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노르웨이.....

노르웨이 화가- 뭉크

나베가 2006. 8. 3. 20:27

Edvard Munch (1863~1944)
Notte bianca (White Night), 1901

Nasjonalgalleriet, Oslo


 

 

1863. 12. 12 노르웨이 뢰텐~1944. 1. 23 오슬로 근처 에켈리.

노르웨이의 화가·판화가.
[개요]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주제를 강렬하게 다룸으로써 보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감정을 자아내게 하는 그의 기법은 20세기초 독일 표현주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 〈절규 The Cry〉(1893)는 실존의 고통을 형상화한 초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뭉크가 제작한 석판화 〈자화상〉(1895)
E. Munch가 제작한 채색목판화 〈The Kiss〉(1902)


[초기]

뭉크는 노르웨이의 정치와 문화에 이바지한 명문가에서 5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가 5세 때 결핵으로 죽었다. 10년 뒤에 누나도 같은 병으로 죽었고, 누이동생은 정신병에 걸렸다. 아버지와 남동생도 뭉크가 어렸을 때 죽었다. 어린시절을 가득 채운 죽음의 공포와 죽음에 이르는 질병이 주는 불안은 평생동안 그를 사로잡았고, 그의 작품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병든 아이 The Sick Child〉(1888,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미술관 소장)·〈죽음의 방 The Death Chamber〉(1892, 오슬로 뭉크 미술관 소장)·〈죽음의 침상 곁에서 By the Death Bed〉(1895, 노르웨이 베르겐의 라스무스 마이어스 컬렉션 소장)·〈죽은 어머니 Dead Mother〉(1899, 독일 브레멘 미술관 소장) 같은 작품은 그가 어렸을 때 받은 죽음의 인상이 반영된 수많은 그림과 판화들 가운데 일부이다.

뭉크는 어릴 적부터 그림에 타고난 재능을 보였지만, 정식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다. 그는 오슬로 크리스티아니아에 있는 미술·공예 학교에 잠시 다녔다. 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노르웨이의 중요한 자연주의 화가 크리스티안 크로그(1852~1925)는 뭉크를 지도했으며 그에게 프랑스의 인상주의를 소개했다. 뭉크가 1885년에 처음으로 파리를 여행한 뒤에 그린 〈저녁 시간 The Evening Hour〉 같은 그림들은 인상주의 양식을 보여주었다. 뒤이어 그당시의 프랑스 미술과 접촉한 것은 그의 표현 양식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켜, 1890년경에는 아르누보 디자인만이 아니라 폴 고갱과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같은 프랑스 화가들의 후기 인상주의 작품에도 영향을 받았다. 인상파 양식인 〈봄날의 카를 요한 거리 Spring Day on Karl Johan Street〉(1891, 라스무스 마이어스 컬렉션 소장)와 표현주의 양식인 〈저녁 때의 카를 요한 거리 Evening on Karl Johan Street〉(1892, 라스무스 마이어스 컬렉션 소장)의 대조가 이러한 표현 양식의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뭉크가 젊은시절을 보낸 크리스티아니아는 작은 지방 도시였는데, 그는 이 도시를 다스리는 상류계급이 편협하고 독선적이며 문화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고 진부하다고 생각했다. 뭉크는 일찍부터 사회적 행동과 도덕 및 예술에 대해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자유분방한 사람들과 사귀게 되었다. 이런 환경은 인습의 굴레에서 그를 해방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뭉크의 미술은 성(性)과 사회적 상황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뭉크는 스칸디나비아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과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노르웨이의 소설가 크누트 함순,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를 비롯한 중요한 작가들을 많이 사귀게 되었다. 그는 헨리크 입센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특별한 친밀감을 느끼고, 입센의 〈왕위를 노리는 자들 The Pretenders〉에 삽화를 그렸으며 〈헤다 가블러 Hedda Gabler〉와 〈유령 Ghosts〉을 상연할 때는 무대장치를 설계하기도 했다.

1892년에 뭉크는 베를린 예술가들의 단체인 베를린 예술가 협회의 초청을 받고 독일에서 그림을 전시하게 되었다. 45점의 그림을 출품한 이 전시회는 11월 5일에 열려 1주일 만에 막을 내렸다. 이 작품들의 강렬한 정서와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분방한 회화적 형상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독일 언론에서는 뭉크의 작품을 둘러싸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으며, 이 논쟁은 예술표현의 자유에 대한 투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뭉크의 표현주의는 곧 인정을 받았고, 그는 주 거처를 베를린과 파리로 삼으며 유럽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1890년대에 독일에서 되살아난 그래픽 아트의 영향을 받은 그는 1894년에 판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에칭·석판화 및 목판화 등을 다룸으로써 가장 중요한 현대 판화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판화는 특히 단순하고 솔직한 형상으로 유명하며, 그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이 강한 주관성이 두드러졌다.


[후기]

뭉크가 베를린에서 첫번째 개인전을 열었을 때부터 1908년 신경쇠약에 걸릴 때까지의 16년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무서운 신경성 강박증에 시달렸다. 그는 구불구불한 선을 사용한 양식으로 인간 실존의 고통과 불안을 표현했다. 뭉크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절규〉는 현대인의 정신적 고뇌를 상징한다. 이 작품은 20세기초의 독일 표현주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격정적 감성과, 현대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주요작품인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 Guernica〉(1937,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 소장)에서와 같은 강렬한 현실감각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1910년부터 뭉크는 노르웨이에 정착했다. 악의에 가득찬 세계와 자신의 정열에 희생당하는 개인을 묘사한 초기작품은 자기 소모적이고 내성적인 측면을 갖고 있지만, 후기 작품에는 삶의 기쁨과 자연의 풍요로움 및 인간과 자연의 친화가 그것을 대신하고 있다. 뭉크에게는 자연과 직접 접촉하는 것이 항상 중요했고, 이러한 접촉은 자유롭고 대담하며 힘찬 화풍으로 그린 수많은 풍경화에 표현되어 있다. 이 그림들의 색채가 더욱 화려하고 풍부해진 것은 그가 보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된 것을 나타낸다. 이 시기에 그가 그린 가장 중요한 작품은 오슬로대학교의 아울라(축제를 여는 큰 방)에 그린 벽화였다.

말년에 뭉크는 판화 제작을 그만두고, 오슬로 근처에 있는 집에서 홀로 지내며 지칠 줄 모르는 정력으로 죽을 때까지 계속 그림을 그렸다. 뭉크는 그가 갖고 있는 부동산뿐 아니라 그림과 판화 및 소묘 작품도 모두 오슬로 시에 기증했으며, 오슬로 시는 1963년에 뭉크 미술관을 설립했다.


[평가]

뭉크는 19세기 자연주의 회화의 경직된 아카데미즘에 반기를 들고, 20세기 표현주의의 선구자인 인간적인 미술을 탄생시켰다. 당대의 한 인물은 그를 '노르웨이 최초의 인상파 화가이자 유일한 인상파 화가'라고 묘사했다. 뭉크는 26세에 쓴 글에서 "나는 숨쉬고 느끼고 괴로워하고 사랑하는 사람, 즉 살아 있는 사람들을 그릴 것이다. 사람들은 이 작업의 신성함을 이해할 것이고, 교회에 있을 때처럼 모자를 벗을 것이다"고 말했다. 인간 조건에 대한 그의 미술적 표현은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는 강렬한 힘을 갖고 있다. 이 호소력은 그를 노르웨이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초기 현대 미술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A. S. Moen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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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미디어

뭉크

절규.

 

뭉크작품-불안에 대하여
생(生).사(死).애(愛).증(憎)에 넓은 공감대(共感帶)
뭉크는 1890년 도라 라우젠 과의 연애로 고민과 알콜에 의해 더욱 심화되어지면서 신경 쇠약 상태가 한때 계속 되어지기도 하는데,
공허한 듯하면서도 무엇의 의미를 찾으려는 기묘한 눈을 크게 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검은 옷의 군상(群像)의 표정은 뭉크의 자주 다루어진 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면성(正面性)에 대하여 혹간 말하기를 분열병 심리에서의 표현성, 친화성(親和性)이라고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나, 뭉크의 근원적인 위문이나 불안이 이와 같은 일련의 작품을 창작토록 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저녁놀을 배경으로하여 나타난 산과 들에서의 곡선적 효과는 불안한 감정을 더욱 강하게 느끼도록 한다. 유화에서 뿐만 아니라 목판화에서도 동일한 내용의 표현을 많이 남기고 있다.

원어명? Life Anxiety 생의 불안

종류? 유화
크기 ?

제작년도? 1893년

소장?

에드바르 뭉크 Edvard Munch (1863.12.12~1944.1.23)



노르웨이 상징주의 화가인 뭉크는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불안, 공포 등 정신적 동요를 그림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고호보다 심도있게 사물에 대한 인간의 감정을 탐구하였으며 불우하고 추한 인간의내면에 대한 연민을 길게 파도치는 선과 강한 색면으로 표현하였지요.뭉크는 요람에서부터 죽음을 안 사람이라고 스스로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누이의 죽음도 지켜봐야 했는데
정신적으로 나약한 형제들, 신경질적인 아버지.
유년 시절의 어두운 기억은
뭉크의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되었습니다.
그의 삶이 불행하고 어두웠던 만큼 그의 작품이 갖는 주된 테마는 죽음과 사랑이었습니다.
뭉크는 자신의 생애 동안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끊임없는 갈등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1893년부터 1908년까지 뭉크는 독일에서 생활했습니다.이 시기에 제작된
<생명의 춤>, <절규>, <흡혈귀>, <죽음과 소녀> 등은 뭉크 자신만의 개성으로
다른 상징주의 화가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노르웨이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 겸 판화가. 일생 동안 삶과 죽음, 사랑과 관능, 공포, 질투, 고립감 등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개인의 깊은 감정을 일관되게 표현했다. 어머니와 누이를 병으로 잃고 자신도 몸이 약했던 에드바르드 뭉크는 이런 환경의 영향으로 초기 작품에서는 질병과 죽음에 관련된 음울한 주제를 주로 다루었다.
1889년에 미술공부를 위해 파리로 갔고, 그곳에서 일본의 목판화와 피사로, 로트레크, 고갱, 고흐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1892년 베를린미술협회전에 출품한 작품은 초기의 애수 어린 서정성을 내면화하고 삶, 죽음, 사랑, 관능, 공포와 우수 등을 강렬한 색채로 표현해 눈길을 끌었다.

[표현주의]1《삶의 프리즈》라는 연작(連作)을 완성했다.
94년부터 판화를 시작해 회화와 똑같은 모티브를 반복하여 다루었다.


뭉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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