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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교회

나베가 2006. 8. 3. 13:39

Norske Kirke

⇒ 노르웨이 교회

노르웨이 교회

―― 敎會

Church of Norway

16세기 종교개혁 때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전환한 노르웨이의 루터 교회.

나라의 지원을 받는다. 10세기에 노르웨이 왕실은 전 백성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11세기에 왕이 되기 전 국외에서 세례를 받은 울라프 1세 트리그바손 왕(995~1000경 재위)과 울라프 2세 하랄손 왕(1015~30 재위)은 백성들에게 강제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게 했다. 울라프 2세는 잉글랜드에서 성직자를 데려와 교회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그는 전쟁에서 죽은 뒤 국가적 영웅이 되었고, 1164년에는 노르웨이의 수호성인으로 시성(諡聖)되었다. 11세기가 끝날 무렵 노르웨이는 국민 대부분이 그리스도교도였다. 1152년 교회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었고, 니다로스(지금의 트론헤임)에 대주교가 있었다.

노르웨이의 종교개혁은 젊었을 때 루터교로 개종한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 크리스티안 3세(1534∼59 재위) 때에야 일어났다. 노르웨이인들은 1539년에 개신교 신앙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루터 교회의 신조를 받아들이지 않은 가톨릭 주교와 성직자들은 교회에서 쫓겨났고, 교회의 재산은 정부로 넘어갔다. 16세기말까지 교회 재조직이 거의 완결되어 국민과 성직자 대부분이 루터 교회 신조를 받아들였다.

17세기에는 루터교 정통주의가 우세했지만, 18세기에 와서는 경건주의 영향을 받았다. 덴마크-노르웨이인이며 루터교 주교이자 교수인 에릭 폰토피단은 1737년 루터의 〈소교리문답 Small Catechism〉을 경건주의적으로 강조한 해설서 〈하느님에 이르는 진리 Truth unto Godliness〉를 출판하여 200년 동안 노르웨이 사람들의 신앙생활에 두루 영향을 미쳤다. 1797~1804년 사이에 일어난 경건주의 부흥운동의 지도자는 농부의 아들이며 25세에 개종했던 한스 하우게였다. 그당시에는 평신도가 설교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었지만 하우게는 온 나라를 다니며 설교하였고, 종교연구와 기도를 위해 모임을 갖는 신앙단체들을 만들었다. 몇몇 성직자들이 반대하였고 이러한 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여러 번 구금되기도 했지만 하우게와 그의 추종자들은 노르웨이 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49~73년까지 신학교수였고 루터교 정통주의와 경건주의를 결합한 기슬 존슨 또한 노르웨이 교회 성직자들과 국민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선교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앞장섰다.

20세기 노르웨이 교회는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사이에 신학적 불일치를 경험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주교와 성직자들은, 노르웨이를 패망시킨 뒤 교회도 지배하려는 나치에 대항해 저항운동을 이끌었다. 주교들은 관직을 포기했고 성직자들 대부분도 교구에서 물러났지만 그들은 계속 국민들과 함께 일했고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독일이 패배한 뒤 성직자들은 교회로 돌아왔고 국교회는 자기 역할을 회복했다.

노르웨이는 여러 교구로 나뉘는데 교구마다 주교가 있고 오슬로의 주교가 대주교이다. 왕과 의회가 교회조직·교회의식·교리·교육을 결정하는 권한을 지니고 있다. 왕은 주교와 목사를 임명하는 데 완전한 자율권을 가지며, 정부는 주교들이 요청한 교회에 더 많은 자율권을 허용하도록 요청한 주교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1845년부터 노르웨이 사람들은 법적으로 국교회에서 탈퇴하여 다른 교회에 가입하거나 혹은 어느 교회에도 가입하지 않아도 될 수 있게 되었지만 국민의 90% 가량이 국교회(노르웨이 교회)의 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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