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오페라

오페라 무대 밑 숨은 공로자를 아는가--박종호의 오페라 바로알기

나베가 2011. 3. 27. 16:38

박종호의 오페라 바로알기

 

오페라 무대 밑

숨은 공로자를 아는가

 

화려한 오페라 무대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주역들 말고도 미술·소품·분장·의상·무대감독·합창 지휘자 등
많은 스태프들이 세트 뒤에서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그 존재조차 관객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오페라 무대의 숨은 주역‘프롬프터(prompter)’이다.

 

 

오페라 공연에서는 주역들이 무대를 뜨겁게 달군다. 공연이 끝나고 나면 관객들의 열
렬한 박수가 극장을 채운다. 하지만 화려한 오페라 무대에서 누구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박수 한 번 받지 못하고, 심지어 관객들은 그런 역할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숨은
공로자들이 있다. 물론 오페라 공연 때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 사람들은 많다. 미술·소
품·분장·의상·조명·무대감독·합창지휘자·안무가 등 많은 무대 스태프들이 세
트 뒤에서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만 좋은 공연 하나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들이 보이
지 않아도 관객들은 그런 이들이 수고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마음속으로 감
사하고 박수를 보내며 프로그램에서 이름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그중에는 중요한 역할
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조차 관객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무대 밑에
서 묵묵히 혼자 오페라를 사랑하면서 평생을 오페라와 함께 살아가는 그의 이름은‘프
롬프터(prompter)’이다.

 

오페라 무대의 숨은 주역‘프롬프터’
오페라 극장 무대에 검은 박스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무대를 유심히 바라보면 무
대 앞쪽 가운데에 위로 약간 튀어 올라와서 무대를 가리고 있는 부분이 있다. 보통 네모
난 것으로 작은 경우는 작은 책상 하나가 올려져 있는 크기이며, 조금 클 때는 옆으로 긴
식탁 정도의 크기이다. 그것은 주로 어두운 색으로 되어 있다. 1층 객석 앞쪽에 앉으면
그 박스가 무대를 가리기도 해 객석에서는 왜 무대 가운데에 그런 것이 있는지 의아해하
기도 한다. 이것은‘프롬프터 박스’로서, 그 안에는‘프롬프터’라 불리는 사람이 들어
있다. 그 박스는 객석에서 볼 때는 막혀 있는 상자 같지만, 실은 뒤쪽으로 열려 있다. 그
래서 박스 안에 있는 프롬프터와 출연자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볼 수 있다. 프롬프터는
오페라 전체를 그린 악보, 즉 총보(總譜)나 성악 파트가 적힌 악보를 들고 그 박스 안으
로‘기어’들어간다. 물론 무대 아래나 오케스트라 박스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
곳은 왠지 기어들어가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다.
원래 프롬프터가 하는 일은 무대 위 가수들에게 가사를 읽어주는 것이었다. 사실 오페
라가 길다 보니 출연자들이 중간에 가사를 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프롬프터
가 출연자들 귀에 들릴 정도의 크지 않은 음성으로 가사를 읽어준 것이다. 이 말을 들으
면 이런 오페라의 전근대적인 모습에 황당해하는 분들이 있겠지만, 사실인 것을 어쩌랴.
프롬프터의 존재는 오페라를 우습게 보거나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공박을 받는 문
제다. 하지만 이 문제로 오페라를 폄하할 것만은 아닌 것이, 프롬프터는 원래 연극에서
나온 것이다. 연극 등 많은 극예술 공연에서도 과거부터 대사를 읽어주는 사람이 있
었고, 그 관습이 오페라에 남아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제는 오페라가 프롬프터를 이용
하는 대표적인 장르가 되어버렸다. 프롬프터는 보통 가사를 다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주로 각 소절의 첫 부분만을 읽어준다. 그러면 성악가는 이후의 가사가 생각나서 뒷부
분을 수월하게 노래할 수 있다. 사실 오페라에는 비슷비슷한 대목이나 멜로디가 적지
않다. 여러 노래들이 흡사한 경우도 많은데, 그때마다 다른 가사들을 다 외우는 것이 어
려울 수도 있고, 다른 작품의 가사와 혼동될 수도 있어 공연 중에 갑자기 가사가 기억
나지 않거나 헷갈릴 수도 있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안전장치로서 프롬프터가 있는 것
이다.
프롬프터가 단순히 가사를 읽어주는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수가 음악을 잊어버리
면 아예 노래를 불러주기도 한다. 또 출연자의 연기가 연출가가 지시했던 것과 다르면
지적해주고, 위치나 자세도 교정해주며, 다음 동작의 시작도 알려준다. 축구로 비유하
자면 지휘자가 벤치에 앉아있는 감독이라면, 프롬프터는 선수들과 함께 그라운드에서
뛰고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지휘자가 공연 전체를 관할하지만 그는 지휘봉을 흔
들면서 사인을 보내는 것이지, 어떤 상황이 생겨도 무대에 대고 얘기를 하거나 야단칠
수 없다. 대신 무대 가운데에 있는 프롬프터는 무대의 상황을 바로 옆에서 보면서 표정
과 손짓, 작은 목소리로 혹은 급하면 큰 소리로라도 지시할 수가 있다. 프롬프터는 가수
들의 표정을 바로 앞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 가수가 몸이 안 좋다거나 가사를 잊었다거
나 연기를 혼동하고 있다거나 하는 것들을 가장 먼저 알 수 있다. 또 그것을 가장 빨리
교정해줄 수 있다. 긴박한 상황이 생겼을 때 프롬프터는 간혹 뒤편의 지휘자에게 사인
을 보내기도 하고, 무대 양편에서 무대를 주시하고 있는 무대감독에게 사인을 주기도
한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역할?
하지만 요즘처럼 연출이나 연기가 오페라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대에 프롬프터가 있

는 자체를 싫어하는 연출가가 많아졌다. 그들은 가수들이 일류 연극배우들처럼 완벽한
연기를 몸에 익히고 가사도 완전히 익혀서 나가기를 원한다. 프롬프터에게 의존하면서
노래를 부르거나 어색한 연기를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요즘에는 세계적으로 프
롬프터를 쓰지 않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프롬프터가 꼭 필요하거나 그
와 일하기를 즐기는 가수들도 있다. 예를 들면 루치아노 파바로티 같은 가수는 한때 가
사 외우기에 게을렀었다. 그래서 프롬프터를 자주 요구하였는데, 이렇듯 작품에 익숙
하지 않은 가수나 공연이 너무 많아서 헷갈릴 우려가 높은 가수들은 연습 때 혹은 아예
계약 때부터 프롬프터를 요구하기도 한다. 또한 무대 앞자리에 앉은 관객들의 입장에서
는 프롬프터가 가사를 읽는 소리가 들리는 경우도 있어서 감상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일부 DVD나 CD에서조차 프롬프터 목소리가 들리는 경우도 있다. 그것 역시
실감 나는 실황의 일부로 생각하여 필자는 그리 나쁘게 생각하진 않는다. 또한 베로나
의 아레나 야외극장 같은 대형 극장에서는 큰 박스 속에 프롬프터가 두세 명이나 들어
가기도 한다. 이렇듯 오페라에서 프롬프터란 한편으로는 중요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는 없으면 더 좋을 묘한 위치에 있다.


프롬프터는 좁은 박스 안에 들어가서 고생을 하지만, 실제로 관객들은 그들의 수고나
심지어는 존재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런 불쌍한(?) 프롬프터를
오페라 속에 등장시키는 경우도 생겼다. 바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카프리치
오>이다. 이 오페라에서는 작품 속에서도 오페라를 제작하고 연습하는 과정을 그린다.
어느 궁정 극장에서 8명의 중요한 오페라 관계자들, 즉 제작자·후원자·극장장·대본
가·작곡가·배우·남자 가수·여자 가수 등이 오페라에 대한 각기 다른 견해를 펼
친다. 그들이 연습을 다 마치고 떠나자 무대에는 아무도 남지 않는다. 그때 프롬프터
박스에서 토프 씨라는 이름의 프롬프터가 기어서 나온다. 이미 불을 끄고 정리를 하려
는 궁정 집사가 그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다. 공연 때는 많이 의존하는 프롬프터이지
만, 막상 공연이 끝나면 아무도 챙기지 않고 가버리는 것이다. 그가 박스에서 나오면 다
들 자기들끼리 돌아가고 없으니, 실제 프롬프터의 애환이 오페라 속에 그려져 있는 것
이다. 그는 교외의 궁전에서 시내까지 돌아갈 차도 없고 차비도 없다. 집사가 불쌍한 그
를 배려해 차편을 마련해줘 그는 늦은 시간에 피곤한 몸을 끌고 겨우 집으로 돌아간다.
최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올려진 벨리니의 오페라 <몽유병의 여인>에 보면
프롬프터를 실제 무대 위로 끌어올려서 연기에 참여시키는 연출을 보여준다. 메리 침
머만이 만든 이 프로덕션은 원래 스위스의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현대 뉴
욕의 오페라극장으로 옮겼다. 극은 극장에서 <몽유병의 여인>을 공연하기 위한 리허설
과정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극중 오해가 빚어져서 큰 혼동이 일어나는 대목
에서 프롬프터 박스 속의 프롬프터가 기어나와 극장 사람들과 함께 소동에 참여한다.


이 연출에서도 박스 속에서 고생하는 프롬프터를 무대 위에 올려서 관객들에게 소개
한다. 프롬프터는 우리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오페라 공연의 성공을 위해 큰 기여를 한다.
처음부터 프롬프터가 되기를 목표로 하고 공부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대
부분 지휘자나 연출가 지망생들이다. 그들은 언젠가는 지휘자나 연출가, 아니면 제작
자를 꿈꾸면서 그 안에서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오페라하우스에는 프롬프터
박스에 한 번 들어가면 나오기가 쉽지 않다는 전설이 있기도 하다.
글 _ 박종호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