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랑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라단조 1923년 뿔랑이 에드몽 드 폴리냑 왕비로부터 작곡을 의뢰 받아 3개월 만에 완성시킨 곡으로 노래를 만들어 내는 매력적인 선율, 판타지의 풍부한 화성, 조성에 있어서 뉘앙스가 풍부한 자유로움 등이 일체가 되어 즉흥적인 외형 속에 미묘한 균제감을 갖추고 있다. 이 작품은 뿔랑의 최대 특징인 순수한 선율의 조형적인 아름다움이 잘 나타나고 있는 반면 뿔랑의 초기 작품의 희열에 찬 감성이 점점 가라앉고 일종의 카오스적인 면모가 나타나 있다.
Francis Poulenc (1899-1963) 1.프랜시스 뿔랑의 음악적 삶 프란시스 뿔랭은 20세기 전반기에 프랑스 음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피아노 수업으로 음악의 길에 들어선 뿔랭은 이후 작곡가로서 성장하면서 다양한 장르에서 수많은 작품을 양산하였다. 그는 "세속음악"과 "순수음악" 이라는 이분법적 경계를 허물었고, 영화음악 작곡에 몰입하기도 했으며, 경음악과 종교음악을 동급으로 취급하여 병행하여 작곡한 인물이었다. 뿔랭은 마가렛 롱과 에디트 피아프에게 곡을 헌정하기도 하였고 화가인 피카소와 브라크 그리고 야콥, 아폴리네르, 엘리아르, 아르곤 등 당대 유명 시인들과 교류하였다. 자신의 전공분야 외에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관심과 소양을 과시하곤 하는 프랑스 인테리겐챠의 전형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뿔랭은 독실한 카톨릭 교도이며 의약품 제조업을 하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1899년 1월 7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탁월한 피아니스트였으며, 그의 외숙부는 연극 애호가였다. 그러니까 그의 예술적 재능은 외가 쪽에서 전수된 듯 여겨진다. 뿔랭은 5세 때부터 그의 모친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고 모차르트, 슈베르트, 쇼팽, 슈만의 음악을 공부하며 성장하게 된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곧 바로 발휘되어 7살 때 이미 첫 작품, 뿔랭은 1917년에 자신의 본격적인 첫 작품인 ''흑인 랩소디''(Rhapsodie ngree)가 성공적으로 초연되면서 작곡가로서 순조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이 작품의 성공은 당시 프랑스에 밀어닥친 ''원시음악''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도 연관이 있었다). 하지만 뿔랭은 그 이듬해 (1918)에 군에 입대하게 된다. 군 복무 기간에도 그의 작곡 활동은 계속되어 그는 동년 12월에 (그의 피아노 곡 중에서 널리 알려진) ''3편의 無窮動''(Trois Movements Perpet tuels)을 작곡한다. 이 곡은 그의 스승 비네에 의해 1919년 파리에서 초연되었으며, 이후급속도로유행하게 된다(뿐만 아니라 비네는 뿔랭의 초기 피아노 곡 대부분을 초연해 준다). 1919년 2월에는 아폴리네르의 시를 텍스트로 한 가곡집 ''동물시집''이 발간되었다. 1921년 10월, 군대를 제대한 뿔랭은 미요의 권유 하에 샤를르 케크랑(Ch. Koechlin)에게서 작곡의 기초를 배우기 시작한다. 바하의 코랄 분석부터 시작한 이 수업은 1924년까지 지속되며, 뿔랭은 ''아카펠라'' (A capella) 기법에 숙달하게 된다. 1918년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르''가 파리에서 초연되자 ''6인조''는 쇤베르크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는 미요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방문하여 빈에서 쇤베르크와 베베른, 베르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의 이태리 여행에서는 알프레도 카젤라를 비롯한 많은 이태리 작곡가를 만나고 로마, 나폴리, 시칠리 섬 등을 방문한다. 이 여행에서 만들어진 곡이 피아노 모음곡 ''나폴리''이다(이 곡은 1925년에 출판된다). 1924년은 그에게 결정적인 성공을 가져다 준 해였다. 한 해전에 작곡한 발레 모음곡 ''암사슴''(Les Biches)이 디아길레프 발레단에 의해 1월에 몬테카를로에서 초연되고, 이 작품이 청중들은 물론이고 비평가들로부터도 최고의 찬사를 받은 것이다. 그 뒤로 피아노 곡과 가곡 작곡이 뒤이어 졌으며 1929년에는 당대 최고의 쳄발로 주자로 꼽히는 란돕스카(W. Landowska)의 권유로 쳄발로를 위한 ''전원 협주곡''(Concert champetre)를 쓰기도 하였다. 1936년과 37년에는 ''아카펠라 합창을 위한 7개의 샹송''과 무반주 ''미사''가 차례로 발표되었다. 2차대전동안에 불란서가 독일 나치군에 의해 점령당하자 그는 음악적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의 ''저항''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1943년에 작곡된 두 편의 작품, Lorca를 기념한 바이올린 소나타 ''C''와 폴 엘리아르(Paul Eduard)의 시를 텍스트로 하여 작곡한 무반주 이중 합창 모음곡, 그중에서 1962년에 작곡한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는 베니굿맨의 청탁에 의한 것이며, 1955년에 죽은 6인조(Les six)시절의 동료였던 아르튀르 오네게르를 추모하기 위한 작품이다. 운명의 아이러니라 할까? 뿔랭은 이 곡을 쓴 이듬해 1월 30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이 곡의 초연은 뿔랭 자신의 추모 연주회가 되어버렸다. 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독신으로 보냈지만, 그의 주위에는 언제나 조언과 지지를 아끼지 않는 오릭을 비롯한 좋은 동료들과 존경의 대상으로 삼았던 예술가들이 있었다.
2. 뿔랑의 작품 및 음악적 특징. 뿔랭의 작품은 매우 다양한 장르를 포괄하고 있다. 이미 어려서부터 피아노 음악을 비롯하여 140곡에 이르는 리트, (때로는 성악 성부가 동반된) 실내악 및 무대 음악을 작곡하였으며 1935년 이후부터는 영화음악에도 손을 대고 1944년부터는 오페라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음악과 종교음악 분야에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뿔랭의 성악 작품은 노래 성부가 언제나 쉽게 이해되도록 쓰여졌으며, 그의 기악 작품의 악곡 구성은 매우 투명하고 세련되면서도 단순하였다. 이것은 사티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2차세계대전에 대한 느낌 하에 작곡한 무반주 이중합창곡, 뿔랭 음악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 요소는 선율이라고 할 수 있다. 뿔랭은 선율의 흐름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와 음악의 형식을 결정짓는 요소로 삼았다. 그의 음악은 오케스트라 작품이던 또는 현악 작품이나 성악 작품이던 간에 언제나 성악적이었다. 한마디로 뿔랭은 포레, 드뷔시 그리고 라벨의 뒤를 이어 프랑스적 선율을 심화시킨 작곡가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음절의 장단, 억양, 음조 등에 관한 운율론에 대한 자신의 분명한 느낌을 구사하였다. 즉 아주 소소하고 섬세한 뉘앙스에 이르기까지 매우 정확하게 운율을 다루었다는 말이다. 그의 탁월한 재능이 합창 음악에서 발휘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음악사에서 바르톡이 타고난 현악 작품의 작곡가로서 칭송되듯이, 뿔랭은 타고난 성악 작품 작곡가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의 음악은 선의 투명함을 지니고 있고 거기에는 기품과 우아함이 깃들어있다. 뿔랭의 음악은 매우 세련되고 직접적이다. 드뷔시는 "음악은 겸허하게 기쁨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뿔랭은 이 격언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의 음악은 언제나 음향적 기쁨이 전면에 부각되어 있다. 그렇다고 그의 음악에 깊이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기품, 명료함, 음향에서의 감성적 기쁨 등이 느껴지지만, 그 배후에는 공포, 감정, 비극 등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뿔랭의 세속 음악과 실내악 작품은 기품과 멜랑콜리, 경쾌함과 진지함, 즉흥성과 세련됨이 어우러져 프랑스 음악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비록 뿔랭만의 유일한 것이 아니지만, 프랑스 음악의 전통적 맥을 이어가면서 가장 현대적으로 재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뿔랭은 사티보다 더 자주 타인의 작품을 차용하기도 하고 혹은 연상시키는 수법을 구사하였다. 그의 작곡 경향에는 사티와 라벨의 영향이 엿보이지만 고전적인 화성과 리듬 그리고 비교적 규칙적인 주제 구성을 구사함으로써 "신고전주의"로 분류되곤 한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 특유의 정서를 그려냄으로써 민족주의적 색채도 지니고 있다. 그가 존경하던 작곡가로는 스트라빈스키(I. Stravinsky), 비제(G. Bizet) 그리고 카브리에르(E. Chabrier)였다.
3. 6인조 ''6인조''(Groupe des Six 또는 Les Six)란 에릭 사티(Eric Satie: 1866-1925)를 음악적·정신적 스승으로 하고 루이 뒤레(Louis Durey: 1888-1979), 조르즈 오릭(Georges Auric: 1899-1983), 아르튀르 오네게르(Arthur Honegger: 1892-1955), 제르멘 타유페르 (Germaine Tailleferre: 1892-), 프란시스 뿔랭(Francis Poulenc: 1899-1963) 그리고 다리우스 미요(Darius Milhaud: 1892-1974)의 불란서의 진보적인 젊은 작곡가로 구성되는 그룹을 일컫는 용어이다. 6명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일명 ''6인조''로 일컬어졌다. 불란서의 저명 문필가인 장 콕또(Jean Cocteaus: 1889-1963)는 1918년에 ''수탉과 아를르캥''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서 이들을 소개하면서 이들의 음악적 이상, 즉 독일의 ''바그너주의''를 거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드뷔시의 "인상주의"가 지니는 모호성에 대해서도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이들의 공동 목표는 인상주의의 모호성이나 상징주의의 암시성에서 벗어나 보다 간명한 선율과 대위법으로의 복귀, 구조적 정확함 등으로 특징지어 진다. ''6인조''라는 명칭은 그후 1920년에 음악평론가인 앙뤼 콜레트(Henri Collet: 1879-1943)가 ''코메디아''(Comoedia)라는 잡지에 러시아의 ''5인조''에 빗대어 ''6인조''라는 명칭을 사용한 이후부터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6인조는 1920년에 각 1악장씩 작곡하여 함께 묶은 6악장의 조곡을 발표하여 신문의 문화면을 요란하게 장식하였다(그러나 곧 바로 뒤레의 이탈로 그룹은 해체의 과정을 밟아간다). 1921년에는 나머지 5명이 장 콕토와의 공동작업으로 발레곡, ''에펠탑의 신혼부부''(Les mari s de la Tour Eiffel)를 작곡·발표하기도 하지만, 이들마저도 곧 바로 미학적 견해 차이로 인하여 그 결속력이 느슨하게 되며, 각기 제 갈 길을 가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혁명적 정신은 곧 잘 러시아의 ''5인조''에 비유되며, 이들이 개척한 음악어법은 드뷔시, 라벨 이후의 오늘날의 프랑스 음악에 가장 크게 부상하는 주류를 이루고 있다. 글 : 인터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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