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기악

그라나도스 / '12개의 스페인 무곡'

나베가 2009. 12. 15. 09:26

12 Danzas Españolas, Op.37

그라나도스 / '12개의 스페인 무곡'

Enrique Granados 1867~1916

12 Danzas Españolas (1892)

이 12개의 스페인 무곡은 그의 피아노곡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 특히 그 제5번 <안달루사>는 기타 독주로 편곡되거나 독창곡으로써 가사가 붙여지거나 하여 우리들의 귀에 친숙하다. 갖가지 스페인 민속무곡에서 그 소재를 취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베니스의 많은 동일한 곡처럼 명료한 원곡의 형태는 나타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12곡 중에서 안달루시아풍인 곡은 4곡(제2번, 5번, 11번, 12번)뿐이며, 기타는 대부분 북방계 민속무곡의 특징을 소재로 하고 있다. 형식은 많은 리듬적인 제1부와 가곡(칼토)풍의 중간부 및 제1부의 재현이라는 스페인 무곡의 일반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제1번 알레그로 G장조 거친 3박자의 리듬에 의한 주제는 계속하여 음계적인 경과부를 가졌으며 또 연주된다. 중간부는 g단조로, 포코 안단테, 칸타빌레라고 지시되어 있는 대조적인 부분으로써 또다시 처음의 주제가 되돌아와 코다로 끝난다.

제2번 '오리엔탈' 안단테 c단조. 돈 프리안 마르티에게 바치고 있다. <오리엔탈>(동양풍)이란 부제가 붙어 있지만 처음의 여성적이고 조용한 주제의 왼손 반주부가 동양풍의 요염한 매력으로 우리를 끈다. 렌토 아사이(6/8박자)는 필시 세레나타적이고 이 곡의 중간부에 적격이다. 이 곡은 아라비아풍인 남부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오리엔탈은 사라센 문화에 대한 추억일지도 모른다.


제2번 오리엔탈 (No.2 Oriental)
Bryan Verhoye, Piano


제2번 오리엔탈 (No.2 Oriental)
Norbert Kraft, Guitar
Peter Breiner, Cond / Razumovsky Sinfonia
위 음원은 '하늘바람꽃님께서 올려주셨습니다.

제3번 에네르지코 D장조. 8도의 리드미컬한 주제가 연주되지만 이윽고 이것은 카논풍 혹은 10도의 연속으로 취급된다. 그리고 중간부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짧은 제2주제는 같은 리듬이기는 하지만, bb단조로 메노모소의 칸토풍으로 취급되고 있다. 또다시 앞의 에네르지코의 주제가 되돌아오고, 또 메노 모소가 삽입되어 에네르지코로 끝난다.

제4번 <빌라네스카> 알레그레토 알라 파스토랄레 G장조. <빌라네스카>는 전원풍이거나 목가적이라는 뜻에서 파스토랄레라고 2번에 지시되어 있다. 먼저 4마디의 전주가 있지만, 이것은 마치 종소리를 모방한 것처럼 2옥타브의 비약으로 D음의 연속이 더욱 계속되지만, 주제는 이를 타고 연주된다. 이 D음의 연속은 빌라네스카의 느낌을 잘 나타내고 있다. 중간부는 몰토 안단테로 g단조, 칸토풍인 16마디로 다시 앞의 주제가 되돌아온다.

제5번 '안달루사' e단조. 이 <12개의 스페인 무곡>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으로서 그라나도스의 전작품 가운데 가장 통속적으로 애호되고 있는 곡이다. 부제는 <안달루사>(안달루시아풍)로 안달루시아 지방의 인상을 묘사한 것이다. 다른 각곡에도 나타나 있는 기타 연주법의 모방은 이 곡에서는 가장 효과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처음에 나타나는 전주는 기타아의 리듬이며, 이어서 선율적인 주제가 연주된다. 장식음의 사용법 등 진정 금상첨화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간부는 안단테, E장조, 3/4박자이며, 대조적인 레가토의 화성적인 선율이다. 재차 주제가 되돌아오고 끝난다.


제5번 안달루사 (No.5 Andaluza)
Guitar 연주곡

제6번 알레그레토 포코 아 포코 아첼레란도 D장조. 론다리아 아라고네사(아라곤 지방의 론다리아 무곡). 경쾌한 3/4박자인 예로부터 있는 호타 아라고네사의 선율이 주제되어서 화려한 중에도 일말의 애수를 띠우고 있다.

제7번 <바렌시아나> 알레그로 아리오소 G장조. 이것은 러시아의 대작곡가 세자르 큐이에게 바치고 있다. 이 곡에서는 선율이라기보다도 리듬적인 요소가 주로 되어 있다.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기타 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자못 스페인다운 맛을 나타내고 있다.

제8번 아사이 모데라토 C장조. 이 무곡에서는 드물게 2/4박자가 사용되고 있다. 전체에 무곡적인 느낌은 없다.

제9번 몰토 알레그로 브릴란테 Bb장조. 또 3/4박자로 되돌아간다. 화렿나 느낌의 곡이면서 그다지 무곡적은 아니다. 최초는 화음의 리듬적인 것, 이윽고 복선율적 제2주제가 나타난다. 이들은 오랫동안 전조하지 않고 Bb장조로 일관하고 있다. 이어서 무곡적인 리듬이 나타나고 또다시 처음의 주제로 되돌아간다. 최추에 제1주제가 조금 얼굴을 내밀고 빠른 상행 아르페지오와 딸림7에서 화음으로의 ff로 끝난다.

제10번 알레그레토 G장조. 이사베르 데 보르봉에게 헌정하였다.

제11번 라르고 아 피아체르 g단조. 즉흥적인 곡. 라르고로 시작되는 도입부는 2마디로 안단테 콘 모토의 리드미컬한 제1부로 들어간다. 이것은 높이를 바꿔서 반복된다. 중간부는 라르가멘토의 화성적인 선율인데, 그 사이에 제1부의 리듬이 1마디 정도 삽입되고 있다. 그리하여 제1부가 복귀해서 끝난다. 이 무곡은 플라멩코 무곡의 느낌이 있다.

제12번 안단테 a단조. 처음의 시작되는 부분에서 왼손의 반주가 특수한 효과를 올리고 있다. 이 리듬의 2마디의 도입부에 이어서 제1부의 주제가 시작된다. 그러나 이것은 잠시후 C장조로 전조되고 있다. 또다시 본래의 조로 복귀한다. 중간부는 몰토 안단테 에스프레시보로, 3박자이면서도 코르도바 궁전의 과거를 연상케 하는 알함브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올 인의 애수를 노래하고 있다. 재차 안단테가 복귀해서 끝난다. 이것도 플라멩코 무곡풍이다.

[자료출처] 세광최신명곡해설전집 제17권

엔리케 그라나도스 (Granados, Enrique 1867~1916 )

엔리케 그라나도스(이 캄피냐)의 생애는 알베니스와 비교할 때 훨씬 수수한 색깔의 것이었다--그 너무나도 비극적인 최후를 제외하고는....

1867년 7월 27일, 그가 태어난 곳은 카탈로니아 지방에서는 주요한 도시의 하나인 레디다였고 아버지는 쿠바 출신의 군인, 어머니는 산탄데르(북 스페인의 산간지방)에서 온 사람이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가정에서 엔리케는 어려서부터 악재를 나타냈으나 그 무렵 '신동'으로서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던 7세 연장의 알베니스의 뒤를 쫓을 기색은 전혀 없었다. 처음에는 그 고장의 군악대 지휘자로부터 악전 일반을 배웠으나 이윽고 바르셀로나로 가서 당시 정평이 있던 피아노 교수 후안 바우티스타 푸홀의 문하로 들어갔다.16세 때 바르셀로나 음악원의 콩쿠르에서 수석을 차지한 후, 펠리페 페드렐의 밑에서 배우게 된다. 알베니스의 경우와 같이 페드렐의 가르침은 기술적인 면보다 오히려 정신적인 면에서 매우 감화를 주었다.

그러나 그라나도스는 이윽고 파리 음악원의 시험을 치르려고 바르셀로나를 떠난다. 때마침 장티푸스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음악원의 교수 샤를 드 베리오 밑에서 1889년 바르셀로나로 돌아오기 전까지 2년간 열심히개인 레슨을 받았다. 귀국후에는 우선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얻었다. --빛나는 데뷔곡목은 당시의 '현대음악인'인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이었다--후에는 작곡에 주력하여 25세 때부터 수년간에 걸쳐서 작곡한 <12개의 스페인 무곡>으로 널리 주목받는 존재가 되었다. 이 곡을 착수한 1892년은 또 그가몇 살 아래인 안팔로 갈과 열애 끝에 결혼한 해이기도 하다. 1898년 31세 때에는 오페라 <마리아 델 카르멘>을 성공리에 바르셀로나에서 상연하여 발판을 확고하게 다졌다.

그 후에도 그는 늘 카탈로니아의 수도인 바르셀로나에서 살았는데 음악에도 상당한 전통이 있는 이 도시에서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는 존재가 되었다.1900년대로 들어서자 '아카데미아 그라나도스'를 세워 많은 젊은 피아니스트와 작곡가를 길러낸 것도 특필할 만하다. 피아노의 수제자중 프랑크 마샬(1883-1959)은 탁월한 기량의 소유자로서 스승의 사후 '아카데미아'를 이어받아 오늘날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알리시아 데 라로차와 같은 걸출한 '그라나도스의 제자의 제자'들을 낳고 있다.

한편 그라나도스는 이따금 파리로 가서 연주회를 개최하여 꽃의 도시에서도 많은 팬을 만들었다. 만년이 되는 1914년 (47세)에는 플레이엘 음악당에서 자작만의 연주회를 열어 절찬을 받고 프랑스와 스페인 양국의 문화 교류에 진력한 扁管?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이 영예 속에 비극의 싹은 숨어있었다. 이 때 연주한 모음곡 <고예스카스>(1911년 완성)의 평판은 대단히 높고 이를 오페라로 개작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나왔다. 그라나도스도 그럴 마음이 들어 단기간에 피아노용 모음곡을 2막의 오페라로 개작하였다. 그로서는 그 것을 인연이 있는 파리에서 초연하고 싶어했지만 때마침 발발한 1차 세계대전(1914-1918)때문에 그 뜻은 좌절되고 말았다. 스페인은 이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주요 교전국인 프랑스는 도저히 오페라 같은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게 된 것이다. 그럴 때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으로부터 이야기가 왔다. 예의 초연을 기필코 뉴욕에서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라나도스는 승낙했는데 꼭 동부인해서 초연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에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공수증(恐水症)이라고 할 만큼 물을, 특히 바다를 싫어했고 언젠가 마요르카 섬까지 가는 겨우 몇시간의 뱃길에서도 선실에 틀어박혀 가만히 시계만 들여다보면서 있었을 정도였으니까(덧붙여 말하자면 여객기가 등장한 것은 훨씬 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결국 그라나도스 부처는 여섯 아이들을 바르셀로나에 남겨두고 뱃길을 떠났다. 1916년 1월의 일이다. 보람이 있었던지 뉴욕에서의 초연은 예상을 상회하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때문에 그라나도스 부처의 미국 체재는 길어졌다. 화이트 하우스에서 꼭 연주를 해달라는 초청이 있어서 그라나도스는 예정한 스페인으로의 직행 기선을 취소했는데 결국은 그 것이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었다.

3월에 들어가서 겨우 부처는 귀로에 올라, 런던 경유 영불 해협을 건너가는 서섹스호 라는 배를 탔다. 그 때 부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배안에 있던 피아노로 남편은 어느 때와 같이 즉흥연주를 했으며 아내는 듣고 있었다고도 한다. 또는 긴 여행을 무사히 끝내고 이제 조금만 있으면 아이들과 만나게 될 행복감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고도 한다.---갑작스런 굉음, 충격,두 사람은 삽시간에 차디찬 파도속에 내던져 졌다. 절망적으로 허위적 거리던 중 그라나도스는 일단 구명정 위에 끌어올려지려고 했다. 그러나....그의 눈에 비친 것은 물 속으로 가라앉으려는 아내의 모습이었다. 그는 정신없이 물 속으로 몸을 던져 두 사람은 얽히듯이 어두운 물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그라나도스, 스페인에 새로운 명예를 안겨다준 작곡가는 독일 잠수정의 무차별 공격에 처참하게 희생되어 1916년 3월 24일 만 48세 8개월의 목숨을 끝낸 것이다.--그라나도스의 절친한 친구 알베니스의 생애와 비교해 보시라.....

그리고 그라나도스 만큼 사람들의 애도를 받은 음악가도 적을 것이다. 스페인 친구들만이 아니라 모름지기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그라나도스는 사랑받고 있었다. 용모부터가 그는 틀림없는 예술가이며 그리고 순진한 동심을 안은 몽상가의 향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의 뛰어난 여자 제자의 한사람이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마드리겔라(한 때의 안드레스 세고비아의 부인)는 스승의 얼굴 모양을 '아랍인과 천사의 혼혈아'라고 표현하고 있다. 타원형의 잘 다듬어진 윤곽, 멋진 곱슬머리, 잘 생긴 이마와 코,좌우로 뻗은 수염,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을 끌어들인 것은 유달리 큰 눈이었다. 그 눈을 지긋이 감은 채 꿈꾸는 듯한 소리로 그는 말을 했다. 보통 때는 말수가 적었지만 친한 친구끼리나 가족들과는 곧잘 농담을 하고 웃기기도 잘하는 밝은 사람이었다. 비록 신경질적이고 어두운 면은 있었다고 해도 밖으로는 잘 나타내지 않았다.

우선 그는 음악에 매혹된 사람이었다. 일단 영감에 사로잡히면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외출할 때는 말끔히 풀을 먹인 와이셔츠를 입고 나가지만 돌아왔을 때는 그 왼쪽 소매가 검게 변해있는것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길을 걸어가다 문득 떠오른 악상을 흰 것이면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악흥(樂興)의 번적임은 때를 가리지 않는다. 자신의 '아카데미아'에서 렛슨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갑자기 열중해서 피아노를 치곤 하여 생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 뿐인가. 같은 일은 연주회 중에도 일어났던 것이다....수제자 프랑크 마샬의 추억담을 여기에 적어둔다.

그라나도스가 바르셀로나에서 신작 피아노곡의 자연(작곡가가 연주함) 리사이틀을 가졌던 때의 일이다. 마샬은 악보 넘기는 역을 맡고 있었는데 갑자기 음표를 잃고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 버렸다. 눈앞의 필사악보의 표와 지금 스승이 황홀해서 타고 있는 음악이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그라나도스는 환상의 날개를 오므리고 씌어진 음표 위로 돌아왔기에 마샬은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고 페이지를 넘길 수가 있었다. 곡이 끝나자 그 사실을 모르는 청중들은 훌륭한 '신곡'의 탄생에 보내는 뜨거운 박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무대를 떠나는 그라나도스에게 마샬은 "정말 놀랐습니다"하고 조금전에 당황했음을 말했다. 그런데 그라나도스는 "아, 그랬던가"하면서 마치 딴 사람의 일이라도 되는듯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고 한다.

또 이런일도 있었다. 어느날 친구들이 모여있는 곳에 전에 없이 꿈꾸는 듯한 몽롱한 눈빛으로 그라나도스가 들어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아.~~ 지금 길에서 아주 아름다운 사람과 지나쳤어.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그래 이러한 사람이야....."하면서 피아노 앞에 앉은 그는 그야말로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넋을 잃고 황홀하게 듣지 않을 수 없는 그지없는 아름다운 즉흥곡을 연주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그라나도스는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단히 민감한 사람이어서 비서역이었던 호세 알테르에 의하면 더러는 레슨 날짜를 미루고까지 누군가와 '데이트'를 즐긴 일도 있었던 모양이다. 다만 그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고 향기를 마시는 것이 좋아서일뿐 언제나 결국은 누구보다도 소중한 아내 안팔로의 곁으로 돌아갔다. 아들 딸 셋씩 6남매--그 중 장남 에두아르도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작곡에 재능을 보였으나 1928년 겨우 33세로 타계--의 어머니가 된 안팔로는 둥근얼굴에 남편에 지지않을 만큼 큰 눈을 가진 마음이 유순한 부인이었다. 남겨진 편지 묶음에서도 엔리케에 있어서 안팔로는 '영원한 연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이 서로 끌어안고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은 것도 역시 숙명이었음이 틀림없으리라.

여섯 아이들에게도 아버지 그라나도스는 아낌없는 애정을 쏟았다. 아니, 친구의 한사람이 말했듯이 그라나도스의 타고난 따뜻한 성품은 가곡이나 친구들에게만 쏟는 것이 아니다. '전 세계를 향해서 샘솟듯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고아였으나 그라나도스가의 서생으로 있게된 호세 알테트는 노령이 된 후에도 그 때의 고마음에 볼을 붉히며 <그라나도스 전>(1956년 마드리드 출판)의 저자 A. 페르난데스=싯드 에게 말했다고 한다--자기는 언제나 친자식이나 아우나 다름없는 보살핌을 받았고 결혼식도 마에스트로의 제자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생각도 못할 만큼 호화롭게 치르게 해주었다고 술회했다.

또한 호세는 이러한 회상도 이야기하고 있다--어느 날 마에스트로는 전에 없이 풀이 죽은 듯 밖에서 돌아오자 머리를 떨구고 주저앉아 버렸다. 한참 후, 호세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그라나도스는 그 날 거리에서 어느 초라한 사람으로부터 구걸을 요청 받고 사연을 들으니 너무 딱해서 가진 돈을 다 주어 버렸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그 돈은 가족이 앞으로 한주일 살아가야 할 돈이었던 것이다....(이렇게 쓰고 있으니 내 마음의 귀에는 모듬곡 젊은날의 이야기>중의 <구걸하는 여인>이나 <고아>의 애절하고 다정한 떨림이 와 닿아 이 에피소드가 정말로 있었던 일이라고 믿게된다.)

그런데 그라나도스의 음악 역시 알베니스의 경우와 같이 가지 가지의 에피소드가 말해주는 인품의 반영임에 틀림없다. 그라나도스가 특히 힘을 기울인 피아노곡에는 뭐니뭐니해도 초기의 출세작 <(12개의) 스페인 무곡집>과 후기의 대표작 <고예스카스(고야의 그림풍의 정경집)>를 꼽을 수 있다. <스페인 무곡집>은 가장 많이 연주되고 기타, 오케스트라, 그 밖의 편곡도 많으므로 이들 작품에 친숙한 분도 적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유명한 제 5번 <안달루사 (플라이에라)>, 제 10번 <슬픈 무곡>, 제 2번 <오리엔탈>등은 한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는 멜로디이며 또 결코 싫증도 나지 않는다. 그라도스 일류의 기품이 거기에는 담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밖에도 제 4번 <비야네스카>,제 65번 <호타(론데야 아라고네사)>,제 7번 <발렌시아나>, 제11번 <삼브라-zambra>등, 꼽아보면 모든 곡들이 잊을 수 없는 면을 갖추고 있다.

거의 모든 주제, 모든 프레이즈에서 스페인을 실감할 수 있는데 그러면서도 민요나 무곡의 원형을 그대로 집어넣는 안이함이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타고난 '스페인적'인 감성이 참다운 독창성과 선명하게 양립하고 있다. 구성면에서 말하면 어느 곡이나 모두 단순 소박한 이 무곡집이 시대를 초월하여 계속 빛나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거의 같은 시대, 아니면 조금 먼저 작곡된 알베니스의 중기의 뛰어난 작품과 아울러 이 곡집은 틀림없이 '스페인 민족주의 악파'의 대두와 확립을 유럽 악단에 보여주는 것이 되었다. 생상스나 퀴의 찬사가 남겨져 있는 것으로도 발표 당시 이 곡집이 얻은 높은 평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무곡집의 또하나의 좋은 점은 간결한 필치 속에 표시된 정확함이다.

한편 후기 (1911년)에 완성된 <고예스카스>는 명쾌한 <스페인 무곡집>과는 달라서 대단히 복잡하고 고도한 멜로디 라인의 짜맞춤으로 되어 있으며 음영이 짙은 아름다운 모음곡이다. 제 1집 <사랑의 말>,<창너머 이야기>, <등불의 판당고>.<탄식 또는 마하와 밤꾀꼬리>, 제2집 <사랑과 죽음>, <에필로그 /유령의 세레나데>--이상의 6곡은 모두 고야의 그림에서 받은 인상에 의해서 태어났다. 아니 보다 좋게 말하자면 '초(超)'자가 붙는 로멘티시스트인 그라나도스가 일생동안 사모하고 있던 '고야와 그 시대'에 보내는 음으로 쓴 사랑의 글이었다. "나는 고야의 마음과 팔레트에 반했다"라고 그라나도스는 편지에 쓰고 있다. '그와 알바공작 부인에게, 그의 모델들에게, 그 싸움에, 정사에, 사랑의 말에, 장식용 끈이 달린 검은 빌로드나 비단 레이스에 비치는 볼의 백장미, 유연한 허리, 진주 같은 손, 흑옥같은 머리결에 꽂은 자시민이 나를 매혹시켰다"라고. 그라나도스가 마음을 쓴 것은 고야라고 하는 복잡한 화가의 로멘틱하고 풍속적익 감미로운 일면에 대해서 였다고 일단은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동시에 그를 진정으로 끌어들인 것은 고야의 붓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어둑어둑한 숙명의 냄새였다.

가장 잘 알려진 <마하와 밤꾀꼬리>를 비롯하여 이 모음곡 전체에 넘치는 무한한 탄식과도 같은 도취감과 애수는 달리 없다. 미묘하게 반음계 취향을 집어 넣은 선율선과 화성 때문에 첫인상이 수수하게 느껴질런지 모르지만 두 번, 세 번 들을 수록 다시 없는 매혹에 마음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스페인의 민족색과 그라나도스 고유의 꿈의 빛깔이 여기에서 절묘하게 융합되고 있으니까.

그라나도스의 작풍에는 지금까지 말한 바와 같이 민족적인 특색과 순수한 로멘티시즘의 색채가 상반하고 있다. 이들 두 가지 요소는 <고예스카스>이전의 작품에서는 오히려 따로따로 나타나는 일이 많았다. 특히 민족색이 짙은 작품인 <스페인 무곡집>과 함께 들 수 있는 것은 <스페인 민요에 의한 6개의 소품>(실제로는 <전주곡>을 포함한 7개의 소품)인 것이다. 그 중 <삼브라>나 <사파테아토>등은 <스페인 무곡>의 다른 작품들 처럼 소박하면서도 강한 힘으로 스페인으로의 꿈을 느끼게 하는 일품이다.

한편 쇼팽에의 심취--그라나도스는 언젠가 말했다. "나는 쇼팽의 '쇼'만 들어도 아주 황홀해져 버린다"라고--를 말해주는 로멘틱한 작품으로는 그 이름도 <로멘택한 정경>이라고 하는 모음곡(부제:마주르카)를 위시하여 <시적인 왈츠집(!!)>,<연주회용 알레그로>, <시적인 정경(2권)>, <젊은날의 이야기>등이 곧 생각난다. 위에서 열거한 작품 중 후자의 두 모음곡은 쇼팽 이상으로 슈만을 상기시키는 필치로 쓰여있는데 그 정취는 결국 그라나도스 개인의 것임에 틀림없다. 위와 같이 '지나치게 낭만파풍'인 작품이 낳은 것은 '근대적 민족주의자'인 그라나도스에 있어서 하나의 약점으로 간주되는 것이 종래는 보통이었다. 나는 감히 거기에 의견을 내 놓고 싶다. 천성적으로 '멋진 시정'을 싣고 달리는 그라나도스의 마차는 낭만주의와 민족주의 의 두바퀴를 가지고 있었다. 만일 민족주의자로서의 면만 중시하고 로멘티스트로서의 면을 경시한다면 마차는 엎어지고 말 것이다. 그라나도스의 로멘티시즘은 설령 늦게 피었다 치더라도 그 때문에 독자적인 향기를 간직한 꽃인 것이다.--"그라나도스야 말로 가장 본질적인 창조자이다.....한마디로 말하면 가장 천재적이며 가장 섬세한 시정을 갖춘 작곡가이다. 더욱이 그는 독학이었다. 그는 ...우리들의 슈베르트이다."라고 말한 파블로 카잘스의 감상은 이 작곡가의 민족적인 작품만이 아니고 순수하게 낭만적인 작품에도 역시 유효하다고 나는 믿고 싶다. 또한 대 첼리스트가 여기서 슈베르트를 예로 삼은 것은 그라나도스가 우선 무엇보다도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작곡가--피아노곡을 비롯해서 기악곡을 쓸 때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납득이 간다.

지금 말한 여러 작품 외에 피아노곡에서 잊을 수 없는 것중에는 모음곡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또 하나의 <고예스카>(고야풍의 정경) 인 <엘 페레레--(짚으로 만든 인형)>, 어미니에게 바친 <무어풍의 무곡과 아랍의 노래>,많은 신비를 담고 있는 <느린 무곡(단사 렌타)>,산뜻하게 다듬어진 <풍경>등을 꼽을 수 있다.

그라나도스의 작품 중 피아노곡에 이어 중요한 것은 가곡 장르이다. <고예스카스>의 어디까지나 정치하게 뽑아진 꿈의 누에고치에서 가늘고 아름다운 실을 뽑아 그 담백한 것이 오히려 멋진 무늬의 편물같은--그러한 취향을 담고 있는 것이 12편으로 된 가곡집 <토나디야스>(1912년)이다. '고풍스러운 스페인 가곡집', '스페인의 멋진 노래집'등으로 번역되는 이 엘범에는 <고예스카스>와 같은 마하(뒷골목의 멋진여자)와 마호(멋장이 남자)의 애환이 그 고풍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듣는동안 어느새 감동하게 되는 방법으로 새겨져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16,17세기의 스페인의 옛시를 추려서 곡을 붙여 우아한 로멘티시즘의 물방울이 떨어지게 하는 <사랑의 가곡집>--(칸시오네스 아마토리아: 전 7곡 1914년).

한편 무대 음악으로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피아노 모음곡에서 편고간 만년의 오페라 <고예스카스>외에 중기의 가작으로 상연할 때 평판이 높았던 <마리아 델 카르멘>,카탈로니아 어의 대본에 의한 '서정가수'(사르수엘라)이 많이 있다. 아쉬운 것은 오늘날 이들이 거의 등한시 되고 있다는 점인데 반드시 재평가의 기회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 밖의 분야에서는 이를테면 그로서는 드문 본격적인 관현악곡(1부에 독창이 들어있지만)인 교향시 <단테>,생각 외로 실내악 연주를 좋아한 그의 일면을 생각케 하는 <피아노 5중주곡>, 절친했던 친구 자크 티보에게 헌정했으며 아마 티보와 듀오로 연주한 것이 틀림없을 <바이올린 소나타>등이 생각난다. 한정된 외국판 레코드 (위에 열거한 세곡은 이상하게도 스페인판이 아니다)로 들어본 바로는 어느것이나 다 그라나도스 특유의 섬세하고 깊은 시정에 찬 것으로서 언젠가는 그의 작품의 전모를 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하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