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지역,이스라엘(2010.3)

39.시리아/팔미라 ....1

나베가 2010. 4. 25. 00:11

팔미라 가는 길.....

 

 

 

 

 

 

사막 한가운데 이렇듯 양떼가 가득하다니...

이 양떼들은 사막에서 피어나는 약초를 먹고 자란다고 한다.

그래서 아주 튼튼하고, 이들의 젖을 먹는 사람들도 매우 건강하다고....

 

 

 

저 멀리 심상찮은 바위산이 보인다.

아무래도 조만간에 팔미라의 위용이 드러날 모양이다.

 

 

 

 

 

 

 

 

 

 

 

 

 

팔미라....

사막의 궁전’이라 불린 오아시스 도시

거칠 것 없이 탁 트인 사막 한복판에 우뚝 선 야자수 숲과 주변의 폐허 같은 유적지.

사막의 황량함과 선연한 대조를 이루며 외롭게 서 있는 이곳이 바로 팔미라다.

팔미라는 시리아 동부 사막에 있는 고대 오아시스 도시로 고대 그리스군의 전초기지로서 중요한 장소였다가 217년 로마에 합병되면서 오리엔트 세계와 지중해 세계를 잇는 무역 중계지로 번영을 누렸다. 도시국가로서 팔미라의 전성기는 로마의 지배를 받던 기원 전후부터 3세기경이다. 당시 이곳에는 물건을 싣고 사막을 건너는 대상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으며, 이들은 팔미라를 ‘사막의 궁전’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267년부터 팔미라를 지배하며 팔미라의 클레오파트라’를 자처했던 제노비아는 암살당한 남편을 대신해 팔미라의 새로운 주군으로서 로마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군대에 맞서 싸웠지만, 여왕은 271년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팔미라를 정복했을때 감옥에 갇혔고, 2년 후 팔미라는 로마군에 의해 불타버렸다.그후 1089년의 지진으로 남은 석주들마저 쓰러져 폐허가 되었다.  그 가운데 셈족이 모신 태양신의 신전 벨(Bel)만이 화를 면하였다. 11세기 경에는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

 

현재 남아 있는 팔미라 유적들은 대부분 로마 지배기의 것이다. 도시 기본 구조 자체가 로마식으로 정교하게 계획된 모습이다. 길게 뻗은 주로와 이를 가로지르는 작은 도로를 통해 바둑판처럼 구획을 나누는 방식이다. 교차로에는 탑문을 세우고, 길 양쪽으로 신전, 극장, 아고라, 공중목욕탕, 왕궁, 법원 등을 질서정연하게 배치했다.

 

푸른 야자나무 숲만 남아…

팔미라의 입구 역할을 하는 아치형 석조문(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세운것이다)을 통과하면, 1km가 넘는 대로가 나타난다. 길 양쪽에는 높이 9.5m의 원기둥 늘어서 있다. 건축물 중에는 거대한 벨 신전과 극장만이 원형을 보존하고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파손되어 터만 남아 있다. 도시 서쪽 외곽에는 무덤의 계곡이 펼쳐져 있다. 탑묘, 가형묘, 지하분묘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을 볼 수 있다.

 

제노비아 이후 쇠퇴의 길을 걷던 팔미라는 11세기 이 지역을 강타한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후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남아 있던 유적마저 파묻히자 잊혀진 도시가 되어버렸다. 무척 오랜 시간이 지난 1930년대에야 비로소 팔미라 유적 발굴과 복원작업이 시작되었으나 복원 정도는 미미하다. 때문에 푸른 야자나무 숲이 아니라면 팔미라는 폐허에 가까운 모습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푸른 야자나무 숲은 과거 이곳의 지명이 타드몰(Tadmor, 야자수)이었음을 상기시켜 주려는 듯하다.

 

 

 

 

 

 

 

 

 

 

 

 

 

 

 

 

 

 

 

 

 

 

 

모짜르트의 <휘가로의 결혼> 중에서 백작부인의 아리아
'그리운 시절은 가고'
Wolfgang Amadeus Mozart (1756 - 1791) / 'Dove sono'
from Le Nozze di Figaro
English Chamber Orchestra
Conducted by Jeffrey T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