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오페라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국립오페라단/2015.11.18.수/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

나베가 2015. 11. 17. 03:19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Richard Wagner - Der Fliegende Holländer - Sir Georg Solti



바그너,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Wagner, Der fliegende Holländer 특성 | ‘유령선 민담’을 소재로 삼은 하이네의 소설을 토대로 작곡<br>정보 | 음악극을 만들어내기 이전 바그너의 초기 작품, 1843년 드레스덴에서 초연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는 유령선 ‘플라잉 더치맨 Flying Dutchman’이 등장하죠? 원래 ‘플라잉 더치맨’은 1641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출항해 인도로 가려다가 남아공 희망봉 근처에서 침몰한 네덜란드 배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앞선 조선기술을 자랑해,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가 그 기술을 배우려고 네덜란드 조선소에 외국인 노동자로 위장취업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네덜란드 선박뿐만 아니라 뱃사람들도 항해 솜씨가 뛰어나기로 유명했지요. ‘바다를 질주하는 네덜란드인’이라는 뜻을 지닌 배 이름 ‘플라잉 더치맨’은 바로 조선강국 네덜란드의 자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배의 선장 반 데르 데켄은 희망봉 부근에서 폭풍우를 만났지만, ‘지구 끝까지 항해하리라’라고 외치며 선원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희망봉을 돌아 항해를 계속하려 했다는군요. 배는 폭풍우에 휘말려 가라앉았는데, 그로부터 약 3백 년 동안 바다에서 이 배와 마주쳤다는 다른 선박들의 증언이 ‘믿거나 말거나’ 줄을 이었답니다. 한마디로 유령선 전설이 태어난 것이지요. 여기서 나온 유럽의 민간 전설은 ‘선장과 선원이 다 죽었지만 저주를 받아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유령이 되어 배와 함께 바다를 영원히 떠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플라잉 더치맨’을 우리말로 옮긴 제목이 바로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의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Der fliegende Holländer]이랍니다. 참, 2010 월드컵 준우승을 차지한 네덜란드의 축구선수 아르옌 로벤의 별명도 ‘플라잉 더치맨’이라는군요.

 

조선 강국 네덜란드의 유령선 선장

 


저주받은 네덜란드 선장은 유령선을 타고 영원히 바다 위를 떠돌아야 하는 운명이다. <출처 : Albert Pinkham Ryder at en.wikipedia>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바그너가 음악극(Musikdrama)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기 이전의 초기 작품으로, 바그너는 이 작품에 ‘낭만적 오페라’라는 부제를 붙였습니다. 1막은 노르웨이의 산드비케 만에서 시작됩니다. 노르웨이 선장 달란트가 이끄는 배의 선원들은 험한 폭풍우 속에서 배를 해안에 대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겨우 배를 정박시킨 뒤 선장 달란트는 선실로 들어가서 쉬고 갑판에 남은 키잡이는 졸음을 참으며 고향의 연인을 그리는 노래 ‘천둥번개와 폭풍우를 헤치고’를 부릅니다.

그 사이 네덜란드 유령선이 소리 없이 곁으로 다가옵니다. 유령선 선장이 배에서 내려, ‘기한이 다 되었다’라는 노래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합니다. 이 네덜란드 선장은 오래 전에 바다에서 신과 악마에게 도전한 죄 때문에,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바다 위를 떠돌아야 하는 저주를 받았답니다. 그는 7년에 한 번 육지에 올라와 자신을 진정으로 영원히 사랑해줄 여자를 찾아다닐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랑을 얻으면 죽지 못하는 저주가 풀린다는 것입니다.


매번 여자들은 그를 배신했지만, 이제 다시 7년이 지나자 그는 새로운 희망을 걸어봅니다. 노르웨이 선장 달란트는 네덜란드인 선장과 그의 보물을 보고는 마음이 이끌려 자기 딸 젠타를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다시 순풍이 불기 시작하자, 두 척의 배는 나란히 달란트의 고향으로 향합니다.

2막은 달란트 선장의 집으로, 처녀들이 넓은 방안에 모여 앉아 물레질을 하고 있습니다. 다들 열심히 노래를 부르며 일을 하지만, 달란트의 딸 젠타는 벽에 걸린 초상화만 넋을 잃고 바라봅니다. 유모 마리가 나무라자 젠타는 마리에게 네덜란드인의 발라드를 다시 불러달라고 청합니다. 마리가 거절하자 젠타는 스스로 그 노래를 부르다가 자기도 모르게 노래에 몰입해 ‘바로 내가 당신을 구원하겠어요’라고 외칩니다. 젠타를 사랑하는 에릭은 그 모습을 보자 속이 상해 화를 냅니다. 마침내 달란트가 네덜란드 선장을 데리고 와 젠타에게 소개합니다. 젠타와 선장이 정신없이 서로에게 빠져드는 모습을 보고 달란트는 자리를 비켜줍니다. 운명으로 묶여 있음을 느낀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신의를 지키겠다는 사랑의 이중창을 노래합니다.


3막에서는 바다에서 돌아온 노르웨이 뱃사람들과 마을 처녀들이 신나게 잔치를 벌입니다. 사람들은 유령선 앞에 가서 ‘우리와 함께 놀자’고 외쳐보지만 배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유령선 선원들이 나타나 기괴한 합창을 시작합니다. 요란한 폭풍우 속에서 두 합창단의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한편 에릭은 젠타에게 옛날로 돌아가자고 간절히 호소합니다. 그러나 젠타는 네덜란드 선장에게 신의를 맹세했다며 그를 피하려 하지요. 에릭은 과거에 젠타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날을 상기시키며 젠타의 마음을 되돌리려 애를 씁니다. 그 이야기를 숨어서 듣고 있던 네덜란드 선장은 젠타가 에릭을 위해 자신을 배신했다고 오해하고, ‘구원은 사라졌다’고 외칩니다. 네덜란드 선장은 다시 유령선을 몰고 영원한 저주의 바다로 떠나갑니다. 그러자 젠타는 주위 사람들을 뿌리치고 절벽 끝으로 달려 올라가 ‘나는 죽을 때까지 당신에게 충실할 것’이라고 그에게 외친 뒤 바다로 몸을 던집니다. 그러자 마침내 저주가 풀린 유령선은 산산히 부서져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사람들은 멀리서 함께 하늘로 날아오르는 선장과 젠타의 영혼을 보게 됩니다.

하이네의 냉소적 원작 vs. 바그너의 낭만적 해석

유령선의 네덜란드 선장(브린 터펠)과 젠타(아냐 켐페)의 오페라 무대 공연 장면.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5월에’, ‘노래의 날개 위에’ 등의 낭만적인 시로 유명한 독일 작가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는 [폰 슈나벨레보프스키 씨의 회상Die Memoiren des Herrn von Schnabelewopski]이라는 작품의 1권 7장에서 이 유령선 선장 소재를 다뤘습니다.

민담을 소재로 쓴 짧은 소설인데요, 하이네 특유의 냉소와 유머가 담긴 작품입니다. “절개를 지키는 여자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악마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풀릴 리 없는 이런 저주를 내린 것”이라거나 “이 유령선 이야기가 여성들에게 주는 교훈은 ‘감상에 빠져 유령선 선장 같은 남자랑 결혼하면 반드시 신세를 망친다’는 것”이라는 등의 내용이 들어있지요. 바그너는 이 하이네의 작품을 읽고 강렬한 인상을 받아 이를 토대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작곡했습니다.

그러나 바그너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여성의 사랑이 제멋대로이고 죄 많은 남자를 구원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또 자신이 평생 그런 여성상을 추구하며 여성편력을 쌓아갔기 때문에 이 소재를 대단히 진지하게 해석했습니다. 작곡가 리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바그너는 이 ‘네덜란드인’이 바로 자기자신이라고 밝혔답니다. 낭만주의 특유의 과도한 열정을 이 작품에 불어넣으면서, 극적 긴장을 강화하기 위해 네덜란드 선장(베이스)과 젠타(소프라노) 사이에 에릭(테너)이라는 또 하나의 주인공을 만들어 넣은 것도 바그너의 창작입니다.

1839년 9월, 북해를 거쳐 런던으로 가는 4주 동안 풍랑으로 죽을 고생을 했던 바그너의 체험 역시 이 오페라 안에 절묘하게 표현되었습니다. 어떤 오페라도 바다의 거센 파도와 바람소리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서만큼 사실적이고 극적으로 표현한 적이 없었답니다. 1843년 드레스덴 왕립극장에서 초연된 이 오페라에서 바그너는 유도동기(라이트모티프Leitmotiv : 극중에서 같은 인물 또는 같은 상황이 등장할 때 동일한 선율과 화성을 되풀이해서 사용해 청중에게 각인시키는 기법)를 대단히 효과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오페라의 출발부터 저주의 모티프, 태풍과 파도의 모티프, 젠타의 구원 모티프 등을 알아들을 수 있는데, 특히 노르웨이 선원들의 모티프와 유령선의 모티프가 혼란스럽게 뒤섞이는 3막 ‘유령선 선원들의 합창’ 장면이 압권입니다. 아직 이탈리아 오페라처럼 아리아와 레치타티보 형식을 유지한 작품이지만, 바그너는 이탈리아어가 아닌 독일어로 대본을 썼고 자신의 모국어에 적합한 성악부를 창조해냈습니다.


 

이용숙 | 음악평론가, 전문번역가
이화여대 독문과 및 대학원 졸업하고 독문과 강사를 역임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독문학 및 음악학 수학, 서울대에서 공연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연합뉴스 오페라 전문 객원기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오페라, 행복한 중독], [사랑과 죽음의 아리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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