따랐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는 파리 시내의 선술집과 피자클럽을 전전하며 유명 오페라 아리아들을 가벼운 분위기로 편곡해 들려주는 떠돌이 3류 가수에 불과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저녁부터 새벽 5시까지 쉬지 않고 노래를 계속 불러야 된다는 것이었어요. 새벽녘이 되면 수많은 손님들이 뿜어내는 담배 연기에 질식할 지경이었지요.”

그런 생활은 무려 8년간이나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왔다. 클럽에서 그의 노래를 듣고 감동한 라파엘 루이즈라는 노신사가 후원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이 일로 무명가수 생활을 청산하고 루이즈의 주선으로 유명한 성악 지도자이자 엑상 프로방스 페스티벌 설립자이기도 한 가브리엘 쉬르제 밑에서 본격적인 성악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쉬르제는 알라냐에게 음악 전반에 대한 교육과 함께 성악가들이 흔히 저지르기 쉬운 실수들을 바로 잡는 데 교육의 중점을 두었다.

그에게 세계 무대의 길이 열린 것은 1988년의 일이다.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파바로티 국제 성악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영국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의 순회 오페라 공연에서 ‘라 트라비아타’의 알프레도 역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한 것이다. 하이C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완벽한 고음, 힘차고 개성이 강한 목소리, 청중들을 강하게 흡입하는 풍부한 연기는 영국 청중들을 완전히 매료시켰고, 언론의 대대적인 찬사를 이끌어냈다.

“그 공연은 제게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어요. 사실 오페라라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것은 내가 출연했던 그 공연이 처음이었으니까요.”

이 공연이 끝나자 많은 오페라단에서 출연 교섭을 해왔다. 그는 곧바로 프랑스의 툴루즈 오페라단과 ‘사랑의 묘약’을, 몬테카를로 오페라단과 ‘라 트라비아타’ 를 공연했으며, 90년 봄엔 ‘라 트라비아타’의 알프레도 역으로 라 스칼라에 입성했다. 그리고 곧이어 무티와 함께 ‘리골레토’를 녹음했다.
 
92년 코벤트 가든 데뷔작인 ‘라 보엠’은 그에게 음악적인 전환점으로서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큰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 공연을 통해 그는 게오르규를 만났고, 공연의 성공과 함께 93년에 EMI와 전속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세계 오페라 무대의 중심에 서게된 그에게 94년 11월 코벤트가든에서 공연된 구노의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은 또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로미오 역으로 출연한 그는 까다롭고 인색하기로 소문난 영국 평론가들로부터 ‘제4의 테너’ ‘스리 테너의 진정한 후계자’ ‘제2의 파바로티’ ‘카레라스 이래 가장 카리스마적이고 로맨틱한 테너’라는 전례없는 찬사를 이끌어낸 것이다.

그는 이 공연으로 그해 최고의 오페라 가수에게 수여하는 ‘로렌스 올리비에 상’을 수상했다.
오페라 무대에서의 명성은 곧바로 음반으로 이어졌다. 95년에 첫 리사이틀 음반(아리아 모음집)을 낸 데 이어 ‘라 보엠’, ‘돈 카를로’를 발매했고, 96년에는 아내인 게오르규와 함께한 ‘듀엣과 아리아’를 선보인 것이다. (이후 다수의 오페라 앨범 녹음)

알라냐가 곧잘 비유의 대상이 되고 있는 파바로티·도밍고·카레라스 같은 메가톤급 가수로 성장할지는 아직은 미지수이다. 그 스스로도 “마치 체급이 다른 권투선수와 시합을 하고 있는 기분이다”라며 그들과의 비교를 원하지 않는 눈치다. 그러나 그가 강렬하고 드라마틱한 음성에서부터 한없이 부드러운 레가토의 표현에 이르기까지 완벽에 가까운 기교를 구사하고 있고, 레퍼토리의 개발 여지 또한 무궁무진하다는 점에서 황혼기를 맞고 있는 ‘쓰리 테너’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테너 부재 시대에 그에게 거는 기대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월간객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