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훈의 지휘봉이 멈춘 뒤 20초의 정적이 흘렀다. 1시간 반 동안 세기말의 불편하고 고통스런 음악에 몰입했던 청중은 숨죽인 상태에서 콘서트홀과 하나가 되어 깊은 감정을 느끼며 이른바 '침묵 악장'을 연주했다. 지휘자가 손을 내린 뒤에야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난 2일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서울시향의 마스터피스 시리즈 첫 공연의 메인 주제는 최근 지휘자 정명훈의 화두이기도 한 구스타프 말러(Mahler)였다. 말러의 최후의 완성작이자 죽음의 아로마(향기)가 피어 오르는 교향곡 9번이었다. 오케스트라를 기능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곡이지만 정명훈은 전곡을 암보(暗譜)로 지휘하는 자신감을 보였고 단원들도 성실하고 열정적인 연주로 답했다.
- ▲ 2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서울시향의 마스터피스 시리즈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왼쪽)의 연주가 끝나자 지휘자 정명훈이 박수를 보내고 있다. 2부에서 서울시향은 말러 교향곡 9번을 연주했다. /서울시향 제공
연주 시간만 30분에 이르는 1악장은 그 자체가 또 한 편의 교향곡이며 전곡의 결론이기도 하다. 작곡가가 느꼈던 죽음의 공포와 광기의 기복이 좀더 어둡고 극단적으로 표현되었더라면 하는 바람도 있었지만, 자잘한 실수가 별로 없는 연주의 완성도만은 분명 놀랍고 고무적이었다.
다소 절제되었던 감정은 2악장을 분기점으로 마구 분출하는 모습을 보였다. 1악장에서 전력 질주하기보다는 후반 악장으로 갈수록 에너지의 강도를 높이는 '미괄식' 해석을 구사한 것이다. 오스트리아 민속 무곡인 렌틀러를 바탕으로 한 2악장에서 비올라 수석은 작곡가의 빈정거림을 흉내내는 듯 어수룩한 깽깽이 주자를 잘 묘사했다. 3악장은 가속 페달을 힘껏 밟은 경주용 차량의 쾌속 질주와 같았다. 웬만한 가속에도 좀처럼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국내 악단이 연주하는 말러를 들을 때마다 느꼈던 조마조마한 심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중간 악장의 냉소와 신경과민이 가라앉고 바이올린 파트가 '고별사'라 할 수 있는 4악장의 문을 차분하게 열었다. 죽음의 명부에서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고도 이승의 끈을 놓으려 하지 않는 작곡가의 고뇌와 비통함이 객석에 그대로 전달됐다. 클라이맥스에서는 심벌즈를 3대나 사용하는 독특한 시도도 있었다.
바이올린 파트의 음색은 다소 밝은 편으로, 가끔은 고(高)음역에서 들뜨는 모습도 관찰되었다. 유럽의 일류 악단에서 들을 수 있는 그윽하게 숙성된 풍부한 현악의 소리는 앞으로 서울시향이 끈기를 가지고 성취해야 할 과제다.
전곡이 끝나고 커튼콜에서 정명훈은 밝은 미소를 머금으며 수석 주자를 비롯한 각 파트를 일으켜 세우면서 단원들을 섬세하게 배려했다. 기분 좋은 출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