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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르톡 / ♬바이올린협주곡 2번 (Concerto for Violin and Orchestra No.2 in B minor, Sz.112) - Yehudi Menuhin, Violin

나베가 2008. 9. 30. 22:49

Violin Concerto No.2 in B minor, Sz.112

바르톡 / 바이올린 협주곡 2번

Bela Bartok, 1881~1945

Wilhelm Furtwängler, Cond / Berliner Philharmonia Orchestra

바르톡은 둘째 아들 페테르를 위해 작곡한 「미크로코스모스」가 완성된 1937년 여름부터 이 「바이올린협주곡」의 작곡에 착수하여 1938년에 완성했다. 그가 총보에 적은 것에 의하면, 1937년 8월에 착수하여 38년 12월 완성으로 되어 있는데, 곡은 의뢰자 졸탄 세케이에게 바쳤다. 그리고 곡은 39년 4월 23일에 멘겔베르크 지휘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1악장(Allegro non troppo)
Yehudi Menuhin, Violin
Wilhelm Furtwängler, Conductor
Berliner Philharmonia Orchestra, 1953. 9. 12 / 13


2악장 (Andante traquillo)
Yehudi Menuhin, Violin
Wilhelm Furtwängler, Conductor
Berliner Philharmonia Orchestra, 1953. 9. 12 / 13


3악장 (Allegro molto)
Yehudi Menuhin, Violin
Wilhelm Furtwängler, Conductor
Berliner Philharmonia Orchestra, 1953. 9. 12 / 13

유명한 바이올린의 명수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은, 그의 중요한 레퍼터리로써 이 곡을 정기적으로 연주했고, 바르톡의 작품 중에서 특히 뛰어난 이 곡의 소개에 힘을 썼다. 바르톡의 바이올린협주곡은 두 곡이 있으나,  한동안 제1번은 간행되지 않았고, 제2번만이 출판되었다.  제1번은 오랜 동안 헌정자의 곁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이 곡이 유일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제1악장(Allegro non troppo), 제2악장(Andante tranquillo), 제3악장 (Allegro molto)으로 구성되있다.

현대 음악의 대표적인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높이 평가되며, 악상은 깊고, 아름다운 민족적인 정서는 가라앉으면서 커다란 윤기를 나타내고 있다. 수법은 정확 치밀하여 알반 베르크의 「바이올린협주곡」에 앞서고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 1916. 4. 22~1998)

미국의 바이올린 연주자·지휘자. 뉴욕 출생. 부모는 러시아계이다. 5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고 8세 때 샌프란시스코에서 데뷔, 그 후 곧 유럽으로 유학하여 독일에서 A.부쉬, 프랑스에서는 G.에네스코에 게 사사하였다. 파리에서 라무뢰관현악단과의 협연에서는 ‘신동’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1931년부터 세계 각지로 연주여행을 하여 젊은 나이에 제1급 연주자로 평가받았다. 36년 이후로는 일시 활동을 중 단하였다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쟁터를 돌아다니며 연주회를 열어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 고 59년부터는 런던을 근거지로 지휘자로도 활약하는 한편, 현존 작곡가의 작품을 소개하고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F.멘델스존의 라단조(短調)협주곡등 별로 연주되지 않거나 재발견된 곡들을 연주하여 화제를 모았다.

또한 런던과 스위스 등에 음악학교를 설립하는 등 음악교육자로서도 유명하며, 94년 로 열 필하모니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 내한, 서울 정도(定都) 6백주년 기념곡으로 영국 작곡가 가르스 우 드가 작곡한 《도드리 서울 600》을 초연했다.

신동의 등장

미국에서 뛰여난 바이올리니스트가 등장하였다. 이자이에게 배운 퍼싱어 문하의 에후디 메뉴인과 루제로 리치였다. 메뉴인은 신동으로 출발하여 에네스코와 부쉬의 지도로 음악의 정신적 요소에 눈을 떳다. 메뉴인과 베를린의 특별한 관계는 그의 소년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9년 열 두살이 된 꼬마 메뉴인은 브루노 발터의 지휘로 베를린 필하모니와 함께 베를린에 데뷔했다. 프로그램은 전설적인 ‘3B 바이올린 연주회’, 바흐의 E장조, 브람스,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었다. 당시 메뉴인은 소아비만증에 걸린 것처럼 보일 정도로 뚱뚱한 체구에 무척 짧고 뭉툭한 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짧은 손가락으로 첫 악절부터 베를린 필을 리드했다고 전한다.

위대한 음악가 메뉴인은 정치적, 도덕적 차원에서도 거장이었다. 2차 대전 중 그는 연합군 병사들과 적십자를 위해 세계를 누비며 500여회의 자선연주를 가졌다. 종전 후인 1945년에는 다시 독일을 찾아와 유태인 강제노동 수용소와 전쟁포로 수용소를 순회하며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이 그에게 정치적 음악가라는 수식어를 달아 준 건 소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사건’이다. 당시 푸르트벵글러는 나치협력 혐의로 베를린 필하모니의 상임지휘자직을 박탈당하고, 독일 내에서의 연주활동도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7년 메뉴인은 이런 푸르트벵글러를 스위스 루체른으로 초청, 함께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 녹음했다. 뿐만 아니라 그해 가을 유태계 음악인으로는 최초로 아직도 전쟁의 참상이 완연한 베를린을 찾아와 공식연주회를 가졌다.

이로 인해 메뉴인은 한동안 유태인들에게 원성과 오해를 사게 됐지만 그 자신은 푸르트벵글러를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고 당당히 대답하곤 했다. 전쟁 중 푸르트벵글러가 공적으로는 히틀러에 협력했는지 몰라도 베를린 필의 유태인 단원 30여 명을 무사히 해외로 도피시킨 공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1948년에는 연주로 받은 돈을 모두 털어 베를린 필 단원들에게 ‘케어’ 구호박스 50개를 선물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음악이 인간을 선하게 만들 수 있음을 믿었다’고 자주 말하곤 했다. 지금도 그런 믿음을 갖고 있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80세가 넘는 메뉴인은 ‘그건 사람에 달린 문제지’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세상이 화염 속에 쌓여 있는데 어떻게 편하게 바이올린만 켜고 있을 수 있나? 사람은 숨만 쉬고 있다고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바로 정의로운 행동이다.”

1927년 11월 25일 카네기 홀, 뉴욕 필 공연 무대. 지휘자는 한참 세계무대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던 30대 후반의 프리츠 부쉬, 협연자는 열 한살의 꼬마 예후디 메뉴인. 레퍼토리는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리허설에 앞서 지휘자 부쉬와 매니저 사이에 심상치 않은 입씨름이 벌어졌다. 부쉬는 “연극 ‘햄릿’을 공연하는데 재키 쿠간(당시 헐리우드의 유명한 아역 배우)을 캐스팅하지는 않는다”라고 강한 불만을 토로하며, “정 꼬마를 무대에 세우고 싶다면 레퍼토리를 모차르트 협주곡 A단조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반면 매니저는 “그의 연주를 들으면 당신도 놀랄 것이다. 모든 것은 일단 리허설을 해보고 결정하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첫날 리허설을 마치고 난 부쉬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메뉴인의 고사리같은 손을 꼭 쥐며, “얘야, 어떤 곡이라도 연주해 주마. 언제 어디서라도…”라며 메뉴인의 천재성에 감탄했다. 드디어 본 공연. 흰 실크 블라우스에 벨벳 반바지를 받쳐입은 천진스런 소년 메뉴인이 무대에 등장했다. 그가 활을 치켜드는 순간 그 신기에 가까운 연주에 청중들은 40여분간 미동초자 할 수 없었다. 그는 일찍이 하이페츠도 제대로 표현해 내지 못한 온화한 베토벤 선율로 완전히 객석을 사로잡았고, 3악장의 그 완벽한 카덴차에 이어 모든 연주가 끝났을 때, 객석에서는 환호와 휘파람, 갈채와 고함소리가 동시에 터져나왔다. 미국 언론들은 그의 출현에 대해 ‘천재’를 넘어 ‘경이적인 존재’라고 대서특필했다. ‘헤럴드 트리뷴’지의 평론가는 “어젯밤 당신이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인간 영혼의 미스터리를 더듬어 찾고 있는 당신의 숨소리였을지도 모른다”라고 썼다. 20세기 바이올린 연주사가 새롭게 씌어지는 순간이었다.

‘위대한 혼을 가진 소년’ - 신동시대의 개막

네 살 때 바이올린을 시작한 메뉴인은 1년 뒤 샌프란시스코 오케스트라 악장인 루이 퍼싱거에 의해 그 재능이 간파된다. 가족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즐겨 찾던 메뉴인은 퍼싱거의 감미로운 톤에 넋을 잃곤했는데, 그 모습을 본 어머니가 메뉴인을 퍼싱거에게 데리고 간 것이다. “그는 내 연주를 몇 소절 들어보더니 말없이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 G단조의 아다지오 악장을 들려줬어요. 실연으로 바흐라는 목표를 제시해 준 것이죠. 우리는 그렇게 만났지요.” 메뉴인의 천재성은 퍼싱거를 만난지 2년만인 일곱살 때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샌프란시스코 오케스트라 협주곡 경연대회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하며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해 화제를 불러 일으킨 것이다.

이즈음, 장차 메뉴인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거장 에네스쿠가 연주차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다.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음, 특히 음폭이나 속도를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며 구사하는 그의 비브라토는 메뉴인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이 사람이 내가 생각하던 진정한 스승이다’라고 생각한 메뉴인은 그에게 배우기 위해 파리행을 시도한다. 여덟살 때의 일이다.

“그의 가르침은 매우 독특했어요. 그는 늘 피아노 앞에 앉아 내 연주를 들으며 고칠 점을 지적하고 음악적인 면을 조언해 줬어요. 특히 그를 통해 비브라토 기법을 온전히 배울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죠. 몇 년이 지나자 에네스쿠는 ‘더이상 가르칠 것이 없으니 독일풍을 배우라’며 아돌프 부쉬를 소개해 줬지요. 부쉬와는 2년간 공부했어요.” 메뉴인에게 행운이 찾아 온 것은 열살 때인 1927년 초다. 에네스쿠의 소개로 폴 파레를 만난 메뉴인은 즉석에서 협연 약속을 받고, 폴 파레가 지휘하는 라무뢰 교향악단과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과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해 파리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한 것이다. 폴 파레는 ‘예후디 메뉴인, 세기의 바이올린’이란 BBC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에네스쿠가 한 꼬마애를 데리고 와서 연주를 들어보라길래, 간단한 연주를 듣고 난 후 아이 엄마에게 ‘뭘 연주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죠. ‘뭐든지요’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랄로, 차이코프스키를 하자’고 제안했지요. 라무뢰 교향악단과 유럽 연주를 시작했는데, 한마디로 대단한 성공이었죠.”

유럽에서의 선풍은 곧 미국으로 전해졌다. 그해 11월, 앞서 언급한 대로 메뉴인은 프리츠 부쉬 지휘의 뉴욕 필과의 카네기 홀 데뷔 공연을 통해 대단한 선풍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이 공연 이후 하루 아침에 스타로 부상한 메뉴인은 곧바로 레코딩 작업에 착수했다. 1928년 4월에 레코딩한 애크런의 ‘로마네스카’ 등을 담은 소품집(‘젊은 날의 메뉴인’이란 제목으로 비둘프 레이블로 출반되고 있다)이 바로 그것. 이 음반은 아직 소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 나이로는 상상할 수 없는 유연성과 ‘메뉴인의 음색’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 카네기 홀 데뷔가 메뉴인의 천재성을 세상에 알리는 신호탄이었다면, 1929년 4월 12일 브루노 발터 지휘로 베를린 필과 함께한 베를린 데뷔는 메뉴인이 전성기로 접어드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메뉴인은 이날 바흐, 브람스,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한 무대에서 연주하는 대단한 모험을 시도한 것이다. 이 연주회는 유럽 음악계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줬다. 그날 객석에서 공연을 지켜보던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아, 정녕 천국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라고 했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이날 지휘자 발터는 자신의 사진에 사인과 함께 ‘위대한 혼을 가진 소년에게’라는 글귀를 적어 메뉴인에게 선물했는데, 메뉴인은 그것을 평생 소중히 간직했다.

이제 그는 연주자로서 더이상 어린애가 아니었다. 토스카니니, 멘겔베르크 같은 대 지휘자들의 초청이 잇따랐고, 그는 1년에 60개 도시 이상을 순회하는 고된 생활이 시작되었다. 레코딩도 계속됐다. 1929년 겨울,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3번을 녹음한데 이어, 1931년에는 로날드 지휘의 런던 심포니와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G단조’를 녹음했다. 이듬해인 1932년 7월 메뉴인은 에드워드 엘가 지휘로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녹음해 또한번 화제에 오른다. “그해 여름, 레코딩 이틀 전에 런던에 도착했어요. 엘가에게 녹음 전에 한번 연주해 보자고 했죠. 이틀만에 녹음하는 게 불가능해 보였거든요. 그래서 리허설을 하게 되었는데, 제2주제에 들어가기 전에 엘가가 그러더군요. ‘좋아요. 걱정 없어요. 녹음은 잘 끝날 거예요’라고요. 그게 레코딩 전에 함께 연습한 전부였죠.”

신동시대의 메뉴인은 스승인 에네스쿠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네스쿠와 함께 녹음한 일련의 협주곡들, 즉 1932년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파리 심포니와 함께한 쇼숑의 ‘시곡’(33년),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35년) 등은 이들의 긴밀했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료들이다. 특히 이 시절 메뉴인은 바흐와 모차르트에 경도되어 있었는데(그는 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 전반까지 7년여에 걸쳐 바흐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을 레코딩하기도 했다), 이 두 작곡가의 음반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인간미와 뛰어난 연주는 그 시절의 메뉴인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변신 - 금세기 최후의 휴머니스트

승승장구하던 메뉴인은 1936년 갑자기 연주활동을 중단한다. 아들에게 안식년을 주기 위한 어머니의 배려였다. 하지만 2년 후 그가 재기할 즈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1938년 2월 9일 카네기 홀에서 바비롤리 지휘의 뉴욕 필과 녹음한 슈만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새로운 비약을 위한 발판이 된 명반이다. 그동안의 활력으로 밀고나가던 스타일에서 벗어나 표현의 폭을 확대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는 모든 것을 접어두고 바이올린을 들고 연합군 전선으로 달려갔다. 그는 부대 막사에서 생활하며 군인들을 위해 연주했고, 병상을 찾아다니며 하루 세 차례씩 연주하는 강행군을 했다.

“늘 마지막 곡은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였어요. 병사들이 무척 감동했거든요. 앞날이 불안한 군인들이 슈베르트를 들으며 희망적인 모습으로 바뀌는 것을 보면 힘이났죠. 그때 나는 청중들과 교감하는 걸 배웠어요. 그리고 휴머니즘이란 것을 생각하게 되었지요.” 전쟁은 메뉴인의 인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많은 주검 앞에서 그는 겸허함을 배웠고, 나치의 유태인 학살 현장을 목격하면서 평화가 인류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했다. 그러한 사고의 전환은 그 후 그의 활동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전쟁이 끝나고 디아길레프 발레단의 프리마 돈나였던 다이아나와 두 번째 결혼을 한 그가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베를린 난민 수용소였다. 그는 그 후 많은 전쟁 피해지역을 순회하며 자선 연주회를 펼쳤고, 모스크바로 날아가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을 연주했다. 나치 전범으로 몰려 수모를 겪고 있던 푸르트벵글러를 품안으로 끌어들인 것도 바로 그였다. 이 일로 메뉴인은 유태인들과 미국 언론으로부터 수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전혀 굳힘이 없었다.

“푸르트벵글러는 아주 멋진 사람이었고, 그의 음악은 시대를 뛰어넘는 위대한 힘이 있었지요. 그가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나는 루체른 페스티벌에 그를 초청했지요.” 1947년 8월 29일 푸르트벵글러 지휘로 루체른 음악제 관현악단과 녹음한 그 유명한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음반의 탄생 배경에는 이런 역사적인 아픔이 숨겨져 있다. 이들은 1949년 10월에 같은 장소에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레코딩해 또 한장의 역사적인 명반을 세상에 내 놓았다.

80세가 되기 직전, 메뉴인은 자신의 음악 여정을 그린 BBC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겼다. “어렸을 때 나는 고통받는 마음을 제 연주로 치유해 주고 싶었죠. 그게 내 임무 같았어요. 음악의 아름다움을 삶의 조화에 연결시키려 했죠.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죠. 바흐의 ‘샤콘느’를 시스틴 성당에서 연주할 수 있다면 세상의 모든 악이 사라질 거라고요.” 20세기 신동 연주사를 열었고, 거장이 된 후엔 음악으로 ‘인류에 대한 사랑’을 구현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던 마에스트로 예후디 메뉴인. 어릴적 꿈을 다 실현하지 못해서일까,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음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러나 80 평생을 통해 그가 인류에 전한 음악혼은 그가 남겨놓은 300여장이 넘는 음반과 그의 영혼이 깃든 음악학교, 그리고 소외된 자에게 음악을 전해주는 ‘라이브 뮤직 나우’를 통해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음원출처:향기로운 삶의쉼터

위의 음원과 글은 '하늘바람꽃'님께서 올려주셨습니다.

출처 : 향기로운 삶의쉼터
글쓴이 : hjkimaa 원글보기
메모 : KBS 제 622회 정기연주회 레파토리 아키코 스와나이 협연<최연소 차이콥스키,파가니니,최연소 퀸엘리자베스 ,일본 국제 콩쿨 석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