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이 회화에 비해 대중적인 미술 장르는 아니지만 삼척동자도 로댕은 안다. 영화 덕분에 카미유 클로델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 조각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면 부르델이라는 이름은 매우 낯설지도 모르겠다. 유명세에 스승 로댕을 넘어서지 못했지만, 예술성에 있어서 부르델의 작품들은 현재까지 ‘조각의 신화’로 인식되고 있다. 19세기 말 조각의 새로운 물결을 만들었던 로댕과 부르델, 마이욜은 근대조각의 3대 거장으로 추앙받는다. 로댕의 수제자로 시작했지만 로댕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던 에밀 앙투안 부르델(1861~1929)의 섬세한 손길을 한국에서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프랑스 파리의 부르델미술관이 소장 중인 부르델의 주요 작품이 오는 29일부터 6월 8일까지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전시된다. 소년한국일보와 뉴시스, 서울시립미술관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활 쏘는 헤라클레스 – 거장 부르델전’을 통해 부르델미술관에 소장 중인 75점의 조각과 48점의 데생 및 수채화가 공개된다. 대표작인 베토벤 시리즈는 물론 ‘활 쏘는 헤라클레스’, ‘알베아르 장군 기념비’, ‘한니발 최초의 승리’ 등이 포함된다. 1985년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전시와 2004년 로댕갤러리에서 '근대조각 3인전'을 통해 부르델의 작품 일부가 전시된 바 있지만, 100점이 넘는 작품을 대규모로 전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세기 후반 구태의연한 조각계와 결별을 선언하고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근대 조각의 새로운 가치를 세운 오귀스트 로댕은 조각에 인간적인 생명력과 인간 내면의 감정을 담아 조각의 새 전통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인간의 열정, 고독, 고통 등 풍부한 감정을 담은 로댕의 작품이 디오니소스적이라면, 고전주의적인 질서와 구성, 통합에 형상화했던 부르델의 작품은 아폴론적이라 표현되기도 한다. 부르델의 초기 작품은 분명 스승이었던 로댕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로댕이 이룬 조각의 혁신을 이어나가는 한편 절제된 균형을 통해 건축적 구성미를 드러내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로댕과 달리 부르델은 여러 작품을 통해 고대 그리스 로마 조각의 소재를 차용했다. 하지만 고전의 재현에 멈추지는 않았다. 부르델은 고전적인 소재에 건축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하며 역동적인 활력과 남성적인 박력, 힘의 긴장을 표현했다. 부르델의 독창적인 작품세계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아폴론의 두상’이 발표된 1900년 즈음이다.
부르델의 작품은 종종 베토벤의 역동적이고 웅장한 음악을 연상시킨다. 첫 작품이 베토벤상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부르델은 베토벤의 음악에 깊이 심취했다. 그가 꾸준히 베토벤 시리즈를 만들었다는 점만 봐도 얼마나 베토벤의 음악을 좋아했는지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부르델에게 최초로 명성을 안겨준 작품인 ‘활 쏘는 헤라클레스’(1909)를 보며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 1악장을 듣는 건 조각가 부르델을 이해하기 위한 간편한 방법 중 하나다. 인간의 생명력을 생생하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로댕의 영향력을 조금은 읽을 수 있지만, ‘활 쏘는 헤라클레스’에서 부르델은 넓게 벌린 다리와 힘껏 활을 당긴 팔을 통해 역동적인 긴장감과 활기찬 구조, 힘의 균형을 표현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드러냈다. 1908년 로댕의 복잡한 여성 편력 문제로 로댕의 작업실을 뛰쳐나온 부르델은 스승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그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각각 1909년과 1910년 제작된 ‘로댕의 흉상’ ‘뒤로 젖힌 로댕’은 로댕에 대한 부르델의 존경심이 표현된 작품들이다.
(활 쏘는 헤라클레스, 1909년, 청동, 248X240X120cm 540kg)
프랑스 남서부의 소도시 몽토방에서 23세의 나이에 파리로 상경한 부르델은 현재 앙투안 부르델 거리라 불리는 르 멘느의 작은 골목에 있는 아틀리에에서 죽을 때까지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자신의 모든 작품은 물론 스케치와 습작, 조각의 원본 모델, 축소 모형 등을 한자리에 보관하고자 그는 자신의 전 작품 소유권을 국가에 양도하는 대신 토지를 양도받아 아틀리에 겸 미술관을 설립하고자 했다. 비록 생전에 그는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아내 클레오파트라 부르델 세바스토스와 딸 로디아 뒤페 부르델은 집념 어린 노력 끝에 부르델이 소유하고 있던 대부분의 작품과 데생, 수채화, 기타 자료 등을 모아 부르델의 작업실을 개조해 1949년 부르델미술관을 개관했다. 최근에는 로디아 뒤페 부르델이 소유하고 있던 부르델의 작품, 문서, 장서, 서신 등이 기증돼 자신의 작품을 한 곳에 모으기를 원했던 부르델의 염원은 한 세기를 지나 현실화됐다. 부르델의 작품은 부르델미술관 외에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파리 오르세미술관, 일본 니카타미술관 등이 일부 소장하고 있다. 국내에는 호암미술관이 부르델의 작품 9점을 소장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작품들이 부르델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목록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부르델의 초기부터 전성기에 이르는 작품까지 아우르며 그의 발자취를 개략적으로나마 알려주는 최선의 전시 목록일 것이다. 시립미술관 측에 따르면 부르델미술관이 향후 10년간 소장 작품을 해외로 방출하지 않을 계획이라니 이번 전시가 국내에서 부르델의 작품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는 드문 기회가 될 것이 분명하다.
고경석 기자 (kave@ticketlin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