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반도(2009.8~2009.9)

33.보스니아/ 사라예보...

나베가 2009. 10. 5. 02:26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우린 버스안에서 사라예보를 바라보고 느낌을 공유한다.

 

 

전후 10년이란 시간이 흘렀어도  전쟁의 상흔이 도시 여기 그대로 남아있고, 수많은 비석들이 세워져 있는 엄청난 규모의 공동 묘지를  보면서 처음으로 이들의 전쟁이, 삶이 얼마나 치열했는 지를 느낄 수 있었다.

비잔틴 제국시대에 동방정교가 들어왔고, 15세기 오스만 투르크족의 500년동안 지배를 받으면서 자연스레 이슬람화 된 민족...

그 오랜 역사속에서도 잘 지내던 민족이 어느날 서로에게 총구를 드리밀며 이 엄청난 비극을 불러일으켰다니...

 

 

         

 

          

 

 

                   

 

 

                                                   

1991년 499만명이던 인구가 전쟁이 끝난 1999년엔 399만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무려 100만명이 죽고 11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하얀색 십자가는 카톨릭교도의 묘, 검정색 십자가는 동방정교의 묘, 그리고 그냥 막대모양의 비석은 이슬람교도의 묘라한다.

 

     

 

 

 

 

그러나 재빨리 스쳐 지나는 버스투어라는 한계....

그런 아픔과 느낌은 역사적인 한 순간으로 그저 스쳐 지날뿐.....

내 시야에 또다시 펼쳐진 사라예보라는 도시는 그저 또 아름답고 평화로운 도시로 보였다.

 

강이 도심을 흐르고...

돌다리가 아름답고...

초록이 풍성한 야산으로 그 사이 사이 보석처럼 박혀있는 붉은 기와집들이 그저 나를 흥분으로 이끌었다.

 

 

         

 

 

 

 

 

 

사라예보에 대하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이며 문화 중심지.
트레베비치 산 기슭을 흐르는 밀랴츠카 강의 좁은 골짜기에 있다. 이 시는 이슬람교적 특성이 강한 많은 모스크를 비롯해 내부가 장식된 목조주택들과 옛 투르크인들의 장터가 있고 시민의 거의 절반이 이슬람교도이다. 주요 모스크로는 베고바드자미야라고도 하는, 가지 후스레프 베이의 사원(1530)과 알리파샤 사원(1560~61) 등이 있다. 후스레프 베이는 또한 이슬람교 신학교인 메드레세, 빈민을 위한 무료 취사장인 이마레트, 공중 목욕탕인 하맘을 짓기도 했다. 16세기말에 세워진 시계탑이 베고바드자미야에 인접해 있다. 박물관으로는 시립박물관의 별관인 므라다보스나, 1878년 이래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역사를 보여주는 혁명박물관, 유대인 박물관 등이 있다. 사라예보에는 광산기술학부가 설치된 대학교(1946), 과학 아카데미, 미술대학 등과 여러 개의 병원이 있다. 상업의 종류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 37개의 거리들 가운데 꽤 많은 거리가 지금도 남아 있는데, 이중 카단지비루크(구리세공사의 바자르)가(街)는 원래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도서관옆 세헤르 세하야 다리 <seher cehaja bridge>
15~16세기 Miljacka강 위에 세워진 13개 다리중 하나로 여러번의 보수와 재건을 거쳤다. 

 

사라예보 근처에는 부트미르 문화를 이루었던 신석기 시대 취락지의 유적이 있다. 로마인들은 보스나 강이 발원하는 곳에서 가까이 있는 일리드자에 휴양지를 만들었는데, 지금도 그곳에는 유황 온천이 있다. 고트족과 뒤이어 슬라브족이 7세기경 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1415년 사라예보는 브르보스나라는 이름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15세기말 투르크에게 점령당한 후 교역 중심지와 이슬람 문화의 거점으로 발달했다. 두브로브니크의 상인들은 라틴 구역인 라틴루크를, 이주해 온 세파르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구역인 치투타니를 세웠다. 17~18세기는 재난이 많았던 때로 화재와 역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은 한편 1697년에는 사보이의 에우제니오 공(公)이 이 도시를 불태웠다.

 

 

 

쇠퇴의 길을 걷고 있던 오스만 제국이 1850년 사라예보를 행정중심지로 삼았고, 이는 1851년 유혈폭동을 유발시켰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878년 투르크를 축출하고 1908년에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공식적으로 합병하자 믈라다보스나 저항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왕위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을 암살했던 1914년 6월 28일에 절정에 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이 사건을 대(對)세르비아의 전시동원을 위한 구실로 이용하여 제1차 세계대전을 재촉했다. 1918년 사라예보 의회에서 유고슬라비아와의 통합을 선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점령하에서 사라예보의 저항운동 투사들은 독일군에 대항하여 중대한 전투를 여러 차례 치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사라예보는 상당했던 전시 피해를 신속히 복구했다. 이곳은 도로망의 중심지이며 전화(電化)된 철도를 통해 브르폴례에서 시작되는 간선철도와 연결되어 있다. 또한 아드리아 해로 이어지는 철도 교통망이 있다. 철물과 카펫 제조를 비롯하여 오래전부터 계속된 수공업이 맥을 이어오고 있다. 1984년에는 여기에서 동계 올림픽 대회가 열렸다. 사탕무 정제업, 양조업, 가구·담배·메리야스 제조업, 성장일로에 있는 자동차산업 등이 이루어지며, 통신기관과 농업 관련 복합산업체가 있다. 또한 사라예보 분지에서 채굴된 갈탄이 근처 일리야슈에서 코크스로 가공되며 용광로가 있어 주물용 선철을 생산한다

 

 

 

아래 보이는 까페는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곳라고 했는데...ㅠㅠ

 

 

 

 

 

 

 

 

골목사이로 먼발치의 야산풍경이 화악 시선을 잡는다.

붉은 기와지붕들이 올망 졸망 모여 만든 작품같은... 

 

 

 

 

우린 버스에서 내려 구시가지를 걸었다.

체코 대사관과 맥주공장을 지나 성안토 성당에 도착했다.

 

 

             1892년에 세워진 성안토 성당

 

                      

 

너무나 소박한 성당 내부....

                      

 

 

                          

 

 

                           

 

 

                         

 

성당에서 나와 골목길을 조금 걸으니,건물벽에 이름이 새겨진 동판들이 주욱 붙어있다.

다름아닌  이곳 내전당시 희생된 학생들과 선생을 기리는 뜻으로 만들어 놓은거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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